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war, No nation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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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과정에서 對프랑스 결전은 왜 불가피했던가
  
   오늘은 독일의 통일과정이란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국토통일로 향해서 가야 하는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후 유럽에선 4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 1854년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와 오토만 투르크가 싸운 전쟁인데 영국, 프랑스, 사르디니아(현재의 이탈리아)가 투르크편을 들었다. 북이탈리아의 왕국 사라디니아의 참전은 이탈리아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 위함이었다. 1859년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사르디니아가 오스트리아를 함정에 빠뜨려 전쟁에 끌어들이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대해서 선전을 포고했다. 프랑스와 사르디니아는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다. 사르디니아는 롬바르디아를 얻음으로써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2년 뒤 사라디니아는 이탈리아를 1천5백년만에 통일했다. 1864년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와중에 있던 덴마크가 독일인이 살고 있던 독일연방의 일원인 슐레스비히를 합병하려고 했다. 독일연방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대표로 하여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게 했다.
  
  덴마크는 패전했다. 프러시아는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스타인을 戰利品으로 빼앗아 합병했다. 그 뒤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주둔군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프러시아의 외교정책을 지휘하고 있던 비스마르크 수상은 분쟁이 성숙되도록 방치했다. 그는 독일연방의 盟主를 자처해온 오스트리아를 꺾어야 독일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일 대 일로 대결하면 승산은 확실했다. 문제는 列强의 간섭이었다. 다행히 영국은 대륙의 문제에 대한 불간섭 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러시아는 내부 개혁문제로 시끄러운 데다가 오스트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이유가 있었다. 러시아 - 오토만 투르크 전쟁, 흔히 크리미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오토만 투르크 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프러시아는 폴란드에서 反러시아 봉기가 일어났을 때 러시아 정부 편을 들어주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 치하에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원정의 실패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최근에 통일한 이탈리아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는 베니스를 이탈리아에 돌려주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처럼 열강이 불간섭을 취하도록 해놓은 뒤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 안에서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켜갔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에 보통선거제에 의한 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 독일사람들은 기존의 연방 시스템을 개혁하길 원하고 있다고 비스마르크는 계산했다. 독일연방을 독일인민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비스마르크의 공세는 오스트리아를 수구세력으로 모는 전략이었다.
  
   덴마크 주둔지에서의 분쟁에 대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 의회에 이 문제를 상정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는 그런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고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던 홀스타인으로 쳐들어갔다. 오스트리아는 다른 독일연방국가들을 연합군으로 총동원하여 프러시아를 응징하려고 했다.
  
   그때 프러시아 군대는 몰트케 참모총장이 지휘하고 있었다. 몰트케는 근대 군사조직의 근간이 되는 참모본부 조직을 발명, 발전시킨 사람이다. 그는 신식 소총과 철도망을 활용하여 신속하게 부대를 동원, 배치함으로써 오스트리아軍을 사도와 결전에서 대패시켰다. 그 뒤 다른 중소 연방국가들을 패배시켰다. 7주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 후 프러시아는 말썽 많던 홀스타인뿐만 아니라 독일북쪽의 연방국가들 - 하노버, 낫소, 햇세-카셀, 프랑크푸르트를 합병하였다.
  
  이로써 독일연방은 해체되고 독일민족의 패권국가이던 오스트리아는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패전을 틈타서 베니스를 점령했다. 마인강 남쪽에 있는 舊독일연방 국가들 - 오스트리아, 바바리아, 바덴, 뷔텐베르그, 헷세-다름스타트는 아무런 조직을 만들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고립되었다.
  
   프러시아는 21개 北독일의 중소국가들을 끌어모아 북독일 연방을 창설하고 헌법을 기초했다. 이 연방의 왕은 프러시아왕이 겸하고 세습으로 하기로 했다. 북독일 연방은 상원과 하원을 두었다. 상원은 소속 국가 정부들을 대표하고 하원은 전체 인민들이 보통선거로 구성하도록 했다. 비스마르크는 민주주의 후진국인 독일에서 보통선거제를 실시하는 도박을 했다. 그때 유럽에선 프랑스만이 보통선거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국가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로 인상지어져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보통선거의 도입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北독일 연방의 창설을 승인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계급이 아니라 국가이익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를 혼란과 실망으로 빠뜨렸다. 국민국가를 만들어가는 역사적 단계에서는 계급이나 지역 이익보다도 국가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당시 독일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그런 역사인식에 투철했다고 볼 수 있다.
  프러시아가 독일의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는 데 대해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였다.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에옹 3세의 외교정책이 엉망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그의 멕시코 원정은 실패했다. 이탈리아가 남쪽에서 통일국가로 등장하는 것도 방치했다. 이제는 독일이 프러시아 중심으로 통일되려 하고 있었다.
  
  유럽대륙의 패권국가를 자처해온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외교전략은 독일을 수십 개 나라로 분열시켜놓고 조종하는 것이었다. 그 독일이 프러시아 중심으로 통일되면 유럽대륙에서 프랑스의 위치는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유럽의 패권을 사이에 둔 프랑스 - 프러시아의 결전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프러시아로서도 같은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러시아 중심의 북독일 연방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南독일의 여러 중소 국가들은 어차피 프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의 어느 한 대국한테 가서 붙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 독일 국가들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기를 꺾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긴장된 시기에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여왕을 해외로 쫒아버렸다. 과도정부는 호헨졸렌 王家의 프러시아왕 빌헤름 1세의 사촌인 레오폴드 왕자를 스페인왕으로 초대했다. 세번이나 호헨졸렌 왕가에선 이 초대를 거부했다. 외교술수의 鬼才인 비스마르크는 이 사건을 이용하기로 했다. 스페인측에 공작하여 네번째 초대장을 보내도록 했다.
  
   1870년7월2일 프랑스 정부는 레오폴드가 이 초청을 수락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프랑스 정부는 대사를 보내 프러시아 왕에게 이 초청장 수락에 대해서 항의하고 취소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프러시아 왕은 사촌으로 하여금 왕위 수락 결정을 취소하도록 했다. 이 단계에서 프랑스는 외교적 승리를 거둔 듯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여기서 프랑스 정부는 과욕을 부렸다. 프랑스 정부는 대사를 다시 프러시아 왕에게 파견하여 「앞으로 호헨졸렌 왕가는 스페인 왕좌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라는 약속을 받아오도록 시켰다. 프러시아 왕은 이 요구를 정중하게 거절하고는 대사와의 대화 내용을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보내주었다.
  
  프랑스와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이 전보를 읽어보고는 묘안을 생각해냈다. 이 전보를 축약하여 신문사에 제공했다. 독일인들이 읽어보면 자신들이 왕이 모욕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프랑스 사람들이 읽어보면 자신들의 대사가 무안을 당한 것으로 느끼게끔 교묘하게 조작, 편집된 것이었다.
  
  이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프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의 강경론자들이 전쟁을 요구하고 나섰다. 나폴레옹 3세는 내키지 않았지만 여론에 밀려 프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1870년7월19일의 일이었다. 이 전쟁에서도 비스마르크의 현란한 외교가 프랑스를 고립시켰다. 어떤 열강도 프랑스와 손잡고 프러시아와 싸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당시 전형적인 인기영합주의자인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적 모험에 의해서 유럽에서 인심을 잃고 있었다.
  
   무모한 멕시코 원정으로 영국을 긴장시켰다. 영국은 프랑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탈리아는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를 흡수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이 로마를 지켜주고 있던 프랑스 파견군이 독일과의 전선으로 이동하는 틈을 타서 로마를 점령해버렸다. 그러니 프랑스를 지원할 리가 없었다.
  
  러시아는 1856년 크리미아 전쟁을 종결하는 조약에서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 함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결정된 것을 이 기회에 무효화시켜버리려고 했다. 4년 전에 프러시아에게 패배한 오스트리아만이 프랑스와 손잡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도 프랑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사라디니아 왕국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 프랑스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무찔러 버린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南독일의 여러 중소 국가들도 프러시아 편을 들어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프랑스는 군사적으로도 프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970년9월2일 나폴레옹 3세가 이끌던 프랑스의 대군은 프랑스의 세단에서 프러시아 군대에 대패하고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이틀 뒤 파리에선 반란이 일어나 공화국을 선포했다. 프러시아와 남독일 연합군은 파리를 포위했다.
  
   1871년1월18일 비스마르크는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프러시아 왕 빌헤름 1세를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하고 대관식을 가졌다. 이 거울의 방은 한때 루이 14세가 독일 여러 나라들의 왕자들을 접견하던 방이기도 했다. 열흘 뒤 파리시민들은 문을 열고 항복했다. 독일 정부는 상대할 프랑스 정부를 구성해주어야 할 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측에 대해서 보통선거로써 제헌의회를 먼저 만들라고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또 전쟁배상금으로서 50억 달러어치의 프랑을 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 - 독일 접경지대에 있는 알사스 - 로렌 지역을 프러시아에 넘겨줄 것도 강제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독일어를 사용하고는 있었으나 프랑스인으로 살아온 역사적 경험으로 해서 스스로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선거에 의해서 구성된 프랑스 국회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약3분의 1로서 소수였다. 이들은 국회가 비스마르크가 요구하는 강화조건을 받아들이려는 데 불만이 많았다. 프랑스 국군이 붕괴한 뒤 파리를 넉달 동안 지켜낸 것은 이들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파리시청을 장악하고 1871년3월부터 5월까지 베르사이유 궁전에 본부를 둔 국회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공화파들이 설립한 혁명정부는 파리 콤뮨으로 불렸다. 이 파리 콤뮨에는 공산주의자들도 끼여 있었으나 대부분은 애국적이고 反독일적이고 反기득권층인 사회 저변층이었다. 이들의 도전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낀 부르좌 계층은 국회를 중심으로 뭉쳐 무자비한 보복살육을 전개했다. 파리콤뮨파 약33만 명이 조사를 받고 약3만8천 명이 구속되었고 약2만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프랑스의 제3공화국은 피바다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프러시아 - 프랑스 전쟁은 유럽의 정치지도를 바꾸고 프랑스의 내부질서를 흔들어놓았다. 외교의 鬼才 비스마르크와 전쟁의 鬼才 몰트케가 합작한 이 전쟁의 승리는 강력한 독일제국을 탄생시킴으로써 프랑스는 그 이후 유럽의 2등 국가로 밀려났다. 전쟁은 이처럼 역사의 흐름과 한 국가,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독일통일은 분열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승리였습니다. 독일민족의 우수성에서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와 폭발력을 두려워했던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을 수십 개의 나라들로 분열시켜놓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전통적으로 가깝게 된 것도 독일을 공통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지식층에는 또 프랑스의 선진된 문화와 사상에 대한 동경심이 많았다.
  독일통일 과정은 독일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에 대한 독일 지식인들의 자각과 계몽과 함께 이루어졌다. 독일철학자 J.G.피히테가 대표적인 독일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프러시아 예나 대학의 철학교수였다. 그는 개인이 가진 내면적인 정신은 그만의 도덕적 우주를 창조한다고 믿었다. 이는 개인주의 정신과 통하고 인간 주체성, 나아가서 한 국가의 자주성과 연결되는 논리였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을 환영했다. 많은 동시대 지식인들이 대혁명을 비판했지만 피히테는 이 혁명이 인간의 존엄성을 한 단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피히테는 또 루소가 정의한 국가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즉, 국가는 인민들의 주권적 의지(Sovereign Will)를 구현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권이라고 하면 「신성불가침의 지고(至高)한」이란 의미가 있다. 주체적 인간들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를 상정한 것이다. 그는 국가를 인류를 구제하는 수단으로 인식했다. 그는 또 개인의 주체성이 그의 도덕적 기반이 되듯이 한 민족의 정신은 독자적인 문화, 사상, 제도, 예술을 만들어내는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는 나폴레옹이 프러시아를 침략하자 더욱 독일민족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1808년 피히테는 프랑스 군대가 점령한 베를린에서 「독일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다. 이 연설을 통해서 피히테는 프랑스,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에 비해서 후진국 취급을 받고 있던 독일인, 독일정신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강조함으로써 독일 민족주의의 열정에 불을 붙였다. 피히테는 독일문화는 프랑스나 유럽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성숙하려면 자아를 발견해야 하듯이 민족이 성숙하려면 민족의 자아, 즉 독일정신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통일을 주도한 것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와 몰트케의 군대였지만 그 바탕이 된 것은 독일인들이 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족주의였고 이는 피히테 같은 애국적인 사상가들의 이념을 반영했다. 독일정신은 프랑스나 영국의 개인주의를 경멸하고 집단주의와 국가의 존엄성, 그리고 충성심을 美化했다.
  
  헤겔은 역사의 원동력을 설파했다. 인간의 논리와 윤리에는 구애되지 않는 독자적인 행동논리를 가진 역사의 정신과 힘을 그는 강조했다. 국가는 그러한 역사의 의지를 실천하는 도구였다. 독일통일기 지식인들은 이처럼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해가는 과정에서 자주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가치관을 찬양했던 것이다.
  
   피히테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란 철학자가 나타나 명상을 통한 자아 발견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에머슨은 자아 발견이 이 세상사물을 주체적으로 보는 관점을 확립시켜준다고 믿었다. 그는 그런 주체적인 관점을 미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연결시켰다. 즉, 유럽의 사생아가 아닌 유럽과는 전혀 별개의 개성과 운명을 지닌 나라로서의 미국과 미국민의 자주적인 철학을 확립한 것이다.
  
  피히테나 에머슨은 자아발견을 통한 인간 주체성의 확립과 국가의 건설과 통일, 그리고 자주성을 한 맥으로 관통하는 철학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개인과 국가를 하나의 논리로써 관통한 이런 철학은 국가건설, 통일, 그리고 통일전쟁을 뒷받침한 가치관이요 엘리트의 윤리요 시대정신이 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1854년의 크리미아 전쟁, 1859년의 이탈리아 전쟁, 1864년의 덴마크 전쟁, 1866년의 프러시아 - 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의 프랑스 - 프러시아 전쟁이란 다섯 번의 전쟁을 통해서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되었다. 전쟁을 매개체로 하여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유럽질서가 재편되었던 것이다. 혁명이 없는 곳에선 민주주의가 없고 전쟁이 없으면 근대국가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근대국민국가의 제일 조건이 자주국방력이기 때문이다. 프러시아가 독일을 통일해가는 과정에서 그 수단은 강력한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한 외교력이었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전쟁은 외교의 연장이고 외교는 전쟁의 연장이란 말이 정확하게 적용된 것이 독일통일 과정이었다.
  
  
출처 :
[ 2003-01-24, 19: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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