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자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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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매를 맞고 아팠다>
  
  대한변협의 공보이사를 잠시 했었다. 나의 주 임무는 파도 같이 수시로 일어나는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성명이나 논평을 발표하는 일이었다. 지성인 단체인 변협은 그때그때 바른 의견을 제시해야 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연히 한 사건이 터졌다. 한밤중 폭탄주를 마시고 취한 검사가 앞에 앉았던 여기자를 추행했다는 소식이었다. 동업자의 의식으로 똘똘 뭉친 언론은 연일 종이 폭탄을 터뜨렸다. 공식적인 성명을 기피하는 분야가 있었다. 언론, 종교, 노동, 장애자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 저항이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한변협 공보이사의 개인적 논평으로 한 마디 했다. 당연히 실수한 검사를 탓했다. 한편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술 취하면 개가 된다는 말이 있다. 개는 기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줄을 덧붙였다. 취재가 절실해도 그런 자리는 조심해야 할 게 아니냐고.
  
  그 한 줄이 언론의 심기를 건드렸다. 여기자단에서 들고 일어났다. 매일같이 나를 욕하는 기사가 났다. 모욕적인 내용이었다. 공영방송의 뉴스에 나에 대한 모욕적인 자막이 떴다. 나를 미친놈으로 간주하는 사설이 나왔다. 마치 똥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한변협 전체 이사회의가 열리고 나는 인민재판을 받았다.
  
  “잘못했으니 책임을 지시죠.”
  한참 아래인 대학 후배가 내뱉었다.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 사직하고 나가라는 소리였다. 나는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기자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젊은 여성 변호사가 칼로 찌르듯 공격했다.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임무였다. 여성 운동단체에 연관된 한 여성 변호사는 벌레를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집단적인 몰매를 실컷 얻어맞았다. 그 무렵 한 유명일간지 논설주간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너 기다려 죽여 줄 테니까, 지금 컬럼을 쓰고 있는 중이야”
  
  그의 어조에는 복수의 기회가 왔다는 듯 감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그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글로 여러 사람을 죽였다. 너무 메마르고 잔인한 인물이었다. 그의 문제점을 대한변협신문에서 지적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한변협신문의 편집인이기도 했다. 그는 그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을 숨기지 않았다. 다음날 그 일간지의 대표 컬럼에 나 개인에 대한 온갖 비난과 비방이 다 실려 있었다. 공식사과를 하고 대한변협 상임이사직을 그만두라는 압력이 산사태처럼 덮쳐왔다. 나는 사과하지 않았다. 공보이사직을 그만두지도 않았다. 압력이 대한변협회장에게로 갔다. 나의 짧은 논평을 읽은 회장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구만. 왜 사과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나는 한 주요일간지의 여기자를 사적으로 만나 정말 내가 잘못한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제가 여기자니까 그런 거예요. 객관적으로 잘못 없죠.”
  
  마지막으로 주요 신문사 정치부장을 지낸 언론인에게 물어 보았다. 잘못이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과오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언론인은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사석에서 말하는 것과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 나뉘어져 있어. 사석에서는 당연한 것도 공식적으로 말하면 죽일 놈이 되는 게 우리나라 풍토지 뭐. 잘 견뎌봐.”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방송에 출연해 보면 관계자들이 무대 뒤에서 하는 말과 카메라가 켜지고 그 앞에서 하는 말이 달랐다.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예수가 당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그를 모욕했다. 그에게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면서 놀렸다. 군중이 몰려들어 그를 죽이라고 했다. 사형을 당하는 처참한 순간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모욕하고 놀렸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성경은 고난당하는 과정을 그대로 연출하면서 그런 경우를 당할 때 참으라는 것 같다. 다른 이의 심한 고통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 내가 어떤 모욕을 당해도 예수보다 못한 것이다. 나는 성경 속 인물들의 고난을 본다. 그리고 인내하며 그걸 뚫고 나가는 걸 아픈 현실의 진통제로 삼고 있다. 그것도 ‘십자가의 도(道)’가 아닐까.
  
  
  
  
[ 2021-09-28, 19: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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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21-09-28 오후 9:48
기자란 직함이 벼슬이더군, 벼락감투, 출세의 지름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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