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죽음 앞에 강인하지 않았어요"
"일어났다가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곤 했어요. 그러다 걸을 수 없게 된 걸 깨달았을 때 펑펑 울더라구요."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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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 한 방울'>
  
  몇몇 고교 선배들과 만나는 모임에서였다. 선배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어령 교수였어. 아직 이십대의 천재 선생이 칠판에 두보의 시를 써 놓고 해설을 하는데 황홀했었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그는 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되고 대한민국 지성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돌아가신지 세달이 됐다. 말하던 그 선배가 덧붙였다.
  
  “그 양반은 낮았던 대한민국의 정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거야.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
  
  나라마다 민족의 나침반이 된 천재들이 있다.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화 무렵 일본의 방향을 서구화와 민족주의로 잡고 교육에 헌신했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인의 정신적 성장을 추구하고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남겼었다. 이어령 교수도 그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어령 교수가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할 무렵의 짧은 소감을 담은 시사잡지를 보고 메모를 해 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면 빨리 줄기에서 떨어져야 하듯이 사람도 때가 되면 물러앉아야 해요. 새 잎들이 돋는데 혼자만 남아 있는 건 삶이 아니죠. 갈 때 가지 않고 젊은 잎들 사이에 누렇게 말라 죽어있는 쭉정이를 보세요.”
  
  그는 아직 윤기가 있을 때 가을바람을 타고 땅에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귀중한 철학이었다. 죽음에 적용해도 될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어쩌다 화면에서 본 이어령 교수의 얼굴에 골 깊은 주름이 생기고 병색이 돌았다. 어느날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그의 모습이 보이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어떻게 병을 맞이했고 죽음 앞에서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자의 죽음은 많은 걸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가장 위대한 설교였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이어령 교수의 부인이 말하는 장면이 흘러나오는 걸 봤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거부했어요. 남은 시간이 얼마 안되는데 항암치료를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남편은 남은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고 싶다고 했어요. 다른 노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남편은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남편은 컴퓨터로 글을 썼어요. 남편은 몽테뉴의 수상록처럼 날마다 일지를 썼어요. 그날그날 생각나는 걸 가장 자유로운 양식으로 쓴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부터 손가락에 힘이 빠져 더블 클릭이 안되는 거에요. 남편은 손글씨로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글 사이에 그림도 그려놓고 했는데 점점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는 거에요. 그림도 없어지고 갈수록 글씨도 나빠졌어요. 건강이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거죠. ”
  
  그는 무너져 내리는 몸을 보고 어떻게 했을까. 그에 대해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은 걸으려고 애를 썼어요. 일어났다가 맥없이 주저앉아 버리곤 했어요. 그러다 걸을 수 없게 된 걸 깨달았을 때 그렇게 펑펑 울더라구요. 그 머리가 좋던 남편이 기억이 깜빡깜빡하기 시작했어요. 남편은 치매가 온다고 생각하고 또 펑펑 울었죠. 남편은 두 발로 서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했어요.”
  
  중년의 미남이었던 그의 장관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위에 금가루라도 뿌린 양 번쩍거리는 느낌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녹이 슬고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 다음 순서인 죽음을 그는 어떻게 대면했을까.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보통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예민한 예술가였어요. 죽음 앞에 강인하지 않았어요. 고통과 죽음을 너무 민감하게 느꼈어요. 너무나 외롭고 두려운 심정을 자신의 글에 그대로 표현했죠. 남편은 노트에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라고 썼어요. 그 노트를 다 쓰고 ‘눈물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책을 내려고 했죠. 그런데 노트 스무 장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갔어요.”
  
  듣고 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물었다.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말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못 찾은 거죠. 죽어봐야 알 것 같다고 썼어요.”
  
  “제목으로 정한 ‘눈물 한 방울’의 의미는 뭐라고 보시나요?”
  진행자가 다시 물었다.
  
  “자기를 위한 눈물이 아니에요.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는 게 진정한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남편은 남긴 거예요.”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 앞에 정직해져야 할 것 같았다.
  
[ 2022-08-03, 14: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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