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문 장군 평전 젊은 거인의 초상(3) - 두 거인의 만남(2)

  • 2003-07-16,10:46
제6장 현리 大敗의 소용돌이
 
 9사단에서의 박정희 참모장
 
 1950년 10월 25일 박정희는 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사단장이 된 장도영 정보국장이 그를 데리고 간 것이었다. 운명적 인연을 가진 두 사람 가운데 늘 베푸는 쪽에 있었던 것이 장도영이었다. 서울 청계 국민학교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 예하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며칠 안돼 사단 사령부는 대전으로 이동, 중부지구에 남은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0월 29일 장 사단장은 6사단장으로 전보되고 오덕준 준장이 후임으로 왔다.
 
 9사단의 본부는 대전고등학교에 설치돼 있었다. 박정희 중령은 참모장으로서 신설 사단의 병력확보와 편제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종합학교 2기로 갓 졸업한 신참 소위 1백여명이 대거 배속되어 왔다. 창설된 28, 29, 30연대의 병력은 육군병원에서 퇴원한 사병들과 보충대 병사들이었다. 무기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사단 포병대대가 창설된 것도 두달 뒤였다. 1∼3개월 간격으로 사단장은 이성가(李成佳), 김종갑(金鍾甲), 최석(崔錫) 준장으로 바뀌었다. 사단장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자연히 사령부는 박정희 참모장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때 작전참모는 육사 동기생인 손희선 중령이었다. 지금은 홍창물산 고문으로 있는 손희선은 '박 참모장은 참모들을 자상하게 거느리고 사단장에게는 깍듯이 대해 사단 사령부의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고 회고한다. 박 중령은 참모들에게 업무의 지침만 지시하고 세부적인 것은 맡겨 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지시한 일의 결과는 반드시 비망록 노트를 갖고 다니며 꼼꼼히 챙기기에 참모들은 자율 속에서도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저는 작전참모장이란 별명을 들을 만큼 재량권이 컸읍니다. 동기생이지만 저보다는 7세나 위이고, 작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 그 분이 시키는 지침대로 하니까 틀림이 없더군요. 저는 뒤에 7사단 참모장이 되었는데 그 분의 방식대로 참모장 일을 하려고 애썼지요.'
 
 박정희는 대전에서 근무하면서 충북 옥천에 있는 미래의 처가로 자주 놀러 갔다. 결혼식은, `50년 12월 12일 대구시 계산동 천주교 성당에서 올려졌다. 당시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섰다. 신부의 손을 잡고 인도한 이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시절 스승인 김영기였다.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하고 입을 떼는 바람에 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또 다른 해프닝도 있었다. 신부의 예물인 금반지를 갖고 있던 송재천이 이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김재춘이 후닥닥 뛰어나가서 금반지를 하나 사갖고 왔다. 나중에 찬찬히 찾아보니 잃어버렸다는 금반지가 다시 나타나 결혼반지는 2개가 됐다. 신혼살림은 삼덕동 이정우의 아래채 셋방에서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퍼'
 
 박 중령이 결혼하기 사흘 전 9사단 사령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급박해진 전선을 좇아 강원도 평창군 대화로 이동했다. 박 중령은 신혼 닷새째 되는 날 사단을 좇아 대구를 떠났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진행중이던 1951년 초에 9사단장으로 취임했던 김종갑(육군중장 예편·공화당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강원도를 수도사단과 9사단이 양분하여 맡고 있었읍니다. 수도사단은 동해안 쪽을, 9사단은 내륙 쪽을 관할했읍니다. 교통과 통신망이 엉망이고 지세는 험악하고 관할지역은 넓어 지휘에 여간 어려움을 겪지 않았어요. 사단장이 대대장 얼굴도 모르고 장교들을 한데 모아 훈시할 기회도 없었읍니다. 병사들은 보충대 출신이 많아 인민군 보급부대로 불릴 만큼 허약했고 포병지원도 못 받는 데다가 예비연대가 없어 교육·훈련의 기회도 없이 신병들을 전투에 투입, 병력 손상율이 엄청나게 높았어요.
 
 전선이 고정되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사단 사령부가 아홉번이나 이동, 9사단은 아홉이란 숫자와 무슨 인연이 있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박정희 참모장에게 맡겼읍니다. 작전만 내 결재를 받아 하라고 했지요. 창원, 보급 등 행정적인 업무를 워낙 꼼꼼하게, 또 정직하게 처리해 주어 뒤를 걱정할 일이 없었죠. 솔직이 말해서 작전에 대한 지식과 안목은 사단장인 저보다 그 분이 낫더군요.'
 
 김종갑 당시 사단장에 따르면 그해 겨울에는 실탄이나 포탄 공급보다도 주먹밥 공급이 더 큰 문제였다고 한다. 전선에서 연기를 낼 수 없어 후방에서 만든 주먹밥을 일선 사병들에게 나눠줄 때쯤 되면 벌써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곤 했다. 주먹밥과 실탄 공급을 맡은 노무자들의 사정은 더 비참했다. 사단마다 약 2천명씩의 노무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25세에서부터 40세 이상까지 비교적 나이 많은 이들이었고 기혼자도 많았다. 1년 기한으로 징집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부대에선 1년 기한이 넘어도 집으로 보내 주면 보충이 안된다고 제대를 시켜 주지 않고 계속 부렸다. 김종갑 사단장 시절 전선에선 큰 접전이 없어도 적의 포격으로 하루 평균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어느 날 2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작전참모가 사단장에게 좋은 날이라면서 술 한잔 사달라고 했다. 김 준장은 박정희 참모장에게 회식준비를 지시했다. 박정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한 명도 안 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입니다. 그 두 사람의 부모는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 더 슬플 겁니다.'
 
 그때 김 준장은 속으로 '건방지게 무슨 반대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문득 그때 말이 생각나더란 것이다. 김종갑 사단장이 박 참모장을 데리고 있을 때 부사단장은 김종평(金宗平·육군준장 예편·서울신문 감사 역임·뒤에 金宗勉으로 개명) 대령이었다. 세 사람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더러 만나 9사단 시절 이야기를 즐겨 했다고 한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그때 두 분께서 재미보신 그 여자를 제가 상대했다가 병에 걸려 혼이 났었읍니다. 두 분께서는 괜찮았읍니까'하고 농담을 하더라고 한다.
 
 이용문 대령, 다시 박정희를 만나다
 
 9사단 시절에 병참 및 군수참모로서 줄곧 박 참모장과 같이 있었던 김재춘에 따르면 육영수 여사는 잠시 박 참모장을 따라와 같이 있었는데 적에게 부대가 포위되는 바람에 군복을 입고 함께 피신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육영수는 남편을 만나러 두 차례 9사단 지역으로 온 적이 있었다. 송재천 중위가 '부인 모셔 왔읍니다'하고 보고하니까 박 중령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 사람 뭐 하러 왔대'라고 하더란 것이다.
 
 그때 한국군 부대에선 군차량을 군인까지 붙여 일반업자에게 대여하여 돈을 버는 '후생사업'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장교들의 봉급에도 보태고 부대 운영비로도 썼다. 이 후생사업을 맡았던 김재춘에 따르면 박 참모장은 한번도 그 수입에 손을 벌리지 않았고 돈관리도 공정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이용문 대령이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에서 9사단의 부사단장으로 부임해 왔다. 참모학교 부교장 시절의 이용문에 대해선 이런 증언이 있다. 이용문의 평양고보 동급생 모씨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부산진역에 내렸다. 역 앞 광장에는 피난온 수백 세대가 흩어져 갈 곳 없이 있었다. 그도 하염없이 서 있었다. 이때 그는 참모학교 부교장 이용문 대령을 우연히 만났다. 이 대령은 지프차를 몰고가다가 동창생과 맞닥뜨렸던 것이다.
 '가족과 같이 왔니?'
 '그렇다.'
 '어디 갈 데가 있니?'
 '보다시피 가두 방황중이다.'
 '자식아, 여기 타!'
 
 이 대령은 친구를 자기 차에 태우고 어디로 가더니 지프차에 트레일러를 붙여 달고는 다시 부산진역으로 돌아왔다. 친구의 가족을 트레일러에 태웠다. 이용문은 차를 자기 집으로 몰게 하여 묵게 했다. 그런 뒤 머물 집을 구해 나갈 때까지 마음 푹 놓고 쉬라고 한 다음에는 휑 하니 나가 버렸다.
 
 이 대령은 6·25 때 서울을 탈출하지 못했고, 그래서 공을 세울 기회도 잃어 진급이 늦었다. 박정희와 이용문은 더욱 단짝이 되었다. 그러나 4월에 최석 준장이 새 사단장으로 부임, 사단 사령부의 분위기가 어렵게 되었다. 최석 준장이 부임한 뒤 첫번째 사고가 생겼다. 어느 날 최 사단장이 일선 시찰을 나갔다가 연대의 배치가 자신의 명령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전참모 박춘식 소령에게 오후의 참모회의에서 이를 해명하라고 지시했다. 박 참모는 박정희 참모장과 함께 작전명령이 잘못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으나 부대배치는 작전명령대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참모회의에서 박춘식 참모는 최식 장군이 서명한 작전명령서를 갖고 와 해명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군수참모 김재춘에 따르면 최 사단장은 '야 이 새끼야, 내가 어디 이걸 보고 사인했나, 보지 않고 했지'라고 소리질렀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사단장과 참모들 사이에 인격적인 대우 문제가 발생, 분위기는 더욱 경색되었다. 부하들을 엄하게 다루기로 소문난 최석 준장도 박정희에게만은 어렵게 대했다고 한다.
 
 사단장과 마음이 맞지 않게 된 박정희 중령은 5월 초 몸이 약해졌다는 구실로 병가를 얻어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다. 사실 그때 박정희는 대단히 쇠약해 있었다. 박정희는 대구로 내려가기 전에 후방에 있던 김재춘의 부대로 와서, 송아지를 잡아먹고 하룻밤을 같이 지냈다고 한다. 김재춘은 이때 박정희가 대구로 내려간 것은 '행운의 위기탈출'이었다고 표현했다. 박정희가 대구로 내려간 지 며칠 뒤인 5월 17일 중공군은 대공세를 취했다. 9사단이 소속된 국군 3군단은 한국전쟁 사상 최대의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무질서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장병들은 방대산·오대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걸어서 며칠 동안 행군해야 했다. 적의 포격이 비오듯했고, 도처에서 매복 공격이 있었다. 체력이 떨어진 낙오자들은 포로가 되거나 총 맞아 죽거나 동사하기도 했다. 김재춘은 '만약 그때 그 분이 9사단에 남아 있었으면 그토록 쇠약해진 체력으로 며칠 낮, 며칠 밤을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산중령을 넘어 후방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용문 부사단장은 현리 패전에서는 후퇴하는 9사단의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으니 야전 지휘관으로서 그는 참으로 운이 없는 편이었다.
 
 30연대의 경우 : 승리의 축제에 연이은 갑작스런 후퇴
 
 태백산맥 중에서도 가장 험준한 설악산과 오대산을 끼고 인제·현리 지구를 담당하고 있던 부대는 국군 제3군단의 9사단과 3사단이었다. 제3군단의 병력배치를 보면, 인제 동북방의 한석산 동측지역을 3사단이 담당하고, 인제, 현리간의 도로를 포함한 한석산 서측지역은 9사단이 맡고 있었다. 제3군단 사령부는 하진부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9사단 30연대는 매봉산 점령을 목표로 작전을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51년 5월 7일 오전 7시였다.
 
 강력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매봉산은 높이 1,066m나 되는 고지였다. 바로 북쪽의 아군부대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30연대장 손희선 중령은 곧 제3대대를 주공으로 삼고 2대대는 우측에서, 제1대대는 예비대로서 좌측에서 제3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30연대는 견고하게 구축된 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공격 섬멸하기 위해 사단포병의 직접 지원하에 공격을 감행, 무려 13시간에 걸친 연대주력의 결사적인 사격전, 수류탄전, 육박전 끝에 적을 무찔러 7일 밤 8시경에는 매봉산의 남방 정상 일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연대는 다시 북방으로 이어진 연봉의 점령을 위해 5월 8일 주야공세를 계속한 결과 9일 오전 8시에는 드디어 매봉산 일대의 적을 격퇴하고 모든 중요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30연대는 매봉산 점령에만 그치지 않고 적을 계속 추격하였다. 5월 10일 오후 5시경에는 연대 예비대였던 1대대가 3대대와 교대하여 계속 공격, 당시 적군의 연대지휘소가 있던 난공불락의 한석산(1,119m)마저 점령함으로써 7일부터 10일까지 주야 4일간에 걸쳐 계속된 일단계 작전을 끝내게 되었다.
 
 매봉산과 한석산을 점령하고 난 뒤 대대적인 훈장 수여식이 있었고 부대는 축제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 17일 오후 4시경 사단으로부터 갑작스런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10여일간의 피나는 전투 끝에, 점령한 매봉산과 한석산을 철수하는 데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제3군단의 생명선이랄 수 있는 보급로상의 요충지인 상남지대의 확보를 다른 군단에서 책임지고 있었다는 데서부터 패퇴의 원인이 숨겨져 있었다. 적의 우회침투에 대비해서, 제3군단의 주저항선을 왼쪽에 인접한 미 10군단과 병행해서 하향조정을 했어야 했는데, 이를 적절히 조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2개 군단 전투지역선상의 상호 측방 노출이라는 취약점을 보이고 말았다. 과연 우려했던 대로 미 10군단의 하향지역이 적에게 뚫려 3군단은 후퇴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요충지의 관할권 문제가 패전의 불씨
 
 당시 제3군단장이었던 유재흥(劉載興·예비역 육군중장·국방부장관 역임)은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 제3군단은 적의 춘계 공세 때 전면의 적공세를 2차에 걸쳐 저지했어요. 그러다가 적이 우회해서 우리 후방에 위치한 미 10군단 지역인 상남을 차단하는 바람에 후퇴하게 된겁니다. 알다시피 그때 우리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는 하진부리부터 상남을 거쳐 전선에 뻗고 있었는데 문제의 상남일대는 미 10군단 소속의 국군 제7사단 전술지역이었어요. 전투 경계선 획정에서 주요 지형지물은 분해 확보치 않는다는 것이 전술의 원리인데 그때 상급의 미 제8군사에서 그렇게 분해했어요.
 
 나는 아무래도 상남지역에 신경이 쓰여 우리 군단 9사단 29연대의 예비대 1개 대대를 그쪽에 배치했어요. 그러자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먼드 장군이 자기 작전지역을 침범했다고 강경히 항의해 옵디다. 그래도 나는 우리 보급로의 중요한 요충지이므로 그대로 고집하니까 상급의 미8군사령관 명령으로 우리가 배치한 1개 대대를 철수시켰어요. 아먼드 장군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요는 그때 미 10군단의 7사단을 우리 3군단에 소속시켜 보급로를 3군단의 단일 관할하에 두었더라면 그런 일은 막을 수 있었지요. 3군단의 생명선인 보급로상의 요충지인 상남지대의 확보를 다른 군단에서 책임지게 됐다는 것이 과실의 근본원인이지요.
 
 그리고 산악지대에서는 우회전술을 쓰는 게 통례이므로 우리가 2차에 걸친 전면의 적공세를 저지한 후 아무래도 좌측방(左側方)에 침투위협을 느껴 돌출됐던 우리 3군단의 주저항선을 좌측 인접 미 10군단과 병행해서 하향조정했어요. 그랬더니 군사령관의 명령으로 다시 북상하라고 해서 원상으로 복구했는데 우려했던 대로 미 10군단의 하향지역이 뚫려 우리 3군단이 후퇴하게 된겁니다.'
 
 이와 같은 중요 지형지물의 분할과 2개 군단 전투지경선상의 상호측방 노출의 약점을 간파한 적은 5월 17일 야간에 인접 7사단 오른쪽을 뚫고 상남의 서북방으로 흐르는 강을 도하하여 3군단의 주력보급대인 3사단 및 9사단의 집결지 후방으로 침투, 오미재고개를 포함한 상남일대의 요지를 점령함으로써 3군단의 유일한 주 보급로를 뒤에서 차단, 좌측방포위를 기도하였다.
 
 이날 저녁 30연대는 용포리에 도착하자 사단으로부터 3사단의 18연대와 함께 군단 철수 엄호부대로서의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한편 이근양(李根陽) 중령은 9사단장 30연대의 부연대장으로 부임하여 9사단 사령부에서 신고하는 날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사단 전체가 포위당하는 사태를 목격하였다.
 
 그는 방대산을 거쳐 후퇴하다가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어 네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후 대구 육군본부 작전국으로 보직 명령을 받았다. 후퇴 당시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저희들은 포위당한 것을 알고 새벽 3시에 모든 사단 예하부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차량 약 2백대를 동원, 병력과 물자를 싣고 후퇴하기 시작했읍니다. 상남고개에 도착해 보니 이미 이 고개가 중공군에 점령되었읍니다. 거기서 우리 병력은 차에서 내려서 방대산을 걸어 올라가 산길을 통해서 철수하게 되었읍니다. 우리가 버린 차량 2백여대는 우리 공군이 폭격하여 부수어 버린 것으로 압니다. …
 
 상남고개에서 이용문 부사단장이 부대 배치를 하다가 포사격 관계의 연락을 해야 한다면서 다시 사단본부로 들어가고 제가 상남고개에서 공병중대를 데리고 지휘하고 있었읍니다. 공병중대와 본부중대 등 비전투원을 급히 편성해서 상남고개에서 중공군과 부딪쳤는데 이때 적의 세력이 압도적이어서 첫 교전에서 벌써 아군이 무너지기 시작했읍니다. 중공군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교전했읍니다.'
 
 외가닥길로 후퇴 시작
 
 이때 군단의 작전 계획은 3사단과 9사단에서 가장 강한 1개 연대씩을 뽑아 상남 북방에서 적의 주력 부대 남하를 저지시키면서 군단 주력의 후퇴를 엄호한다는 것이었다.
 '5월 17일 저녁에 중공군이 상남 서북으로 흐르는 강을 건너 북쪽의 오마치고개를 점령했을 때만 해도 그들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손희선(孫熙善) 당시 9사단 제30연대장은 기억한다.
 
 '3군단 후방길은 인접 7사단 우측을 뚫고온 중공군에 의해 제압됐지만 북쪽은 별 이상이 없는 형편이었지요. 우리 30연대와 3사단의 18연대가 상남 북쪽 고지에서 저지부대로 배치된 그날 밤에 적은 우리 부대와는 접전없이 계속 7시간 동안 우측을 뚫고 3군단 후방으로 침투했어요. 우리 30연대가 그대로 고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다른 부대들은 모두 남으로 후퇴했어요. 상부와의 연락이 끊어져 내 독단으로 30연대도 방대산을 넘어 철수하기로 했읍니다.'
 
 적 선봉부대는 이미 남방으로 침투하여 아군을 뒤에서 포위한 것이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사단과의 모든 통신연락이 두절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상부의 명령을 기다릴 것 없이 부대철수를 결심하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천주원(千珠元)은 당시 9사단 30연대 작전참모로서 통신망이 전무하다시피했던 상황에서 그때의 철수 작전은 마치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나는 연대작전참모로선 연대장을 보좌해서 작전을 펴왔지만, 철수에 있어서는 어떤 뚜렷한 작전이란 게 불가능합디다. 나는 월남에 가서도 싸워 보았는데 두 전쟁을 비교해 보니 우리가 그때 통신장비와 기동장비가 거의 없다시피한 후퇴길에서 그 정도로 병력을 건졌다는 것은 기적이었지요. 철수가 시작되고부터는 유일한 통로가 적 수중에 들어가 장비가 쓸모없게 돼 모두 소각한 것이지요. 통신장비가 없고 보니 지휘체계를 세울 수 없어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했지요. 사실 우리는 상남북방에 엄호부대로 투입된 후부터 상급부대의 지휘를 받지 못하고 연대 단독으로 행동했어요. 나는 전투할 때는 무기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통신장비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읍니다.'
 
 이근양은 말한다. '그 전투 며칠 전 박정희 참모장은 다른 데로 전속을 갔었다. 이용문 대령과 후퇴를 하는데 중공군에 포위되어 사령부와 통신이 끊긴 적이 있었다. 그때 이용문 대령은 야전 전화기를 늘 들고 다녔다. 왜 갖고 다니는지 몰랐는데 그는 이때 숲속으로 들어가 전화선을 찾아내더니 그 선에 전화기를 연결, 직접 사령부와 통화하는 것이었다. 역시 2차대전 때의 실전 경험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30연대가 상남지역에 접근해 보니 예상대로 그곳은 적에 의해 점령된 뒤였다. 부득이 이 부대는 18일 아침에 동남쪽의 방대산을 경유 험산준령의 산악지대를 타고 강행군하여 19일 창촌 북방 약 7km의 광원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광원리에는 9사단과 3사단의 경장비 병력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이미 30연대보다 앞서 산간의 험로를 따라 미처 후송하지 못한 중장비 등 군수품을 용포에서 포기하고 주로 각자가 휴대할 수 있는 경장비로써 후퇴하였으며 여기서 손희선 연대장은 9사단 부사단장 이용문 대령과 합류케 되었다.
 
 이용문 부사단장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9사단과 3사단을 합쳐 자기가 선두에서 지휘, 행군을 계속했다. 후퇴길에서 가장 고생했던 지역이 창촌에서 하진부리까지 가는 사이였다. 이용문의 친구 시인 구상은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당시 현리 후퇴에 참여하였던 장병들의 회고담을 들으면 이 부사단장의 조기후퇴 주장이 통과되지 않아 적에게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 당하자 할 수없이 산맥을 타고 24시간 계속 걸어서 남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 참모나 각 지휘관들이 위장책으로 계급장을 떼니까 이 부사단장은 '계급장 없이 어떻게 지휘하느냐'고 호통을 쳐 도로 달도록 했다는 것이다.'
 
 당시 9사단 30연대 중화기 중대장이었던 조철권(趙澈權·전 노동부 장관)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17일 저녁 상남이 적에게 점령당하자 군단병력은 길로 빠질 수 없어 방대산 쪽으로 후퇴했어요. 17일 훈장 수여식에 왔던 심언봉 군단 참모장도 길이 막혀 우리와 함께 걸으며 철수했어요. 우리들은 개인장비만 가지고 방대산을 넘어 일렬 종대로 계곡으로 해서 하진부리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어요. 무슨 특별한 작전이란 있을 수 없고 한명의 부하라도 더 데리고 군단까지 가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지휘관들과 사병들은 강냉이라도 몇알 씹으며 허기를 이기려고 했지만 참모들은 대개 굶었습니다. 너무나 허기가 지니 군악병은 나팔을 버리고 심지어 차고 있던 시계까지 무겁다고 버리고 가는 실정이었어요. 그런데 모두 무기만은 소중히 지녔어요. 굶어 비틀거리면서도 무거운 구식 박격포를 지고 가는 사병을 보았읍니다. 우리는 하진부리에서 병력을 점검하고 여기서 철수 후 처음으로 밥을 지어 먹었어요. 하진부리에서 정선쪽으로 15k쯤 되는 모로치고개에서 적과 맞부딪쳤어요.'
 
 김재춘 소령은 이렇게 말했다.
 
 '지휘계통이 무너져 자기 체력만 믿고 달아나야 할 실정이었읍니다. 체력엔 자신이 있는 저도 한번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야간 탈출로 겨우 목숨을 건졌지요. 나중엔 탈진하여 고마운 부하들이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때 박정희 참모장 숙소에서는 젖먹이가 딸린 아주머니가 가정부처럼 일하고 있었읍니다. 이 아주머니가 저와 같이 달아났는데 아주 깊고 넓은 계곡물을 건너게 되었읍니다. 어른도 목까지 잠길 정도였어요. 우리가 계곡을 막 건너려 할 때도 적의 포격·총격이 집중되었어요. 허겁지겁 건너긴 했는데 아주머니가 정신없이 제 앞을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등에는 아기가 없고 빈 포대기만 업혀 있지 않겠읍니까. '아주머니, 아이는 어떻게 했어요'라고 물으니까, 그제서야 떠내려간 아기를 찾는다고 야단을 합디다만 너무 늦었지요.' 김재춘에 따르면 최석 사단장과 이용문 부사단장은 전선이 뚫렸을 때, 그 대처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엇갈린 증언
 
 철수 당시에도 최석 사단장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이용문 부사단장이 철수 결심을 촉구해서 잘 빠져 나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이근양은 이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 다르다.
 
 '결심을 제때에 못했다기보다는 하룻밤 자고 나니까 사단이 완전히 포위당했기 때문에 당황해서 방대산 쪽으로 부대가 전부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사단의 전방에 있던 28연대가 앞을 막으려고 했지만 퇴로가 된 도로의 양쪽은 지뢰지대였어요. 거기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한 가닥 도로를 통해서 1만여명의 병력과 수색대의 차량이 뒤엉켜 철수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다가 상남고개에서 퇴로가 막히니까 모두 방대산으로 몰리게 되었읍니다. 지휘체계도 혼란에 빠져 전혀 통솔이 되지 않았읍니다.
 
 사단장은 사단장대로 주위의 사단본부 병력과같이 산으로 들어갔고, 부사단장도 병력을 끌고 후퇴하다가 후방이 적에 의해 차단되는 바람에 병력과 떨어져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읍니다. 산으로 기어오를 때는 지휘계통이 전혀 서지 않았어요. 물론 연대 이하의 부대에서는 지휘계통이 유지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단과 연대, 이런 관계에서는 지휘체계가 유지되지 않았읍니다. 당시 28연대장은 이창정 대령, 30연대장은 손희선 대령, 참모장은 강태민 대령이었읍니다. 박정희 참모장이 병가를 얻어 대구로 물러난 뒤 강태민 대령이 대신 부임했는데, 며칠 안 있다가 포위 당한 것이지요.'(국방부 전사연구실 증언록)
 
 이때의 전투 정황에 대해 당시 최석 사단장은 뒤에 이렇게 말했다.
 '9사단은 병력 손실도 컸지만 장비 손실이 많았읍니다. 도로가 차단 되었기 때문에 일부장비만 뺄 수밖에 없었읍니다. 이용문 부사단장에게 오늘 밤 중으로 차량을 다 빼라고 했는데 새벽에 도로가 점령되는 바람에 다 빼지 못했어요.'(국방부 전사연구실 증언록)
 
 모로치고개에서 적을 저지
 
 30연대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설상 가상으로 적이 퇴로인 운두령을 또 먼저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촌에서 운두령을 넘어 철수할 계획을 변경하여 동측방의 계방산(1,577m)과 비로봉(1,563m) 중간을 따라 철수작전을 강행한 끝에 하진부리에 연대주력이 집결하기에 이르렀다. 하진부리에 도착하여 비로소 30연대는 탄약과 식량을 보급받았으나 부대를 재편할 시간적 여유도 없어 사단으로부터 또다시 군단 철수 엄호 임무를 부여받고 21일 동사리재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여 적의 진출을 일단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2일 새벽 적의 압력으로 다시 하진부리-모리재(956m)-대화 방향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연대는 속사리재 일대에서 적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하진부리에서 정선 방향으로 흐르는 하천계곡을 따라 남하, 모로치고개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30연대는 주력을 모로치 일대에 배치하여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여 쌍방간에 본격적인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모로치고개에서의 전투에 대해 조철권 당시 대위는 이렇게 회상한다.
 
 '적은 남쪽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는 북쪽에서 적을 공격하는 그런 기이한 전투였어요. 연대장은 대대장에게 능선으로 올라가 적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는데 대대장이 다리를 다쳐 내가 대대를 지휘했어요. 밤이 되니 적 1개 연대가 능선으로 올라와 혼전이 벌어졌지요. 한때 아군진지가 위험했지만 장교들이 직접 기관총을 쏘면서 역전했어요. 날이 새니 적은 북상하고 없읍디다. 이때부터 우리는 다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하진부리에 다시 들어가니까 미군 탱크부대가 보이고 적은 마구 패주하고 있었어요. 이제 전세가 역전되는구나 싶어 용기 백배 하더군요.'
 
 모로치고개에서의 전투는 30연대의 전력을 투입하여 적의 남진을 기어코 저지해야 할 일대 결전이었다. 장병들은 6일간에 걸친 철수로 피로가 극도에 달해 있었지만 모로치고개를 적에게 탈취당하기 일보 전에 확보하여 결정적으로 적의 진출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손희선 당시 연대장은 말했다.
 
 5월 23일 야간에도 적의 재차 역습이 있었으나 완전히 격퇴시켰다. 이 모로치 전투는 아군이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이도록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바로 다음날은 5월 24일 일출과 더불어 적의 북상 패주를 관측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반격 작전이 시작되었고, 잃었던 지역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중공군 9개 사단의 인해 전술과 오대산에 잠복하고 있던 게릴라의 후방공격을 동시에 받아 처참한 철수를 당해야 했던 한국군 제3군단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재흥 군단장, 최석 9사단장, 김종오 3사단장 등의 용전과 통솔의 덕이었다고 《한국전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개 사단이 지휘체계를 일시 상실하고 무질서한 후퇴를 했고, 군단·사단 사령부의 기능이 잠시라도 정지되었다는 점에서 이 현리 후퇴는 한국 전쟁 중 최대의 패배로 기록되기도 한다.
출처 :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