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책, '이회창 회고록'
이회창은 책에 등장하는 그 어느 누구도 험구하고 악담하지 않는다. “요컨대, 선거에 진 것은 나의 잘못이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김일중(회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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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회고록을 읽고 최재형을 생각하며>
  
  이회창(86)은 법관이었을 때, '대쪽 판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대쪽 같다'는 말은 곧은 성미(性味)나 절개(節介)를 비유하는 말이다. 이런 평판은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신념이나 신의(信義)를 굽히거나 바꾸지 않은 강직한 태도를 취했다는 뜻이다. 정의롭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였을 때에도 대쪽 같은 성품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이와 같은 생활 태도는 그의 일생을 관통한다. 그가 정당의 대표였을 때는 당내의 비주류로부터 '제왕적(帝王的) 총재'라는 비난도 들었다. 이런 비판은 그의 조직 장악력이 뛰어났고, 당(黨) 안에서나 당 밖에서의 어떠한 도전에도 물러선 적이 없는 출중(出衆)한 전투력과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놀랍게도 그는 싸움을 매우 잘했고 싸움에 능하기도 했다.
  
  내가 읽은 책은 김영사가 2017년 9월 11일에 발행한 매우 두꺼운 책이다. 두 권으로 되었다. 제1권은 437쪽으로 되어있고, 제2권은 600쪽. 회고록은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말 그대로 자기가 스스로 쓴 자기 전기(傳記)이다. 자서전이 대필(代筆)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 어디에도 그렇게 쓰였다는 말은 없다. 저자는 사법시험을 대학 재학 중에 한 번의 도전으로 가볍게 통과한 수재이다. 그는 슬기의 힘(智力)과 지식의 힘(知力)이 현란(絢爛)해서 책의 어느 일부분이라도 대필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은 한 인격이 높고 뛰어난 한 정치인의 회고담을 그의 앞에서 직접 듣는 것과 같다.
  
  저자는 책에서 그의 이력(履歷)을 이렇게 간단히 요약한다. “나는 학창 시절을 거쳐서 법관이 되고, 그 후 두 번의 대법관과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쳤고, 정치에 입문해 정당의 총재와 여당 및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고배를 마셨다.”(제1권 25쪽에서 인용).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다면, 그가 한 번은 지역구(충남 예산·홍성)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3선 국회의원이란 사실이다. 김대중과의 대결에서 37만 표 차이로, 노무현과의 대결에서는 57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나는 앞에서 저자가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고, 싸움에 능하며, 탁월한 리더십(Leadership)을 발휘했다고 썼다. 그가 책에 손수 쓴 아래의 글들을 읽으면 나의 논평에 수긍이 갈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아버지는 남자는 무리를 앞서거나 무리를 이끌어야지 무리를 따라다녀서는 안 된다.”(1권 94쪽). 그는 중학교 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3등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선거로 학생회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학생 때부터 leader (지도자)였지, follower (뒤따르는 자)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일단 맡으면, 먼저 할 일의 방향을 정한 후 사전에 철저히 일을 숙지하고 조직을 운영해 의도대로 운영하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1권 45쪽). 그는 정치 조직에서도 그 단체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나는 많이 방황하고 주저하다가도 일단 결단을 하고 길을 정하면 끈질기게 매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집념을 가지고 있다.”(1권 118쪽). “그리고 운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삶의 의미라고 믿었다.”(1권 119쪽). “나는 원래 강골이 아니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으며, 가급적 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싸워야 하고, 이를 피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1권 137쪽). 비겁하다는 단어에 주목하라.
  
  이회창은 2002년의 대통령 출마를 위한 당(黨) 안의 토론회에서 최병렬, 이부영, 이상희로부터 집중적이고 매서운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의 공격을 회고하면서, '사슴을 쫒는 자는 토끼에 눈을 주지 않는다'는 고사성어를 인용하고, 싸움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자가 여우를 사냥할 때처럼 전력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평소 나의 지론인데 아마 나에게는 싸움닭의 DNA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1권 472쪽). “나는 부산 피난 시절인 고등학교 3학년 때, 깡패들에게 희롱당하는 젊은 남녀를 구해주려다가 코뼈가 부러진 일이 있다.”(1권 90쪽).
  
  이회창은 그가 옳다고 생각한 일에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서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1권 58쪽). 그는 소위 삼김(三金, 김영삼·김대중·김종필)과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그는 맨 처음 “삼김 청산”이란 구호를 만들고 이를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그는 '삼면(三面) 김가'의 어려움을 되돌아보면서, 특히 김대중의 공격을 “상대방을 토벌(討伐)하듯이 공격해왔다”고 묘사한다.(2권 244쪽). 그의 강경투쟁은 김대중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토벌은 반란자 등 적이 되어 맞서는 무리를 병력으로 공격하여 없앤다는 뜻을 가진, 살벌한 말이다. 책에 그와 세 김 씨와의 격전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 내용이 흥미진진하다. 그는 “여야 간의 경쟁과 견제는 정치의 본질과 같다”고 주장한다.(2권 253쪽). 그는 정치를 아예 생사 결단의 투쟁으로 본다. 그의 얼굴은 얌전한, 깨끗한 선비 같으나, 그는 불굴의 투사다. 일반인들은 그가 싸움꾼인 줄 모른다. 나도 몰랐다.
  
  그는 취임 4개월 만에 국무총리를 사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름 노릇이나 하는 정치를 원하지 않았고, 대통령은 이런 내가 마땅치 않았을 뿐이다.”(2권 90쪽). 여기서의 대통령은 김영삼이고, 마름은 지주의 위임을 받아 소작지를 관리하던 사람을 지칭한다. 그가 어느 조직의 우두머리에 취임하면, 항상 주장하는 것이 그는 어느 누구의 부하가 아니란 말을 확실하게 천명한다. 이런 그를 권력자가 좋아할 리가 없다. 그는 그를 국무총리에 임명한 김영삼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이회창의 집안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쓴다. 나의 “할아버지 이용균은 한학자인 선비였고”(1권 85쪽), “예산 할아버지 본가에는 精神一到(정신일도) 何事不成(하사불성)이란 글귀가 걸려있다.”(1권 85쪽). 이 할아버지는 이회창의 아버지가 서울 경기고보(경기중학)를 다닐 때, 천안에서 서울까지는 기차표를 사게 했으나 예산에서 천안까지의 100리 길을 걷게 했다.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 이태규는 29세에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5년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올랐다. ”나는 본가에서 집념과 검약을 배웠다.”(1권 85쪽).
  
  “나의 외가는 천석꾼 만석꾼 소리를 들었고 나는 초등학교 시절 전남 담양군에서 자랐다. 외조부는 일찍 타계했고, 외숙 세 분이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큰 외숙이 살린 그 사람이 고발하여 (6·25 때) 군중대회에서 총살당했다.”(1권 86쪽). 이회창의 아버지 이홍규는 경성법전(서울대 법대)을 나온 검사였다. 그는 '척결검사'란 별칭을 들었다. 척결(剔抉)은 부정, 모순, 결함 등이 있는 현상이나 원인을 송두리채 파헤쳐 깨끗하게 없애다는 뜻의 명사다. '척결검사'는 '대쪽 판사'보다 무섭다.
  
  이홍규는 공산당 프락치 검사라는 누명을 쓰고, 이회장이 고등학교 1학년 때(16세) 구속되었다. 그는 반대파에 의해 빨갱이로 조작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1권 16쪽)까지 당했으나, 끝까지 버텨 후에 검사로 복직돼 대검 검사로 일했다. 아버지가 검사였을 때, 이회창은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다. 그 때 어머니가 병아리를 키워 시장에 팔았다. 어머니가 메추리를 길러 팔면 돈을 번다고 하여 10마리를 사서 키웠으나,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가 기른 것을 잡아먹을 수 없다고 어머니가 산에 버렸다.”(1권 100쪽).
  
  아버지가 구속되었을 때 여러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했다. 어머니는 변호사비를 못 주는 대신 매일 아침 저녁에 그들을 찾아다니면서 감사 표시를 했다. 이회창은 그 때 어머니와 동행했다. 그 때의 그 어머니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어머니는 좌절하지 않고 절망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101쪽). “어머니가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는 것을 보았다.”(1권 100쪽).
  
  아버지는 97세에 타계했다. 이회창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쓴다. “아버지는 자기 관리가 철저해 매일 아령과 냉수마찰을 하고 80대 초반까지도 철봉의 대차 회전운동을 매일 20 번씩 했다.”(1권 90쪽). 그의 큰아들인 이회영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뉴욕의 마운트 사이나이 의과대학의 정교수로 일했다. 그는 한국을 떠날 때 아버지로부터 “노벨상을 탈 때까지는 집에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1권 95쪽). 그의 3남 이회성은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교수로 일했고, 4남 이회경도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카이스트에서 교수로 일했다. 그들은 자력으로 미국에서 공부했다.
  
  “1·4 후퇴 때 부산 피난 가 있던 중 우리 가족은 모두 가톨릭에 입교했다. 서울 수복 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명륜동에 가까운 혜화동 성당 새벽 미사에 매일 참여했다.”(1권 101쪽). 나는 “법관으로 있을 때는 거의 매일 퇴근하면서 성당에 다녀 저녁 미사에서 기도와 목상에 잠기곤 했다.”(1권 63쪽). “신이 나를 사랑하고 지켜준다는 생각은 기도의 결과와 상관없이 삶에서 적지 않게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또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1권 64쪽).” “나의 아버지는 현직 검사로 있으면서 모략으로 구속되어 수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 신께 간곡한 기도를 드려 고통을 이겨내고 자신을 지키셨다.”(1권 69쪽).
  
  이회창은 단기필마(單旗匹馬)로 정치에 입문하던 날 이렇게 기도한다. “나는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신께 열심히 기도했다. 이 길이 제가 가야 할 길이면 끝까지 지켜 주소서. 만일 갈 길이 아니면 제게 병을 주시든가 아니면 사고를 주시든지 저를 막아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나는 병도 나지 않고 사고도 만나지 않는 채 끝까지 갔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이 신이 허용하는 가야 할 길인 줄 믿었는데 끝에 가서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았다.”(2권 63쪽).
  
  위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이 길은 내가 자유의지로 선택한 길인데,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선택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때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내 선택의 결과를 보게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줄 뿐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2권 63쪽). 이 글 속에는 이회창의 신관(神觀)이 잘 나타나 있다. 기도할 때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바른 길로 가는 신념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1권 69쪽)
  
  이회창은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1권 23쪽). “정치와 정치인의 책임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이 선과 정의를 지향한 역사 발전을 이끌어온 인류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성이 있는 존재다.”(1권 43쪽).
  
  “민주주의는 바로 개인의 존엄과 자율을 존중하고 공정한 관심과 배려로 공동체 안에 정의를 세워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2권 43쪽). 이회창의 말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려고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2권 281쪽).
  
  이회창은 비판받을 때 “대쪽이 갈대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늘 들었다.(2권 57쪽). “아버지가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1년 대통령 선거 때, 당시 내가 살던 집은 비좁아 빈 방이 없고 정치바람으로 사람들이 왕래도 많았던 때라 선뜻 확답을 못 드렸다.”(2권 101쪽). 이 기술(記述)은 이회창의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머니가 이회창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자고 했는데 방이 없어 대답을 못했다는 말이다. 그는 참 청빈하게 산 것 같다.
  
  이 자서전에서 이회창은 책에 등장하는 그 어느 누구도 험구하고 악담하지 않는다. 그를 두 차례의 대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와 그 가족들을 범법자와 죄인들을 만들었으나 사실만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가 선거에서 맞붙은 김대중과 노무현까지도 칭찬은 했으나 개인적인 비판은 안했다. 정책적인 문제에서만 비판했다. 두 차례의 대통령의 선거 패인도 자기에게 있다고 말하지 그 어느 누구에게 돌리지 않는다. 언론 기관에서 쓴 패인도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에게 있다고 쓴다. “요컨대, 선거에 진 것은 나의 잘못이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다.”(2권 207쪽).
  
  참 좋은 책이다. 훌륭한 회고록이다. 뛰어난 정치학 개론서(槪論書)이다. 이회창 같은 '대쪽 같은' 또 다른 이회창이 나타나서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같은 때는 더욱 그렇다.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끝)
  
  
  
  
[ 2021-07-18, 19:3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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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Buster   2021-07-19 오전 6:42
1997년 김대중에게, 2002년 놈우현에게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 이회창이 못내 아쉽다 못해 원망으로 바뀌었었다. 설훈, 김대업, 쓰레기통 속의 썩은 생선같은 것들의 거짓 주둥이질에 대처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한심한 그를 '이회충' 이라고 하며 욕을 했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회창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회고록 1.2권 꼭 읽어 보겠습니다. 부친 보다 더 오래 장수하시길 빕니다.
  이중건   2021-07-19 오전 12:55
탈북자지만 이분과 고향이 같다. 황해도 서흥. 대통령이 꼭 되야 할 분인데 복을 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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