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적군(敵軍)이야 임마"
“너 같으면 선거를 돕지 않은 인간들에게 한 자리 주고 싶겠냐?"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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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일기를 뒤적이다가 한 장면을 보고 쓴 웃음이 나왔다. 정말 나는 어리석은 멍청이였다. 어느날 내게 정중한 초청장이 왔었다. 대한변협회장으로 당선된 선배가 보냈다. 고교 선배인 그는 금수저 출신이었다. 고시에도 일찍 합격하고 법관 생활도 고위직까지 무난히 마쳤다. 나는 해외출장을 가느라고 투표장에 가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변협회장으로 당선된 선배로부터 감사의 뜻과 함께 회식에 참석해 달라는 간절한 문장이 박힌 초청장이 온 것이다. 초청자가 몇 명이 되지 않았다. 그 중에 내가 분명히 있었다.
  
  선거를 도운 것도 아니고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주저하다가 그 자리에 갔다. 선거에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나마 참석해서 축하해주고 오자는 마음이었다. 그 며칠 후 호텔 일식집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섬찟하면서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신임회장의 선거를 도왔던 친한 사람 몇만 모인 자리인 것 같았다. 초청장에 내 이름이 왜 적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회장이 된 선배의 표정에 얼어붙을 것 같은 찬바람이 돌았다. 도로 나오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있는 상태가 됐다. 신임 변협회장이 작은 도기 주전자를 기울여 모인 사람들에게 사케를 따른 후 말했다.
  
  “변협의 상임이사나 간 분야별 위원장은 어떤 기준에 따라 임명해야 할지 개인적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겉으로는 부드럽고 매끈한 변협회장의 태도였다. 사람들이 얘기를 한 후 마지막에 내 차례가 왔다. 신임 변협회장의 표정에서 나에 대한 야릇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자리가 점점 불편해졌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한 마디 해야 했다.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한 사람이라도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게 어떨까라는 의견입니다.”
  
  자신의 선거를 도와준 사람들만을 상임이사나 위원장으로 앉히는게 관례가 되어 있었다. 대통령선거판도 그랬다. 신임 변협회장의 벼르는 듯한 눈이 날카로워지면서 분노섞인 어조가 터져 나왔다.
  
  “너 같으면 선거를 돕지 않은 인간들에게 한 자리 주고 싶겠냐? 너는 말이야 글줄이나 써서 뭔가 한 자리 줄 생각을 했었어. 그런데 전혀 주고 싶지 않아. 너 선거일에 해외로 나가버리고 투표도 하지 않았었잖아?”
  
  나는 그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혀 있었다. 만 명이 넘는 변호사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내가 투표를 하지 않은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분노가 연쇄폭발을 했다.
  
  “넌 적군이야 임마. 여러 사람들한테 되게 미움을 받고 있어.”
  
  나는 호박 쓰고 돼지우리에 들어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그 자리에 가서 호되게 얻어맞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 자신에 대해 곰곰 반성을 해 보았다. 칭찬보다 적이 하는 저주의 말이나 비난이 나에 대해 더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일 수 있었다. 편을 갈라 치열하게 싸우는 선거판에서 그들은 나를 적군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주관은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적으로 생각했었나? 내게 그는 적도 동지도 아니었다. 나는 선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선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는 인격이지 학연을 따라 패거리를 지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세상이나 사람을 보는 안경이 다른 것 같았다. 내 편과 적이 있었다. 중간은 인맥지도와 선거지도를 따라 포섭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안경의 색깔이 다른 것 같다. 그는 그의 안경을 쓰고 나를 보고 나는 나의 안경을 쓰고 그를 보았던 것 같았다. 사람마다 쓴 안경의 색깔과 돗수가 다르다. 그는 그의 음악을 듣고 그의 리듬에 따라 세상을 걸어가고 나는 나의 음악을 듣고 나의 리듬으로 내 길을 간다. 정치적인 그와 나는 삶의 색깔과 질감이 다르다. 어느 게 옳고 그른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자기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섭섭했는지도 모른다. 자기편이 아니라고 적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아직 유아수준의 정신적인 의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세상은 자꾸만 어느 편에 들게 하려고 올가미를 던지고 있다.
  
  
[ 2021-09-11, 23: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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