좌익이 판치는 세상은 왜 저질화되는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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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을 저질히라고 할 때 따라 붙는 이유들이 몇 가지 있다.

1. 예절을 지키지 않는다.

2. 말이 험하다.

3. 上下左右를 모른다.

4. 정직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5. 美風良俗이나 전통을 무시한다.

6. 결투정신이 없다.

7. 떼거리로 덤빈다.

8. 모함, 뒷통수치기, 약점잡기, 침소봉대가 생활화되어 있다.

9. 승부에 승복하지 않는다. 반성이 없다.

10. 자신이 無識한 줄 모른다.

11. 교양과 담 쌓았다.

12. 남 탓 한다. 개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13. 부끄럼과 고마움을 모른다.

14. 厚顔無恥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특히 자기 편끼리는 살인도 좋은 일이라고 감싼다.

15. 眞僞, 彼我, 善惡, 美醜 분별력을 망가뜨린다.

16. 교양, 질서, 尙武정신 같은 것을 경멸한다.

이렇게 적다가 보니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적, 성격상 특징을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념을 위하여 眞僞와 善惡과 美醜까지 뒤집는다. 그들은 혁명이념에 복무하는 것은 모두가 선하고, 진실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좌익 사상이 판 치는 곳에서 아름다움, 멋짐, 즉 인간의 미학이 사라진다. 인간의 저질화가 이념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인간, 특히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좌익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모르므로 저질, 흉포화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美學이 사라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은 공산주의와 같은 狂信과 싸울 때는 같은 수법을 써서는 안 되고 머리를 써야 한다면서 '거짓이 판 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게 혁명이다'고 했다. 美學의 붕괴는 진실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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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美學

미국의 南일리노이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스웨덴의 역사'(著者 프랭클린 D. 스콧)는 약 700페이지나 된다. 내가 바이킹과 노르만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안 후배 외교관이 구해 준 것이다.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의 후예)은 서기 800~1200년 사이의 약 400년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를 무대로 드라마틱하고 영웅적인 삶의 자취를 남긴 민족이다. 이 戰士(전사)집단의 활동 범위는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영국, 아일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랜드, 캐나다, 러시아, 그리스, 터키(당시는 비잔틴 제국), 이스라엘, 카스피해, 지중해, 北海, 北대서양, 北아프리카, 스페인, 프랑스, 南이탈리아와 시실리에 걸쳤다. 콜럼부스보다 500년 먼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들이다.
  
   오늘의 영국은 1066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 있던 노르만(바이킹 출신의 정착민) 세력이 바다를 건너가 점령하여 세운 왕조의 후예이다. 비슷한 시기 南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점령, 태양의 왕국을 건설, 당대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고 개방적인 나라를 만든 세력도 노르망디에서 원정 온 일단의 戰士들이었다. '러시아'라는 나라도 스웨덴 바이킹이 키에프에서 세운 공국이 母胎(모태)이다. '러시아'라는 말 자체가 바이킹의 '루스'라는 낱말에서 나왔다.
 
   인류역사상 한 민족집단의 에너지가 이처럼 단기간에 대폭발한 예는 흔지 않다. 기원 전 4세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대원정, 7~9세기 이슬람 세력의 팽창, 13세기 몽골 군단의 유라시아 대원정이 비슷한 예일 것이다.
 
   당시 바이킹은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거창한 우주관과 용맹한 인생관을 지닌 原始(원시)종교를 따랐다. 바이킹 戰士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덕목은 '남자의 美學', 그리고 명예였다. '스웨덴의 역사'는 바이킹의 인생관을 엿보게 하는, 돌에 새긴 詩를 소개한다.
 
   가축들이 죽는다.
   친척들도 죽는다.
   너도 죽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영원히 살아남을 것은
   죽은 이들 하나 하나의 정정당당한 이름이다.
 
   著者(저자)는 이 시에 담긴 바이킹의 윤리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그들은 영웅적 신념의 소유자들이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궁극적 결과물이 아니라 어떻게 이 운명적 게임을 감당하였는가였다. 고통은 참아내야 한다, 남을 위해서나 원칙을 위해서가 아니라 운명의 실천을 위하여, 미리 주어진 삶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하여. 폭력과 잔인한 행동도 예사로 했다. 이 또한 변명이 필요 없다. 운명이니까.
   그들은 사회적 의무나 도덕적 금기 따위는 무시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과 경제적 利害得失(이해득실) 같은 것들은 경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나쁘고 옳다는 것에 대해선 확실한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美學이었다. 그들이 한 일들이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할 정도의 이야기꺼리가 된다면 그것은 멋진 것, 그래서 옳은 것이 된다.>
 
   著者는 이런 가치관을 '변명도, 거칠 것도 없는 거친 개인주의'라고 표현했다. 문명사회와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바이킹 사회가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정교한 법적 장치를 고안한 것도 개인들이 가진 이런 야성적, 미학적 행동양식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은 젊은이들의 모험을 장려하고, 여성들의 독립성을 보장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바이킹 여성들만큼 독립성이 강하였던 나라는 없었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나라의 모범적 남녀 평등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여성은 재산의 소유권을 가졌고, 집안과 농장의 실질적 운영권도 지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여성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천년 전 바이킹 여성이 가졌다는 이야기이다.
 
   바이킹과 노르만에 대한 중세 문명인들의 기록엔 공통점이 있다. 육체는 멋지게 발달하였고, 성격은 용감하며, 너그럽고도 잔인하며 교활하다. 법을 잘 지키고, 명예를 존중하며, 무엇보다도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치졸, 치사, 비겁, 용렬, 옹졸이란 단어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이들이었다.
 
   바이킹 언어에서 유래하는 영어 단어로 버서크(berserk)라는 형용사가 있다. '狂暴(광폭)한'이란 뜻이다. 명사형으로 berserker는 狂戰士(광전사)로 번역된다. 戰場(전쟁)에서 용맹무쌍한 싸움꾼을 일컫는다. 늑대처럼, 곰처럼, 미친 듯이, 그러나 신들린 듯 싸우는 戰士들이다. 미칠 정도로 신나게 싸우다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 이를 멋진 인생으로 여겼던 이들이 11세기를 前後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문명화되었고 지금은 사회복지 제도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를 만들었다. 세계사의 가장 위대한 逆轉劇(역전극) 중 하나이다.
 
   남자의 美學이 실종된 곳이 요사이 한국이다. 막말, 떼쓰기, 폭로, 배신, 저질, 거짓말, 사기, 무례가 배운 층에서 더 기승을 부린다. 이순신의 절대고독, 박정희의 초인적 결단, 김유신의 장엄한 자주정신, 계백의 決戰(결전)의지, 이승만의 자존과 자유, 상삼문의 절개, 안중근의 仁義(인의) 같은 남자의 美學이 우리에게도 있긴 했었다. 요즈음 한국 정치와 언론의 추태는 계급투쟁적 저질 행동 양식에다가 한글專用으로 한국어가 망가지고 思考(사고)체계가 흐트러지고 행동이 그렇게 따라간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한글專用엔 미학이 없다. 깊은 생각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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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미학/이승만

 李承晩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日記엔 75세의 老대통령이 권총을 흔들면서 미국 대사를 위협하는 희안한 장면이 나온다.
 
  <1950년 8월14일>
  
  어제 오후 콜터(John B. Coulter) 장군이 무쵸 대사 및 드럼라이트 1등서기관과 함께 찾아와서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회신으로 맥아더 사령관이 자기에게 “7000 명의 한국군 병사들에게 유엔군 휘장이 달린 군복을 입히고 미군과 함께 먹고 잘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명령을 주었다고 보고했다. [지금까지는 한국군이 미군과 함께 행동하더라도 양국군이 먹는 음식은 달랐었다.]
  
  그런데 사실은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편지로 요청한 내용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은 원래 우리 젊은이들이 적의 게릴라 활동은 물론 크고 작은 산속 길을 수색하며 敵軍(적군)의 침투를 막도록 하기 위하여 “3만 정의 소총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미군 병사들이 같은 한국인인 한국군과 공산군을 구별하여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같은 무기 공급 요청에 동의할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와 적군을 능히 식별하지만 미군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무쵸 대사는 “대구가 적군의 공격권 안에 들어갔다”면서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제주도가 敵의 공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남한 육지의 전부가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망명정부(亡命政府)’를 지속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쵸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슬그머니 허리춤에서 모젤 권총을 꺼내들었다. 순간 무쵸는 입이 얼어 버렸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살 때 고속도로 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이렇게 놀란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오면 이 총으로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무슨 일을 벌일 것은 아니었지만 긴장한 무쵸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돌아갔다.
  
  이날 밤 나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악몽과 환상에 시달렸다. 바로 눈앞에서 공산당이 나타나 대통령이 나를 쏘았는데 불발(不發)이 되어서 우리가 붙잡히거나 치명상을 입지 않아서 목숨이 붙어 있는 바람에 그들에게 곤욕(困辱)을 치르는 환상에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대통령이 나를 쏘았다. 그런데도 죽지는 않고 피만 흘렀다. 나는 피를 흘리며 공산당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소스라쳐 눈을 뜨면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이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죽음의 美學/박정희
 
 金載圭가 쏜 총탄이 가슴을 관통, 등에서 피가 샘솟듯 하는 데도 그는 ‘체념한 듯 해탈한 듯’(곁에 있던 여인의 증언) 담담하게 말하였다.
 “난, 괜찮아.”
 이 장면은 한국 역사에서 보기 어려운 武士的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그가 차지철처럼 행동하여 실내 화장실로 피했다가 사살되었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영웅 박정희’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결산, 또는 요약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23년간 군복을 입었지만 정신적으론 죽을 때까지 군인이었다. 신라의 화랑도가 삼국통일 이후에 사라진 이후 그를 통하여 처음으로 武士道가 역사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군인이 집권한 것은 5·16군사혁명이 고려 武臣亂 이후 근 800년 만에 처음이었다. 민중봉기는 많았지만 군인에 의한 혁명은 우리의 역사 사전엔 없었다. 그런 점에서 5·16은 세기적 사건이 아니라 千年的 사건이다.
 12세기 한국(고려 무신 정권)과 일본(가마쿠라 막부)이 비슷한 시기에 무사통치 시대를 열었다. 한국은 13세기 40년간 몽골 침입으로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맥이 끊어졌고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까지 이어졌다. 한국은 교조적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자학으로 무장한 儒者가 다스리고 일본은 칼을 찬 무사가 800년을 다스렸다. 여기서 두 나라의 진로가 달라졌다.


 군인통치에 의한 국가 발전은 역사의 보편 원리

 유럽과 일본은 騎士와 武士 지배를 오래 받으면서 봉건체제를 경험하고 산업혁명과 민주화로 나아갔다. 민주주의가 꽃핀 곳이 모두 군인통치를 오래 받은 나라라는 사실은 逆說이 아니라 역사의 定說이다. 군인통치는 늘 전쟁을 준비하므로 그 과정에서 행정제도가 정비되고, 국민의 기강이 잡히며,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 이런 제도들이 모두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박정희와 군 장교단을 매개로 하여 역사 발전의 보편적 경로에 진입한 것이다. 박정희는 2중의 혁명가인데, 문민통치의 전통을 깬 혁명가이고, 동시에 봉건적 질서를 깬 근대화 혁명가이다.
 박정희는 군사적 교육을 오래 받아 반듯한 자세와 정확한 업무처리가 습관화된 경우이다. 대구사범도 사실상 準군사 교육기관이었고,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그리고 해방 뒤 조선경비사관학교, 미군 포병학교 유학, 육군대학 교육 등 총 교육기간만 10년에 이른다. 군대는 전쟁을 준비하는 조직이고 교육(훈련)기관이다. 生死가 오고가는 순간에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므로 준비에 철저하고 정직, 정확해야 한다. 군대의 의사결정은 참모회의를 거쳐 지휘관이 내리는데 민주적 토의를 반드시 거친다. 민간인 출신 대통령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업무처리에서 보다 민주적인 이유가 있다.
 장교들은 소대장부터 대장까지 오르면서 다양한 조직의 경영을 체험하고 비상사태에 대처한다. 국가 지도자 양성 코스로는 最適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은 30년간 군인 출신 대통령 세 명을 배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國政운영을 선 보였다. 이 시기의 경제 성장률 부문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인 것은 한국군 장교단이 권력을 잡거나 뒷받침한 시기였다는 점과 떼어놓고 논할 수 없다.


 “군인이 민주주의를 지켰다”

 朴正熙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가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데 대한 콤플렉스나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래서 경제개발로 속죄하려 하였다는 식의 ‘심리분석’이다. 그는 이런 식의 識字憂患을 검열하였다. 박정희는 혁명의 역사적 당위성을 확신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당당히 주장하였으며 특히 군인의 기여를 정치인보다 높게 평가하였다.
 1963년 윤보선 후보와 맞붙은 대통령 선거는 ‘무엇이 진짜 민주주의냐’를 놓고 벌인 토론의 場이기도 하였다. 진주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이렇게 말한다.
 “6·25사변 때, 공산군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이것을 나가서 총칼을 들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나라를 지켰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당시의 우리 국군 장병이요,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 우리 애국 시민, 학생, 학도병, 또는 저 시골 농촌에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지게 목발을 두드리던 불우한 청년들이 전부 끌려 나와서 지게 목발 대신에 총칼을 들고 전방에서 공산당과 싸워서 이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소위 구정치인, 과거에 정치를 했다는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할 줄 아는 것은 우리뿐이고,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우리고, 느그는 전부 가짜고, 이질 민주주의고, 위험한 민족주의고, 심지어 나아가서는 빨갱이고, 공산당이고 이렇게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고 있는 전몰장병들은 아직 한 번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우리뿐이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진짜로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해 왔고, 누가 거짓말, 껍데기 민주주의를 해왔느냐… 국민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마산 유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어떤 소위 우리나라의 자칭 지도자라는 사람이 아마 이 고장에도 다녀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선거전이 벌어지기 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군인은 군복을 벗어도 한 3년 동안은 때가 벗겨지지 않는다, 군대 갔다 온 놈은 전부 집에 앉아서 한 3년 동안 물을 끓여놓고 때를 벗겨라, 이겁니다. 여기 지금 군대 갔다 온 제대군인들이 많이 계시죠. 완전히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더라도 이것은 옷만을 바꾼 군정이다, 그러니까 우리 야당 舊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아야겠다. 이거 여러분들이 혹 정신을 못 차리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지도 몰라요. 군인이 군대에 가서 무슨 지독한 짓을 했기에 3년 동안 벗겨야 할 때가 묻어 있습니까. 
 저부터 수십 년 동안 군에서 복무를 했고 군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군인이 군대 가서 배운 것은 또한 여러분들 子弟가 군에 입대해서 2~3년 동안 배우는 것은 그야말로 앞으로 국민으로서 건전한 정신적인 기초를 군대에서 닦아주는 것입니다. 자기 맡은 임무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자,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해라, 상사의 명령에 대해서 복종을 해라, 동료·단체를 위해서는 희생정신을 발휘해라, 모든 일에는 감투정신을 발휘해라. 이런 모든 것은 국민들이 모두 갖춰야 될 훌륭한 정신적인 덕목입니다. 그런데 뭐, 모처럼 배운 것을 집에 와서 뭐, 3년 동안 또 벗깁니까(와 하는 폭소). 그리고 나서 구정치인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하니 그저 남을 속이기나 하고 사기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하는 그런 재주를 또 배우란 그 말입니까?”


 최강의 선진 조직이 군대

 1961년 5·16 군사혁명 때 한국의 가장 선진된 집단은 장교단이었다. 약 10%가 미국 유학 경험자였다(외교관보다 더 높은 비율). 큰 조직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군인들이 행정기관을 접수, 군대식 효율적 조직 경영술을 접목시켰다. 그렇게 개조된 행정기관이 기업을 밀어주고 키우면서 경제개발의 기관차가 질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군인들이 집권하여 경제개발에 성공한 사례는 칠레의 피노체트를 제외하면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이는 장교단의 높은 수준, 특히 두 지도자 朴正熙·金鍾泌의 知性에서 우러나온 리더십 덕분이다.
 한국의 군사문화는 임진왜란과 같은 國難의 시기엔 발휘되다가 곧 잊혀져왔기에 전통이랄 게 없었다. 日帝 시대의 군대 경험, 그리고 한국전을 거치면서 커진 국군과 皆兵制가 새로운 군사문화의 근거가 되었다. 국군은 건국의 礎石, 호국의 干城,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해왔고 北核 대응과 자유통일과 일류국가 건설을 무력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아직 日淺한 군사문화의 전통이 더 강화되고 내면화되어야 이런 뒷받침이 가능할 것이다.


 武士道와 匠人정신

 참고로 일본의 武士道는 그 계통이 신라의 화랑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많다. 신라에서 건너간 이들이 전한 것을 일본식으로 발전시켰다는 느낌이 든다.
 일본의 武士道는 종교는 아니나 종교적 心性을 깔고 있다. 일본인이 물건을 만들거나 직장에 다닐 때 보여주는 집중력과 성실함, 여기서 나오는 완벽함의 추구엔 종교적 心性이 보인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것, 초인적인 것, 절대적인 것, 완벽한 것을 갈구하면서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求道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마음이 경제에 투입되면 名品을 만든다. 한국이 산업혁명을 가장 늦게 시작하였지만 세계 5대 공업국에 오른 것은 군사문화가 제조업에 들어와 놀라운 정밀성과 생산성을 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년 전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의 사무라이(武士)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마사무네(正宗) 집안은 700년째 代를 이어 名劍을 만들고 있었다. 그 匠人은 이런 말을 했다. 
 “좋은 칼을 만들고 나면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칼에 내 이름이 새겨지고 내 정성이 들어갑니다. 1000년 뒤에도 저는 이 칼을 통해서 살아 있을 것입니다.”
 칼에 영혼을 불어넣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기능공이 철학자처럼 말했다. 일본인들은 상품을 만들 때도 영혼을 쏟아 붓듯이 정성을 다한다고 한다. 그러니 불량률이 세계에서 제일 낮은 제품이 나오는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무식한 싸움꾼이 아니라 글을 아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武士道를 ‘죽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뒤집어보면 ‘사는 것’이다. 항상 명예로운 죽음을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사무라이 정신이 일본의 모든 분야에 스며있다. 미국의 건국정신, 서양의 기독교 정신(또는 신사도나 기사도), 조선조의 선비정신, 신라의 화랑도 정신 같은 것들이 지도층 속에서 살아 있어야 그런 사회는 타락하지 않는다.


 사무라이 정신
 
 일본 北海道의 노보리베츠 온천마을 근방엔 에도 시대의 취락을 再現한 민속촌이 있다. 登別伊達時代村(노보리베츠 다데 지다이무라)이라고 한다. 그 안에 사무라이館이 있고 유키 료이치라는 사람이 썼다는 ‘武士道’(Spirit of Samurai)라는 글이 걸려 있다. 
 <인간의 투쟁본능은 보편적인 것이고, 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은 이 거친 투쟁본능에 제어장치를 붙여, 통제하려고 했다. 이를 武士道라고 한다. 이는 사회를 통제하고 또한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투쟁본능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그 어떤 神聖한 것의 존재를 일본인에게 깨우쳤다. 봉건제도는 무너져도 그것을 지탱해준 武士道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를 體現한 이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武士道를 일본인의 독특한 관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독특한 출생의 비밀에 있다. 무사도의 아버지는 禪이고 어머니는 유교이다. 禪은 불교에 있어서 명상이며, 深思默考에 의해 知의 영역을 넘어서서 절대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이며, 유교는 祖先숭배신앙을 기초로 민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따라서 상호 모순된 개념을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생긴 武士道를 體現한 인간, 즉 사무라이는 이 둘의 조합의 비율에 따라, 또 그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 ‘사람의 人生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며, 서두르지 말고 참는 것이 無事長久의 기본이다’라고 말한 도쿠가와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이고, 강함을 추구하면서 결투에 생애를 걸고 상대를 죽여 간 미야모토 무사시도 사무라이이다. 
 이 두 사람 간에는 공통된 삶의 방식이 없어 對局에 위치하는 듯하다. 단 하나 있다고 한다면 艱難辛苦의 한가운데서 각각 神에 다가가 체감한 것, 이것이 사무라이 정신이다.>

 남자의 미학/金庾信

  삼국통일기에 신라가 唐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것은 金庾信으로 대표되는 자주국방의 의지 덕분이었다. 唐은 신라와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친 뒤 신라마저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다. 이때 金庾信 등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결단한 덕분에 민족통일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승부는 군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선비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자』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원래 唐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여세를 몰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태종무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多美公(다미공)이란 사람이 나와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백성을 백제 사람으로 위장하여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唐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입니다.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
  
   金庾信이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라고 했다. 태종무열왕은 내키지 않았다.
  
   『唐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 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소.』
  
   이에 金庾信이 말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金庾信이 한 말은 삼국사기에 「自救」로 표현되어 있다. 신라가 개노릇을 하여 唐을 섬길 용의는 있다. 唐이 신라를 존중해 주면 말이다(이것이 자주적 사대주의의 정신이다). 만약 唐이 크고 힘센 것만 믿고 신라의 자존심과 그 존재 자체를 말살하려 한다면 신라는 唐을 물어뜯어서라도 自救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新羅와 같은 小國이 大國을 옆에 두고도 自我를 지켜갈 수 있게 한 정신무장의 핵심 논리이다.
  
   신라가 臨戰태세를 갖추자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은 백제 포로들만 데리고 귀환했다. 당시는 唐의 전성기 고종시대였다. 고종은 『어찌하여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의 대답은 그대로 신라에 대한 세계 최강국의 최고 찬사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謨也)
  
   기록에 나오는 仁愛忠事. 즉 어짐, 사랑, 충성, 섬김, 이것이 신라의 공민 윤리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덕심은 21세기 대한민국에도 加減(가감) 없이 쓸모 있는 국가와 국민의 윤리이다. 국가와 지도층은 국민들을 어짐과 사랑으로 대하고, 국민은 국가에 충성하며 지도층을 섬긴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이상적인 「국가-국민」 관계이다. 화랑도의 武士道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국가윤리는 근대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근대성의 핵심은 자존심과 실용성이다. 金庾信의 직설적 말에서 그런 정신이 잘 묻어 나온다. 우리는 아무리 개처럼 작은 나라이지만 주인이 그 존재를 무시하면 사생결단하여 싸워서 지킬 만한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야말로 아무리 힘센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나만의, 우리만의 自我이고 自尊인 것이다. 신라 지도층의 위대성은 이런 집단적 自我를 발견하고 이를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지켜내는 과정에서 민족적 自我로 확대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족을 민족으로 만든 동족의식이 생겨났던 것이다.
  
   신라는 자주성을 지켜내는 방식에서 국력을 초과하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처럼 유아독존으로 모험을 하다가 必亡의 길을 걷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신라는 唐의 힘을 빌리고 그 唐의 패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려고 했다. 唐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다. 唐과 결전할 때도 외교적으로는 항상 유화책을 썼다. 자존심을 뱃속에 숨겨 놓고 펼친 强穩 양면의 실용노선이 신라의 독립을 성취했다.
     
   자주국방이란 말을 신라 이후 처음으로 되살려낸 朴正熙의 다음 어록은 金庾信과 같은 맥락이다.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 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을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 (1972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남자의 美學/階伯과 官昌과 盤屈

 '황산벌'이란 영화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흥분하는 이유가 있다. 저질 사투리, 욕설보다도 한국사의 가장 비장하고 감동적인 장면을 파괴하고 이를 우스개로 만든 이 영화의 非국민적, 反역사적 행태이다.

황산벌 전투에 대해서 우리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배웠다. 우리 소년들은 관창을 통해서 애국과 희생을 배웠다. 1950년대의 우리 소년들은 비록 배가 고팠지만 관창과 계백의 기백과 용기와 희생정신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 가슴이 1960년대에 지도자를 잘 만나 근대화의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황산벌은 우리 민족이 곱게 가꾸어가야 하는 신화이고 전설이다. 그리스 신화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자기 역사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부분을 짓밟고 이로써 돈을 벌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나무라지 못하는 나라는 자멸하기 쉽다. 미국 영화가 워싱턴 대통령을, 링컨 대통령을 우스개 소재로 만든 것을 보았는가.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더 뜨거운 애국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 나라이다. 애국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을 업으로 삼아 이름을 내고 돈을 벌겠다는 사람보다 더 나쁜 이들인 이들에 영합하고 부추기는 세력이다. 正史에 따라 황산벌을 논한다. 

<서기 660년 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명은 황산벌에 도착하여 백제 장군 階伯(계백)의 5000 결사대와 대치했다. 여기서 일어난 일들은 三國史記에 실감 나게 적혀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많이 소개되어 있는 장면들이다. 6·25 전쟁 후의 195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는 階伯, 官昌(관창)의 장렬한 죽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흥분을 맛보았다. 아이들끼리 병정놀이를 할 때 『너는 階伯 장군, 나는 金庾信』式으로 별명을 붙여 일종의 연극을 하기도 했다.
 
  기자는 당시 별명이 「階伯」이었다. 그런 별명을 갖고 나니 金庾信이 미워지고 백제軍을 동정하게 되어 주로 그런 성향의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金庾信을 「삼국통일로 한민족 형성의 출발점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평가하게 되었지만 어릴 때의 彼我감정이 퍽 오래 갔던 기억이 있다.
 
  황산벌에서 일어난 장면들은 三國史記의 기록 덕분에 영화처럼 생생하게 想像(상상)할 수 있다. 소년기에 읽었던 플루타크 영웅전이나 三國志, 또는 일본 戰國시대 武士 이야기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황산벌 전투는 한국 군사문화의 絶頂(절정)을 보여 준다. 그 이후의 한국사에서 실종된 武士道와 男性美의 현장감이다.
 
 
  階伯은 출정하기 전에 패배를 예감한 듯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三國史記 列傳).
 
  『한 나라의 인력으로 唐과 新羅의 大兵을 당하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내 妻子(처자)가 노비가 될까 두렵다』
 
  그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출정했다. 황산벌에서 階伯의 결사대는 10배나 많은 신라軍을 네 차례 격퇴했다. 金庾信은 여기서 신라軍도 決死특공의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전 진덕여왕 시절 金庾信은 백제軍과 싸울 때 苦戰(고전)하자 충직한 부하 丕寧子(비령자)를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면서 부탁했다. 비령자는 『저를 알아 주시고 또 이런 일을 맡겨 주시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령자는 아들 擧眞(거진)을 데리고 출전했는데 걱정이 되어 종 合節(합절)을 불러 부탁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반드시 따라 죽으려 할 것인데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거두어 돌아가 어머니를 위로해 다오』
 
  비령자가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을 보고 아들도 뛰어들려고 했다. 종 합절이 말리니 거진은 칼로 합절의 팔을 친 다음 달려가 전사했다. 합절도 『상전이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무엇하랴』면서 뛰어들어 죽었다.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본 신라軍이 분기탱천하여 일제히 돌격, 백제軍을 무찌르고 3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階伯과 대결할 때 신라군 사령관 金庾信은 부사령관 둘을 데리고 있었다. 부사령관 金欽純은 金庾信의 동생이었다. 그는 아들 盤屈(반굴)을 불렀다.
 
  『신하는 충성이 제일이고 자식은 효도가 제일이다.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忠孝를 다 완성하는 것이다』
 
  반굴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적진으로 돌입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다른 부사령관 品日(품일)은 아들 官昌을 데리고 출전했다. 品日도 아들을 백제軍으로 돌격시켰다. 階伯은 사로잡힌 관창의 갑옷을 벗겼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것을 보고는 살려보냈다. 관창은 신라軍으로 돌아와선 우물물을 들이켜 마시고는 다시 돌격을 감행하였다. 階伯은 생포한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붙들고 옷소매로 피를 씻으면서 말했다.
 
  『내 아들의 面目(면목)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구나. 임금님의 일로 죽었으니 후회가 없을 것이다』
 
  신라軍은 이 두 소년 장군의 죽음을 보고는 흥분하여 북을 두들기면서 진격하여 백제軍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金庾信의 조카가 되는 盤屈의 아들이 있었다. 金令胤이라고 했다. 문무왕 다음이 神文王인데 이때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명령을 받은 장군 金令胤은 출전할 때 아버지 盤屈의 명성을 의식했음직한 발언을 한다.
 
  『나는 이번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악평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반란군과 대치할 때 金令胤의 동료 장수들은 『잠시 병력을 물렸다가 적이 피곤해진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다. 金令胤은 그 건의를 거부하고 즉시 돌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從者(종자)가 말렸다.
 
  『장군들이 저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예봉을 거두고 틈을 보자는 것인데 장군님만 홀로 나아가려고 하니 안 될 일입니다』
 
  金令胤은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列傳).
 
  『싸움에 임하여서는 나아감만 있을 뿐 물러남이 있어선 안 된다. 장부가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 衆意(중의)를 왜 따라야 하는가』
 
  金令胤은 적진으로 쳐들어가 격투하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神文王은 비통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아비가 없었으면 그 아들도 없었을 것이다』
 
  金令胤은 신라 사람들의 귀감이 된 아버지를 너무 의식하여 좀 무모한, 일종의 자살 공격을 했다는 것을 왕이 알았다는 느낌이 드는 말이다.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이 된 신라의 武士들은 忠孝를 일치시킨 도덕률을 항상 가슴과 머리에 새겨 놓고서 생활했다. 화랑도는 東아시아에서 나타난 최초의 장교양성 교육기관이다. 이들의 행동윤리는 臨戰無退(임전무퇴)로만 단순화되지는 않았다. 圓光 법사가 만든 화랑 5계에 의해 殺生有擇(살생유택)이란 인도적 배려가 따랐다. 반드시 이겨야 하되 쓸데없는 살육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가 3위1체로 통합된 것이 新羅武士 집단의 행동윤리이자 도덕률이었다. 화랑도의 대표인 風月主 출신이자 신라 무사도의 化身인 金庾信에게도 後日譚(후일담)이 있다.
 
  그의 둘째 아들 元述(원술)은 唐軍과 싸우다가 패했다. 다른 장군들은 전사했고 그도 죽으려 했으나 보좌관이 말리는 바람에 살아서 돌아왔다. 金庾信은 자신이 죽인 수많은 신라의 젊은이들을 생각하였음인지 문무왕에게 원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왕은 그러나 『원술한테만 중죄를 물을 수는 없다』면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원술은 시골로 도망해 있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나타나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면담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부인에게는 三從(삼종)의 義(의)가 있다.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원술 같은 자는 이미 남편의 자식 노릇을 못 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
 
  원술은 그 뒤 對唐결전의 최대 승부처였던 매소천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이 정도의 非壯美와 감동이 있는 역사는 세계사를 들추어도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역사를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 어린 학생들의 머리를 혼란시킨 이 영화제작자들은 민족사적 범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남자의 미학/文武王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통일대왕 文武王(문무왕)의 유언은 권력자의 유언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담담하다. 죽음을 맞아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담백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前略) 山谷(산곡)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北山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主(조조)의 西陵(서릉)에는 오직 銅雀(동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機(만기)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만다. 草童(초동) 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갓 자재를 낭비하여 虛事(허사)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헛되이 人力만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을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庫門(고문)의 바깥뜰에서 印度 의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服(복)의 輕重(경중)은 규정이 있으나 喪(상)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州(주), 縣(현)의 課稅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 官員(관원)은 곧 시행하라.>
  
   문무왕의 인감됨을 느끼게 해주는 이 유언은 천하大亂(대란)의 시대에 태어나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거친 大人物(대인물)의 폭과 깊이를 드러낸다. 죽음을 앞두고도, 전쟁으로 고생한 백성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名文이다. 문무왕이 보여준 권력자의 겸손함은 오늘 대한민국의 공직자들도 참고로 할 만하다.

 바로 이 文武王이 모든 것을 걸고 對唐(대당)결전을 선택, 唐軍을 축출, 한반도를 韓民族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한 분이다. 50대에 죽은 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 재를 바다에 뿌리게 한 것은, 권력을 잡았다고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는 인사들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이 아닌가. 민족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생無常(무상)의 겸허함!


 문무왕 8년(서기 668년) 11월5일, 왕은 멸망시킨 고구려의 포로 7000명을 이끌고 경주에 돌아왔다. 그는 신하들을 데리고 선조의 묘에 배알,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물어 國運이 태평하게 되었다'고 신고하였다. 이듬해 왕은 죄인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三國史記 문무왕 條에 적힌 그 요지는 감동적이다.

<지금 두 敵이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었다. 적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이미 상을 다 주었다. 戰死한 혼령들에게도 명예를 추증하였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들은 아직 은혜를 입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 이를 생각할 때 나는 먹고 잘 수가 없다. 국내의 죄수들에게 특사령을 내리니 오늘 未明 이전에 五逆(임금 아버지 어머니 조부 조모를 죽이는 것)과 死罪를 범하지 않은 자로서 갇혀 있는 자는 범죄의 대소를 불문 다 놓아주라. 죄를 범하여 관직을 박탈 당한 자는 다 복구시키고,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도적질한 것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징수를 면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취하여 먹은 자로서 농작이 부실한 곳에 사는 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 농작이 잘 되는 곳에 사는 자는 올해 추수 때 취한 본곡만 갚고 이자는 물지 않아도 된다.'

문무왕이 신상필벌을 엄히 하면서도 백성들,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을 극진히 보살피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文武王이란 諡號(시호)처럼 그는 文과 武의 교양을 겸하여 아름다운 균형감각을 가졌던 분이다. 특히 김정은 일당의 同族 살륙 행패와 비교하면 1347년의 時空을 뛰어넘는 聖人처럼 느껴지는, 보편적 인간애와 도덕성을 확인하게 된다.  

 

  671년 문무왕의 答薛仁貴書는 계속된다. 그는, 신라가 백제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칙지)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군량)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유덕민)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勅旨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노상)에서 눈을 만나 人馬(인마)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권과)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도호) 劉仁願(유인원)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의식)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皮骨(피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혈육)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軍官民(군관민)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문무왕이 피를 토하듯이 쓴(문장가 强首의 대필인 듯) 答薛仁貴書에는 그동안 신라가 唐과의 연합을 위하여 참았던 굴욕을 털어놓고 쌓인 울분을 품위 있게 드러내는 내용들이 많다. 신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참아낸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唐의 힘을 빌린 다음에 보자는 스스로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다운 승리는 굴욕을 참아낸

[ 2018-04-14, 16:16 ] 조회수 : 4694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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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유의메아리     2018-04-16 오전 10:36
조갑제 사장님 올려주신 글 감명깊게 잘 보았읍니다 좌익이 판치는 세상은 왜 저질화되는가 그럴수밖에 없는 부동의 사실을 한가지 덧 붙이겠읍니다 미군의 일본 항복을 받기위한 그야말로 최후수단인 원자폭탄을 나가사기 히로시마 에 투하하여 일황이 항복선언을 하기직전 일본 패망을 예견하고 쏘련 개자식들은 그렇게도 연합국이였든 미국이 그렇게도 많은 군장비를 대주었는데도 일본에 선전포고도 아니하고 미적미적 거리다가 일본에 원폭 투하이후 억지로 선전포고하고 총한방 아니쏘고 승전국이되여 당시 일본의 위성국이던 만주의 관동군(일본군)무장해제시킨다는 명목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잽사게 만주에 진주하고 자기네도 일본땅을 분할 점령하자며 북해도를 내 놓으란다고 겁을 집어먹은 트루만 대통령과 국무장관 애치슨등이 협의한 결론이 한반도의38도선 이북을 쏘련군에 내주기로하여 한반도 분단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발했다 그리하여 북한에 진주한 붉은군대는 미국산 GMC트럭, 쓰리쿼터 ,찝차 등 미군장비를 타고 북한지역에 진주했다 당시 북한 평북지방에서는 함경북도쪽으로부터 남하하는 쏘련군대가 가는곳마다 강도질을해서 제가살던 평안북도 각지역에서는 마적단의 출현이라며 무기도없이 각 마울마다 자경단을 조직하여 야경을돌고 밤을 새웠다 나중에 보니 그 마적단은 쏘련군이였다 쏘련군은 마을마다 지나며 갖은 행패와 강도질을 일 삼었다 내가살던 평북 용천군 양시에서도 주재소에서 싸이렌이 울리면 동내 주민이 뛰여 나가보면 영락없이 쏘련군 병사놈이 도둑질을 해서 주재소 싸이랜이울렸다 그놈들은 출동한 마을 청년들에게 박치기로 얻어맞고 뒈지게 얻어맞었자 그런게 하루도 몇차레 장날은 더 많이 일어났다 하도 박치기에 얻어맞은 쏘련병사가 어린아이들을 대려다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리에 뿔이라도 있는지 만저보는 것이였다 평안도 박치기는 쏘련병사들에게 많은 겁을 주었다 붉은 군대가 같히 대리고 들어온 허사비 개일성을 앞세워 20개 정강을 발표하고 북한주민의 선무 작업에 들어갔다 그것도 잠시 붉은군대 사령부가 평양에 설치되고 북한을 임시 통치하며 주로 한짓은 북한 각지에서 붉은군대 사령부가 지들 맘대로 발행한 북한 통화로 쌀과 ,황소등 기타 생필품등을 마구잡이로 구입해서 북한전역의 역두에 산더미 같이 모으고 열차에실어 쏘련으로 갖어갔다 미국은 쌀도 밀가루도 기타 생필품을 주었는데 쏘련은 지놈들이 발행한 군표로 마구 통용해서 북한의 재화를 싹쓰리 해갔다 그리고 개일성의 북한 임시정부는 조만식 선생을 무력화시키고 북한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그 무서운 숙청, 지주,부자들을 대상으로 문전옥답 토지는 토지개혁이라는 명목으로 빼았고 집은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평안도 사람은 함경도로 함경도사람은 또 타도로 이를 집행한 완장찬 압재비는 주로 저능아 지금으로보면 지적장애 2급이상의 장애인을 내세워 집행했다 또 殺父會를 조직 내아버지는 네가 너의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빨갱이들은 청소년들을 사주하여 놈들이 반동이라고 낙인 찍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쏘련군 진주할때 그들의 만행에 빡치기로 대항하든 평아도 사람과 그 기질은 어데가고 바보가 되였는가 그에 대한 정답은 앞에 기술한대도 숙청과 살부회 찍해도 죽이고 짝해도 죽이고 공권력이 사람 죽이는데, 힘없고 조직이없는 일반인이 어찌 대항하겠읍니까 이 글은 조갑제 대기자님의글에 주제넘게 보충글로 올립니다 빨갱이는 이렇습니다 감사합니다
   白丁     2018-04-14 오후 9:47
한마디로 상노무시키들이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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