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은 간부에게 절대 시집 보내지 않겠다"

아빠는 명절 아침에 왜 흙벽을 쳐 내 이팝에 흙이 쏟아졌나?
<두 번째로 이은 자서전>

산더미 같은 풍랑으로 거대한 화물선이 뒤집히는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거센 풍랑 밑에는 잔잔하다고 한다. 아마도 나의 유년 시절을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부모님 세계는 거센 풍랑이고 철없는 나는 그 밑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 전쟁이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어!"
"아이고! 이 녀석!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얼마나 죽을 맛인지 알기나 하냐!"

밤낮 전쟁 영화와 만화, 책, 교육과 선전 속에 살다나니 어린 마음에 그게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 전쟁을 겪으며 모친과 아래 여동생 둘이나 목전에서 잃은 우리 엄마는 몸서리치신다.

먼저번 자서전에 언급한 것처럼 공산동(童)으로 태어나 보니 가장 느낀 점은 배고픔이었다. 그 배고픔과 함께 모래알 같은 메옥수수밥과 메조밥이 정말 싫었다. 오죽했으면 부친의 엄격한 교양으로 아침 달리기를 할 때 <강낭밥은 물러가라! 이팝(흰쌀밥)은 오라!> 소리치며 동네방네 뛰어다녔겠는가. 거짓이 없는 어린 마음 그대로의 감정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속에 명절 어느 날 이팝을 먹게 되어 아침부터 기뻤다. 한데 아빠가 무슨 일인지 방 벽을 치는 통해 그 흰쌀 밥에 흙들이 떨어졌다. 6·25 전쟁 후 어려움 속에 흙벽으로 집을 짓다나니 진동을 받으면 흙들이 떨어지는 것이다. 오랜만에 먹는 이팝 위에 흙들이 떨어져 어린 마음에도 너무 아깝게 느껴진 기억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아빠가 왜 벽을 쳤는지는 훗날 커서 알게 되었다. 나는 이팝 먹을 생각만 했지만 아빠는 울분을 참을 수 없는 풍랑 속에 계셨던 것이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시군 했다. "야 야! 간부고 뭐고 내 딸들은 절대 간부에게 시집 보내고 싶지 않다!" 고을에서 미인 소리 듣던 엄마는 간부 남편을 만나 좋겠다며 모두 부러워했다 한다. 하지만 실제 살아보니 살얼음판도 이런 살얼음판이 없다는 것이다. 간부로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지기만 하면 그만큼 아픔도 크다는 것이다. 패가망신 정도가 아니라 처형되거나 유배 보내는 정도는 본인과 그 가족에게까지 미쳐 온 가족이 망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날수록 그 불안감은 더욱 더 커져만 간다. 이런 상황은 김일성 때인데 70년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은 최근 탈북한 고위간부들의 일치한 증언이다. 공산 종주국 소련에서 시작된 가혹한 숙청은 공산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 본능은 숙청이라 할 수 있다. 공산 혁명 초기 유산자에 대한 숙청이 끝나면 자기들끼리 숙청이 진행된다. 경쟁자들을 제거하여 유일 수령화, 신격화까지 되면 끝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숙청은 한도 끝도 없다. 이제는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에 가혹한 죽음을 맞을 정도이다. 수령 김정은이 참가한 회의 때 건성건성 박수 쳤다고 고모부 장성택, 또 졸았다고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 현영철이 고사총으로 박살이 난 것이 대표적이다.

아빠는 남로당 간부로서 6·25 전쟁 때 월북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하는 인민군 6사(방호산 사단장)를 따라 북으로 향했다. 월북 과정은 정말 형언할 수 없다고 한다. 인민군은 얼마나 냉정한지 같은 공산당임에도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믿을 데는 인민군밖에 없는데 이럴 수가 있나 참 막막했다고 한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그런 천대와 억울함 속에서도 인민군 뒤를 멀리서 따라갔다고 한다. 하도 따라오니 인민군이 선을 베풀며 받아들인 대가는 걷지 못하는 군관을 들것에 들고 가는 것이다. 맨 몸으로 행군하기도 벅찬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태백산맥을 거쳐 자강도 희천까지 가는 길에 고생은 말할 것도 없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진격을 따라 1·4후퇴 때는 정치 공작대로 서울까지 되돌아오기도 했다. 여기까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정전이 되자 남로당에 대한 탄압이 가장 거세진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과 이승엽 등 월북한 쟁쟁한 인사들이 줄줄이 숙청된다. 그 중 박헌영을 미 제국주의 간첩으로 처형함에 대해서는 참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박헌영 자신도 '나는 미제 간첩'으로 공표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터무니 없는 죄명임은 세상이 알 것이란 자신감이다. 하지만 법치가 꼬물도 있지 않은 공산국에서는 그게 위력한 증거로 된다. 남로당 간부였던 아빠는 그래도 박헌영 직계가 아니어서 살아남았다.

남로당 간부 숙청에 이어 허가이를 위수로 한 소련파가 거세된다. 그 다음은 1956년 8월 당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을 위수한 연안파가 제거된다. 내가 태어난 다음 해인 1958년에는 인민군 내에서 숙청이 대대적으로 일어난다. 가장 젊고 학력과 경력이 낮은 김일성이지만 실권을 쥐는 계기가 되었다.

숙청된 이들은 이들이 아니면 김일성 정권을 수립할 수 없었던 일등 공신들이다. 하지만 권력 쟁취 앞에서는 그게 오히려 독이 되는 꼴이다. 본래 인간의 나쁜 속성, 정치의 속성이 그런데다가 공산 정치란 환경에서 더욱 노골화된 것이다.

이런 거세찬 풍랑 속에 남(南) 출신들이 숨통이 트인 사건이 일어난다. 남조선으로부터 온 1960년 4·19 봉기였다. 적화통일 위해 부랴부랴 남 출신들을 불러들이게 된다. 아빠는 일약 사리원 공산대학으로 소환이 된다. 하지만 너무 잘난 남 출신이기에 시기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아빠는 공산대학 축구선수였다. 그리고 연설도 참 잘했다고 한다. 잘 생긴 외모에 머리도 좋아 인기였다고 한다. 한 가지 실례를 든다. 당시는 영화나 연극을 보려면 인산인해로 들어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만은 공산대학 학생이지만 재치 있게 들어갔다고 한다. 도 간부들이 들어갈 때 뒤에 태연하게 서서 따라 들어간다는 것이다. 외모가 준수한 아빠를 도 간부로 인정된 덕분이라는 것이다. 한편 여학생들에게도 인기였다고 한다. 6·25 전쟁 시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에 그 인기는 더해졌다. 소독(蘇獨) 전쟁에서 정말 많이 죽은 남자들 때문에 소련에서도 그랬다.

공산주의는 참 이상한 것이 있다. 본능과의 싸움인 것이다. 그 일환의 하나가 <부화> 투쟁이다. 연애를 간첩 잡듯 했다. 여자에게 인기였던 아빠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에 걸렸다. 당시 장가를 가 맏아들인 나와 여동생이 있을 때이지만 그래도 걸렸다. 그 처벌로 사리원 공산대학에서 쫓겨나 혁명화 노동계급화를 위해 시골로 추방되었다.

추방되어 산골에 갔지만 엄마는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여자 건으로 처벌되었으면 여자로서 질투가 났겠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정치적 처벌이었으면 온 가족이 망할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앙당에서 아빠를 대남공작원으로 쓰려고 공산대학에 찾아왔었다고 한다. 실제로 작은 아버지뻘 되는 분은 대남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 다행히도 죽지 않고 귀환하여 추후 중앙당 3호청사 과에 당 비서였다. 아빠는 마침 추방되어 갔기에 대남공작원으로 가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갔더라면 생사를 알 수가 없었을 뻔했다.

잡혔으면 역적 가족이고 죽었으면 열사가족이라 하지만 가장을 잃는다. 한 아내로서 한 엄마로서 훈장보다도 평안을 더 추구한다. 아무튼 엄마는 추방된 것을 다행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리원에서 추방되어 간 곳이 황해북도 곡산군 사현리이다.

내가 태어나 기억나는 것은 여기이다. 훗날 아빠가 처벌이 회복되어 리 간부로 이사갈 때 지하리라는 역전에서 난생 처음 기차를 탔다고 좋아했다. 사실은 태어난 황해북도 서훙군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사리원에서 살았지만 그것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이팝에 흙먼지 사건은 곡산군 사현리에서이다. 아마 다섯 살 되던 1962년이라고 기억된다. 흙벽을 친 아빠의 울분 한 가지를 말하고 이번 글은 마치려 한다.

아빠의 울분은 <태백산>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한편 공산화된 베트남에서도 잘 증명되고 있다. 태백산 영화에서 보면 적화된 남한 마을에 실권은 남로당이 아니라 북한에서 온 간부들이다. 공산화된 남베트남에서도 베트공보다 북베트남 공산당이 실권을 쥐고 적지에서 목숨 걸고 싸운 남베트공들을 다 청산한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리, 군산 감옥을 거치면서 1946년부터 남로당원이 되어 사선을 넘은 아빠이다. 하지만 북한에 올라가 보니 남 출신들을 간첩 취급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이다. 사소한 트집이 잡히면 청산 우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공산 혁명 동지로서 이렇게 은혜와 의리가 없이 냉정할 수 있는가이다.

평시 술 담배를 안 하는 정숙한 편의 아빠이다. 하지만 한가한 명절을 맞아 추방된 산골의 초가집 흙벽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울분이 차올라 벽을 치신 것이다. 먹을 것밖에 모르는 어린 나는 이팝에 흙이 묻은 것만 아까워했고. 아무튼 우리 엄마가 흔히 하시던 것처럼 살아나 이 글을 쓰는 것만도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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