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오휘웅(1) - 집행장에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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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행장에서
  
   억울한 목에 밧줄이 안 걸리도록
  
  끔직한 살인의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폐지론자가 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사형존치론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주로 대중매체를 통해 범행의 현장이나 범인의 악독성을 생생하게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에서 증오심이 우러나온다. 오죽했으면 강도강간범에 대한 '공개처 형'까지 거론됐을까.
  
  한편 사형집행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돼 있다. 교도소 담 안의 어느 밀실에서 이뤄지는 이 '합법적 살인'은 국가 기밀도 아니고, 그 상황의 공개를 어느 누가 법으로 금한 적도 없지만, 좀처럼 사실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집행에 참여한 사람은 꺼림칙해서 입을 다물고, 언론도 사형집행을 현대의 신화로 남겨 놓고 싶어한다. 가끔 사형집행된 흉악범의 수기나 편지가 참회록이란 제목으로 잡지에 실리기?한다.
  
  거개가 기독교에 홀딱 빠져 기쁨에 충만된 속죄의 삶을 살다가 천당 가는 기분으로 교수형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흉악범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는 배경 하나로 '하느님을 모르는 죄인들'을 오히려 동정하는 듯한 언사를 하고, 세상 사람들을 척 내려다보는 듯한 투로 쓴 글이, 보통 사람들에겐 도대체 기분이 나쁜 것이다. 이런 반발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 박철웅, 그놈은 감방에서 다른 할 일이 없으니 예수를 믿은 모양인데, 그래서 천당에 갔고, 그놈한테 목숨을 빼앗긴 세 사랑은 예수를 안 믿어서 지옥에 갔단 말인가?'
  이런 수기나 참회록은 사형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방해한다. 비신자에게는 광기로 비치기도 하는, 집착과 신앙으로 채색된 그들의 참회는 사형 비밀주의와 함께 한국의 사형제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오히려 그르칠 수도 있다.
  
  사형비밀주의는 결국 사형제도의 존속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세계 형사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모른다'는 것은 가끔 무관심이나 증오심으로 이어진다. '안다'는 것은 으례 합리나 신중으로 연장된다. 사형집행을 목격한 판사는 그 뒤로는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한번쯤은 다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론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국에서는 사형제도의 존폐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무고한 사람의 목에 밧줄이 걸리지 않도록 하느냐가 급선무다. 얼마나 많은 사형수가 형장에서 '나는 무고하다' '나는 억울하다' '이런 일이 나로써 끝나기를…' 등의 유언을 남기고 죽어 갔으며, 그 유언들이 얼마나 타당성 있는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2년간 집행 명령서의 결재 보류
  

  사형집행은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 이뤄진다. 장관의 성향에 따라 사형집행의 회수가 크게 다르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법무부장관으로 있었던 황산덕씨는 고 육영수 여사 살해범인 문세광에게만 집행명령을 내렸고, 일반사형수에겐 한번도 집행명령서에 결재를 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에서 취급된 사형수는 국방부장관이 집행명령을 내린다.)
  
  유명한 형법학자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황산덕씨는 '아무래도 내 손으로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 꺼림칙하여 연말에 대검에서 사형집행 기안을 올릴 때마다, 조금 기다리라면서 서류를 돌려보내 버렸다'고 했다. 문세광에 대한 집행명령도 자신이 제주도로 출장 가 있는 사이 차관이 대신 했다는 것이다. 황산덕씨의 기억에 따르면 집행보류로 전국 교도소에는 약 1백 명의 사형확정수가 적체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후임 법무장관은 1976년 12월 27일과 28일, 1977년 3월 26일, 세 차례 수십 명의 사형 집행을 명령했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1976년 12월 27일, 28일 양일간 11명이 처형됐다. 이틀 연이어 집행이 진행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후임 법무장관의 사형집행 보고를 받고 뒤늦게 황 장관의 2년간 보류조치를 알았는데, 어느 날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황 장관 (당시는 문교장관)은 '그래도 문세광이는 처형했잖습니까'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사형집행장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 세 군데다(군 형장은 제외). 서울구치소, 대구교도소, 광주교도소. 사형집행은 이 세 곳에서 같은 날짜에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다. 사형집행은 법률(행형법 57조)에 따라 국경일이나 일요일, 공휴일에는 못하게 돼 있다. 집행을 대기하는 확정수가 많았던 50년대에는 집행일이 특정되지 않고,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또는 더 자주 사형이 집행됐다고 한다. 참고로 60년대의 사형집행자수를 보면, 1963년에 20명, 64년 14명, 65년 21명, 66년 13명, 67년 17명, 68년 26명으로 나타나 있다(신진규, 『형사정책II』).
  
  7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주로 봄(3,4월)과 12월 하순 두 차례 집행이 치러졌다. 80년대에는 9월이나 10월말에 집행이 있기도 했다. 1982, 83년에는 한여름 복중에 집행이 있었다. 형장에 24시간 보존키로 돼 있는 시체가 썩어 그 냄새가 진동했다. 전국에서 가장 사형집행 건수가 딴은 서울구치소의 경우엔 한 번에 5∼7 명씩 교수하는 게 보통이다.
  
  최근엔 정부통계에서 사형집행자수가 나타나지 않는데, 매년 20명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피고인수는 1980년에 32, 81년 33, 82년 35, 83년 19, 84년 18명이었다. 70년대 이후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는 달은 1,2월이다. 이때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사는 사형수들도 약간 안도할 수가 있다. 사형집행이 있음직한 4월이나 12월 하순에는 사형수들이 바싹 말라간다. 서울구치소에서 오래 근무했던 어느 교정공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가족에게 연락을 해 달라는 부탁이 잦아지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고, 재소자와 자주 다투는가 하면, 교화업무에 협조를 하지 않고, 투정을 부리기 일쑤지요. 그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조용해집니다. 반대로 경축일이 가까와 오면 혹시 감형이나 되지 않을까 숨을 죽여 기다리지요.'
  
  법무부장관의 사인이 없으면 사형수는 기한 없이 연명을 할 수가 있다. 60년대엔 10년 이상 그렇게 살고 있는 사형수도 있었으나 70년대에 들어 와서는 확정 뒤 7년 정도 연명한 것이 최장 기록이었다고 한다(서울구치소의 경우). 박철웅, 김대두씨 등 진범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형수일 경우엔 확정된 지 1, 2년 안에 집행해버리기도 한다.
  
  억울하다고 재심을 청구하는 사형수에겐 그것이 최종적으로 기각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심 개시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즉 재심청구 사실만으로는 사형이 연기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재심을 청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는 사형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확정된 이후에도 3∼5년쯤 더 살다가 가기도 한다. 1984년말 현재 서울구치소에는 24명의 사형 확정수와 14명의 미확정 사형수가 있었다. 전국 수자는 1백 명을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1983년 7월 윤상군 유거범 주영형씨 등이 처형된 이후엔 줄곧 집행이 없었다. 법무부장관이 바뀐 지 석 달이 지난 1985년 10월 31일에 전국적으로 집행이 있었다.
  
  '집행에 차출' 면하려고 발버둥쳐
  
  사형집행의 결정은 교도소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므로 교도소에선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짐작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대검찰청에서 사형수 대여섯 명을 지정, 사진촬영과 건강진단을 해 올리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다. 교도소나 구치소에선 여러 사형확정수 가운데 그 몇 사람만 불러내면 그들이 눈치를 채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여 모든 사형수에 대해 촬영과 건강진단을 해버린다. 그때부터 사형수들은 전전긍긍해 한다.
  
  사형집행 지휘서가 구치소장 앞으로 전달(인편)되는 것은 보통 그 건강 진단이 있고 나서 석 달쯤 지난 때다. 건강진단의 대상이 된 사형수가 거의 그대로 사형집행자 명단에 올려진다. 집행지휘서는 하루 전에 전달된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집행의 준비는 대충 이렇게 한다.
  
  먼저 소장이 보안간부와 교무간부를 불러 집행계획을 의논한다. 집행을 주관하는 쪽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조용한 집행'이다. 사형수가 감방에서 끌려 나올 때 소동이 벌어지지 않도록 계획을 짠다. '참회 속에서 양순하게 가주는'것이 교도소측이 바라는 바다. 집행순서가 문제다. 특히 첫 사형수가 어떤 태도로 죽느냐 하는 것이 그 날의 형장 분위기를 좌우한다. 소장은 으례 구치감의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사방(舍房)에 있는 사형수부터 차례로 집행하자고 한다. 그래야 먼 감방에는 사형집행 소식이 늦게 알려져, 뒤에 집행되는 사형수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사형수 교화를 맡고 있는 교무간부는 '신앙심이 깊고 얌전한 사형수를 가장 먼저, 그리고 눈·콩팥 등 신체 기증자를 맨 끝으로 돌려야 분위기도 잡을 수 있고, 이식수술의 절차도 순조롭게 진행된다'면서, 다른 집행순서를 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출입구에서 가까운 사형수부터'란 관례가 채택된다.
  
  이어서 사형집행에 종사할 인원을 뽑아낸다. 스무 명쯤이 필요한 '사형집행인'으로 자원하는 이는 있을 턱이 없고, 거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고 한다. 신경쇠약 증세가 있다, 곧 결혼할 때인데…, 아내가 임신중이다 등등의 사유가 등장한다. 딱 부러지게 '차라리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이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순번을 정해놓고 공평하게 사형집행의 기회를 배당하곤 한다.
  
  인원편성이 끝나면 교무계에서는 집례를 맡을 신부, 목사, 스님에게 '내일 급한 일이 있으니 아침 일찍 나와달라'고 연락을 취한다. 평소에도 교도소에 파견돼 있다시피 하는 이들 성직자들은 단번에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다. 교무계에선 집행될 예정인 사형수들을 맡아 1주일에 한 번씩 '사형수 교회'까지 와서 예배를 올려주는 여신도들에게도 '내일 교무계로 나와달라' 고 연락을 한다. 사형수 유족에겐 집행 뒤에 알린다. 집행 당일 새벽엔 사형장 청소가 있다. 재소자들이 하는데 이 소문이 퍼지면 감방은 술렁인다. 구내공장에서 전날 저녁에 돗자리, 그리고 용수를 만들었다는 소문도 금새 퍼진다.
  
  '밧줄이 꺼끄럽습니까'
  
  사형수들이 자신의 집행을 예감하는 것 같다는 증언은 많다. 지난해 10월 31일에 처형된 강도강간범 최윤성씨 (26)는 아주 감수성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최씨를 맡았던 김모 집사에 따르면 죽기 직전엔 죽음에 대한 이야기, 공범 황모씨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 등을 많이 했고, 몸 단장을 하지 않았으며, 3일 전부터는 운동장에 운동하러 나오지도 않았고, 계 속 틀어박혀 책만 보았으며, 전날 가족이 면회 갔을 땐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는 것이다.
  
  최씨는 그보다 1년 전인 1984년 11월 1일에 김모 권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오후 문 목사님을 뵈러 교회실에 들어서면서 저는 죽음을 봤습니다. 앉아 묵상하는 동안 제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죽음의 차가움에 온몸을 떨었습니다. 내일의 집행을 위한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일 아침이 되면 지금 허둥대는 제 모습에 심한 부끄러움과 어처구니없음을 느끼게 되겠지요. 평소 죽음과 삶을 초월했느니, 두렵지 않다느니 하고 떠벌인 제가 한순간 그 그림자만을 보고도 혼비백산하는 걸 보니… 제 자신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낍니다.'
  
  이 청년에게 그 죽음은 꼭 1년 뒤에 찾아왔지만, 1984년 11월 1일 그 날 최씨는 내일이면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심경에서 서둘러 이 편지를 썼던 것 같다. 최씨는 그 엽서 편지에다가 이현주 목사의 이런 글을 인용,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하늘은 어찌하여 저토록 푸르며 때를 맞춰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가. 어찌하여 냇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우거진 수풀에서 새들은 지저귀는가. 그대들의 눈에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나의 눈에는 그대로 슬픔이었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것은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한다는 거다. 이미 죽음일 따름인 나의 몸뚱이에 어찌하여 아직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먹고 싶은 마음과 어처구니없는 욕심이 남아 있단 말인가. 지금이 창세 이전이 울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울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죽으면 다시 고요한 어둠 속에 묻히게 될까. 모든 것이 있기 전의 그 정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될까. 나의 마음은 죽음을 그리워하는데 나의 문드러진 몸뚱이는 그토록 목마르게 삶을 갈구하고 있으니…'
  
  10·26사건 때 김재규씨와 함께 처형된 유성옥씨 (전중앙정보부 운전사)는 처형되기 바로 전날 느닷없이 서울구치소 어느 직원에게 물었다고 한다.
  '목에 밧줄이 걸리면 꺼끄럽습니까.'
  '그런 생각 마세요.'
  '꿈에서 자꾸 그런 장면이 나타납니다.'
  '마닐라 삼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꺼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편안히 갑니다.'
  
   '넥타이 공장'의 모습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 개시 시간은 오전 10시이다. 1970년대 이래의 관습이다. 이 관습이 두 번 깨졌다. 문세광씨와 김재규씨는 이른 아침에 처형됐다. 김씨의 하수인인 박선호씨 등 네 명은 오전 10시부터 처형됐고. 사형집행 날, 아무리 보안을 해도, 이날 아침에는 재소자들이 낌새를 채게 된다. 기상 나팔 직후에 나오던 방송이 안 나오고, 야외 사역이나 아침 운동이 없고, 통로의 출입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삼엄한 분위기에 짓눌려 구치소는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형법 66조는 사형은 교도소 안에서 교수형으로 하고, 군형법은 지정된 장소에서 총살로 집행하도록 정해 놓았다. 사형이 교수형과 총살형으로 정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다. 법에 명시된 것은 1905년 형법대전 제 94조가 '사형은 교(絞)로 한다'고 못박은 것이 처음이다. 세계적으로 교수형이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사형 방법이다. 미국에서 주로 쓰는 '가스 중독살'과 함께 고통이 덜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대가 있는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사형수는 행형법 제 13조에 따라 구치소나 미결수용실에 수감된다. 그들이 미결방에 들어 있는 것은, 사형수는 형사소송법상으로는 기결수이지만 행형정책상으로는 집행과 동시에만 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미결수다.
  
  서울구치소의 미결 구치감은 4천 평 가량 되는 대지 위에 서 있는 흰 벽돌 2층집이다. 여기에 6개의 사(舍)가 있고, 사는 상하층으로 돼 있다. 이 구치감치 벽은 높다. 그 북쪽 벽에 철문이 하나 있다. 이 철문을 나서면 무학재 너머 금계산이 보인다. 철문에서 북쪽, 즉 금계산 쪽으로 맨땅에 길이 나 있다. 재소자들이 자주 불려가는 운동장이나 의무실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런데 한 30걸음쯤 걷다가 보면 왼쪽으로 꺾어지는 샛길이 나온다.
  
  이 샛길을 옛날 재소자들은 '지옥3정목'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일제시대부터의 별명인 듯하다. 사형수들이 지옥으로 가는, 번잡한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곳이란 뜻이라 한다. 이 샛길을 따라 열 걸음쯤 더 걸으면 왼편에 높이 3.5미터쯤 되는 흰 담 벽이 나온다. 담벽에 붙은 철문을 들어서면 잡초 투성이의 모래 땅바닥에 서 있는 15평 가량의 직사각형 목제 기와 건물과 만나게 된다. 높고 흰 담 벽이 직사각형 (15×10m)으로 이 하얀 건물을 에워싸고 있어 바깥에선 건 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이 처형장이다.
  
  '집행 날짜를 알려주었으면…'
  
  사형수를 형장까지 데리고 오는 것을 연출(連出)이라고 한다. 연출조는 무술에 능한, 건장한 보안과 직원 3명으로 구성된다. '지옥의 사자'격인 이들이 어느 날 오전 갑자기 감장 정문 앞에 나타난다. 덜컹, 문을 열고는 '19xx번 의무과로 체중검사!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거나 '전방(轉房)!' 이라고 외친다. '형장으로 갑시다'고 정직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사형날짜를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옛날엔 사형집행장으로 들어가는 '지옥 3정목'의 샛길에 이를 때까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다. 1982편 여름에 처형된 금당사건 주범 박철웅씨는 교도소 직원들에게 그 전부터 집행장의 구조나 분위기를 캐묻곤 했다. '한번도 못본 곳이라서 그럽니다. 미리 생각해 두면 그날엔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씨는 '집행예정일도 귀뜸해 달라'고 했다.
  
  '몸도 깨끗이 하고, 책도 정리하고, 같은 방 형제들과 작별 예배라도 보고 가야지요.'
  예정일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집행일 오전 그를 데리러 간 연출조는 '오늘은 하느님 앞으로 가는 날이다'고 참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박씨의 수갑도 풀어주었다(사형수는 1심에서 사형구형이 떨어지면 집행 때까지 수갑을 차야 한다). 이것도 '특혜'였다. 박씨는 태연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성경, 찬송가 등 자기 물건을 정리한 뒤 감방 동료들과 작별 예배를 보고 형장으로 향했었다.
  
  일본 오사까 구치소에선 집행 이틀 전에 이 사실을 사형수에게 알려주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 기간에 사형수는 가족과 마지막으로 만나 구치소 안에서 식사를 함께 할 수도 있다. 사형수들은 신변을 정리한 뒤 집행 직전엔 설사촉진제를 복용, 뱃속까지 비우고, 가쁜한 기분으로 형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고중렬씨(64·화양천주교회 사무장)는 서울구치소에서 1954∼72년까지 18년간 근무하면서 사형수 교화에 종사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사형수를 가장 많이 상대했고 사형집행 현장에도 가장 많이 참여했으며 약 4백 명의 사형수를 대자(代子)로 만든 사람이다. 그는 심지가 굳은 사형수에겐 집행 당일 아침 일찍 감방으로 찾아가 '오늘 천국으로 갈 것 같으니 끝까지 자세를 흐트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거개가 담담하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고 형장에서도 그랬다는 것이다. 고씨는 이런 소감을 책에 쓴 적이 있다.
  
  최소한 형 집행 1, 2개월 전에 성직자(교도소 담당)에게 집행일자를 알려 떠날 준비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비록 죽어야 할 인생이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얼굴 붉힘도 없이 완전한 죽음으로써 평안히 떠날 수 있도록 조그만 시간을 주고 후회 없이 (형장의) 쪽대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갈 수 있게끔 준비시켜 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서울구치소』)
  
  여섯 번 죽는 사형수
  
  연출조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눈치를 챈 사형수들 중에는 허무한 반항을 하는 이도 있다. 변소로 숨어들고, 발버둥치고… 연출조의 속임수에 걸려 정말 의무과로 불려가는 줄 알고 나온 사형수라도 구치감 담벽의 철문을 지나, 곧장 뻗은 통로에 들어서면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된다. 길 양쪽에는 거의 1미터 간격으로 교도소 직원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무슨 비상인가.'
  '의무과에선 왜 부를까.'
  '혹시?'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꽉 막힌 채 걷다가 보면 어느새 지옥 3정목. 옆에 따라오던 교도관이 사형수의 몸을 왼쪽으로 툭 치거나 턱으로 샛길을 가리킨다.
  '이쪽으로.'
  그 순간 사형수는 멈칫하고 교도관을 쳐다본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다.
  
  그런 시선으로 멀리 인왕산을 보고, 몇 날을 두고 훔쳐 봤던 하늘을 보고, 자신이 거처했던 감방쪽을 뒤돌아보고…. 어느 사형수는 형장 문앞까지 왔다가 그만 온 길로 줄달음,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다가 감방 앞까지 와서는 '어머니, 어머니'하고 목놓아 엉엉 울다가 다시 형장으로 끌려 가더라는 것이 고중렬씨가 기억하는 5, 60년대의 단상들이다.
  
  요사이는 달라졌다. 사형수는 연출조가 데리러 왔을 때 대충 눈치를 채고 늦어도 구치감 철문을 나서는 순간, 삼엄한 분위기로 해서 그는 '오늘의 운명'을 알게 돼 있다. '지옥 3정목'샛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무계장 과 '담당'(그 사형수의 종교에 따라 담당직원이 정해져 있다)이 뛰어오듯 다가와 사형수 양쪽에서 바짝 붙어 손을 잡으면서 간곡하게 말한다.
  
  그 당부는 대체로 일정하다. 기독교신자에겐 '하느님께 영광 돌리자', 불교신자에겐 '극락에 가도록 하자', 신체 기증을 약속한 사형수에겐 '유언 때 그 이야기를 꼭 해달라.' 사형수의 손은 예외없이 땀에 젖어 축축하다고 한다. 이때 사형수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지만 아무리 신앙이 깊고 담이 큰 사람이라도 약간의 동요는 있게 마련이다. 심한 경우엔 하체에서 힘이 빠져 달아난 듯 주저 앉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들어갈 때 그렇게 하듯 뒤로 뻗대기도 한다. 그러면 연출조가 양쪽에 끼고, 들 듯하여 끌고 간다.
  
  '먼저 갑니다'
  '그동안 신세졌습니다'고 인사하는 사형수도 있다. 박철웅씨가 그랬고, 1979년 9월에 처형된 오휘웅씨가 그랬고. 어느 사형수는 몇년 전 백지장같이 하얘진 얼굴에, 흰자위만 남은 눈을 번득이며 'xx들, 날 왜 죽여!'라고 절규했다. 교무계장과 담당이 사형수의 양쪽에 서고, 바로 뒤에 세 연출조 직원이 부축하듯 뒤따르면서 일행은 샛길로 꺾어들어 왼편 담벽의 철제 쪽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재소자들이 '넥타이 공장'또는 '고만통'이라고 부르는 집행장 건물이 스산하게 거기 서 있다.
  
  이 건물이 시야를 확 메울 때 사형수는 다섯번째로 죽는다고 한다. 1심 선고 때, 2심 때, 3심 확정 판결 때 죽고, 지옥 3정목에서 꼬부라 질 때 네번째 죽고, 이 건물을 봤을 때 다섯번째 죽고, 교수대에서 여섯번째로 마지막 죽음을 맞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어디 여섯 번뿐이겠는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감방문이 열릴 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 다, 방송이 갑자기 안 나올 때마다, 비상이 걸릴 때마다, 아침 운동이 중단될 때마다, 옆방의 사형수가 사라질 때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분마다 죽어가는 것이 사형수의 삶이다.
  
   집행장 돗자리 위에 앉다
  
  높은 흰 담벽에 둘러싸인 집행장 건물에는 양쪽 측면에 둘, 북쪽에 하나, 모두 세 개의 쪽문이 나 있다. 북쪽 담벽문과 가장 가까운 북쪽문은 사형집행을 주관하는 검사, 구치소장 등이 드나든다. 사형수는 북쪽 담벽문을 지나 이 건물을 왼쪽으로 돌아서 동쪽 측면에 난 쪽문을 통해 형장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형수는 우선 고요함에 압도된다. 벽면을 따라 스무 명쯤 되는 사람이 꽉 서 있는데도 형장 안은 침묵, 바로 그것이다.
  
  남쪽 구석의 병실에 칸막이처럼 늘어뜨려져 있는 하얀 커튼이 그의 시야를 메우게 된다. 내벽은 흰색 계통이고, 천장에선 백열등이 빛나지만 형장 안의 분위기는 음울하다. 집행장의 마룻바닥은 시커멓게 변색된 그대로다. 새벽에 청소는 했지만 군데군데 보오얀 먼지가 앉아 있다. 사형집행 당일에만 청소를 하니, 흉가 같은 집행장은 누추할 수밖에 없다.
  
  마룻바닥의 앞쪽, 곧 북쪽에는 높이 60센티미터쯤의 강단이 있다. 강단과 마루 사이엔 목책을 닮은 경계목이 박혀 있다. 강단의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고, 그 뒤에 세 사람이 앉는다. 가운데가 구치소장, 그 오른쪽이 검사 자리다. 탁자 위에는 검은 보자기가 덮여 있고, 그 위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놓인다. 그 사형수의 신원기록과 판결문, 재심청구서 등이 묶여 있는 신분장이다.
  
  강단의 뒷쪽 벽면을 따라선 벤치가 두 개 놓여 있다. 여기엔 사법연수원생들이 견학차 와서 앉기도 한다. 구치소장이 앉은 자리 왼편에 작은 탁자를 앞에 두고 명적과 직원이 앉는다. 유언을 적기 위해서다. 그 뒤 의자엔 목사, 신부, 스님 등이 앉는다. 강단 바로 밑, 구치소장 바로 눈 아래 마룻바닥에 돗자리가 깔려 있다. 전날 짠 것이든지, 깨끗한 가마니를 뜯어낸 것이다. 사형수는 이 돗자리 위에 편하게 앉혀진다. 연출 때 그대로 그의 양쪽엔 교무계장(오른쪽)과 담당이 서고 등 뒷편엔 3명의 연출조 직원이 선다. 양쪽 측문에 3명씩 모두 6명의 보안과 직원이 서서 계호한다.
  
   '그만 읽어요'
  
  사형수가 앉자마자 집행관인 구치소장은 인정신문을 시작한다. 집행인들은 이 고역을 빨리 끝내야겠다는 강박심에 쫓겨 서둘러 이 의식을 치러버리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정신문은 법정의 그것과 거의 같은데, 신분장과 대조하면서 묻는다.
  '몇 번이죠?'
  '성명은?'
  '본적은?'
  '주소가 어떻게 되죠?'
  '생년월일을 말씀해보세요.'
  이때 사형수가 대답을 잘못하면 주소나 생년월일 등을 읽어주고 '예'라는 간단한 대답을 구해낸다. 드물게 흉터, 반점 등 신분장에 나타난 신체상 특징을 확인하여 엉뚱한 사람이 처형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도 한다.
  
  이어서 소송과정에 대한 확인이 계속된다.
  '19××번 ×××는 197×년 ×월 ×일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맞죠?'
  '예.'
  1976년 12월말에 있었던 강도살인범 엄기덕씨에 대한 인정신문 때 구치소장은 '엄기덕은 강윈도 춘성군에서 달구지를 끌고 가던…'이라고 공소사실의 요지를 낭독해 갔다. 이를 듣고 있던 엄씨는 갑자기 '소장님, 제가 한 일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낭독을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소장도 이 말을 받아들여 그 부분을 생략해버렸다. 사형수들로선 마지막 가는 자리에서 새삼 자신의 범죄사실을 소상히 들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기 작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고지식한 구치소장들은 공소사실 낭독을 성실히 (?) 하곤 했는데, 사형수들의 항의가 잦아 요즈음엔 그냥 '××사건'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197×년 ×월×일 항소를 제기했죠?'
  '예.'
  '197×년 ×월×일 그 항소가 기각됐죠?'
  '예.'
  '…상고를 제기하여 기각됐죠?'
  '예.'
  '그래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서 지금 이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유언이 있으면 하시죠.'
  
   조봉암과 박철웅, 주영형의 유언
  
  사형집행의 의식에 있어서 유언은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말이기 때문이다. 그 무게는 법정에서 하는 최후진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희미해져 가는, 때로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어지러운 의식 속에서, 혹은 원한이나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그래도 최후의 안간힘을 다 써서 정신을 가다듬고 뱉아내는 마지막 말에는 그 사형수가 살아온 인생의 총체적 무게가 걸려 있다고 봐야 한다.
  
  조봉암씨의 사형집행 때 그의 등뒤에 서 있다가 용수를 뒤집어 씌운 역할을 했던 당시 서울구치소의 모 직원은 이렇게 그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때는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 교도관이 그를 데리고 형장으로 들어가는 데 그는 걸음을 늦추더니 한 곳을 유심히 보면서 중얼거렸다. '참, 그 꽃 아름답기도 하다.' 그의 눈길이 미치는 곳에는 이름 모를 하늘색 꽃이 곱게 피어 있었던 것이다. 인정신문을 받기 전에 그는 더부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사형을 집행하려면 수염이나 깨끗이 깎아주고, 몸단장도 좀 시켜 줄 일이지… 몹쓸 사람들…'이라고 중얼거렸다. 조씨는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가족이 다 잘 알아서 하겠으니 별말이야 있겠소. 결국 이승만에게 져서 이렇게 된 것인데… 다만 한마디 남겨놓고 싶은 게 있소. 이 나라에서 정치 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 줄 짐작 못한 바 아니나… 그 희생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오.'
  태연했던 그도 내가 뒤에서 용수를 씌우자 바르르 경련했다.
  
  그 이틀 전에 조씨와 공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양명산이 처형됐는데, 나는 그때 포인트(교수대의 마룻바닥을 꺼지게 하여 사형수가 밧줄에 달린 채 지하로 떨어지게 하는 핸들)를 제끼는 일을 했으니 인연이 묘했다.'
  
  금당사건 주범 박철웅씨는 가장 긴 유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도식으로 유언을 했는데 10분 이상 걸렸다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해볼 수 있는 것은 다해 보았습니다. 돈도 모았고 쓸 만큼 써보았으며 수많은 여자들도 안아보았습니다.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자가용으로 다녀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나서 저는 이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인 세 사람과 유가족―특히 정 사장의 세 아이 이름을 들어가면서―에게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간구했고, 목사, 신앙의 자매, 교무계장 등 수많은 친지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빌었다. 그의 유언이 너무 길어지자 교무계 직원들은 조마조마해졌다고 한다. 저러다가 자제심을 잃고는 횡설수설로 변해 발악을 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그 긴 유언이, 박철웅씨는 비록 이승의 삶을 초월했다고 장담했으나, 생에 대한 미련의 표현인 것 같았다고 풀이하는 이도 있다.
  
  1983년 여름에 처형된 윤상군 유괴살해범 주영형씨는 '나로 인해서 교직자의 이미지가 먹칠을 당한 것에 대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속죄하는 뜻에서 저의 신체를 기증하기로 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로 인해 번민에 빠진 학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유명을 달리 한 윤상군의 명복을 빈다'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화투에 손을 댔습니다. 돈을 잃었습니다. 본전을 찾으려 하다가 또 돈을 잃었습니다. 화가 나서 술과 여자를 가까이 했습니다. 월급으로는 이자도 못 갚을 정도였습니다. 이럴 때 윤상군 유괴계획을 세우게 됐습니다. 만사가 잘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사위가 잘 굴러간다는 생각에서 깨어났을 때 저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사위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하세요.'
  
   사회를 비판한 유언
  
  희대의 살인범 김대두씨는 사형선고를 받고 화끈하게 변신하여 기독교 신도가 됐었다. 1976년 12월 사형집행장에서 그는 뼈아픈 유언을 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가 전과자들을 좀더 따뜻이 대해 주셔서 갱생의 길을 넓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전과자들은 출소하기 전에 여러 가지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보려고 마음이 부풉니다만 모든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만을 대할 때 다시 범죄를 하게 됩니다. 교도소에서도 초범자와 전과자는 분리 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지난 1976년 12월에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김종성씨는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자신을 해고한 주인을 죽인 사람이었다. 그가 구속되자 아내는 두 아들을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근섭 목사의 소개로 두 아들은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갔다. 그래도 김씨는 유언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을 길게 털어 놓았다. 결혼하게 된 경위까지 설명하면서. 그러고 나서 김씨는 '우리 사회의 부자들에게 부탁드립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그때 집례를 했던 김수진 목사는 전하고 있다.
  
  '나그네 길인 이 세상을 가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길을 가는 데 쓸 만큼의 양식이지 그 이상을 지고 가려고 하면 오히려 화가 됩니다. 남은 양식은, 그 최소한의 양식조차도 없는 이들에게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범죄인이 줄어들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979년 9월에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강도살인범 전광욱씨는 글로 옮겨 놓으면 그대로 명문이 되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행장에 참석했던 어느 직원은 지금도그 유언내용을 정확히 기억 있었다.
  
  '주여! 죄값은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당신께 저의 영혼이 달려가는데 흔들릴까 두렵습니다. 저를 꽉 붙들어주십시오. 저로 인해 목숨 잃은 ○○○도 구원받게 해주십시오. 저로 인해 죄를 범한 사람들을 사하여 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 분들께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저는 가진 것 없사오나, 이제 두 눈을 맡기고 가오니 주의 뜻대로 사용해주십시오. 주님, 불쌍한 이 영혼을 꼭 붙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뜯어본 뒤 자신을 희롱하는 두 고참사병을 쏴 죽이고, 1963년에 총살형을 받은 최영오 일병 (당시 서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4학년 재적)은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한다.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관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무리 비천한 사형수라도 형장에서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를 쓴다.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는 확신은 그런 태도를 취하게 하는 의지력을 주기도 한다. 의연하게 죽어간 사람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형집행을 많이 하면서 여러 가지의 인간형을 두루 살핀 서울구치소 출신의 어느 퇴직공무원은 '의젓하게 죽든, 발악하면서 죽든 똑 같아 보입니다'고 했다. 의젓하게 죽었다고 위대해 보이지도 않고, 발악하면서 죽었다고 경멸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항변하고 발버둥치면서 죽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인간다와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출처 : 책
[ 2003-07-06, 18:2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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