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따뜻한 사람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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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젊어서부터 아주 이기적이다. 나만의 스케줄을 정해 기계같이 그걸 따르고 하루가 지나면 계획표에 엑스표를 치고 스스로 만족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시간을 침범하면 속으로 불편해 하곤 했다. 요즈음은 그 수많은 엑스표 속으로 사라진 시간을 보면서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되돌아 본다. 미래의 나를 보면서 꾸었던 여러 가지 꿈들이 그 엑스표들과 함께 사라졌다.
  
  지난해 연말 잠시 며칠간 가출을 했던 적이 있다. 강가에서 혼자 사는 친구를 찾아갔다. 변호사인 그 역시 나같이 시간을 쪼개가면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와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대학 동기일 뿐이었다. 대학 시절이나 그 이후에도 어쩌다가 얼굴을 본 정도였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의 영(靈)이 그를 찾아가게 한 것 같다. 그도 삶의 틀이 있을 것이다. 그가 거절을 하면 다른 곳을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흔쾌히 자기 집에 받아들여 주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나와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어려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는 그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벗은 몸을 보여주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사생활을 개방하고 나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같이 이불을 덮고 잤다. 그는 내가 가출해 있는 며칠간 차를 운전해 내가 갈 곳에 데려다 주었다. 끼니 때가 되면 약한 다리 대신 양 팔꿈치를 싱크대에 받치고 밥과 찌개를 끓여 상을 차려 주었다. 내가 그의 다리가 되어주고 그의 머슴이 되어야 하는데 완전히 거꾸로였다.
  
  나만 생각하고 나의 계획대로 냉랭한 일생을 살아온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남은 여생을 살 만큼은 돈이 있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주고받는 거래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 인간의 내면에 있는 따뜻함이라는 결론이었다. 겨울의 푸른 물이 흐르는 강가에 찬바람이 불어도 그 친구와 함께 있는 동안 따뜻했다.
  
  살아오면서 우연히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서 고드름이 얼어붙은 내면을 녹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내게 삼십대 초반은 어깨에 강제로 짊어진 짐으로 인해 인생광야 길을 가기가 힘이 들었던 때였다. 회사에서 퇴직을 한 아버지가 일년 만에 중풍에 걸려 몸을 쓰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을 집에 모셔야 했다. 일찍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들·딸이 있었다. 세를 든 아파트에서 온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나의 입장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스쳐 지나가듯 알게 된 고등학교 선배가 있었다. 한두 번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고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검사인 그는 서울 근교 도시의 검찰청으로 가면서 나를 전직 법무장관이 하는 로펌에 추천해 주었다. 로펌이 처음 세상에 나타나는 초기에 국내에서 제일 큰 로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그 자리를 사양했다. 그 따뜻한 마음만 받았다. 그 선배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총책임자로 있는 지방의 검찰청 청장실로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 지역으로 와서 내가 여기 근무하는 임기 동안만이라도 법률사무소를 내는 게 어때? 그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거야.”
  
  그건 전관예우 같은 것도 아니었다. 특별한 학연으로 맺어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잘한 적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았고 따뜻함을 느꼈다. 나는 그에게 폐가 될까 봐 호의를 사양했다. 대통령의 비서관을 했던 그는 나중에는 대통령 직속 기관 지휘부의 좋은 자리로 나를 끌어들이기도 했었다. 인생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을 거의 다 살고 나서 요즈음 깨닫는 게 있다. 대통령을 했어도 문제가 생겼을 때 모두 도망치고 주위에 개미 새끼 하나 없는 경우가 있다. 그건 그의 냉랭함에 그 원인이 있기도 할 것이다. 냉랭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있어도 주위가 얼어 붙는다. 반면 따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칼바람 부는 눈 벌판에 있어도 춥지 않다. 뒤늦게 반성을 하고 마음에 불을 지펴보려고 하는데 잘 되지를 않는다.
  
[ 2021-03-09, 14: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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