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변론요지서라고 써요?”
어느 날 밤 서초동의 작은 커피숍, 그가 허름한 점퍼를 걸친 채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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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
  
  내 영혼에는 두 개의 상처가 각인되어 있다. 하나는 중학교 시절 싸우다가 칼에 맞은 상처다. 사십대 무렵 나에게 칼질을 했던 아이와 만나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는 자기의 칼에 맞은 자리를 유심히 본 후에 “정말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겉에만 흔적이 남아있을 뿐 마음의 상처는 그 순간 치유됐다.
  
  두 번째는 사십대 후반 한 형사 법정에서 말로 받은 상처였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앉은 재판장은 자세부터가 겸손하지 않았다. 말을 함부로 해서 여러 변호사들의 원성을 받고 있는 판사였다. 사람에게 몽둥이나 칼을 쥐어주면 눈빛이 달라진다고 한다. 왕관을 씌워주면 인간 자체가 완전히 변한다고 한다. 걸음걸이까지. 그런 게 인간이라고 했다.
  
  높은 법대에서 등 높은 의자에 앉은 그는 왕 같았다. 그와 책상을 나란히 두고 판사를 하다가 변호사가 된 분이 그가 재판장으로 있는 법정에 갔다가 모욕을 당하고 분노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그 앞에 선 것이다. 나는 그래도 속으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육군대위 때 그는 옆 부대에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근무했다. 같이 밥도 먹고 고스톱도 쳤다. 내가 변호인석에 오르고 재판이 시작됐다. 내가 쓴 변론요지서를 그가 손에 들고 있었다.
  
  “이걸 변론요지서라고 써요?”
  그의 눈에서 경멸의 빛이 흘러나오면서 내뱉는 말이었다. 나는 갑자기 방망이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신이 없었다. 재판장인 그가 방청석을 향해 소리쳤다.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왔으면 일어나.”
  내 의뢰인들이 방청석 중간쯤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재판장이 그들에게 말했다.
  “이건 변론요지서도 아니야. 실력 있는 다른 변호사를 구해봐요.”
  
  나는 갑자기 똥물이라도 쓴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일생의 상처가 됐다. 그날 저녁 법정의 서기한테서 전화가 왔다.
  
  “제가 보니까 변론요지서를 잘 쓰신 것 같아요. 재판장이 법적인 형식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 껍데기 형식보다 사건의 본질을 보는 재판장도 있구요. 판사도 여러 종류입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이유를 알았다. 수필같이 소설같이 범죄 상황과 피고인의 주변을 묘사했다. 감정이 증발한 해골 같은 법률 문장이 싫었다. 미국의 대법원 판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단편소설이었다. 문학 속에 법률이 소금같이 배어 있었다. 그게 법률 선진국의 변론요지서의 형태였다. 그러나 그 재판장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그렇게 실력 없는 변호사라고 하는 것은 모욕이고 내게는 깊은 상처로 남았다.
  
  소설같이 쓴 또 다른 변론요지서를 낸 적이 있었다. 두 아이를 납치한 유괴범에 대한 재판이었다. 나는 유괴한 아이들이 찡찡댄다고 죽이지 않고 노랑머리와 고깔모자 그리고 딸기코를 사다가 피에로 분장을 하고 아이들을 달랜 범인의 행동을 변론요지서에 밀도 있게 묘사했다. 형사나 검사가 외면한 포인트를 부각시킨 것이다. 결핵으로 삶의 마지막까지 몰린 범인의 내면도 묘사했다.
  
  판사는 유괴범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변호사에게 가서 감사하라고했다. 판사는 나중에 내게 직접 연락을 해서 정말 변론서를 잘 쓰셨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리얼하게 쓰지 않았으면 상황을 모르고 기계적으로 판결을 할 뻔했다는 것이었다. 받아들이는 판사의 그릇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달라졌다.
  
  대위 시절 중위였던 그 판사에게 혹시 상처를 주었나 열심히 생각하고 반성해 봤다.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는 승승장구해서 실세 대법관까지 하다가 퇴직했다. 어느 날 밤 서초동의 작은 커피숍에서였다. 그가 허름한 점퍼를 걸친 채 구석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법정에서 걸쳤던 화려한 옷을 벗으니까 그도 초라한 노인이었다. 얼마 후 그가 암에 걸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주위의 법조인들의 입에서 그가 병을 앓고 난 후에 겸손해졌다는 소리가 돌고 있었다. 하나님은 병을 보내서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나 보다. 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검은 은혜인 걸 깨닫는다. 칠십 넘어 보통의 인간인 그를 보면서 그리고 나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오랫동안 남았던 상처가 치료되는 것 같다.
  
[ 2022-07-31, 10: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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