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태영 변호사 “왜 예수가 난 날만 공휴일인가”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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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변호사의 삶의 흔적>
  
  나의 아버지 연배인 김이조 변호사는 살아있다면 지금 구십대 중반이다. 전화를 걸면 그 번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번호였다. 아마도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법조의 역사를 쓴 분이다. 자신이 시간을 내어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자료를 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변호사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의 돈으로 책을 만들어 사법연수원이나 법원에 보냈다. 그 자신이 살아있는 법조 역사였다. 일기를 뒤지다 보니 스산한 바람이 불던 이천팔년 삼월 이십사일 그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약속도 안하고 핸드폰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가 가는 분이었다. 그와 차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 끝에 물었다.
  
  “선배님은 일제 강점기 뭘하고 지내셨어요?”
  나는 아버지 같은 선배변호사들에게 틈틈이 그들의 삶을 물었다. 나중에 그 분들이 저 세상으로 간 후 그 말들 자체가 역사가 될 것 같았다.
  
  “일본 통치하에서 저는 교원시험에 합격해서 소학교 선생이었죠. 그때 열일곱 살이었는데 난 뭐가 뭔지 몰랐어요. 교실 앞 벽에는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자는 구호가 붙었고 그 앞에서 일본어로 아이들을 가르쳤죠. 내 이름 자체가 일본 이름이었고 학생들을 데리고 군대 가는 병사들 환송식에 갔었죠. 마지막에는 내가 병사로 군대에 끌려갈 차례였는데 그때 해방이 된 거죠. 내 고향이 함경남도 영흥인데 친일파를 붙잡아서 인민재판을 하는 걸 봤어요. 일본사람과 특별히 내통을 했다고 떠들던데 그냥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의 말 속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사람들의 의식이 느껴졌다. 그는 해방 후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됐다. 부장판사를 끝으로 변호사가 되고 환갑을 맞이한 해부터는 개인적인 법조 역사가로 나선 것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법조인들을 연구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버지 연배인 그의 나이 또래의 변호사들 얘기를 듣는 것도 법조역사였다.
  
  “해방 후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특징이 있는 동료 변호사들 얘기 좀 해주시죠.”
  그의 생생한 관찰과 경험을 듣기 위해 물었다.
  
  “장단점이 분명한 용태영 변호사가 있어요. 그 분은 공업학교 출신이예요. 용태영 변호사는 공업학교에서 작문에는 꼭 일등을 했대요. 그런 글재주가 있어서 그런지 팔십대인 지금까지 자기 수필집만 열 권이 넘게 썼지? 아마? 그리고 그 서슬이 시퍼런 독재 시대에도 배짱이 두둑하게 살아온 사람이예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얼마나 무서웠어요. 자기 집 마당도 도시계획을 한다면 보상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이 잘려나가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죠. 박정희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를 넓힌다고 그 동네 집들에 대해 모두 계고처분을 내렸어요. 그런데 용 변호사 혼자 그 처분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거에요. 법원도 꼼짝 못하던 그 시절인데도 우연히 법원이 용 변호사 손을 들어줬어요. 용 변호사 혼자 서울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청와대 지역에서 살게 된 거죠. 이층집을 지어서 아들과 함께 잘 살고있어요. 특이한 건 그 집 앞에는 금칠을 한 커다란 불상이 있는 거에요. 불교 신도라서 그렇기보다는 조계종에서 그 변호사에게 선물을 한 거죠.”
  
  “왜 조계종에서 부처를 선물했죠?”
  그것도 특이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용 변호사가 왜 예수가 난 날만 공휴일이고 부처가 난 날은 아닌가 차별 취급을 하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소송을 제기했죠. 그래서 석탄일이 공휴일이 된 거죠. 특이한 일을 참 많이 한 사람이에요. 새로지은 법원의 엘리베이터도 용변호사 때문에 다른 변호사들이 덕을 보고 타고 올라가는 겁니다. 법원을 신축할 때 판사들 엘리베이터만 만들고 변호사나 일반인들은 오층 법정까지 걸어올라가게 만들었어요. 왜 판사와 국민들이 차별되어야 하는지를 문제삼은 거죠. 그래서 일반인용 엘리베이터가 법원건물에 설치된 겁니다.”
  
  “그렇게 돌출된 행동을 하다가 정보부에 끌려가 혼이 나지는 않았습니까?”
  그 시절은 그랬다.
  
  “몇 번 끌려간 모양인데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았어요. 대단한 배짱이죠.”
  
  같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면 욕을 하는 게 세상이었다. 그 용 변호사가 생존해 있을 때는 뒤에서 따돌리고 비난했다. 큰 강물에는 돌을 던져도 그 흐름이 흩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비난에 동요되는 자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다. 그는 큰 그릇인 것 같았다. 그리고 변호사로서 자기 일을 하다가 간 분 같았다.
[ 2020-10-24, 21: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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