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사실(史実)을 정치적 이유로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근린국에 대한 영합으로 인해, 역사학(歴史学)이 뒤틀리고 왜곡되는 현실을 역사학자들은 맹렬히 반성해야 합니다. "

오히라 히로시(大平裕)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오히라 히로시(大平裕)
1939년생.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기념재단 대표. 
주요저서, '日本古代史 正解'(講談社) 등. 
 

<번역:펀드빌더(주요내용 발췌)>

 

현재, 임나(任那)의 존재는 입에 올리기 거북스러운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日本이 고대에 한반도를 통치했다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일본內 관련 학회는 이웃 韓國을 자극할 수 있으니 자제하자는 암묵적 동의가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좌익(左翼)적 분위기에 굴복한 상징적 사건이 바로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 조작' 논쟁입니다. 서기 400년 前後에, 日本은 한반도 東西에서 대규모 전쟁에 주력(主力)으로 참전했고, 고구려(高句麗)의 위협으로부터 백제(百済)를 도와주는 한편, 동해안 쪽에서는 임나(任那)와 함께 북상하여, 신라(新羅)를 공략(攻略)했습니다. 日本 사상 최초로 전개된 해외에서의 대규모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이 전쟁의 규모는 고구려 왕이었던 광개토왕(広開土王, 제19대・재위 392~413)의 생애를 새긴 석비(石碑)인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 413년 건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왕(広開土王)은 호태왕(好太王)으로도 불렸는데, 북쪽으로는 북연(北燕)을, 남쪽으로는 백제(百済)를 침공하는 등 팽창을 도모한 왕이었습니다. 당연히 비문(碑文)은 왕(王)의 공적을 나타내기 위해 연전연승(連戦連勝)을 어필하고 있는데, 왜국(倭国)과 더불어 임나(任那) 제국의 이름(諸国名 : 加羅・安羅)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왜국(倭国)과 관련된 기술(記述)은 11군데 나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391년(辛卯)
왜(倭)가 바다(海)를 건너와 백제(百済)・신라(新羅)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399년(己亥)
백제(百済)는 고구려(高句麗)와의 약조(約)를 깨고 왜(倭)와 통(通)했고, 평양(平壌)으로 내공(来攻), 한편, 신라(新羅)로부터 급사(急使)가 왔고, 왜인(倭人)들이 국경(国境)에 가득(満)했다.

400년(庚子)
신라(新羅)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오만(五万)명의 군사(兵)를 파견(派遣),했는데, 왜군(倭軍)이 성안(城中)에 가득(満)했고, 왜병(倭兵)을 무찔렀다(討).

404년(甲辰)
왜(倭), 불법적으로(不軌) 대방군(帯方郡)으로 침입(侵入).

407년(丁未)
오만(五万) 명의 군사(兵)를 이끌고 싸웠고, 왜(倭)는 갑옷(鎧) 일만여(一万余) 개를 남기고 패퇴(敗退).

그런데, 이 광개토왕비(広開土王碑)에 대해, 1972년 재일(在日) 한국인 학자 이진희(李進熙)씨가 지금까지의 비문해석(碑文解釈)·해독(解読)에 대해 이치에 맞지도 않는 이론(異論)을 내세워 학계에는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이 비문(碑文)은 1884년, 舊日本軍 참모본부의 ‘사코 가케노부’(酒匂景信)가 입수한 것인데, 이진희(李進熙)씨는, 근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舊일본군이 멋대로 탁본(拓本)을 조작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당시 실물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한 관계로 이진희(李進熙)씨의 갑작스러운 주장을 확실히 부정(否定)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로 인해, 관련 연구는 40년간 정체(停滞)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이진희(李進熙)씨는, 日本側이 광개토왕(広開土王) 비문(碑文)을 근거로 삼아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로 출병(出兵)하여, 백제(百済), 신라(新羅)를 정복(征服)했고, 가야(伽耶) 지방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統治機関)을 두어, 2세기 동안 지배했다는 것은 역사적(歴史的) 사실(事実)'이라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발(反発)했습니다. 

하지만, 2006년 4월14일字 요미우리(読売)신문에는, <호태왕(好太王) 비(碑) 탁본(拓本) 발견…조작 논쟁에 종지부(終止符)>라는 반향 큰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고대 日本의 한반도 진출을 기록한, 중국 길림성(吉林省)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 최고(最古)의 탁본(拓本)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기사였습니다. 왜국(倭国, 日本)과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기술(記述) 부분이, 舊日本軍이 입수한 탁본(拓本)과 새로 발견된 최고(最古)의 탁본(拓本)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중국사회과학원 서건신(徐建新) 교수가 판명해낸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70년 이후로 논쟁이 지속되어온 舊日本陸軍에 의한 비문(碑文)조작설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서건신(徐建新) 교수는, 동아시아 각국에 산재한 약 50종(種)의 탁본(拓本)을 확인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는데, 2006년 당시까지 최고(最古)로 여겨지던 ‘사코(酒匂) 입수(入手) 탁본(拓本)’보다 3년이 더 오래된 1881년 탁본(拓本)을 북경(北京)의 옥션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 탁본 정보(내용)를, ‘사코(酒匂) 입수(入手) 탁본’ 정보(내용)와 함께 PC에 입력하여 상호 비교해 본 결과, 의도적으로 변조하거나 조작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호태왕비탁본(好太王碑拓本) 연구'(東京堂出版)로 정리되어 발표되었습니다. 

이진희(李進熙)씨의 민족감정에 기초한 반일사관(反日史観)은,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속죄관(贖罪観)을 간직한 日本人 학자들을 윤리적(倫理的)으로 압박하는 공격 재료로 작용했습니다. 오랜 기간,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 연구에 브레이크를 건 바람직하지 못한 학자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브레이크 때문인지, 1980년대 이후 日本의 역사 교과서에는 광개토왕(広開土王) 비(碑)에 대한 기술(記述)이 일제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근린국에 대한 영합으로 인해, 역사학(歴史学)이 뒤틀리고 왜곡되는 현실을 역사학자들은 맹렬히 반성해야 합니다. 

1980년대, 한반도 남서부 전라북도(全羅北道)와 전라남도(全羅南道), 특히 남도(南道)의 영산강(栄山江) 연안에 40기(基)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잇따라 발견되었습니다.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은 日本에서 이와테(岩手)県에서 가고시마(鹿児島)県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고분으로서 日本 독자(独自)의 무덤 조성 양식입니다. 이것이 왜국(倭国, 日本)으로부터 한반도로 전해진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발견된 지역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기술한 임나서부(任那西部) 지역입니다. 

임나(任那)와 관련해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시되는 풍조(風潮)가 현재 있습니다만, 사실(史実)을 정치적 이유로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에서는, '日本의 문화는 전부 韓國으로부터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심지어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조차 韓國에서 日本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조차 있는 듯합니다. 韓國의 학자들은, '한반도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 日本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을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동조하는 일부 日本人 학자도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임나(任那)・가야(伽耶, 加羅) 지역이, 왜국(倭国)과 어떠한 형태로 외교(外交)・군사(軍事),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했는지를 말해주는 문헌적 증거들은 외면하고 있는 듯한 현상은 유감입니다. 이러한 韓國側의 왜곡을 日本人 학자들도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이에 대해 거의 침묵하며 영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 日本人 학자들은, 이러한 韓國의 잘못을 지적하면 이후로 韓國側으로부터 필요한 자료를 얻는 것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있고, 상호 학교류 같은 것도 어려워지는 등의 본질이 아닌 것을 염려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대학에서 이러한 교수의 방침을 부교수가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고 학생들 
또한 이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임나(任那)'라는 말은 아예 입 밖으로 올리기를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토록 좌파적 역사관 풍조가 일본 내에는 형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임나(任那)에' 대해 부정하는 풍조(風潮)가 이어지고 있지만, 역사(歴史)라는 것은, '선악(善悪)'이나 '좋고나쁨'이라는 감정과는 별개로, 사실(史実)은 사실(史実)로서 있는 그대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극단적 좌익 사관이나, 극단적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히지 않고 연구에 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주 월계동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위 사진) 
日本 군마현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 (아래 사진) 

 

https://youtu.be/_CsJCa2TlXU

[ 2021-06-15, 20: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