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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과 박정희
 박승환과 박정희
 
 박승환은 봉천항공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많은 만군내 조선 인 장교들을 만나 뜻을 확인하는 일을 계속했다. 아내 김순자는 '봉천 우리 집은 항상 조선인 장교들로 들끓었다'고 회고했다.
 
 '그분은 양복이나 양말이 항상 한 벌, 한 켤레밖에 없었습니다. 친 구, 후배들에게 다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귀찮아서 양 말이 없다고 말한 뒤 나중에 하나 남은 양말을 내놓았더니 '이 양말에 는 내발만 들어가고 그 사람 발은 안들어가는가'하면서 막 나무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동지가 된 만군장교들은 문용채(봉천군관 5기생·육군소장예 편) 최남근(봉천군관 6기생·간도특설대 근무·해방 뒤 4연대장) 이상 렬(봉천군관 7기·해군대령 예편) 최창륜(신경 만주군관 1기) 이기건 (만주군관 1기) 박임항(만주군관 1기) 김백일(봉천군관 5기) 박준호 (만군항공장교) 박동균(만군 군의관·육군소장 예편) 등 수십명이었다. 박승환은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1943년쯤 꾀병을 냈다. 장인 김태덕은 만군과 일본 관동군 수뇌부에 인맥이 넓어 사위가 장기휴가 를 받도록 해주었다.
 
 박승환은 장교복장인 채로 병가를 얻어 고향인 파주로 왔다. 그는 여운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공작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중학생이던 조카 박명근(전 국회의원)이 심부름을 자주 했다고 한다. 삼촌이 하나씩, 둘씩 가져오는 수류탄을 보관하는 일도 맡았다. 그는 지붕밑 천장속에 모아둔 수류탄이 떨어질까 불안했다. 박명근은 닭장의 땅바닥에 구멍을 파고 그 속에 등겨를 채워 넣고는 수류탄 70여개 를 파묻었다. 박승환이 여운형의 밀명을 받아 중국 팔로군 지역으로 잠입하여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을 처음 만나고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아내 김순자도 밀서를 전달하고 사람을 만나고 하는 데 있어서는 동지나 다름이 없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김순자 할머니(75세)는 '홍사익 장군도 남편의 비밀조직 활동을 엄호해주었다'고 기억한다. 홍사익은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서 일본육사 26기 출신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육사선배인 김광서 중위, 동기생 이청천 중위, 1년 후배인 이종혁 중 위가 일군부대에서 탈출하여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사익은 번민하다가 일군에 남아 있기로 했는데 항상 죄책감 과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약 8년간 만주와 상해에서 근무하면서 우리 동포와 조선인 장교들을 접촉할 시간이 많았다. 홍사익이 그들을 감싸주었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확인되고 있다. 1944년 3 월 홍사익은 관동군 군사학교 부교장에서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보되었다.
 
 김순자 할머니는 '홍사익 소장께서 필리핀으로 떠날 때 아버님, 남 편, 그리고 제가 봉천역에 전송나갔지요. 홍장군은 남편의 손을 잡더 니 '자네에게 모든 것을 부탁하네'라고 말하면서 등을 두드려주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고 했다. 박정희에게는 대구사범 선배이기도 한 송남헌(김규식의 비서실장 역임)은 '해방3년사'란 저서에서 이렇게 썼 다.
 
 '여운형은 1943년에 출옥한 직후 해방에 대비한 국내외 조직규합에 나서 박승환을 통해 만군내 조선인 장교들을 포섭하도록 하는 한편 1944 년 8월10일에는 조동우등 국내외 노장 사회주의 일파와 함께 조선건국 동맹을 조직했다. 여운형과 박승환의 국내진공 계획에 주동적으로 참 여했던 장교들 가운데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다.'.
 
 박승환이 약 7년간 닦아놓은 인맥을 중심으로 조직에 들어간 것은 1945년 4월 봉천에서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박승환, 이상렬, 박준호, 최창륜, 문용채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산하 조직이란 뜻에서 '조선건국 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란 명칭에 합의하였다. 박준호의 기억에 따 르면 이 조직의 대표는 박승환, 연락책은 금주 주둔 만군헌병대 문용 채 상위, 군관학교출신 장교 담당은 최창륜, 재정은 김순자의 형부인 평양갑부 최기영이었다.
 
 이들은 지역별로, 또 기수별로 조직대상 장교들을 추리게 되었다. 박준호는 생전에 기자에게 '신경 비행대에 있던 최창륜이 1기 후배인 박정희를 2기생 대표로 추천한 것으로 기억된다. 박정희와의 연락은 그가 맡았을 것이다. 박승환이 해방 전에 박정희를 직접 만난 적은 없 다고 본다'는 증언을 남겼다. 간도 용정 광명중학교 출신의 쾌남아 최 창륜은 생도시절에는 후배 박정희를 구타하여 눈물을 맺히게 한 적도 있었으나 졸업한 뒤에는 친해졌다. 연령초과인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에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강재호 상위는 간도특설대 에 있었다.
 
 간도특설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부대였지만 부대장을 제외하 고는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으므로 국내진공작전을 위해선 가장 중요 한 병력이었다. 이 부대에선 최남근, 강재호 두 장교가 버티고 있으면 서 박승환과 완전히 호흡을 같이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공작을 할 필 요가 없었다. 박정희가 강재호, 최창륜 같은 핵심 장교들과 믿고 지내 는 사이였고 그의 평소 성향이 민족적이었다는 점들로 미루어볼 때 '만주분맹'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박정희는 주 동적 참여자나 활동가는 아니었다. 박정희가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여 운형계열에 해방 전부터 동조했다는 것은 해방 후 그에게 닥쳐올 험난 한 역정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순자 할머니의 기억에 따르면 박승환은 1945년 여름 재차 중국전 선을 뚫고 연안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을 만나고 왔다고 한다. 박승환은 봉천으로 돌아오자마자 만군내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 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더니 여운형에게 보고차 아내와 함께 서울로 갔다. 박승환은 여운형에게 '이제 곧 일본이 망할 것 같다. 시간이 촉 박하니 국내, 연안, 중경의 민족지도자들이 중국에서 만나 거사 날짜 를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여운형에게 중국행을 권유했다는 것이 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고 소련이 만주로 진격 하기 시작한 지 며칠 뒤 박승환은 '일본이 항복을 결정했다'는 극비정 보를 입수한다. 8월14일 박승환은 아내와 함께 서울역에서 봉천행 특 급 '히카리'호에 올랐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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