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한 목소리에 기교 없는 창법(唱法)·…1개월 만에 5만 장 판매
김장실의 트로트 이야기(5)타향살이(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 1934년)

김장실(前 국회의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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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북방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고향의 사방 백리를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자 식민 지배를 당하는 2등 국민으로 살아가는 서러움이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다. 살기는 힘들고, 말도 행동도 제약이 너무 많아 가슴이 답답하였으나 어디 가서 호소할 데도, 울분을 풀 길도 없었다.
  
  특히, 농촌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는 상태에서 도시에 새로운 산업이 들어서면서 기회를 찾아 혹은 학업 등을 이유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점차 고향을 떠나 살기 시작하였다. 소수의 선각자들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다수의 민중들은 먹고 살기 위해 만주나 연해주, 일본, 미국 등으로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일제(日帝) 시대에 일본에 240만 명, 만주에 200만 명의 한국인이 살게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조선 땅을 떠나 모든 것이 낯선 수만리 타관 객지에서 꾸려가는 삶은 참으로 힘들었다. 일본인 등 다른 민족의 질시와 하대 등 온갖 모욕을 참고 견디며 지내야 했다. 이러다가 조선에서 온 순회악극단 공연을 볼 때 혹은 명절 때 고향사람들끼리 모여 밥을 같이 먹거나, 술을 한잔 하다 보면 두고 온 고향과 부모형제 생각이 절로 나면서 그간 쌓였던 서러움과 한(恨)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놓게 된다.
  
  그래서 일제 시절, 타향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사람들의 고향을 그리는 심사를 포현하는 노래들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이때 우리 대중가요계는 일제의 검열 등을 피하기 위해 님과의 이별이나 고향의 상실, 나그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바로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을 은유적으로 드러내었다. 그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다.
  
  이 노래를 부른 고복수는 1911년 경남 울산 태생이다. 그는 교회 선교사로부터 어릴 때부터 음악을 배워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1934년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조선일보 후원으로 개최한 <전조선명가수선발대회> 부산지역 예선대회에서 그는 1등으로 입상하였다. 그 이후 9개 도시에서 3명씩 모두 27명이 겨루는 본선대회에서 그는 과제곡 <비련>과 자유곡 <낙화암>을 불러 정일경, 조금자에 이어 3등으로 입선하였다.
  
  콜롬비아레코드사는 1등과 2등을 한 정일경과 조금자는 방송 출연, 레코드 취입 등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에 반해 고복수는 녹음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이상하게 홀대하였다. 이런 일로 매우 울적하여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던 차에 그의 잠재력을 확인한 흥행의 천재인 이철 사장의 권유로 오케레코드사로 이적(移籍)하였다.
  
  오케레코드사로 오자 그는 고향 김천을 떠난 이후 가슴에 쌓인 향수에 어린 회한과 눈물을 능숙하게 표현한 김능인 작사를 뛰어난 선율로 그린 작곡가 손목인이 작곡한 노래를 1934년 6월 처녀작으로 취입하였다. 레코드의 앞면은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이원애곡>을, 뒷면은 <타향살이>(원제 타향)가 실렸다. 고복수의 구수한 목소리에 기교 없는 창법이 돋보이는 이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1개월 내에 5만 장이 팔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가 이 노래를 부르는 공연장에 온 기생 팬들이 울음바다를 이루었고, 심지어 울다가 까무러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만주 용정(龍丼) 공연 때 이 노래를 들은 부산 출신 30대 여인이 고복수를 찾아와 남편은 죽고 고향 갈 차비가 없다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고향의 집 주소를 주면서 안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 후 그 여인은 자살하였다고 한다.
  
  한번 대중의 인기를 얻자 그는 계속 연타석 홈런을 쳤다. 1935년 4월에 낸 <사막의 한>도 히트하고, 1937년에 1월에 발표한 <짝사랑>도 대중의 큰 인기를 얻어 그 시절 최고의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한편 1937년 <알뜰한 당신>으로 인기를 얻은 황금심과 고복수는 <반도악극좌>에서 만나 사랑하다가 1941년 결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백조가극단 멤버로 활동하였고, 6·25 전쟁 중에는 인민군에게 연행되었으나 원산 근처에서 탈출하여 구사일생으로 살게 되자, 윤군 정훈공작대에 참여하여 군 위문 공연을 하였다. 1957년 은퇴공연에는 100여 명에 이르는 후배가수들이 참여하였다. 은퇴 이후 시작한 영화사업이 잘 되지 않아 서적외판원을 하며 어렵게 살다 1972년에 돌아가셨다. 그의 고향 울산시 중구 동헌 입구에 고복수를 기리는 노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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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향살이>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가 옛날
  
[ 2021-02-20, 16: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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