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데 목숨 건 조선조 정치의 一例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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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仁祖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定遠君의 장자였다. 생모는 啓運宮 具씨.
   인조는 「私廟에 전례를 거행할 때 祭文의 앞머리 말에 生父를 무엇이라 부르느냐」로 고민했다. 왕이 된 아들이 왕이 아닌 아버지를 私的으로 제사지낼 때의 호칭문제였다. 李元翼과 鄭昌衍은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칭하되 전하가 말할 때는 정원군을 皇考라 부르지 말고 考라고만 할 것이며 전하를 孝子라고 하지 말고 孝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예학에 밝은 장령 金長生이 상소하여 「제왕의 예는 계통보다 더 엄한 것이 없으니 형으로써 아우의 뒤를 잇거나 숙부로써 조카의 뒤를 잇는 경우에도 아우와 조카를 父子의 도리로써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인조가 왕이 아닌 生父를 아버지로 대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인조는 「이렇게 되면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만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화를 내면서 金長生의 주장을 무시했다. 인조가 私廟에 참례하고 齋所에서 하룻밤을 지내니 사헌부에서 들고 일어났다. 「여염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일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정통에서 빼버리고 인조를 바로 할아버지인 선조로 연결시키려하다가 이런 예학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前정권의 정통성을 다 부정해버리니 그 정부가 우리 현대사에서 孤兒가 되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왕권의 정통론, 법통론으로 논한다면 할아버지인 선조가 아버지가 되고 生父인 정원군은 아버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과거의 실존을 애써 무시하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종묘사직의 법적인 정통성과 인간도리로서의 父子간 의리 중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인조의 生母 계운궁 具씨가 죽자 喪服논쟁이 생겼다. 친부모가 죽으면 아들이 3년상을 치러야 하는 것은 상식인데, 문제는 인조가 임금이 되었고 선조를 바로 잇는 임금으로 행세하려면 선조의 부인들, 즉 할머니들을 어머니로 대우해주어야 하므로 生母인 계운궁 구씨가 법통상으로는 어머니가 아니란 점이었다.
  
   社稷의 법통상으로는 할아버지인 宣祖가 아버지, 할머니인 선조의 부인들이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 역시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변칙이다. 영의정 이원익 등은 인조가 3년상을 치러선 안되고 不杖期, 즉 지팡이를 짚지말고 1년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부제학 崔鳴吉, 그리고 부원군 李貴는 「廢主, 즉 광해군은 어미를 무시했는데 전하는 아비를 무시하란 말인가, 조정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거의가 아비를 무시하는 자들이다」고 반발한다. 인조는 이귀와 최명길의 편을 들어 3년상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선조는 조부이지만 아버지가 되는 도리가 있고, 전하께서는 손자이지만 아들이 되는 도리가 있다」고 하면서 「私親, 즉 사사로운 부모를 위해서 3년상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자신의 뜻을 굽혀서 신하들이 하라는대로 기년상, 즉 1년상을 하기로 하는데 喪杖, 즉 지팡이를 짚고 삼베 옷을 입는 이른바 杖期로 하고 싶다고 한다. 신하들은 지팡이를 짚는다는 전례가 고전에 없다면서 이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인조는 이 반대를 누르고 장기를 강행했다.
  
   다음은 누가 상주가 되는가인데 신하들은 다른 집안의 양자로 들어간 인조의 동생 능원군을, 그 양자를 파하고 宗系를 잇도록 한 뒤 상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이 주장도 누르고 자신이 상주의 예를 갖춘다. 대학생 李行進 등이 상소했다. 「情이란 것은 인심의 사사로운 면이고 예란 것은 天理의 공정한 것이다. 정을 억제하고 예를 따르며 가벼운 것을 버리고 중한 것을 따른 연후에야 인심이 합치되고 천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인조한테 상주됨을 거두라고 맹공한다.
  
  인조는 양보하여 능원군이 상주를 攝行, 즉 대리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도 신하들은 반대하여 능원군의 양자를 파하고 다시 원래의 宗系로 돌린 다음에 상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인조는 이 주장에 결국 굽히고 만다. 그런데 인조의 3년상에 찬성했던 이귀가 다수 신하들의 부장기론을 비판하고 나서자 조정은 다시 한번 논쟁의 폭풍속으로 들어갔다. 영의정 이원익은 이귀의 비판에 발끈하여 도성을 나가 사의를 표하고 좌의정 尹昉 우의정 申欽도 사직할 뜻을 비쳤다.
  
   사헌부 사간원, 즉 兩司는 이귀의 삭탈관직을 요구한다. 인조는 이귀를 옹호한다. 최명길도 이귀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조정에 가득한 名流들이 無父의 죄에 빠지고 말았다」고 신랄하게 공격한다. 대다수 신하들은 인조가 이귀와 최명길의 편을 드는 데 대하여 극렬하게 성토한다.
   도승지 鄭蘊은 이런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이 독주한 결과 원로는 이미 지위를 버리고 산야의 사람이 되었으며 좌우 兩相도 사퇴할 뜻을 품고 있고 臺閣은 기세가 저상되어 있고 신료들은 해이해 있고 사대부는 서로 만나면 근심스런 안색을 하고 있고 閭巷의 쑥덕이는 말들은 함부로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지가 있다>
  
   返魂, 즉 죽은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의식을 어디서 치를 것인가에 대해서도 임금과 신하가 대결한다. 인조는 인경궁에서 하려고 하고 신하들은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았으니 궁에서 返魂式을 올려선 안된다고 반대하나 인조는 이를 무시했다. 인조가 발인식에서 어디까지 따라갈 것인가가 논쟁점이 되었다. 인조는 산능, 즉 산소에까지 배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신하들은 대궐문 안에서 곡송, 즉 곡을 하고 영구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인조가 한 수 양보하여 교외까지 따라가서 하겠다고 하자 신하들은 이에 반대하고 궐문 밖에서 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했다.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교외까지 따라갔다.
  
   이런 논쟁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느낌이 든다.
   첫째, 당시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상당히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직책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사소한 것 같이 보이는 복상문제로 온 조정이 영일이 없고 결국 이 논쟁은 반대자를 처벌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넷째, 이런 논쟁은 당시 선비 정치인들에게는 참으로 신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패거리를 만들어 정교한 이론을 전개하고 왕에게 대어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보람차고 정의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평소 연마해온 禮學과 朱子學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는 기회도 되었으니까.
  
   그런데 또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논쟁이 과연 국가의 번영과 백성들의 행복과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 또는 군사정책을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닌 사소한 초상절차에 대한 지리한 말싸움이 과연 政의 시간을 빼앗을 만큼 가치있는 것이었을까 하는 회의가 생기지 않는가.
  
   당시 신하들은 말할 것이다. 왜 이것이 사소한 것이냐고. 종묘 사직에 관한 것이고 임금의 公私행동의 구별에 대한 논쟁이며 조정의 정통론과 관계되는 논쟁인데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그런 면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일단 주자학의 정치이론에 빠져버리면 지금 우리가 구차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그들에게는 重且大한 문제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정교한 예의범절을 규정하여 이에 반하는 사람은 비록 임금이라도 혼을 내는 이런 꽉 짜인 사회에서는 활달한 기상이 일어날 수가 없고 창조적인 작업이나 개혁이 성공할 수가 없다. 이미 규정된 법도에서 한 치를 벗어나기도 어려운 판에 어떻게 판을 바꾸고 뜯어고치는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결국 조선왕조에서 말하는 臣權이니 언론의 자유란 것은 국가의 나아갈 길이란 본질적인 문제로 다투는 그런 것이 아니고 백성의 삶과는 유리된 채 벌이는 지배층 내부의 언론자유요 논쟁인 점이 강했다.
  
   대사헌 李弘胄는 인조7년3월의 箚子(차자. 간단한 상소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국가가 변란을 겪은 나머지 사기가 시들어져서 이익을 앞세우고 의리를 뒤로 하는 의논과 公私를 등지고 자기 黨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세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있는 자는 나라 일에는 뜻이 없어 오직 녹봉이나 유지하고 몸이나 지키려 하고 있으며 파직을 당한 자는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풀어보려고 틈만 노리고 있습니다>
   선비들이 정교한 논리를 만들어 싸우는데 그것이 결국은 黨派的 이해관계 때문이란 지적이다.
  
   인조는 8년8월 주강, 즉 낮에 하는 공부시간에 강사 김기종과 이런 문답을 주고받는다.
   <예로부터 붕당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옛날의 붕당은 선한 자는 군자의 당이 되고 악한 자는 소인의 당이 되었는데 지금은 이와 다르니 진실로 개탄스럽다. 반드시 어진 임금이 나와야만이 이런 폐단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나같이 용렬하고 아둔한 사람이야 어떻게 조정에서 붕당이 제거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인조는 朱子를 비판하면서까지 朋黨을 비판한다.
  <黨이란 그 글자가 비록 朱子의 말일지라도 나는 듣기 싫다. 朱子가 한 말은 黨을 비호하려고 한 말은 아닐지라도 나는 朱子가 실언했다고 생각한다. 신하는 임금이 옳은 길을 가도록 인도할 뿐이다. 임금을 끌어들여 黨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무리를 지을 뿐이지 당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朱子는 대현인인데 공자가 말한 뜻을 어찌 모르고 감히 임금을 끌어들여서 당을 하라고 時相에게 권면했겠는가.>
  
   위에 소개한 정치문화, 사소한 데 집착하여 남의 약점을 공격하고 목숨을 거는 정치행태, 그 원인은 자주국방을 안하고 안보를 대국에 맡겨버리는 사대주의를 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정치의 주제를 놓쳐버린 부작용은 사소한 데 목숨거는 치사하고 졸렬하며 속좁은 정치행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정치가 이런 미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출처 :
[ 2003-01-23, 23: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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