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와 여론
훌륭한 지도자는 여론을 주도하고, 나쁜 지도자는 여론을 오도(誤導)하고, 어리석은 지도자는 여론을 추종한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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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지도자의 최대 덕목은 민심 순응에서 여론 존중으로 바뀌었다. 변화가 적었던 과거에는 민심도 변화가 적었다. 고조선 시대의 민심이나 한말의 민심이나, 시간으로는 4천년의 차이가 있었지만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임금이 치산치수를 잘하여 풍년이 들고,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세금 적게 걷고 부역을 가볍게 하고, 군기가 엄정한 군대를 길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해 주면, 민심은 천심이 되어  세세 연년 나라님을 칭송했다. 

 

 변화가 잦아진 근대 이후로 거의 고정되었던 민심은 수시로 변하는 여론으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지도자도 여차하면 바뀐다. 선거 제도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선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정권의 변화가 부쩍 심해졌다. 선진 7개국에 속하지만, 이태리는 지난 60년 동안 평균 1년에 한 번 꼴로 수상이 바뀌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정권이 제일 자주 바뀐다. 그런데도 이들 두 나라는 끄떡없다. 오히려 정권이 자주 바뀌지 않는 여러 후진국에서 불안과 혼란이 더 심하다. 정치 외 다른 부문에서 선후진국이 크게 차이 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론을 측정하는 방법도 점점 정교해졌고, 여론을 조작하는 기술도 그만큼 발달했다. 지도자 또는 지도자를 꿈꾸는 자들은 권력을 잡는 첩경인 여론의 고속도로에 올라서기 위해 주로 세 가지 방법을 썼다. 훌륭한 지도자는 여론을 주도하고, 나쁜 지도자는 여론을 오도하거나 조작하고, 어리석은 지도자는 여론을 추종한다. 예나 제나 훌륭한 지도자는 매우 드물다. 여론을 주도하려면, 통찰력과 조직력에 더하여 용기와 겸손을 두루 갖추어야 하는데, 천재나 미인이 드물 듯이 이런 걸출한 지도자는 혈통으로 계승되든 물리력으로 스스로 올라서든 선거로 뽑히든 매우 드물다. 옛날에는 왕조 초기에 이런 지도자가 3대 연이어 나오면 200년 이상 유지되는 태평성대가 도래했고, 현대사회에서는 한 세대에 한 명 정도 이런 지도자가 나오면 그 나라는 선진국 소리를 듣는다. 인류의 반 이상을 차지한 구 공산권에서는 약 두 세대에 걸쳐서 훌륭한 지도자가 단 한 명도 안 나왔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여론을 조작하고 오도하고 선동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이윽고 인간 신(神)들은 국민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게 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자들은 강제수용소의 몽둥이와 방송의 이빨로 겉으로 드러난 여론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민심은 어쩔 수 없다. 생명의 뿌리에 닿아 있고 사랑의 열매를 먹고사는 민심은 조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작되고 오도된 여론 아래 저 깊은 곳에서 들끓던 민심의 거대한 용암이 이따금 가느다랗게 솟구치는 연기의 정체를 알아채고, 그 용암이 전쟁을 능가하는 지진을 일으키기 전에 그에 순응한 것이 바로 공산국가의 개혁개방이다.   

 

 포퓰리즘은 오도된 여론을 추종하고 선동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중남미에서 이런 자들이 대활약했다.

 

 남북분단으로 한국은 여러모로 북한에 비해 매우 불리했다. 일제가 산업시설의 90%를 북한에 건설했고 천연자원도 압도적으로 북한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시대라면 들이 넓은 한국이 유리했겠지만, 이미 한반도는 일제시대에 초기 산업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북한이 훨씬 유리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군은 공산형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된 세력이었지만, 미군은 아무런 준비 없이 얼떨결에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미군정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을 뿐 아니라 당장 코앞의 현안인 좌우의 대결에 대해서도 6·25가 발발하기 전까지는 도통 감이 없었다. 소련이 처음부터 악의를 갖고 두만강을 건넜음에 반해, 미국은 선의를 갖고 태평양을 건넜지만 그 방법이 너무 서툴렀다. 어제의 적을 내일의 친구로 만들기 위해 맥아더가 작심하고 체계적으로 일본에 접근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다행히 어지러운 한국에는 여론을 주도한 지도자,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다. 그런 그도 말년에는 실정(失政)하여 나라를 혼란의 늪에 빠뜨렸다. 혼란의 늪 바깥에는 불안의 안개가 자옥했다. 천우신조로 이내 국가를 혼란의 늪에서 건져 올리고 국민의 마음을 짓누르던 불안의 안개를 걷어 버린 지도자 즉 여론을 주도한 지도자가 다시 나타났다. 한민족 역사상 몇 손가락에 꼽힐 지도자요, 2차대전 이후 탄생한 무수한 후진국에서 첫 손에 꼽힐 지도자였다. 그가 바로 박정희다. 그는 선진7개국(G7)이 100년에서 200년에 걸쳐 이룩할 일을 불과 18년만에 달성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여론이 그에게 서서히 돌아섰고, 나중에는 놀랍게도 민심이 그에게로 쏠렸다. 지금도 민심은 박정희 한 사람뿐이다. 민심은 일단 형성되면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제 북한 주민의 민심도 박정희 한 사람에게 향해 있다.

 

 불행히 한국에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끈질기게 여론을 조작하고 오도하는 무리가 존재했다. 그들에게 이승만과 박정희는 밥맛 떨어지는 자요, 재수 옴 붙은 자다. 여론을 조작하고 오도하려면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종교화한 이론이 있어야 한다. 박정희라면 이를 가는 자들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게 한국의 지식인 중에 깊고 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이 민심에 무관하게 조작하고 오도한 여론의 바람을 타고 이들의 대표선수 중 한 사람이 권력의 월계관을 쓰기가 쉬워진다. 과연 그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썼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무덤에서 꺼내어 침을 뱉고 매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 네 번째다. 그 사이 김일성과 김정일은 민족의 반열에 올라섰고 이승만과 박정희는 친일파의 불명예 전당에 갇혔다.

 

 이명박 정부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 조작되고 오도된 여론도 전략적 묵계를 맺어 수도권을 중심으로 상당수 이명박 정부를 밀었지만, 그 여론조차 얼굴을 바로 드러낼 수는 없어서 박정희 민심의 등에 올라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론 전쟁 곧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박정희 민심과 슬슬 거리를 두고 김정일-김대중-김영삼 여론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어찌된 셈인지 평양방송과 KBS와 MBC가 아무리 할퀴거나 꼬집거나 물어뜯어도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된통 당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무엇보다 좋은 기회다. 비록 노무현 정부가 박정희 민심에 떠밀려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세계5대 제조업 강국으로서 한국은 지난 15년간 수백 조 원의 돈으로 응석받이 키우는 식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자립형 기업농을 육성하는 선진농업에 대한 비전과 정책을 마련한 후 민심에 호소하여 한미FTA를 성공시키면, 여당과 야당을 함께 설득하여 앙숙이었던 전임 대통령이 시작한 북미경제자유무역협정(NAFTA)을 발효시킨 클린턴의 인기를 얻을 수 있다. 사장이 단독으로 훗날 뒤돌아보면 옳을 게 틀림없는 정책을 단숨에 결정하고 불도저에 직접 올라타고 밀고 나가면, 사원들이 헐레벌떡 우르르 따라오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그 신화를 오늘에 멋지게 재현하려다가, 불도저 대통령은 호시탐탐 틈만 노리던 무시무시한 여론에게 직격탄을 맞았다. 여론을 주도할 절호의 기회에서 여론의 역풍을 만나면서, 여러모로 찜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차선책으로 지지했던 민심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코드가 동일한 노무현 정부가 앞장서도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사람들이 방송을 그대로 장악한 상황에서 가만있을 리 없는데, 이명박 정부는 이를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불도저 뒤에 당연히 따라나서야 할 이들도 주춤거리고 있다.  

 

 조작되고 오도된 여론만 들끓는 게 아니라 절로 형성된 민심도 흔들리자, 당연히 손을 잡아 줘야 할 동지와 머잖아 손을 내밀 잠재적 동지도 절차상의 하자를 들먹이며 여론에 동조하거나 기세등등 나섰다가 부릉부릉 소리만 요란한 불도저를 쳐다보며 뒷짐을 지게 이르렀다. 여론을 조작하고 오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한 여론을 추종하는 이들이 여당 안에서도 여기저기 생겨나게 되었다. 야당과 당만 다를 뿐 원래 초록이 동색인 자들, 자칭 당내 개혁파들이 많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비온 뒤에 땅이 굳기도 전에 다시 비가 오고 바람이 불 수 있다.  

 

 김정일에게 오른쪽 뺨 맞고 왼쪽 뺨 내미는 식으로는 박정희 민심을 얻을 수 없다.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는 양시론(兩是論)적 입장을 가진 정체불명의 책상물림을 삼정승을 능가하는 도승지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기반장도 아울러 맡기고 그가 연설문 하나하나 일일이 서너 시간 토막 잠까지 쪼개어 OK 사인을 내려야 안심하는 식으로는 박정희 민심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7천만 한민족이 은연중에 함께 형성한 박정희 민심을 점점 돌아서게 만들  뿐이다. 그러면 이명박 정부는 조작되고 오도된 여론과 적이 아니라 전략적 동반자라는 의구심을 받게 된다. 여론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여론을 추종하게 된다. 제2의 김영삼 정부가 된다.
                (2008. 5. 10.)      
    

[ 2008-05-10, 17: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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