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찔린 '왕(王)의 남자'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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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가 이혼 사건의 피고측 변호사를 맡았던 사건이 있었다. 재벌 회장이 사위를 내쫓으려고 시도한 소송이었다. 재벌 측 변호사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막강한 존재였다. 고위직 판사 시절 법관 중에서도 뛰어나게 실력이 앞서가던 사람이었다. 인품도 출중했다. 게다가 그는 그 무렵 대통령 당선이 거의 확실한 대법관 출신 이회창 후보의 측근중의 측근이었다. 헤비급 권투선수와 길거리에서 보는 허약한 남자와의 대결같이 그 반대편에 있는 나는 무기력한 입장이었다. 재벌 측 변호사는 다행히 고교 선배였다. 이미 승부가 사실상 결정된 싸움에서 그는 잔인한 최후의 공격은 하지 않고 스스로 무릎을 꿇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재판 연기로 시간을 벌면서 재벌가의 냉정함과 잔혹성을 법률 서면으로 폭로하고 있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후배 제발 재판을 끌지 말자. 상징적으로 이기기만 되는 거야,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께.”
  
  상대편 소송대리인인 그는 아량과 관대함이 있었다. 오랜 판사 생활은 그쪽 편의 말만 일방적으로 믿지 않았다. 글로 제출된 나의 주장을 읽고 오히려 재벌가를 조용히 나무라는 것 같았다. 그의 배려로 서로 물고뜯고 상처가 크게 날 수 있는 이혼 법정이 원만하게 끝이 났다. 그는 법관 선배이자 주군인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갈 길이 바쁜 분이었다.
  
  그 무렵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된다는 여론조사 결과 보도가 신문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대의 풍향에 민감한 사람들은 대통령 후보의 최측근인 그에게 어떻게든지 선을 대려고 혈안이 되었다는 말들이 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호랑이의 위세를 등지고 교만하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신문의 일면 머릿기사로 그의 구속이 보도되고 있었다. 볼이 훌쭉하게 들어간 그의 수심에 찬 얼굴 사진이 지면 가운데 박혀 있었다.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이동하던 중에 발각이 됐다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전쟁으로 치면 그는 선봉의 장수였다가 적의 창에 찔린 셈이었다. 신문기사 속에 주군인 이회창 후보가 그에게 “차라리 내가 다 받았다고 하고 감옥에 들어갈까?” 하고 물으니까 그가 “내용도 모르시면서”하고 만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 치고 재벌들로부터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갔다. 이따금씩 서울구치소로 가면 어둠침침한 공간의 벌집 같은 유리방 접견실 안에 죄수복을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곤 했다. 그가 수치심을 느낄까 조심했다. 그의 친구인 선배들은 그가 검찰 수사 때부터 재판이 끝날 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수사나 재판에 관여해 본 사람이면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침묵했다는 것이다.
  
  그가 징역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이 보이는 어느 날 나는 구치소의 벽쪽에 있는 유리방 접견실 안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체 하고 가나 보고 있었어.”
  
  내가 인사를 하지 않았으면 그는 섭섭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징역형을 마치고 석방된 후 세상의 표면에서 조용히 물러난 것 같았다. 대통령선거 기간 중 김대업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문제를 폭로했다. 모략이었다. 그러나 모략으로 선동된 국민들은 이회창 대통령 후보에게서 마음을 돌렸다. 그 사건을 수사하던 나와 친하던 검사는 이렇게 은밀한 내막을 속삭였다.
  
  “조사해 보니까 모략이 분명한데 권력층에서 수사결과 발표를 바로 하지 말고 나중에 하라는 거야.”
  
  모략공작의 배경에서 나오는 악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대쪽 이미지로 대통령이 확실하던 이회창씨와 그의 심복장수는 그렇게 정치의 무대에서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와 관우의 운명을 지게 된 것 같았다. 아니 십자가 위의 예수와 헤롯왕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일까.
  
[ 2021-05-13, 04: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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