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나무심기는 아궁이에 나무심기
북한에 나무심기? 이보다 우스운 희극이 없고 이보다 눈물나는 비극이 없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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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에 나무심기 공약을 실천하겠다고 밝히며 이산화탄소가 줄어드는 '반대급부가 있는 지원'이라는 상호주의 논리로 각하의 말씀에 무게를 더하자, 여기저기서 '옳소, 옳소!' 적극 지지하고 나서고 있다. 30년간 8억 달러를 들여 북한에 나무를 심으면 12억 달러의 생산으로 4억 달러의 순이익이 창출될 거라는 연구논문도 발표되었고, 대통령은 일거양득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엔 일거삼득이라는 애국애족 칼럼도 곧장 뒤따라 나왔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대통령 말씀과는 별도로 스스로 계획한 대로 직접 북한에 가서 나무를 심겠다는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정치발언을 언론에 흘리고, 멀리 미국에서는 골프 태극전사 최경주가 '북한 나무심기 재단'을 설립한다고 응원 메시지를 보낸다. 어떤 신혼부부는 금강산에 관광 가서 떨리는 손으로 고성능 카메라 앞에서 한 그루 나무를 심는다. 우습다. 슬프다. 이보다 우스운 희극이 없고 이보다 눈물나는 비극이 없다.

 

  국회의원 시절 북한인권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김문수 지사까지 전 경기지사, 대선 경선에서 희망이 없어지는 순간 친북좌파 본색을 드러낸 손학규의 북한에 모심기 쇼 뒤를 따르는 것을 보니, 암담한 생각까지 든다. 다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소림사에서 익힌 천하제일 무술만 믿고 윗통을 벗어제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벼락치는 기합소리와 함께 적진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격이니까! 

 

 다행이랄까, 북한에서 식목 행사를 거부했다. 청와대나 경기도청이나 조금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만간에 남북 사이의 경색 국면이 풀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으니까. 30년 계획이니까! 어찌 저리들 순진하실까.

 

 한국은 원래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지만 후에 벌거숭이가 된 산에 다시 푸른 옷을 입히는 데 성공한 나라다. UN에 따르면, 이런 예는 전세계에서 유일하다. 오늘날 중국을 보면 알겠지만, 산업화와 산림녹화는 정반대 현상인데, 한국에선 그 둘이 함께 이뤄진 것이다. 개발과 보존이 손에 손잡은 한강의 기적은 이렇게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일이다. 악명 높던 한국의 벌거숭이산은 일제시대부터 그렇게 된 줄 알거나, 해방 이후에 그렇게 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둘 다 틀렸다. 1894년 갑오경장의 해이자 청일전쟁의 해에 부산에서 두만강까지 두루 여행한 영국의 지리학자가 있었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 그녀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서울 근교의 언덕들(영어의 hills는 해발 1,000m 이하의 산과 구릉을 뜻함 --최성재 역주)과 그 인근의 해안, 항구, 주요 도로의 황폐함은 매우 인상적인데, 그것은 이 나라에 대해 꺼림칙한 생각을 갖도록 하는 데 일조한다. 또 한국 남부의 많은 곳에서 삼림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보존되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망자(亡者)들의 덕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부와 동부 지역의 산 속에는, ... 오늘날까지 나무꾼들이 손 댄 흔적조차 없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삼림이 존재한다. --이인화 옮김

 

 나무꾼들이 접근할 수 없는 높고 깊은 산과 조상들이 잠자고 있는 엄숙한 종중산 외에는 이미 한일합방 전에 나무가 거의 사라졌다는 기록이다. 일제는 백두산 근방의 원시림에 톱과 도끼를 들이대어 압록강과 두만강에 일년 내내 뗏목을 띄우기도 했지만, 산에 산에 나무를 숱하게 심기도 했다. 식목행사는 해방 후에도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도 장면 정권 때도 박정희 정권 때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60년대까지 반세기 노력이 헛고생이었다. 왜? 그 나무들은 모조리 아궁이로 들어가거나 절로 말라 비틀어 죽어 버렸으니까! 아무리 엄하게 단속해도 소용없었다. 산림계에서 떴다, 하면 일제히 집을 비우고 도망가면 그만이었으니까!

 

 나는 중학까지 산골짜기에 살아서 왜 그런지 잘 안다. 우리는 겨울이면 눈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산에 나무하러 가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공부보다 중요했다. 겨울방학 때만 아니라 방과후에도 나무를 한 짐씩 해야 했다. 10리 길을 걸어 집에 돌아오면 책보(책가방은 중학생이 되어야 들고 다닐 수 있었음)를 집어던지고 망태나 지게를 지고 바로 산으로 달려갔다. 그 때는 너나없이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나무하러 다녔다. 그리고 식목일에는 산에 들에 나무를 엄청 심었다. 소용없는 줄 알았지만, 학교서 시키고 면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무들은 기껏 며칠 후면 길어야 몇 달 후면 대부분 말라비틀어지거나 용케 살아 남았다고 해 봤자 사춘기 소년의 키보다 안 자랐다. 말 그대로 나무처럼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는 데는 사람이 사는 집 근처 또는 학교나 면사무소, 경찰지서 등 관공서 울타리 안팎이었다.

 

 산이 너무 메말라 설령 묘목을 복합비료와 같이 심어도 몇 달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온 기적이었다. 입산금지! 아예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면사무소 산림계에서 산밑에 크게 입간판을 세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비실비실 웃었다. 탁상행정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서히 산에 나무가 우거지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한 번도 식목행사에 동원된 적이 없다. 그러나 가끔 고향에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노래나 구호에서나 존재할 것 같던 푸른 산이 그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절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어느새 전교생이 집게를 들고 지겹게 잡던 그 많던 송충이도 흉측한 모습을 감추었다. 당시에는 왜 그 때 사람들이 당국의 말을 잘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거기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산에 나무하러 갈 사람이 없었다. 경제가 본격적으로 도약하기 시작하면서, 너도나도 도시로 공부하러 가거나  취직하러 나갔던 것이다. 식구가 몽땅 도시로 나가면서 폐가가 속출했다. 배운 게 없어 넝마주이가 되어도 농촌보다는 살기 좋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사주단지를 집어던지고 우르르 도시로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바꾸러 나갔던 것이다. 명절만 되면 출세한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공장에서 단 1년 만에 논 한 마지기 살 돈을 번 얘기, 시장에서 도시 사람 뺨치게 물건값을 확 깎은 얘기 등에 농촌에 남은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문희와 신영균과 어린 김정훈이 나온다는 영화 얘기는 또 얼마나 신나던가! 눈물나던가! 듣고 또 들어도 그 때마다 재미있었다. 나중에 직접 영화 볼 때보다 더 재미있었다.
    
 둘째, 농촌에 그 무렵부터 새마을 바람이 후끈후끈 불기 시작하면서 겨울철에 산에서 나무하는 것보다 한결 나은 돈벌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까짓 몇 푼 된다고 힘들게 나무하러 다니느냐.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도 민주 국가인데, 법도 지켜야지! 안 그래? 머잖아 1980년이면 일인당 국민소득 1000불에 수출 100억 불이 된다고 하잖아. 우리 농촌도 도시 사람 못지않게 잘 살려면 농한기에도 일을 해야지! 안 그래?

 

 셋째, 농촌에도 구공탄을 때기 시작했다. 전에는 연탄이 비싸서 연탄 아궁이를 공짜로 만들어 주어도 방치할 판이었는데, 이제는 통일벼가 공급되어 소출도 왕창 늘어난 데다 이중곡가제를 실시하고 경제작물을 심고 농한기에도 일을 하여 그 정도의 돈은 별로 부담이 안 되었다. 다행히 당국에서도 입산금지 정책을 조금 완화하여 어떤 산을 정해서 10등분하여 해마다 그 중 한 군데는 나무를 해도 괜찮다고 허가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무도 산에 나무하러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 지나자 산소 가는 길이 없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제일 먼저 들은 수수께끼.
 형: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 딱 벌린 게 뭐게?
 나: 와, 어렵다. 아가리가 그렇게 큰 게 있나. 그게 뭐꼬?
 형: 이 빙신아, 그것도 모르나. 아궁이 아이가. 아궁이!
 나: 와, 맞네! 히야는 천재다. 그런 것도 다 알고. 하나만 더 알려 줘라.     

   
 1976년 북한에선 식량자급에 대한 구국(실은 망국)의 결단이 내려졌다. 김일성의 뙈기밭 개간 교시에 따르면, 500M 이하의 산으로 경사 70도 이하는 모조리 개간하라는 것이었다. 영원무궁 식량을 자급하겠다는 당찬 결의는 즉시 실행으로 옮겨졌다. 그 후의 사정은 이제 한국 사람도 잘 아는 바다. 그 미친 것이 협동농장을 해체하여 이승만처럼 농민에게 싸게 농지를 불하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면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리는데, 협동농장은 곧 독재권력의 기초니까 그렇게는 죽어도 못하고 애꿎게 그나마 좀 남아 있던 군데군데 푸른 산을 온통 발가벗겨 식량증산도 못하고 산사태만 연례 불청객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원조 경제, 약탈 경제에 기대 살 게 아니라 북한이 스스로 먹고사는 방법을 찾아, 곧 스스로 개혁하고 개방하여 이승만을 뒤따르고 박정희를 뒤따르지 않는 한, 북한에 나무 심는 것은 아궁이에 나무 심는 거나 마찬가지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산에는 절대 나무가 우거질 수가 없다. 사람 목숨이 나무 목숨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 부모와 내 자식이 굶어 죽게 되었고 당장 온 식구가 얼어 죽게 되었는데, 나무는 무슨 얼어 죽을 나무인가. 껍질을 벗겨 먹을 수 있으면 있는 대로 발겨먹고 불을 지펴 방구들을 데울 수 있으면 보는 족족 베어서 집으로 져 날라야지! 제발 정신들 좀 차리시라.
엎드려 빌거니와, 부디 쇼 좀 그만하시라.           
       (2008. 4. 3.) 
 

 

[ 2008-04-03, 16: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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