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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분열
 야권 분열
 
 1963년 7월5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윤보선은 야당 통합에 의한 단일 후보 실현을 위해서 후보를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민정당, 민우당, 신정당 3야당의 통합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8월 1일 3당 대표들 400여명은 서울시민회관에서 통합야당 '국민의 당'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
 
 8월14일 박정희 의장은 선거날짜를 확정, 발표했다. 5대 대통령 선거는 오는 10월15일, 6대 국회의원 선거는 11월26일. 8월26일 민 정당은 최고위원-기획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국민의 당에 통합할 것 인가 말것인가로 격론을 벌였다. 유진산이 이끄는 통합파와 김도연의 반대파는 종일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유진산, 김 도연, 윤보선은 모두 민주당 구파출신이었다. 윤보선은 신상발언을 통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행동을 통일해야 합니다. 가려면 다같이 가고 남으려면 다같이 남아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대통령 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동의한다면 김도연씨를 통합야당의 대통령 후보 로 밀겠습니다.'.
 
 이로써 당세가 가장 강한 민정당의 태도는 일단 정리되었다. 문 제는 구민주당 신파로 구성된 재건 민주당의 태도였다. 야당 통합에 냉담하던 민주당은 신정당의 허정을 대통령 후보로 밀면서 3당 통합 운동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신정당의 허정과 민정당의 김도연 두 사람을 두고 재야 지도자들이 일종의 모의투표를 했는데 9대 2로 허정이 이겼다. 이렇게 되니 민정당에선 윤보선에게 다시 출마하라 는 압력이 가해졌다.
 
 윤보선은 9월4일 민정당 간부회의에서 9일 전에 있었던 자신의 대통령 사퇴 선언을 취소하고 통합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김도연 대신 자신이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번의에 번의를 거듭한 것은 박정희 만이 아니었다. 9월5일 국민의 당 창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서울 시민회관에서 803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다수파인 민정당 계열은 후보선출 투표를, 반대파는 사전조정을 주장 하면서 격돌하여 대회장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다음날 대회도 후보 선출에 실패했다. 법무장관 출신의 최고위원 이인은 마이크를 잡더 니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당 모습이 이렇게 된 마당에 본인은 책임을 지고 최고위 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국민의 당에서도 물러나겠습니다. 이런 추잡한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박정희 의장에게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경고해드립니다.'.
 
 9월8일에 열린 지명대회도 투표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민정당의 통합파를 이끌면서 윤보선의 후보지명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온 유진산이 안국동의 윤보선 집을 찾아와서 이렇게 간청 했다.
 
 '대국적 견지에서 선생님께서 대통령 후보를 허정 선생에게 양보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때 윤보선은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회고록에서 인용).
 
 <나에게 묘한 말이 들려왔다. 허정씨가 대통령이 되고 유진산씨 가 국무총리를 하기로 묵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한둘도 아닌 믿을 만한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이 들려왔다. 나는 그가 변절 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야당 분열의 불씨가 되는 윤보선과 유진산의 상호불신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9월10일 비민정당계에서 민정당측과 상의없이 선거관리위원회에 '국민의 당' 창당등록신고서를 제출했다. 민정당도 이틀뒤 전당대회를 열고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로 써 야권통합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이틀 뒤(9월14일) 국민의 당은 전당대회에서 허정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대통령 선거일을 한 달 앞둔 9월15일 모두 일곱 명의 후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했다. 기호순으로 신흥당의 장이석, 자민당의 송요찬, 공화당의 박정희, 추풍회의 오재영, 민정당의 윤보선, 국민의 당의 허정, 정민회의 변영태. 송요찬은 옥중에서 출마했다.
 
 후보 등록 이후 박정희 의장이 8월30일자로 공화당에 입당하고 다음날 총재에 취임하면서 대통령 후보를 수락한 것이 위법이란 시 비가 일어났다. 박정희가 5·16혁명 직후 헌법을 정지시키고 공포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최고회의가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모든 권한 을 대행한다고 되어 있었다. 구국회법 19조는 국회의장이 정당에 적을 두어선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회의장의 권한을 인 수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공화당에 가입한 것은 위법이란 주장 이었다.
 
 최고회의측도 이 점을 뒤늦게 알고는 1963년 9월3일 서둘러 비상조치법을 고쳐 '최고회의 의장은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가입할 수 있다'고 했다. 공화당은 박정희가 실제로 공화당 당적을 가지게 된 날짜는 심사 끝에 당원명부에 이름이 오른 9월4일이라 주장했다.
 
 이 주장이 맞다면 공화당은 당원도 아닌 상태의 사람을 대통령 후보와 총재로 추대했다는 궁색한 이야기가 된다.
 
 이 법률적인 쟁점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이 재건 민주당(당수 박순천)대변인 김대중 현 대통령이었다. 이 법률문제를 놓고 윤보선 의 민정당에선 사광욱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박정희 후보등 록 취소 행정소송 및 효력정지를 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여 선거의 큰 쟁점으로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근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 '일설에 의하면 이것이 박대통령이 나를 평생 미워하게 된 최초의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고 썼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기자) (이동욱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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