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백구십년경 가을 어느 날 고영근 목사가 나를 찾아왔었다. 처음 보는 분이었다. 그 무렵 나는 심신이 피폐했었다. 처절할 정도로 학대를 당하는 한 죄수의 인권문제를 제기했다가 오해받고 비난을 당할 때였다. 고영근 목사는 내게 힘을 내라고 하며 돈 십만 원이 든 봉투를 전해주고 갔다. 눈치를 보니까 남에게 돈을 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 분이 아닐 것 같았다.

그에 대해 조금 알아보았다. 그는 박정희 정권시대 반독재 투쟁으로 몇차례 투옥이 됐던 분이다. 그는 천구백팔십이년 오월 십팔일 광주에 가서 추모예배설교를 맡았었다. 그 자리에서 “아벨의 핏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처럼 광주 시민들의 고귀한 핏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 결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지 말며 폭력에 굴복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험한 공안정국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끌려가기도 했던 성직자였다. 나는 엘리야 같은 대단한 분이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 얼마 후 나는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까치산역 앞에서 고영근 목사를 만났다. 근처의 소박한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언덕 위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낡은 단독주택의 안채는 아들에게 주고 그는 문가의 작은 방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좁은 그의 방 벽에는 철제 책장이 보였고 그 안에는 그가 쓴 책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북아현동에서 하던 교회를 그만두고 깨달은 것들을 책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있다고 했다. 그 작은 방에서 혼자 글을 쓰고 혼자 편집하고 인쇄소에 맡겨 책이 나오면 그 책 뭉치들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배포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의 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그 중에서 그가 했던 이런 말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구속됐어요. 나를 정치범으로 분류해서 독방에 가두었는데 주변 방들은 모두 미전향 장기수들이더라구요. 보니까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잡혔는데 정부에서 전향을 하라고 해도 평생 사상을 꺾지 않고 노인이 될 때까지 그곳에 있는 거예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는 방에 그런 미전향 장기수가 있었어요. 그 안에서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조금씩 말을 하게 돼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자기는 남조선해방을 위해 사상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평생 투쟁을 하는데 남쪽의 목사들은 왜 북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순교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 말 속에는 대한민국의 목사나 성직자들에 대한 비아냥이 들어 있었어요.”

고영근 목사가 한 그 말은 밀물같이 들어와 나의 가슴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미전향 장기수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도 과연 믿음이 있는지 나 자신이 의심 스러웠다.

내가 봤던 종교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서울의 한 교회 사람들이 필리핀에 단기 선교를 갔다. 그들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반군 지역에 잘못 들어섰다. 반군들이 쏜 위협 사격의 총알이 버스를 뚫고 들어와 앞자리에 있던 젊은 부목사의 배에 맞았다. 피가 뿜어져 나오고 버스 안은 공황상태가 됐다. 그 일행들이 반군들의 캠프로 납치가 되어 한 곳에 감금됐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에게 이미 믿음은 없었다. 반군의 젊은 대장은 믿음을 버리면 석방하고 예수를 계속 믿고 싶은 사람은 바로 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들을 인솔하던 나이먹은 남자 장로가 일행에게 말했다.

“사태가 이런데 일단 모두 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버린다고 합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거 아니요?”
같이 간 여신 도중 몇 명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동안 목사님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설교했잖아요? 장로님 왜 그러는 거예요?”
“아니 이년들이 이런 상황에서 답답한 소리 하고 있네. 이걸 그냥.”

장로는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나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 같았다. 성경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모두 비겁한 겁쟁이였다. 예수가 붙잡히자 모두 도망을 갔다. 베드로는 벌벌 떨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했다. 그런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강한 신념과 신앙의 소유자가 됐을까. 성경이 내게 제기한 깊은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강해질 수 없는 것 같다. 성령이 들어와야만 비로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