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링컨, 박정희--세계 3대 정치지도자
나폴레옹과 링컨과 박정희는 각 대륙에서 법의 지배로 자유와 평등을 제도화하고 과학기술 중시의 교육개혁으로 항구적인 풍요의 기초를 닦은 산업시대의 세계 3대 지도자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서주(序奏)]


 때는 18세기, 장소는 유라시아와 북미. 아시아가 천 년 만 년 변하지 않는 대지(大地)의 푸근한 가슴에 안겨 있는 동안, 유라시아의 서쪽 끄트머리와 대서양 건너 새 땅에서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를 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 시대에 영혼을 팔아 쾌락의 죄에 빠졌던 파우스트 박사가 귀여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나타나 서로가 승리를 자신하면서 하나님의 자애로운 승낙을 받아 서유럽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위대한 대지에 더 이상 코 박고 살지 않고, 위대한 대지의 젖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젖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아름답고 달콤한 꽃과 열매가 피고 열리는 세계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건설하겠다고, 파우스트 청년과 영원히 늙지 않는 메피스토펠레스 소년이 나란히 손을 잡고 유라시아의 가장 척박한 서쪽 끄트머리에 나타난 것이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이 농업시대의 대문을 벗어나 산업시대의 황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15~16세기 르네상스 사춘기를 거쳐 17~18세기 계몽주의 청년기를 거치며 유럽의 난쟁이 국가들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처럼 온갖 기화요초의 사상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접어들자마자, 네 분야에서 지난 4세기 동안의 꽃과 잡초를 하나의 꽃밭에 질서정연하게 가꾸는 천재 원예사가 각각 작품을 내놓았다. 1804년 나폴레옹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민법》을 내놓았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숨을 죽였다. 그가 전혀 예상 못한 인간승리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3년 후 1807년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발간했다. 철학을 헤겔 이전과 헤겔 이후로 나눠 버린 것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말인지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제법 많은 인간들이 뇌에 전기충격을 받은 듯 잠시 까무러쳤던 것이다.


 바로 다음 해 1808년에는 잇따라 베토벤과 괴테가 각각 《운명》과 《파우스트》를 내놓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조용히 물러났다. 일개 풍각쟁이가 이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독립선언하고, 기껏 키워 주었더니 파우스트가 스승이자 친구인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 없이 '노력하는 한 헤매며(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 Man will stray so long as he strives' 천국<헤브라이즘>에서 지상<헬레니즘>을 지나 지옥<게르마니즘>(Vom Himmel durch die Welt zur Hoelle-From Heaven through the world to Hell)으로 두루 끊임없이 오가겠다고, 언젠가는 천사의 경지에 올라서겠다고 문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베토벤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는 소리의 규칙적인 나열로 천상과 지옥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며, 오로지 음악만으로 먹고살았던 인류 최초의 프로 음악가이기도 하다. 설령 황제나 귀족이나 귀부인이 은혜를 베풀지 않아도 많은 중산층과 서민들이 기꺼이 고집불통의 베토벤에게 너무너무 적어서 너무너무 미안해 하며 금화와 은화를 내놓았다. 이처럼 대지의 품에서 막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이 구축한 새 세계에서는 재화가 오히려 차고 넘치면서 누구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나 천사가 아닌 다른 평범한 인간들을 기쁘게 하는 한, 얼마든지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음악만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바야흐로 베짱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미술과 문학과 스포츠와 방송은 또 어떤가. 크고 작은 현대의 뭇 영웅들이 밤하늘의 별보다 아름답게 빛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산업시대의 풍요가 가져다 준 축복이다. 
   

[간주곡]


 산업시대의 세계 3대 정치 지도자로 나는 나폴레옹과 링컨과 박정희를 꼽는다. 톨스토이는 링컨을 인류 사상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 꼽았지만, 나폴레옹은 어쩌다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시대의 용마루에 올라섰다가 한 순간에 내팽개쳐진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고, '천재?' 웃기는 소리 작작하라고 사정없이 매도했다. 더군다나 박정희에 이르면, 사람들은 펄쩍 뛰거나 바삐 지나가는 길에 정신병자 쳐다보듯이 슬쩍 보고 아예 관심도 안 가질 것이다. 나는 감히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비중과 그들이 세계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비교하고 검토함으로써, 이 셋이 각기 유럽과 북미와 아시아에서 산업화 초기에 어떻게 '세계가 따르는 지도자'가 되었는지 보여 줄 것이다. 이 세 영웅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나폴레옹은 원수 영국의 감시 속에 죽음보다 못한 삶을 연명했고, 링컨과 박정희는 암살 당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환호한 사람 못지않게 이를 간 사람도 많았다는 증거다. 생전에 그들은 한쪽 귀로는 구세주 소리를 들었고 다른 한쪽 귀로는 독재자 소리를 들었다.

  
[제1악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는 나폴레옹 이전과 나폴레옹 이후로 나뉜다. 오늘날 나폴레옹의 이상은 EU의 탄생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1799~1814)은 결과적으로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유럽 전역에 전파했다. 그 후 20세기 들어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크게 자극을 받은 후발 산업국가 독일이 주도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음으로써, 비로소 유럽은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나폴레옹이 구축하려고 했던 것보다 한결 진화된 유럽 운명공동체를 탄생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이 낳은 최대의 인물이다. 동갑인 헤겔과 베토벤이 태어나기 1년 전, 코르시카 독립군이 프랑스군에게 패배하던 해에 그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원래 이름은 이태리식으로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은 열 살 되던 해 불과 넉 달간 불어를 배우고 프랑스의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출세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당시는 귀족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급 장교로 평범하게 살 운명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고급장교인 귀족들이 뿔뿔이 도망가 버렸다. 덕분에 그는 군사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벼락 출세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영광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1715) 때 잉태된 것이다. 루이14세는 절대군주요 계몽군주였지만, 정복 전쟁과 식민지 경영과 농업발전의 과실이 왕족과 귀족과 신부(神父)라는 제1신분에게만 돌아가게 했다. 그 후에도 프랑스는 중농주의와 중상주의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에 1세기나 뒤떨어졌다. 18세기에 프랑스는 철저한 보호무역 정책을 고수하여 면화규제를 위반하였다 하여 농민과 소사업가 1만6천 명을 교수형에 처하거나 능지처참했다. 상품이 고을을 지나갈 때마다 통행세를 거둬 전국적인 상권도 형성될 수 없었다. 전국을 한 바퀴 돌면 어떤 상품이든 가격이 4배로 뛰었던 것이다. 사상이든 과학이든 영국에 뒤질 게 없었지만, 인류 역사상 처음 도래하는 새 시대에 전혀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프랑스의 모순은 극에 달했다. 부와 교양을 갖춘 부르주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죽음으로 내몰린 농민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구체제(앙샹 레짐)를 무너뜨리기 위해 1789년 혁명의 불이 타올랐다. 교회와 귀족의 토지는 몰수되어 농민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통행세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 다음엔 곧바로 공포정치와 사회불안과 안보위기가 닥쳐왔다. 안으로는 새로운 권력층이 정적을 못 잡아먹어 난리였고, 밖으로는 이웃 나라들이 왕과 귀족과 신부를 개 취급하는 프랑스를 못 잡아먹어 난리였다. 혁명의 열기는 혁명의 환멸로 바뀌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나폴레옹 장군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집트 원정에서 육전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1798년 나일해전에서 영국의 이순신 넬슨에게 패하고 1799년 몰래 단신으로 빠져 나와 프랑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드디어 나폴레옹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는 프랑스를 집어삼키려던 나라들을 혼내 주기 시작했다. 그 외 작은 나라들은 프랑스로 편입시켰다. 그는 산업화 시대에 가장 먼저 발달하는 무기를 잘 활용했다. 대포와 총의 화력과 말의 기동력과 국민개병제의 애국심으로 나폴레옹 군대는 단시일에 유럽최강의 군대로 거듭났다.


 1802년 그는 놀라운 제도를 두 개 도입했다. 그것은 교육령과 레종 도뇌르(명예훈장)다. 그의 교육령에 의해 유럽 최초로 국민학교와 고등학교가 계급에 관계없이 산업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키우게 이르렀다. 그것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또한 교회와 화해하여 그들도 국민학교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특히 교회는 여학생도 받아들였다. 명예훈장도 획기적인 제도였다. 그것은 이전과는 달리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적 성취에 따라 주어지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프랑스인들이 가장 흠모하는 영예다. 1804년에 나폴레옹은 황제에 등극함으로써 베토벤에게는 추억의 인물이 되지만, 그 해에 바로 전세계에 영향을 안 미친 데가 거의 없는 민법을 공표했다. 프랑스 혁명의 최대 이상인 자유와 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잇따라 1806년에는 민사소송법, 1807년에는 상법, 1808년 형사소송법, 1810년 형법을 완성함으로써 나폴레옹 법전에 의한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곧 민주주의를 관념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렸다. 1805년에는 1794년 설립된 공과대학 에콜 폴리테크(Ecole Polytechnique)를 군사학교로 바꾸면서 파리시내로 옮겼다. 이 때 그는 '조국과 과학과 영광을 위하여(Pour la patrie, les sciences et la gloire)'라는 교육목표와 긍지를 내리고 심어 주었다. 그 후 기초과학 강국 프랑스의 과학 두뇌는 소수 정예의 이 대학 출신이 약 80%를 차지하게 되었다(2008년 현재 학부생 1902명, 박사과정 330명). 나폴레옹은 법률개혁과 교육개혁을 통해 황제 등극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선의의 독재자로서 시대의 흐름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폴레옹은 대지주가 사라지면서 대대적으로 새로 태어난 자영 농민에게 대폭적인 감세의  선물을 베풀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세원(稅源)을 넓히고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했기 때문에 재정은 더 튼실해졌다. 도로, 교량, 항만, 상하수도 등 사회간접시설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정치혁명에 이은 산업혁명의 고속전철(TGV)을 건설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중국의 3분의 1도 안 되는 유럽을 통일했다면, 전쟁광이란 오명을 덮어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제2 로마제국 건설은 불가능한 욕심이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 정치, 경제, 인재 등 모든 면에서 진(秦)이 다른 나라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정치혁명에 이어 산업혁명도 프랑스보다 한 세기 앞섰던 세계최강 영국을 상대해야 했다. 영국과 비길 수는 있었으되, 이길 수는 없었다. 1803년 그 당시 미국 전체의 면적과 비슷했던 루이지애나(루이 왕에게 바치는 땅)를 미국에 단돈 1500만 달러에 판 것은 영국과의 기나긴 싸움에서 경제력이 고갈되어 전비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지금도 루이지애나만 생각하면 밥맛을 잃는다.)


 나폴레옹이 신분이 철폐된 프랑스인에게 애국심을 불어넣어 '라 마르세예즈 합창단'을 다른 나라 군대와는 달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무도 도망가지 않는 가공할 전쟁기계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18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군사전략가 기베르와 부르셰가 개발한 전술을 채용하여 군사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분진협동(分進協同)작전을 쓰고 대포의 무게를 크게 줄임으로써 기동성을 늘려 화력을 전광석화처럼 집중시켜 적군의 주력부대를 '전멸'시키는 등 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군사천재였다고 하지만, 19세기부터 전쟁은 국가총력전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력과 과학기술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워털루 전쟁의 패전을 나폴레옹 부하 장군의 어리석음이나 날씨 탓으로 돌리면 곤란하다. 그 전쟁에서 설령 이겼다고 해도 프랑스는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경제력도 없었고 과학기술도 딸렸기 때문에 최후의 전쟁에선 지도록 운명지어져 있었다.     
      

[제2악장 아브라함 링컨(1809~1865)]


 링컨 없는 미국은 상상할 수 없다. 미국이 링컨이고 링컨이 미국이다. 초등학교 제대로 다니지 못한 꺽다리 촌뜨기가 미국을 새로 건국하고 세계 역사와 세계 지도를 바꾸었다. 그는 언제나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꼽힌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포한 것이 그렇게 큰 일인가. 3천만 국민 중 60만 명이 죽는 비참함 없이도 전세계에서 산업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노동자란 새 신분이 등장하면서 노예는 서서히 사라지지 않았던가. 노예는 분명 농업시대의 부산물이요,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시대의 도래와 더불어 노예가 절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산업화를 가장 먼저 시작한 영국에서도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8세기 초반 런던 시민의 25퍼센트가 노예무역에 관련되었다. 노예무역 덕분에 브리스틀항과 리버풀항은 부와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돈으로 온갖 사치품을 사고 으리으리한 교회도 지었는데 지금도 그 교회들이 남아 있다. 노예무역은 오늘날로 치면 건설시장 전체와 IT 산업 전체를 합친 것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가 노예무역을 반대한 이래 18세기말까지 아프리카에서 1천만 명이 넘는 흑인이 유럽의 백인에 의해 짐짝처럼 실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12.5%가 사망하고  뭍에 내리자마자 4.5%가 죽어 갔다. 1789년 5월 12일 영국의 하원에서 한 양심이 일어나 장장 4시간 동안 차분하게 노예무역 폐지를 조근조근 이성에 호소했다. 1940년 윈스턴 처칠의 사자후보다 더 유명한 연설이 바로 이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의 노예폐지 연설이다.


 "저는 여러분의 열정에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냉철하고 공명정대한 이성에 호소할 따름입니다. 또한 여러분을 놀라게 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문제를 조목조목 차분히 논의하고자 합니다. 저는 어느 누구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이 끔찍한 노예무역을 조장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더불어 대영제국 의회 전체의 각성을 촉구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 죄를 인정해야 하며, 타인에게 죄를 덮어씌움으로써 자신의 죄를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연설 내내 모든 의원들의 양심이 노예선에 탄 노예처럼 고통을 당하다가 연설이 끝나면서 드디어 눈물의 해방을 맞이했기 때문에, <<스타>>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빗장과 사슬로 아프리카를 점령하는 일은 이제 끝났다."    


 그러나! 아니었다. 윌버포스를 위시한 영국의 양심들이 끈질기게 노력했지만, 노예폐지법안이 통과되기까지 무려 18년이 걸렸다. 1807년의 태양은 그렇게 텅 빈 노예선도 환히 비추었다. 아무리 사악한 것이라도 현실의 이권을 포기하기란 그렇게 어렵다. 윌버포스의 영향으로 1808년에는 미국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1838년에는 영국 식민지 전체에서 노예무역이 사라졌다. 노예제도는? 영국의 노예제도는 농장주들이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는 조건으로 1833년에야 겨우 폐지되었다. 미국은? 가만 두었으면 절로 없어졌을 거라고?


 미국은 백인의 신천지요, 실험장이요, 제2의 고향이었다. 초라한 식민지로 시작하여 유럽의 백인 국가 전체와 맞먹는 인구가 유럽보다 훨씬 큰 땅에서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잘 사는 나라, 유럽 어떤 나라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독립국가로 우뚝 섰다. 같은 유럽의 식민지로 시작했지만, 중남미는 아직도 상황이 열악하기만 하다. 만약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 없었다면, 링컨이 로크와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이상이 구현된 미국의 헌법 정신을 위기에서 구하여 정의와 인권과 자유와 평등이 법조문의 활자에서 걸어나와 남부의 농장에도 발을 딛게 하지 않았다면, 링컨이 국가의 분열을 피의 용기로써 통합하지 못했다면, 링컨이 새롭게 부상하는 거대한 산업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미국은 오늘날 중남미보다 못한 나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링컨은 끝까지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불의의 폭력 앞에 정의가 비겁하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깡패의 협박에 경찰이 도망갈 수는 없었다. 링컨은 말했다.
"정의가 곧 힘이다. --Right is might."
이 말은 흔히 말하는 속담을 뒤집은 것이다.
"힘이 곧 정의다. --Might is right."
 노예 주인인 백인 너희들이 힘이 세니까, 너희 말은 모두 옳다고 진리라고? 어림도 없는 말이다. 아니다! 흑인 노예가 옳으니까, 우리가 옳으니까, 미국의 헌법이 옳으니까, 힘이 있고 정의로 뭉친 우리의 힘이 강하니까 승리한다. 뭐, 시끄럽다고? 뭐, 흑인 노예를 치는 채찍으로 우리도 치겠다고? 너희가 그렇게 힘이 세냐? 어디 그럼 한 번 붙어 보자.--그렇게 하여 남북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누구도 그렇게 길게, 그렇게 넓게, 그렇게 깊게 전쟁이 계속 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새로 도입된 소총의 살상력이 가공스러웠다. 불과 반세기 전 나폴레옹의 전술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전에는 포병이 멀리서 대포를 날리는 사이 보병이 쏜살같이 적의 200야드 앞까지 전진해서 탄막을 형성하면 필승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소총은 유효사거리가 400야드였다. 이 정도 거리에선 명중률이 떨어지는 당시의 대포보다 나았다. 이 장사거리 소총에 걸맞은 전략과 전술은 남부군의 스톤월 잭슨만이 알고 있었다.
"적을 혼동시키고 오도하고 기습하라!"


 정의의 링컨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잭슨의 작전은 몇몇 작은 전투에서만 채택되었을 뿐, 남부군에서는 끝내 전면적으로 채택되진 않았다. 그 바람에 남북의 군대는 정면 대치로 서로가 팽팽히 맞서 대량살상을 일삼았고,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우세했던 북부군에게 소모전 양상의 전쟁이 점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마침내 링컨이 그랜트를 총사령관으로 불러 올리고 서부사령관으로 그랜트의 부관 윌리엄 셔먼을 기용하면서 전쟁은 정의의 편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셔먼은 인정사정 보지 않는 대량 파괴로 스스로의 힘만 믿고 기고만장해 하던 남부 백인들로부터 아예 전쟁의 의지 자체를 꺾어 버렸던 것이다. 의지가 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과 마찬가지!          


 링컨의 시대에 이미 유럽의 북쪽 하늘로부터 새로운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산업시대에 새로 등장할 노예제도였다. 그것은 영국이나 독일의 산업화 초기에 비참했던 노동자의 근로조건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악독한 새 노예제도였다. 유럽 중 빈부격차가 가장 심했던 러시아에서, 농노제도가 가장 오래 계속된 곳에서 만인평등을 내세운 절대권력이 총칼로 정의를 강요하는 공산주의가 바로 산업시대의 새 노예제도였다. 새 노예들은 흑인 노예보다 더 비참할 운명이었다. 국가 권력이 곧 노예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국민의 90%가 노예가 될 운명이었다. 새 노예는 옛 노예처럼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고 말할 자유도 없고 노래할 자유도 없게 될 운명이었다. 나아가 생각할 자유도 없게 될 운명이었다. 그들은 인간 기계, 로봇이 될 운명이었다.   이전에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생산수단을 빼앗기 위해 가진 자란 이유만으로 무장해제된 사람들을 수백만 수천만 학살할 예정이었다.


 러시아와 형태는 조금 달랐지만, 중산층이 두텁지 못했던 독일에서도 히틀러라는 괴물이 나타나서 무저항의 인간들을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대량학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살아남은 인간은 인간기계가 되길 강요받았다. 보라는 것만 보고 들으라는 것만 듣고 말하라는 것만 말하고 생각하라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누구든 지도자가 가리키면, 즐거운 마음으로 악마를 죽이듯이 죽여야 했다. 


 링컨이 흑인 노예도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여, 백인이 흑인과 결혼하면 둘 사이에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백인과 흑인이 한 품종임을 인정하게 만들고, 흑인도 백인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고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똑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똑같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여, 미국의 헌법 아래 백인이든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누구나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미국에선 평등종교 공산주의가 아무런 매력을 끌지 못했다. 또한 링컨이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할 터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북부뿐만 아니라 남부도 '어제는 노동자, 오늘은 기술자, 내일은 사장'이라는 기회의 나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미국에선 공산주의가 아예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었다. 이 점은 미국과 똑같이 백인의 식민지로 시작한 중남미와 확연히 달랐다.


 1862년 전쟁의 와중에 링컨은 1859년 제임스 부캐넌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법안에 서명했다. 그것은 모릴(Justin Smith Morrill) 의원이 제안한 주립대학안(Morrill Land-Grant Colleges Act)이었다. 각 주마다 상원의원 숫자와 비례하여 국유지 3만 에이커(121㎢ 여의도의 40배, 서산간척지의 1.2배)를 무상으로 불하하여(That there be granted to the several States... thirty thousand acres for each senator and representative in Congress), 항구적인 대학 재정을 마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설립된 주립대학이 현재까지 106개에 이르고 이들 학교에 할당된 토지는 충청도 이남 전체에 해당하는 약 7만㎢이다. 그런데 이 대학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인문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되, 반드시 농학과 공학 과정을 개설하는 것이다. 미국이 향후 과학기술에서 세계1위로 올라서고 산업도 세계1위로 올라서는 터전을 닦아놓은 것이다. 나폴레옹이 국민교육제도를 도입하여 프랑스인의 잠재능력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마련했듯이, 링컨도 그런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스스로 만든 법안은 아니지만, 전쟁의 와중에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이런 법안에 서명했다는 데서 링컨의 또 다른 혜안을 엿볼 수 있다.


 링컨의 미국은 남북전쟁 후 경이적으로 발달하여 독일이 일으킨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부터 인류를 구했다. 그로써 후진국의 악몽인 제국주의는 공산국가를 제외하고는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두 번 모두 전쟁배상금을 챙기지 않았다. 링컨의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제국주의의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정의를 실현하고 표표히 떠나는 서부의 사나이 세인처럼! 마지막 남은 공산 제국주의와 공산 노예제도도 역시 '힘이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힘이라는' 링컨의 미국에 의해 폐지되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링컨의 정의 앞에 중공과 소련이 차례로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제3악장 박정희(1917~1979)]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자진해서 승전국의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100여 개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다. 독립의 환희는 잠깐이었고, 다들 너무너무 배가 고팠다. 식민지 시절이 그리웠다. 그 사이 어제의 독립투사들이 독재자가 되어 국민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자유라는 이름의 무질서가 백주대로에 횡행했다. 독립국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의 길에서 발을 뗀 선진국에게 채권을 독촉하듯이 손을 내밀기 바빴다. 미국과 소련이 가장 큰 원조국이었다. 미국은 군사보다 경제를 우선하여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로 선진국과 개도국이 상생하는(win-win)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고 했고, 소련은 경제보다 군사를 앞세운 새로운 공산 제국주의 시대를 열어 석유와 무기를 미끼로 공산 식민지(위성국)를 달래거나 협박하고 역시 석유와 무기를 미끼로 1943년 공식적으로는 해체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체제로 제3세계(개도국)를 제2세계(공산권)로 끌어들여 세계적화의 야욕을 달성하려는 음흉한 계략을 꾸몄다. 


 한국은 1300년간  통일국가 체제를 누린 전세계 유일한 국가였지만, 산업시대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거의 100% 미국 덕분에 해방되어 신생 독립국 신세로 추락했다. 그나마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소련의 치밀한 전략에 의해 38선 이북을 빼앗긴 반쪽 짜리 독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위성국을 제외하면 소련의 세계적화 야욕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악마 스탈린은 소련군 장교 출신 김일성 꼭두각시를 앞세워 미군이 빠져나간 한국에 기습남침하여 히틀러군의 무기보다 강력한 무기로 번개처럼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국의 개입으로 간신히 원위치되었지만, 한국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미국의 원조로 끼니만 겨우 잇던 한국은 원자탄에 맞은 것 못지않은 열전(hot war)으로 잿더미와 먼지와 넝마와 붉은 산, 그리고 뱃가죽과 증오와 절망만 남았다.    


 나폴레옹이 식민지배와 혁명과 전쟁의 아들이었듯이 박정희도 식민지배와 전쟁과 혁명의  아들이었다. 나폴레옹을 존경한 박정희는 식민시대에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가장 앞선 학문인 과학기술과 군사학을 배웠다. 좌우 사상의 파편에 스쳐 맞은 그는 해방 후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김일성의 기습남침이었다. 민간인 신분으로 국군의 정보과에서 일하던 박정희는 육이오 6개월 전에 북한 인민군의 38선 집결을 파악했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모조리 묵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그는 고향 구미에 내려가 있었다. 친척의 장례식에서 조문하고 있었지만,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즉시 전보를 치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전보를 받는 즉시 다들 탈출하지 못해 아우성인 서울로 올라갔다. 나폴레옹이 넬슨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파리로 가는 것보다 그 극적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선물은 고작 군복을 새로 입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은인자중하던 박정희 장군에게 드디어 때가 왔다. 그것은 4.19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처럼 한국의 4.19 혁명도 사회불안(데모도 자유! 때리는 것도 자유!)과 정치환멸(민주당 신구파의 조선시대형 당쟁)과 경제불황(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살 길 찾자!)과 안보위기(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로 3천만이 암행어사 출도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가 사전에 발각된 군사혁명을 서슴없이 감행하여 한강을 건넜을 때 예포 수준의 저항밖에 없었다. 무슨 군사 쿠데타가 이 쪽 저 쪽 다 합해 한 명도 안 죽었다. 무혈혁명이었다. 명예혁명이었다.
"마침내 올 게 온 것이다."
그가 실패했다면, 후진국 어느 나라에서나 보듯이 제2, 제3, 제4의 군사 쿠데타는 성공할 때까지 계속 일어났을 것이다.  


 군사쿠데타가 군사혁명이 되려면, 조국 근대화를 이룩해야 했다. 김일성의 적화야욕에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맞고함을 지를 수 있어야 했다. 정치안정과 경제건설과 안보확립, 이 셋 중 어느 하나만 삐끗해도 박정희는 제2의 홍경래나 제2의 정중부가 될 판이었다.


 박정희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법률 제정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나폴레옹의 법률위원회보다 생산적이었다. 심하게 표현하면 달랑 헌법만 있을 뿐 미군정의 영어 법률과 조선총독부의 일어 법률로 사법체계를 꾸려가던 나라에서 6개월 만에 나폴레옹 법전과 일본 법률을 참고하여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을 개정하거나 새로 제정하여 서구 선진국 수준의 법률을 완비했다. 더 이상 빽과 떼법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었다. 자유와 평등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이후 자유민주에 가장 크게 공헌한 지도자가 바로 박정희다. 김영삼과 김대중과 노무현은 말싸움과 권력 싸움에 능했을 뿐 자유민주를 후퇴시킨 지도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양의 탈을 쓴 늑대라면, 박정희는 늑대의 탈을 쓴 양이다.   


 박정희는 그와 동시에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승만 시대부터 경제개발계획은 탁상 위에서 어지럽게 뒹굴었지만, 재원 마련의 어려움과 지도력의 부족으로 국민에게 선 한 번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것을 보완하여 집권 바로 다음 해부터 즉각 실천에 옮겼다. 의욕만 넘쳤을 뿐 처음에는 군사 정부도 많이 헤맸다. 그러나 '잘 살아 보세!'라는 구슬픈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경제도 급속히 안정되어 갔고 차분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3년 박정희는 애초 권력의 속성을 모르고 섣불리 스스로 한 약속을 깨고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입후보했다. 유례없이 공정한 투표에서 그는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정통성을 보장받은 박정희는 붕새의 날개를 단 호랑이였다.


 1964년 마침내 그는 경제에 눈을 떴다. 자유당과 민주당의 원안대로 애국심에 넘쳐 국내 산업을 과보호하는 대체 경제를 추진하다가, 그것이 GATT 체제(한국은 1967년에 가입)에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3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알아챈 것이다. 국내 산업을 육성하되 치열하게 국내외 산업과 경쟁시키고 해외로 내다 파는 수출산업을 대대적으로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시 전세계 100여개 개도국 중에 이를 깨달은 지도자는 한국의 박정희와 대만의 장개석과 싱가포르의 이광요뿐이었다. 이들 세 국가와 영국이 통치하는 홍콩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급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65년 박정희는 대학생과 교수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원수 일본과 수교하면서 경제개발의 종자돈을 마련했다. 1000억 달러라도 받았으면 그 아니 좋겠지만, 일본을 우리 힘으로 물리쳐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은 국제법상 전쟁배상금은 받을 수 없었다. 유무상 자금과 상업차관을 합해 9억 달러는 1964년 수출 1억 달러의 기적을 낳은 한국에게는 적지 않은 자본이었다. 대박을 터뜨리려다가 아직껏 단돈 10만 달러도 못 받은 북한과 비교해 보면, 박정희의 결단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것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명박이 당시 고려대 학생회장의 신분으로 한일회담에 반대하다가 얼마간 콩밥을 먹은 것을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하여 박정희가 살던 집에 이사가기에 이르렀는데, 아직까지 소싯적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최측근에 바로 그 때의 동지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걱정된다.


 일본과 수교했다는 것은 GATT 체제의 두 축인 미국과 일본의 시장에 모두 진출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세계에서 가장 큰 어장에서 우리의 능력대로 얼마든지 달러 고래와 엔 참치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당히 국가 대 국가로 서로가 국익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관측병의 정확한 관측을 토대로 안 보이는 곳에서 귀신같은 계산으로 적에게 불의 선물을 안겨 주는 포병장교 출신답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과학기술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역대 한국의 지도자 중 유일무이한 과학기술 대통령이었다. 일본도 두려워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세우고, 공대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서울대 자연대와 서울공대와 한양공대를 꿈의 대학으로 만든 지도자가 박정희였다. 이 점은 나폴레옹과 링컨과 마찬가지였다. 박정희는 과학기술이 세계수준으로 올라서면 매판자본은 슬그머니 민족자본으로 변한다는 것을 제대로 안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연대와 공대만이 아니라 공고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기능공을 양산하여 세계기능올림픽을 휩쓸게 하여 단순 가공밖에 못하던 한국의 노동자가 고졸만으로도 대졸을 능가하는 고임금을 받을 수 있게도 했다. 박정희 시절에는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김포공항에서 세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열어 주었다. 입으로만 예의, 입으로만 민주, 입으로만 분배, 입으로만 평등을 외치는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지도자가 박정희다. 자유민주에 굳게 선 실용주의를 요란한 구호가 아닌 조용한 실천으로 전국민에게 각인 시킨 국민 스승이 박정희다. 


 박정희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당장 남북한의 차이를 보라. 일제가 대부분의 공장과 발전소를 북한에 지은 데다가 지하자원도 풍부했기 때문에 해방 후 북한은 한국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지휘봉을 잡은 후부터 완전히 역전되었다. 한국의 오케스트라는 5천만이 각기 다른 소리를 냄에도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하지만, 북한의 곡마단은 2천만이 똑같은 소리를 내지만 그것은 귀신이 곡하는 섬뜩섬뜩 소리만 낼 뿐이다. 박정희의 용단으로 한국은 기술자립도 95%의 20기 원자력 발전소를 꾸준히 건설하여 세계최고 품질의 전기를 세계에서 가장 값싼 요금으로 가정이나 공장이나 유흥가나 전기를 흥청망청 써도 예비전력이 북한의 10년 전기 생산보다 많지만, 북한은 한국과 반대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악마적으로 이용하여 민족을 말살할 원자탄 두서너 기를 만들어 놓고 관솔불 밑에서 날마다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있다. 김일성이 일제가 건설해 둔 발전소로 한국이 쓰는 전력 대부분을 공급하다가 1948년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것을 생각해 보면,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말없는 실천자이고 김일성 부자가 얼마나 허풍만 심한 날강도임을 훤히 알 수 있다.  


 한국에선 민주와 통일을 앞세운 소프라노 친북파와 테너 좌파가 집요한 말싸움에서 판판이 승리하여, 말없는 국민들은 압도적으로 박정희를 최고의 지도자로 꼽지만, 공식석상에선 박정희가 친일파와 독재자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세계가 따르는 지도자다. 1978년 중국의 등소평이 박정희의 개혁개방과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받아들인 이래, 공산권이 몰락한 후 민족분단의 원흉 소련도 러시아로 이름을 바꾼 다음 푸틴이 부지런히 박정희의 뒤를 따라 슬라브족의 우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구도 마찬가지이고 최근에는 중남미도 마찬가지로 박정희 뒤를 따른다. 나폴레옹의 유럽과 링컨의 미국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낳은 백인의 나라였다. 따라서 그들이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 자유와 평등을 명실상부하게 만들고 과학기술을 장려하여 국가의 백년대계를 마련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후진국에서 산업시대를 여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2차대전 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선진국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중남미에 엄청난 경제원조를 퍼부었다. 그러나 성공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자갈밭과 모래밭과 가시밭에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그 씨는 발아도 못하고 권력자들이 나눠가졌다. 설령 그 씨가 싹을 틔워도 금방 말라 비틀어졌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올챙이 시절을 다 잊어 버리고 무지한 오만으로 올챙이들에게 개구리와 뱀의 법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를 거부했다. 후진국에는 후진국에 맞는 정치가 있고 경제가 있다는 신념으로 한국의 발전단계에 맞는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늘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되, 그 둘을 차근차근 키워 나갔다. 우선은 단순가공의 경공업, 그 다음은 기술 위주의 중화학 공업과 전자선업 등으로 시장을 끊임없이 키웠다. 한편으로는 개방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무엇이든 내다 팔아 아귀같이 달러를 벌어들였다. 선진기술도 과감히 받아들이고 그 기술을 눈이 찢어지고 코피 터지게 보고 배워 하나하나 선진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과학기술의 발전 없이는 영원히 외국자본의 경제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박정희는 과학기술 교육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박정희는 세계 어디에도 없던 후진국 발전 모델을 창조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것이 입증됨으로써,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금은 전세계 100여개 이상의 개도국이 박정희 모델을 따르고 있다. 최근에는 인구 10억의 인도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그 이전에 공산국가 베트남도 합류했다. 아직도 세월을 거꾸로 가고 있는 집단과 나라는 북한과 쿠바뿐이다.


 박정희에 비길 수 있는 세계적 지도자는 이광요와 장개석과 네루인데, 그들은 박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는 없다. 각각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광요와 장개석은 나라는 작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선 박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박정희에 상대가 안 된다. 그들은 야당과 언론을 묵사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통치할 때 야당은 국회에서 모기소리도 간신히 냈다. 겨우 한두 석 많아야 스무 석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론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한국의 언론은 거기 비하면 천국이었다. 반면에 박정희는 유신개헌과 긴급조치의 억압적인 정치로 점수를 많이 잃었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도 상대적이다. 200년 민주역사의 서구 선진국과 바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우승 못했다고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정희의 자유민주는 무엇보다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늘 야당이 국회 의석의 약 절반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신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유정회를 빼면 나머지는 여야가 거의 동수였다. 이런 나라는 전세계 개도국 중 인도밖에 없었다.


 네루는 정치측면에선 박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경제정책은 실망 또 실망이었다. 전세계에서 거지가 가장 많은 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네루 가문은 1947년 이후 단 7년만 빼고 지금까지 인도의 정치를 주름잡고 있는데, 바로 이 7년 사이에 박정희식 개혁개방 정책을 받아들여 현재 인도는 환골탈태하고 있다. 네루의 경제정책은 박정희가 처음 3년 동안 펴던 경제정책과 흡사했다. 국내 산업 보호, 자립 경제, 무역 억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사실 네루가 사회주의자로서 비동맹의 맹주를 자처하며 미국보다 소련에 기댔기 때문이다. 소련이 무너지면서 네루 가문도 무너졌고 네루의 경제 정책도 폐기되었다. 그러자 인도의 뻔뻔한 거지와 기이한 고행자가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카덴차]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초창기에 눈뜨고 못 볼 정도로 비참한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인도주의에 의해, 그것은 서서히 개선되었다. 그러나 영국 외에 다른 나라는 급격한 산업화가 피를 불렀다. 그것이 프랑스 혁명이고 나폴레옹 전쟁이고 남북전쟁이고 세계대전이고 6.25동란이다. 더 끔찍한 것은 공산혁명에 의해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산노예가 양산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19세기 이후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사람이 자국 지도자에 의해 산업화의 미명하에 목숨을 잃었다.  


 천만다행으로 유럽에는 나폴레옹이, 북미에는 링컨이, 아시아에는 박정희라는 세기적 지도자가 등장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그들이 농민과 소시민과 중산층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예는 자유인이 되게 하고 농민은 노동자로 노동자는 기술자로 기술자는 사장으로 되는 길을 그들은 활짝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공산노예가 등장할 여지를 아예 없애 버렸다.   


   그들은 또한 인류 최초의 산업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키우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천시되던 과학기술 교육을 인문 과목(liberal arts)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과학기술이 산업화의 핵심임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다.


 이제 지식정보사회다. 새로운 지도자가 요구된다. 아직은 산업시대의 나폴레옹과 링컨과 박정희에 견줄 만한 세계적 지도자가 안 보인다.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면 무엇보다 나폴레옹과 링컨과 박정희를 알든 모르든 자기도 모르게 스승으로 모실 것이다. 세계적 지도자가 바로 이 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아직도 박정희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 축에 못 드는 풍토가 가시지 않은 이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이런 풍토를 제일 좋아하는 자는 다름 아닌 김정일이다.
            (2008. 4. 1.)                


 

[ 2008-04-01, 16: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