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현장 구천에서… 백제 聖王의 기록
[고성혁의 역사추적] 관산성 전투2- 비극의 현장 구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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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설명 :관산성 전투지역 구글어스 위성지도와 궂은벼루(구천)의 위치표시

 

 

 위 그림과 지도를 보면 자연스런 의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었다는 관산성 바로 앞인 구천(궂은벼루)에서 백제성왕은 신라군에 사로잡혀서 죽게 되는데 어쩌다가 달랑 보기병 50명만 거느리고 신라군이 포진하고 있는 관산성 바로 코앞을 이동했는지 군사적 시각에서 보면 그 연결성에 이해 못할 부분이 너무도 많다.

 

역사의 기록중에서 특히 전투의 기록은 그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군사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작전지도로서 그려낼 수 있어야만이 제대로 된 역사의 재구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난 그 역사의 현장인 옥천을 찿아가서 관산성에 직접 올라가 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역사추적의 목적

 

  신라폄훼의 역사관은 중국의 동북공정보다도 더 나쁜 자학적 잘못된 역사관이다. 


관산성 전투의 결과는 훗날 삼국의 전쟁에서 가장 뒤쳐졌던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단초가 되는 그런 전투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관산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미미하고, 그에 대한 접근도 보면 대체로 감성적으로 흐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감성적으로 흐른다 함은 신라가 배신하여 나제동맹을 깨트렸다라든가, 뒤통수 맞은 백제라든가 아니면 비열한 신라의 이런 속성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같은 민족을 공격했다라는 것으로 신라를 폄훼하는 시각의 역사책이 많음을 보고 이것은 잘 못되었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적 개념인 오늘날의  민족이라는 시각으로  삼국시대를 재단하는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삼국시대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자국의 국익을 위해서 투쟁하고 싸워 나갔을 뿐이다.  이점을 간과하고  감성적 민족의식으로 신라를 폄훼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보다 더 나쁜 잘못된 자학적 역사관이다. 오히려 우리가 책임을 묻는다면 국론을 통합하지 못하고  국제정세에 따르지 못하여 망국의 길로 걸었던 백제나 고구려에서  찿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론을 통일하고 국제조류와 정세에 적극적으로 임한 신라를 비난하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국익우선의 국제사회에서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쟁은 오늘날 현대에 와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있는데 특히 관산성 전투를 전후로 한 삼국의 역사는 더더욱 그러하다. 영원 한 敵(적)도 그리고 영원한 우방도 없는, 힘이 좌우하는 냉혹한 국제질서에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바를 이 관산성 전투에서 찿아보고자 함이 나의 역사추적의 시작이다. 특히 감성적이 아닌 군사적 관점에서 논리적이고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앞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


 

1-1삼국사기 본기 백제 성왕의 기록

 

백제 성왕의 할아버지인 백제 개로왕도 장수왕의 침공으로 지금의 아차산성밑에서 참수되는 비극을 겪었는데 그 손자인 성왕도 그과 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참극을 맞이하였으니 3대에 걸친 비극은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성왕의 기록을 살펴보자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재위기간 31년>

 

성왕의 이름은 명농이니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붕어하고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1년 가을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3년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4년 겨울 10월,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7년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10년 가을 7월 갑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12년 여름 4월 정묘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16년 봄,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18년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9년, 왕이 양 나라에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 박사와 열반(涅槃)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 화가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 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25년 봄 정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27년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질렀다.겨울 10월, 왕이 양 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31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에 전하는 기록이다.

 

순간의 방심이라면 방심이랄까 아니면 신라의 치밀한 공작이었을까 모를 일이지만 결과는 백제성왕의 무참한 죽음이었다. 아마도 백제성왕의 죽음은 우리 역사상 그 어느 군주보다 치욕적이면서 비극적이라고 할수 있을 게다. 여기에 비한다면 조선시대 인조의 3배구고도의 굴욕은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떡하다가 백제성왕이 그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 하는 의문이었다. 삼국사기엔 그저 몇줄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앞서 표기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백제본기가 전하는 기록은

 

성왕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라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성왕과 동시대를 기록한 신라본기에는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을까? 신라 진흥왕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던 백제성왕 32년(554년)은 신라 진흥왕 15년에 해당한다.

 

1-2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진흥왕 15년 관산성 전투기록

 

진흥왕 15년 가을 7월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명활성을 수리해 쌓았다.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참고로 가량<加良>이라고 표기된 것은 가야를 말한다.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가른 역사의 분수령인 관산성 전투에 대한 우리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서 전하는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 반면에 일본서기엔 관산성 전투의 당시 상황을 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일본 서기의 내용은 차츰 말하기로 한다.

 


비극의  현장 구천 (궂은 벼루)


사진 설명 : 관산성에서 내려다 본  구천(구진베루, 구즌벼루) 전경



바로 이곳이 궂은벼루라고 불리는 구천이다. 역사기록엔 백제성왕이 554년 이곳 구천에서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된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위치해 있다. 약 30미터 높이의 깍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이어지고 절벽 밑으로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곳이다. 아마 당시에 저 벼랑뒤쪽에 신라군이 있었으리라고는 백제 성왕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봐도 저곳은 자연적인 요세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자연 해자인 서화천을 끼고 절벽으로 막혀있는 뒤쪽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아마도 신라군은 그 절벽뒤쪽에 주둔하였으리라 생각이들어서 현장을 확인해 보러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저 절벽 뒤쪽으로 돌고돌아 가보았다. 좁은 농로길을 어렵사리 찿아 가본 그곳에서 난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엔 아직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옥천이라는 교통의 요충지를 유사시 지키기 위한 군부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신라군의 통찰력에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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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관산성 바로 아래엔  오늘날도 국군이 주둔하고 있다.  



1500년의 장구한 시간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오늘 현재 그대로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 옛날 역사의 현장 모습이 내 머릿속에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철책선 안쪽에 들어선 GP처럼 신라는 관산성을 뒤로 하고 백제군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이곳에서 주둔하였으리라 하는 짐작을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과거 신라군이 주둔했음직 한 곳을 확인하고 다시 궂은벼루로 발길을 돌린다. 이번엔 성왕의 심정이 되 보기로 했다. 성왕 32년, 서기로는 554년 이길을 따라서 멀리 보이는 백제의 산성으로 말을 달려가던 성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몸져 누운 아들생각에 바로 코앞에 신라군이 매복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리라. 아픈 자식을 눈앞에 둔 아비의 심정에 적군의 위협은 안중에도 없었을까?




사진 : 백제 성왕이 죽은 현장인 구천 (오른쪽 벼랑을 보고 궂은벼루라고 한다)

          기록엔 성왕이 궂은벼루 아래서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여간 바로 이 길은 그 옛날 백제산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또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성왕32년으로 날라가 본다.  현재 이곳은 백제진영이다. 오른쪽 사진에선 안보이지만 구천(궂은벼루)라 불리는 벼랑밑으로는 서화천이 흐르고 있고 저 벼랑뒤쪽으로는 막 도착한 신라의 기동군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는 백제성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전 병력을 이곳 관산성 일대로 집결시키고 있고 그에 따라서 삼년산성에 주둔하던 신라군이 바로 저 벼랑 뒤쪽 구릉에 막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던 백제 성왕은 그저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에, 또 한편으로는 전황이 불리해지고 있다는 걱정에 그 수습책을 생각하느라 미처 신라군의 동향을 파악치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성왕은 이 길을 따라 약간의 호위병력 50여명과 함께 태자 부여창의 진영으로 가고 있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이런 백제 성왕 일행을 저 절벽위에서 보고 있던 신라군은 병력이 소수인 것을 알고 급히 요격부대를 풀었으리라.


날은 저물고 오직 성왕일행의 말발굽소리만이 계곡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저 길을 가고 있을 그때 신라병력은 매복하여 성왕의 일행이 지근거리에 오기까지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사방에서 함성이 들리면서 신라군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을때 백제성왕은 얼마나 놀랐으랴? 청천벽력이 바로 이를 두고 한 소리일 것이다. 아들이자 태자인 부여창이 지키고 있는 산성을 눈 앞에 두고 순간의 방심에 허를 찔린 백제성왕의 눈앞엔 무엇이 어렸을까?


신라군에 의해서 목이 잘리는 모습을 궂은벼루는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을텐데 아무 말이 없다. 성왕이 뿌린 붉은 피를 그대로 머금었을 구천의 벌판은 역시나 조용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있은 그날의 사실을 역사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조 32년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 15년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비해서 일본서기의 기록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흠명천황 15년조의 기록이다.

 

명왕(明王)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국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청하였다. 명왕이"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수없다"하니, 고도가"우리 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하여 참수당하였다.

 

 

<계속>

[ 2010-04-15, 09:4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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