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면 기생(妓生)이 되고 싶어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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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작은 여행길에 올랐다. 정읍을 빠져 임실로 가는 길에 잔잔한 푸른 물이 구름을 담고 있는 호수가 보였고 그 옆으로 오월의 잎으로 우거진 숲 속 산길이 있었다. 이리저리 감아 도는 산길을 올라가다 깊은 숲 속 길가에 ‘차와 가야금’이라고 적힌 작은 나무판자 간판이 보였다. 정읍이 고향인 대학 동기가 소개한 친구가 하는 깊은 산 속 카페였다. 정읍이 고향인 친구 부부가 십오 년 전쯤 산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남편은 교사였고 아내는 은행원으로 일을 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자연인’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깊은 산 속에 둥지를 틀고 혼자 살거나 부부가 사는 모습들을 취재한 프로였다. 별별 모습들이 다 있었다. 기어 들어가야 하는 작은 움막을 만들어 놓고 벌거벗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혼자 사는 여성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깊은 그곳에서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구해다 오두막을 작품같이 만들기도 했고 산자락의 밭을 일구기도 했다. 상당수는 흙탕물 같은 세상이 싫어서 인간을 피해 산으로 간 것 같았다.
  
  칠십 고개인 내 나이 또래인 그 부부는 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산 속 그들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상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산 속이라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정리된 정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예쁜 나무다리가 보이고 다리 아래로 시냇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시냇물의 튀어나온 흙 부분에는 작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다. 일부러 시냇물의 자연스런 풍경과 어울리는 나무다리를 만든 주인의 예술적 감각이 느껴졌다.
  
  다리 너머로 물레방아가 보이고 그 옆으로 진흙으로 만든 방앗간 같은 집이 나타났다. 오래된 방앗간을 개조한 것 같았다. 투명한 유리가 달려있는 샷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각기 다른 몇 개의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카페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늙은 부부만 산다는 그곳에서 두 사람 다 밖에 일을 하러 나간 것 같았다. 산 속에 홀로 있는 소박한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진흙으로 바른 벽 앞에 오래된 통나무 방아공이가 보이고 그 옆에 손때묻은 가야금이 놓여있었다. 가야금 줄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탱’ 하고 투명한 소리를 내면서 줄이 울렸다.
  
  어느새 밖에서 일하던 주인 여자가 나타났다.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청바지를 입은 세련된 모습이었다. 약간의 자연스런 화장기가 있는 얼굴이었다. 쌍꺼풀 진 둥근 눈에 콧등이 두툼한 맏며느리 같은 고전적인 타입이었다.
  
  “미안합니다. 아침 다섯 시부터 풀을 뽑고 일을 하는데도 끝이 없어요.”
  그녀는 구석의 탁자로 가서 차를 준비하면서 말했다. 말하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득음을 한 소리꾼의 음성같은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 손때묻은 가야금이 떠올랐다. 그녀가 진한 대추차를 머그컵에 담아 가지고 내가 앉은 탁자로 왔다.
  
  “가야금을 보니까 소리꾼이신가 봐요. 사철가를 조금 해줄 수 있어요?”
  내가 말했다.
  
  “여기 정읍에서는 오래 전부터 정읍사가 있고 전라도 각 지역을 소개한 호남가가 있는데 사철가를 해 달라면 하죠. 그런데 봄보다는 겨울 쪽을 해 드릴게요.”
  
  그녀가 구성진 소리로 사철가의 흰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을 불렀다. 속에 끼로 가득한 소리꾼 같았다.
  
  “어떻게 가야금을 가지고 이 산중으로 오게 됐어요?”
  내가 물었다. 독특한 예인(藝人)의 운명 같았다.
  
  “제가 은행원 시절 매일 빳빳한 현찰을 가지고 와서 예금을 하는 분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게 과거와 미래를 알아맞춘다는 유명한 점쟁이였죠. 그 점쟁이한테 갈 때는 사람들마다 그렇게 새로 나온 깨끗한 돈을 가져다 준대요. 은행원과 고객으로 여러 번 만나다 보니 그 점쟁이가 내 앞날을 알려준다면서 나보고 은행원이 아니라 너는 물장사 팔자라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화가 났죠. 저희 때는 여자에게 물장사 팔자라고 하면 술집 화류계를 연상했으니까요. 기분이 나빴는데 이상하게 그 무렵 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남편이 산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이렇게 산 속으로 들어왔어요. 남편은 이 봉우리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려고 해요. 나는 집의 안에 있는 인테리어를 담당하구요. 그렇게 살아왔어요.”
  
  진흙집 안의 구석구석 그녀의 센스가 담겨 있었다. 섞은 나뭇가지를 이용한 등불이 천정에 매달려 있었다. 또다른 한 구석에는 유럽풍의 그릇들이 오래된 나무장 안에 정리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나를 덧붙였다.
  
  “그 점쟁이가 말한 내 팔자가 맞는 것 같아요. 사실 나는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기생이 되고 싶어요. 기생이 얼마나 좋아요. 가야금도 하고 소리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 즐겁게 사는 거죠. 하얀 속치마에 매화도 치고 풍류를 즐기면서 말이에요.”
  
  그녀는 마음 문이 활짝 열린 좋은 사람 같았다. 그리고 나이를 망각하고 자기 일을 즐기는 아름다운 할머니였다. 그 자리를 빨리 뜨는 게 아쉬운 하루였다.
  
  
[ 2021-05-16, 03: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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