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은 일들
내가 변하지 않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욕망이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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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열한 시경 서초역 부근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허름한 배낭을 멘 백발의 칠십대쯤의 여성이 옆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비닐봉지가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작은 집게가 들려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버려져 있는 작은 쓰레기 하나를 집게로 들어 올려 다른 손에 든 비닐봉지 속에 넣었다. 횡단보도에 맞은편 신호등의 파란 불이 켜졌다. 그녀는 건너가면서도 차도에 떨어져 있는 휴지조각 하나를 얼른 집게로 주워 비닐봉지에 넣었다. 잔잔한 감동이 파문이 되어 가슴 기슭으로 밀려왔다. 이름난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저녁이면 나는 석촌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잠실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아파트로 돌아온다. 저녁이면 역 구내에서 마주치는 독특한 광경들이 있다. 구석에는 노숙자들이 드문드문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누워있다. 그런 중에 싱글벙글 웃으면서 외마디 소리를 하며 지나가는 육십대 말쯤의 남자가 있었다. 흰 머리를 바글바글 볶았다. 꽃무늬가 들어있는 속칭 ‘몸뻬’같은 여성용 바지를 입고 작은 바퀴를 단 판에 쓰레기 봉지와 박스를 가득 담아 어디론가 옮기는 모습이었다. 역에 있는 상인들의 쓰레기를 치워주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공원 근처에서 그가 자는 걸 봤다. 그는 노숙자였다. 무기력하게 벤치에 누워 죽은 듯 있는 것 보다는 일하는 그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보면서 중국음식점 배달원 김우수 씨의 경우가 떠올랐다. 매월 칠십만 원을 받으면서 싸구려 고시원에서 살던 그는 몇 명의 고아원 아이들에게 고정적으로 돈을 보냈다. 어쩌다 그 아이들한테서 편지가 오면 그걸 읽고 환한 얼굴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다가 트럭과 부딪쳐 죽었다. 하나님은 천사인 그를 더 이상 세상에서 고생하지 말라고 빨리 데려가신 것 같았다.
  
  나의 개인법률사무소로 그런 천사가 왔다 가기도 했었다. 청계천의 뒷골목 허름한 건물의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여자였다. 어느 추운 겨울 아침 그녀는 출근하다가 육교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노인을 보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지갑을 열고 그 속에서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그 노인 앞의 깡통에 넣어주었다. 며칠 후 저녁 텔레비전을 보다가 불쌍한 아이들이 사는 움막이 보였다. 그녀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그 아이들에게 한 달에 만원을 고정적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능력이 닿는 대로 안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돈을 보냈다.
  
  변호사인 내가 그녀가 보냈던 돈들의 총액을 계산할 필요가 있었다. 감옥에 간 그녀의 동생을 위해 누나의 선행을 재판장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 돈은 억대가 넘는 거액이었다. 작은 선행이 모이면 그렇게 커질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었다. 들판에 나 있는 작은 꽃들처럼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알맞은 작은 일을 하면서 맑고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된 한 여성 당선인의 작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여공 출신으로 야간대학을 다녀 변호사가 됐다.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가 없는 아이 세 명을 입양해 키운다고 했다. 그녀의 정치철학은 거창하지 않았다. 열심히 일해서 내가 잘살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게 그녀의 생각이라고 했다. 그녀같은 국회의원이 들꽃 같은 작은 법 하나를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화장실 법이 만들어지고 우리의 더럽던 화장실 문화가 세계 최고가 되었다. 자전거법이 만들어져 강변을 따라 쾌적한 자전거길이 생기게 됐다. 그런 작은 법이 우리를 잘살게 한다. 거창한 정치이념을 내걸고 하는 선동들은 가짜가 많다. 한 장 한 장의 벽돌 삼천만 장이 모여 로마의 콜로세움이 됐다. 하나하나의 돌들이 육억 개가 쌓여 만리장성이 됐다. 국가나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세상이라는 구조물을 이루는 좋은 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먼저 변해야 사회가 변하는 건 아닐까. 내가 변하지 않고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욕망이다. 물방울 같은 작은 선(善)들이 모여서 강물을 이룰 때 우리 사회는 천국 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 2021-08-17, 12: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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