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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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의 답안지>
  
  나는 손 글씨가 지독한 악필이다. 대학 시절 주위에서는 그렇게 못쓰는 글씨로 어떻게 고시의 주관식 시험을 치를 수 있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런 악필로 어떻게 주관식 시험인 고시에 합격했는지 나 자신도 의문이다. 더운 여름 수천 장의 손글씨를 보고 채점을 하는 시험관의 분통을 터뜨렸을 게 분명하다. 답안지를 쓰는 속도도 느렸다. 달팽이가 그 속도로도 노아의 방주까지 갔듯이 나도 그런 것 같다.
  
  가끔씩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이 긴장감이 돌던 고시장의 모습이 나의 뇌리에 떠오른다. 시험장 앞의 칠판 위에는 문제를 적은 두루마리가 걸려있었다. 그 속에 한 줄의 짧은 주제가 적혀 있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논하라’라든가 ‘평등권을 설명하라’ 그런 식이다. 그때는 국사라는 주관식 과목도 있었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정책에 대해 논하라’라는 문제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 식이었다. 조선시대의 과거 문제에도 조선의 중국에 대한 정책을 논하라는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두루마리를 잡고 있던 테이프가 끊기기 직전까지의 그 견디기 힘든 팽팽한 긴장감이 지금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윽고 두루마리가 펼쳐지면 경주마가 튕겨 나가듯 고시생들은 양면 괘지 열 장에 손 글씨로 작은 논문을 써나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흘간 글을 적어 나갔다. 팽팽하게 조여진 바이얼린 줄처럼 긴장한 나흘간은 고통이었다. 신경줄이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하는 걸 보기도 했다. 나는 그런 고통 속에서 순간순간 감사하면서 괘지에 글을 써 나갔었다.
  
  실패의 쓴 맛은 일차를 떨어져 봐야 안다. 일차를 일곱 번 계속 떨어진 친구는 마지막 순간 정말 하늘이 노래지더라고 했다. 수재 소리를 듣던 몇천 명 응시자 중에 삼사백 명을 뽑는 일차시험도 만만치 않았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차시험을 칠 때였다. 교실마다 시험감독관이 있고 가슴에 붉은 리본을 단 총감독관이 각 시험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찍 행정고시에 합격한 친한 친구가 총감독이 되어 있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모두들 무서운 투지를 내뿜으며 붉은 선을 친 괘지 위에 글을 써 나갈 때였다. 나는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해 멍하게 앉아 있었다. 외운걸 달달 써 나가기보다 본질을 한 마디라도 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멍하게 앉아 있는데 총감독을 하는 친한 친구가 다가와 귓속으로 말했다.
  
  “야, 남들은 벌써 답안을 서너 장씩 쓰고 있는데 너는 왜 안 쓰고 있어?”
  
  친구는 내가 또 떨어질까 봐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시험장 밖에는 판사가 된 친구가 내 어린 딸을 안고 응원을 나와 있었다. 친한 친구 그룹중 나 혼자만 합격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렇게 시험을 치렀었다. 때로는 너무 정직하고 고지식한 건 독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유신헌법의 본질을 쓰는 문제가 있었다. 그 본질이 독재라고 썼다가 합격하지 못하고 찍힌 고시생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국정원 직원 채용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마지막 면접에 임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국정원 고위간부의 아들이기도 했다. 시험관이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국정원 직원 지망생은 독재자인 면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 사실이 보고되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그를 낙방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당시 국정원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시류에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질을 봐야 하는 것인지는 평생의 화두였다. 어제는 같은 실버타운에 있는 구십 가까운 노의사분한테서 카톡으로 글이 왔다. 내가 고시장에서 치른 주관식 시험은 십구 세기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종교학 시험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주관식 문제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예수의 기적에 대해 논하라’가 나왔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자 일제히 답안지에 펜촉 닿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런 속에서 유독 한 학생만 멍하게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도 학생은 여전히 멍한 모습으로 답안지를 쓰지 않고 있었다. 감독관이 다가가 뭐라도 한 줄 써야 한다고 경고했다. 백지 제출은 영점 처리되고 학사경고의 대상이 된다고 알렸다. 그 말에 딴청을 부리는 것 같던 학생이 돌연 시험답안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니 정말 단 한 줄만 써놓고 고사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달랑 한 줄짜리 답안지 그 답안지는 옥스퍼드 대학 신학과 창립 이후 전설이 된 만점 답안지였다. 그 학생이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었다. 모든 신학대학 교수들을 감동시킨 바이런의 한 줄 답안은 이랬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을 붉히더라’
  
  인생은 본질을 찾아가고 거기에 답하는 과정이 아닐까. 오늘 아침 그런 생각이 들었다.
  
  
  
[ 2022-08-02, 11: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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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날개   2022-08-05 오전 8:30
나는 불현듯 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ㅡㅡㅡ 이상의 날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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