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꿀돼지
한 사회의 편견을 깨뜨리기는 몸에 붙은 큰 혹을 떼어내기만큼 힘들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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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조상들은 돼지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답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돼지를 '돝'이라고 했었지요. 용비어천가 65장에 보면
  --뒷동산에서 돝을 기르셔서-
  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이 '돝'에다가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뜻으로 송아지, 강아지, 망아지처럼 새끼 짐승에게 쓰는 '-아지'를 붙인 게 '도야지'였습니다.
  
   도야지의 원래 뜻은 새끼 돼지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어느새 다 큰 돼지 이름인 돝은 없어지고 도야지만 쓰이다가, 이를 다시 줄여 돼지라는 말만 쓰게 된 것이지요. 지금은 윷놀이의 '도개걸윷모'에서 '도'로 그 흔적이 남아 있지요.
  이 '도'를 '또'라고 발음하는 지방도 많습니다. 윷놀이에서도 보듯이, 우리 조상들은 아득한 옛날에는 개보다 돼지를 더 친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돼지꿈 꾼 날은 복권을 안 사면 왠지 굴러 들어온 큰 복을 놓친 것만 같은 아쉬운 생각이 들잖아요.
  
   한자, 집 가(家)자를 주목해 볼만합니다. 지붕 아래 돼지 시(豕) 자가 들어 있잖아요? 중국에는 한 지붕 아래서 사람 거처하는 바로 옆에 돼지를 키우는 일이 없었답니다. 이건 틀림없이 우리 먼 조상인 동이족(東夷族)에서 나왔을 겁니다. 조선의 북부 지방과 만주 지역에는 돼지를 방과 부엌 사이서 키웠거든요. 밥 먹을 때도 서로 빤히 쳐다보았고 잠잘 때도 서로 인사를 하고 잤답니다.
   '도야지야, 잘 자, 좋은 꿈꾸고.'
   '예, 잘 주무세요, 돼지꿈 꾸시고, 꿀꿀.'
  
   아주 빈번히 쓰이는 글자가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그대로 나타낸 걸 보아, 어쩌면 한자가 원래는 우리 민족이 고조선 시대에 만든 글자일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갑골 문자 이전의 문자를 발견하고서는 중국이 절대 한족 이외에는 안 보여 준다고 하는데, 거기에 혹시 우리 가슴을 설레는 비밀이 들어있지는 않을까요?
  
   자, 그럼 이쯤하고 돼지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게요. 이 이야기는 경북 선산에서 있었던 실화랍니다. 한 3백년 전의 일이지요. 효종 때쯤 되었을 거라고 해요.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랍니다.
  
   돼지 어미가 새끼를 한꺼번에 열 세 마리나 낳은 적이 있었습니다. 돼지는 최고로 많이 낳으면 스무 마리도 낳는답니다.
  다행히 마음씨 너그러운 아지매가 산파가 되었던지라, 얼른 첫물과 끝물에서 한 마리씩 빼돌렸습니다. 열 마리까지는 잘 키우지만, 그 이상이 되면 어미돼지가 육중한 엉덩이로 깔아서 죽이는 수가 있거든요. 나머지 돼지 새끼들을 튼튼히 키우기 위해서랍니다.
  
   자연에서는 삶과 죽음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이므로 이를 잔인하다고 괴성을 지를 필요는 없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동물의 선택은 번개같지만, 그것은 인간이 수십 년 생각한 것보다 정확하답니다.
  
   일단 젖을 물면 그 새끼는 삽니다. 돼지는 매우 섬세하여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반드시 자기가 맨 처음 물었던 젖꼭지만 빠니까요. 이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답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난 돼지가 어리둥절 아직 젖꼭지를 못 찾고 있을 때, 아지매가 재빨리 첫물이 물었던 젖꼭지를 준비해 둔 물로 싹싹 씻고 그 입에 물려주었습니다.
   '쫄쫄, 아 맛있어!'
  
   아참, 새끼 돼지가 얼마나 깜찍한지 말하지 않았군요. 어미돼지가 새끼를 낳을 즈음에 세심한 주인은 돼지우리를 아주 청결하게 청소하고 짚을 잘 골라서 깔아 준답니다. 사람의 안방만큼 깨끗하지요.
  
   6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는 사람도 안방에서 아기를 낳을 때 짚을 썼답니다. 좋은 짚을 골라 정갈하게 손질하고 이를 다시 입에 깨끗한 물을 머금고 푹푹 품어서 먼지 하나 없게 했답니다. 포르말린으로 병균의 내성만 키우는 현대 병원보다 사실은 훨씬 위생적이었지요.
  
   이런 깨끗한 돼지우리 밖에서 몰래 짚더미에 숨어서 눈만 반짝반짝 내놓고 돼지 낳는 걸 보면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답니다. 텔레비전의 동물 세계를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지요. 특히 새끼 돼지 몸 전체가 반들반들 윤이 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손이 간질간질해집니다.
   '아유, 귀여워. 깜찍해. 이뻐. 사랑스러워. 한 번 만져 봤으면! 쓰다듬어 봤으면! 안아 봤으면!'
  
   아지매도 마침 애기 낳은 지 몇 달 안 되어 첫물과 끝물 돼지 두 마리를 젖을 물려 키웠답니다. 첫물은 왼쪽 젖, 끝물은 오른 젖, 사람 아기는 양쪽 젖 다 아무 거나.
  
   그런데, 가난한 그 옛날에 젖이 제대로 나왔겠어요? 결국 작은 첫물은 일 주일도 안 되어 죽었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돼지 새끼인데 심청이 아버지처럼 동네 젖을 얻어 먹일 수는 없었지요. 미음도 먹이고 숭늉도 먹이고 해서 돼지와 아기는 포동포동 살이 찐 옴포동이는 못 됐지만, 그런 대로 무럭무럭 잘 자랐습니다.
  
   돼지가 젖을 뗄 무렵 장에 가서 다 팔고 한 마리만 남겼습니다. 안방에서 키운 돼지와 합하면 두 마리였군요. 물론 어미와 합하면 세 마리였구요.
  
   처음에는 어미돼지가 깜빡 자기 새끼인 줄도 모르고 죽도 못 먹게 했습니다. 젖은 물 생각도, 물릴 생각도 전혀 않았습니다. 한 마리 남은 돼지 새끼는 웬 떡이냐며 잘 나오지 않던 젖이 마구 쏟아져 나오자 정신없이 젖을 빨았구요. 그러나 다른 젖꼭지는 절대 물지 않았습니다.
  
   '와, 맛있다. 쫄쫄. 야, 너는 왜 안 빨아 먹니? 아무도 없어, 아무 젖꼭지나 하나 차지해 버려! 꿀돼지야. 젖도 안 빨고 자꾸 꿀꿀거리기만하는 꿀돼지야. 바보, 꿀돼지야. 쫄쫄, 야, 정말 젖 잘 나온다. 이러다가 돼지 배가 다 터지겠다.'
  
   아지매의 허연 오른 젖밖에 못 빨아 본 꿀돼지는 참 신기했나 봅니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좀 징그럽기도 했구요. 갑자기 아지매 젖이 생각났지만,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엄마 젖을 매일 붙들고 있다고 붙들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 형한테, 눈치도 없이 며칠 전에 아지매 젖을 빨려고 하다가, 실컷 얻어터졌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도저히 이젠 같이 안방에서 붙들이와 같이 재울 수 없다고 생각해서 돼지 새끼를 팔던 날, 아지매가 꿀돼지를 돼지우리에 집어넣은 거였지요. 사실은 어미에게 돌려주었던 거죠.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안방에서 꿀돼지 소리가 났습니다. '꿀꿀, 꿀꿀!'
  아지매는 꿀돼지가 붙들이랑 같이 노는가 했더니, 방에는 꿀돼지만 있었습니다. 붙들이는 할머니와 마실 나갔던 겁니다.
  
   아지매는 반갑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방이 지저분했습니다. 냄새도 났고요. 다행히 눈치가 있어서 똥이나 오줌은 싸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얼른 안아서 마당으로 데리고 나와서 내려놓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즉시 쪼르륵 수채 구멍으로 달려가더니, 엉덩이를 잘 겨냥해서 힘을 빡 주는 것이었습니다. 쏴쏴하는 소리도 같이 냈습니다. 원래 거기서 배변 훈련을 시켰던 거지요.
  
   먹다 남은 밥에다 생선 가시도 섞어서 돼지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꿀돼지가 맛있게 죽을 다 먹은 다음 아지매는 다시 꿀돼지를 아쉽지만 돼지우리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꿀꿀거렸습니다. 뭔가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한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냥 사람이 그리워서 들어왔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는 여름이었습니다. 말복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 가만히 있어도 등어리에 땀이 저절로 송알송알 배겼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부채를 들고 느티나무 아래에 또는 시원한 맞바람이 이따금씩 부딪치는 대청 마루에 눕거나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개들은 혀를 길게 빼고는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개 잡는 소리가 나자 눈치 빠른 개들은 벌떡 일어나 왔다 갔다 안절부절했습니다. 닭 잡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머리가 나쁜 닭들은 전혀 눈치 없이 푸드득 푸드득 그늘진 수채 근방에서 지렁이를 쪼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지매가 들에서 돌아와서 점심밥도 준비하고 돼지에게 죽을 주려고 돼지우리에 갔더니(개밥은 아침저녁 두 번만 주었습니다. 낮에는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었지요. 소는 들에서 풀을 뜯어먹었고요.), 또 꿀돼지가 없어졌습니다.
  
   '또 안방에 들어갔구나! 요걸 그냥, 귀엽다 귀엽다했더니! 내일 모레 당장 해평 장날에 내다 팔아야지!'
  
   그러나 꿀돼지는 안방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아지매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꿀꿀아, 꿀꿀아! 어디 갔니? 이리 나오너라, 엄마 왔단다!'
  
   흔적을 찾아보려고 먼저 부엌 앞의 수채 구멍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거기 돼지 배설물 냄새가 났습니다. 그 냄새가 이렇게 달콤할 줄 예전에는 미쳐 몰랐습니다. 코를 대고 킁킁대다가 그 냄새가 어디로 뻗어나갔나 살펴보려고 휘휘 둘러봤지만, 해가 너무 강렬하게 내리쪼여 이미 냄새는 다 증발했습니다. 개 코로도 냄새를 추적하기가 그리 쉽게 않았을 겁니다.
  
   다급한 대로 부엌도 들여다보고 장독대도 가 보고 개집도 들쳐보고 소 외양간도 둘러보았습니다. 번개같은 영감이 떠올라 안방에 들어가 다락도 살펴보았습니다. 칫, 엉터리 영감이었습니다.
  
   '요게, 어디 갔지? 꿀꿀아, 꿀꿀아! 아이구 목말라!'
   급히 안채 옆 디딜방아가 있는 외돌아진 곳의 우물가로 갔습니다. 얼른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아하, 시원하다! 아니, 너! 꿀돼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꿀돼지가, 이미 한 마흔 근은 나갈 꿀돼지가 아지매 발치서 엉덩이를 땅에 대고 위를 쳐다보면서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얼른 손으로 물을 떠서 그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꿀꺽! 휙 둘러보았더니, 다 깨진 바가지가 하나 보였습니다. 거기 물을 부어 주었습니다. 쭈욱 한숨에 다 마셔 버렸습니다.
  
   '야, 꿀돼지야! 너 왜 이러니? 내일 모레 장에 팔아 버릴까? 돼지는 돼지우리에 있어야지. 넌 이미 다 컸어. 더 이상 젖 먹는 어린애가 아니야.'
   '꿀꿀.'
   말 못하는 돼지는 꿀꿀거리면서 뒤뚱뒤뚱 걸어갔습니다. 우물 옆에는 파초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고요. 꿀돼지는 거기 시원한 파초 아래로 갔습니다. 가더니 거기 엉덩이를 대고 슬그머니 앉았습니다. 이어 비스듬히 등을 대고 턱 누웠습니다. 네 다리를 일제히 한 번 흔들었습니다.
   '어, 시원타! 꿀꿀!'
  
   거기 감나무 그늘 속 다시 파초 그늘 아래에 물에 젖긴 했지만 깨끗한 가마니가 한 장 깔려 있었습니다. 옆에서 꿀돼지가 물고 왔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디딜방아가 있는 처마 아래에 쌓아둔 가마니가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아재가 숫돌 갈면서 받아둔 물도 다 엎질러져 있었습니다.
   '꿀꿀.'
   '.....?'
   '꿀꿀! 꿀꿀!'
   '.....?'
   '꿀꿀꿀! 꿀꿀꿀!'
   '.....!'
  
   '알았다! 알았어! 유레카!'
   비로소 아지매는 꿀돼지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알았습니다. 꿀돼지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안방이 의미하는 건 청결이었습니다. 꿀돼지는 깔끔한 동물이었습니다. 더러운 돼지우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오줌과 똥과 흙이 뒤범벅된 돼지우리 속에서 뒹굴어야 하는 게 여간 비위가 상하지 않았던 겁니다.
  
   우물가 파초 아래의 젖은 가마니가 뜻하는 것은 서늘한 습기였습니다. 돼지는 건조한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 똥과 오줌 속에서도 뒹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돼지가 제일 지저분해 보이는 겁니다.
  
   그 날로 아지매는 아재와 같이 어미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처럼 돼지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했습니다. 모래도 넣어주었습니다. 꿀돼지를 위해서 특별히 젖은 가마니때기도 하나 넣어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돼지 세 마리는 꼭 한 구석에 잘 조준해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특히 꿀돼지는 단순한 조준이 아니라 정조준의 도사였습니다. 사람 새끼인 붙들이는 아직도 가운데가 터진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싸대는데 말입니다.
  
   아지매는 깨끗한 물을 길어서 여름에는 하루 두 번 이상 꿀돼지와 그 누나, 그리고 그 엄마에게 쫙쫙 끼얹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태어날 때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쫙 흘렀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 집은 언제나 돼지우리를 안방처럼 깨끗하게 하는 가풍이 있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따라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네요.
  
   속말: 한 사회의 편견을 깨뜨리기는 몸에 붙은 큰 혹을 떼어내기만큼 힘들다. 편견은 겉으로 드러난 혹이 아니라 속에서 커지는 혹이라서 더욱 이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2000. 8. 12.)
  
  
  
[ 2007-01-23, 12: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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