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암자, 6인의 고시낭인(考試浪人)
"난 고시에 합격하면 고기를 파는 집 딸과 결혼할 거야. 친구들을 초청해서 한번 실컷 먹여줄 거야.”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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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각자 소설이 됐다.>
  
  천구백 칠십칠년 일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얗게 눈이 덮인 가야산 원당암의 새벽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둔탁하고 묵직한 목탁 소리가 몇 번을 울렸다. 아침 공양을 하라는 소리였다. 나는 청계천 시장에서 산 얇은 싸구려 이불을 덮고 방 안에 가득 찬 냉기를 견디고 있었다. 방안이나 밖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지난 저녁 장작 세 가치를 땐 온돌방은 식어 있었다.
  
  간신히 일어나 암자 뒷 쪽에 달아맨 창고같은 어둠침침한 방으로 갔다. 베니어를 잘라 만든 길 다란 사각의 상 위에 음식이 담긴 몇 개의 양재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밀쌀을 삶은 밥, 된장을 약간 푼 멀건 시래기국, 살얼음이 낀 소금만 뿌린 하얀 김치가 담겨있었다. 초라한 아침 식단이었다. 암자에서 공부하는 고시 낭인 여섯 명이 상에 둘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먹는 게 아니라 억지로 위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 밥값을 낼 형편도 못 되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한 장학재단에서 주는 돈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존하고 있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 속에 나오는 강제수용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턱에 수염이 더부룩한 노장 신씨가 밥을 먹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밥에는 계란을 깨서 간장 한 숟가락 넣고 비비면 맛이 그만인데 말이야.”
  “아니야, 두부를 구워 먹는 게 더 맛이 좋아.”
  앞에 앉아있던 백짓장 같은 하얀 얼굴의 정씨가 말했다. 그는 남대문의 도깨비 시장에서 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이럴 때는 맛갈스러운 명란젓이 있으면 밥이 절로 넘어갈텐데”
  
  나는 우리들의 모습이 영화 속의 빨치산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수염투성이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산속에 숨어 살 듯 사는 게 비슷했다. 나의 옆방에는 지명수배된 운동권 출신이 숨어 있었다. 그의 방에는 혁명에 관한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불란서 혁명사, 러시아혁명사, 모택동사상, 베트남 혁명사등이었다. 그는 혁명이 목적인 것 같았다. 그에게 무기만 들려주면 그게 바로 빨치산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공존하고 있었다.
  
  밥상 끝자리에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각진 턱에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덩치 큰 강씨가 화제를 바꾸어 이런 말을 했다.
  
  “난 고향에서 천재로 알려졌었지. 서울법대에 들어가니까 마을에서는 당장 판검사가 나온 걸로 알더라구. 자만했었는데 어느새 늙어버렸어. 계산해 보니까 대학만 두 번 졸업하고 대학원도 나온 셈이야. 병역 문제가 걸려 방위병으로 일 년 동안 군대에 갔다 왔지. 한참 어린 놈들이 나를 어떻게 골린 줄 알아? 한 되짜리 주전자에 가득 든 물을 나보고 다 마시라고 기합을 주는 거야. 그걸 다 마시니까 코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더라구. 더러운 세상이야.”
  
  암자의 거친 밥만 먹으면 배가 고팠다. 밤이 찾아오면 더 힘이 들었다. 그 며칠 후의 한 밤중이었다. 나는 보관하고 있던 돌덩이 같이 굳어진 떡을 아궁이 속의 타다 남은 장작 위에 올려놓고 녹이고 있었다. 작달막한 권씨 방의 창호문을 두드려 같이 먹자고 불렀다. 아궁이 옆에 둘이서 쭈그리고 앉아 교대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씨를 살렸다. 깜깜한 밤하늘에서 달이 하얀빛을 뿌리고 있었다. 지방대학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권씨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은 여섯 식구가 남의 묘에 딸린 논 두 마지기를 부쳐먹고 살았죠. 가난이라면 어떤 집에도 뒤지지 않아. 덕분에 나는 어떤 험한 음식이라도 먹어요. 그리고 어디서 자도 몸이 꺼떡 없어요. 공사장 일용잡부 등 별별 일을 다하면서 지방 대학을 다녔어요. 앞길이 막막했는데 생활비까지 대주면서 공부를 하라는 장학금을 받게 됐어요. 행운이죠. 난 고시에 합격하면 고기를 파는 집 딸과 결혼할 거야. 친구들을 초청해서 한번 실컷 먹여줄 거야.”
  
  그게 그 시절 산 속 암자에 모여든 가난한 고시 낭인들의 모습이었다. 소설로 치면 인생의 전반부의 고생하던 모습이라고 할까. 우연히 암자에서 만났던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었다. 그 후 바람결에 그들 소식을 전해들었다.
  
  지방대 출신의 권씨는 그 다음해 고시 낭인중 제일 먼저 고시에 합격했다. 하나님은 서울법대보다 지방대 출신을 더 우대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그가 춘천지검장이 되어 잡지 표지에 난 걸 본 적이 있다. 중후한 얼굴 모습이었다. 고깃집 딸과 결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후 그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는 소리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계란 간장 밥을 먹고 싶다던 신씨는 검찰서열 몇 위의 검사장이 되어 기자회견을 하는 걸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검사를 그만 둔 후에 대학 총장으로 갔다는 기사를 봤다.
  
  두부 예찬을 하던 정씨는 그 이년쯤 후 고시에 수석 합격했다고 신문에 난 걸 봤다. 그는 바로 변호사가 됐다. 돈을 잘 벌어 부자가 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잘 놀면서 인생을 즐긴다고 했다. 그와 카지노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전해 주었다.
  
  군대서 기합으로 한 되가 되는 주전자 물을 마셨다는 강씨도 뉴스를 통해 그 후의 모습을 봤다. 여주의 한 사이비 종교집단 내부의 살인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로 텔레비전 뉴스 화면에 나오는 걸 봤다.
  
  우리가 살던 시대는 고시라는 제도를 통해 개천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아주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다리에 매달리면 궁둥이를 밀어주는 장학금 제도도 있었다. 부자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정직하게 살아도 생활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다른 사다리가 있었다. 학위 제도와 선거였다. 지명수배를 받고 도피해 산 속에서 혁명 서적을 읽던 옆방의 운동권은 저명한 정치학 교수가 되어 인터뷰하는 사진을 잡지에서 보기도 했다. 운동권 경력은 민주화가 되면서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는 거대한 사다리였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들은 모두 칠십대의 노인이 됐다. 우리들은 세상에서 받았던 역할들을 반납하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몸으로 한 편의 인생소설들을 쓴 것 같다. 물론 실패의 비극소설도 있다. 인생의 끝은 성공도 실패도 넘어서는 여백의 세계가 아닐까.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어떤 인생의 스토리를 몸으로 쓰는지 궁금하다.
  
  
  
[ 2024-04-07, 05: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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