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그의 시대(3) - [반정작전]의 좌절(4)
  오붓했던 육군대학시절
 
 朴준장은 진해 여좌동에서 방이 두칸 있는 전세집을 얻었다. 육군대학총장의 관사뒤뜰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받이 집. 朴준장과 陸英修부부가 근혜양을 데리고 한 방을 썼고 다른 방은 韓丙起중위와 운전병 李他官이 썼다. 朴正熙 부부의 생애에 있어서 진해생활은 가장 오붓했던 시절로 기록되고 있다. 朴준장은 교육일과를 끝내면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해는 길었다. 해질 때까지의 시간을 이용하여 내외가 해안을 따라 걷기도 했고 언덕으로 올라가 수평선상의 장엄한 낙조를 구경하기도 했다. 밤에는 교재를 뒤적이는 학생으로 돌아갔다.
 
 늘 쪼달려 온 陸英修에겐 싱싱한 생선을 싼값에 구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韓丙起에 따르면 朴준장은 여기서도 쌀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 준장 월급으로도 생계유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루는 朴준장이 편지를 써 주더니 광주에 있는 1관구사령부의 金在春참모장에게 전하라고 했다. 金대령은 편지를 뜯어보더니 쌀 다섯 가마를 주었다. 韓중위는 기차편으로 여수까지 쌀을 실어 날랐으나 헌병들이 무서워 여수에서 5만 환을 받고 팔아버렸다. 진해로 돌아 와 5만 환을 朴준장에게 받쳤다. 3군단장 宋堯讚준장은 가끔 진해에 들러 육군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과거의 부하들에게 용돈을 주고 가곤 했다. 다른 부하들에겐 5만 환씩, 朴준장에겐 10만 환씩 주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다른 부하들이 기분 나빠하기도 했단다.
 
 韓丙起부관은 「학생 장군」 옆에선 별 할 일이 없었다. 무료하게 지내는 것을 보기가 민망했던지 朴준장은 어느 날 韓중위를 부르더니 『내일부터는 도시락을 싸 줄테니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이나 하고 오너라』고 했다. 해수욕도 며칠 지나니까 싫증이 났다. 韓중위는 李亨根육군참모총장의 심복인 金영찬 대령에게 부탁하여 육군본부 보임과에 근무할 수 있도록 손을 쓴 뒤 朴준장에게 허락을 구했다. 쾌히 승낙한 朴준장은 『서울에 가면 있을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없습니다』고 했더니 『우리 집이 비어 있으니 거기 가 있으라』고 했다. 그때 서울 충현동의 朴준장 집에는 장모 이경령이 朴준장의 첫 아내에게선 난 朴在玉과 근영 양을 데리고 있었다.
 
 진해를 떠날 대 朴준장은 韓丙起가 쌀 다섯 가마를 팔아서 가져 온 5만 환에서 2만 환을 떼어서 韓중위에게 주었다. 韓丙起는 서울의 충현동 집에서 육군본부로 출퇴근을 했다. 그때 여고를 졸업하고 집에 있던 朴在玉과의 인연은 그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朴준장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韓대위(승진)에겐 꼭 5천 환씩의 용돈을 주었다고 한다. 朴준장 내외는 朴준장의 장모 회갑때와 陸英修의 동생(육예수) 약혼식 때 서울에 올라와 참석했다. 육예수는 1957년 1월 고려대학교에서 사무원으로 있던 조태호(趙泰浩.정수장학회 이사장)와 약혼했다. 육예수의 어머니 이경령은 신랑집에서 보낸 혼서함(婚書函)을, 자신의 팔자가 사납다는 구실로 사위에게 열라고 했다고 한다. 1957년 3월20일 朴준장은 벚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른 철에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그 열흘 뒤 그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전보되어 경기도 포천으로 부임했다.
 
  白仁燁군단장을 들이받고
 
 군단장 백인엽(白仁燁)중장은 1군사령관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한 白善燁대장의 동생이었다. 白仁燁은 朴正熙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지만 해방 뒤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에 진급이 빨랐다. 성격이 격하고 부하를 엄하게 다루기로 소문난 白중장 밑에서 부군단장 朴준장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 무렵 朴준장이 韓대위에게 직접 털어놓은 사건이 하나 있다.
 
 어느날 朴준장은 군단장 비서실장을 데리고 외출, 식사를 하고 왔다. 비서실장이 없을 때 군단장은 그를 찾았는데, 부군단장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오는 즉시 부군단장을 오라고 해라』고 시켰다. 朴준장이 나타나자 白중장은 대뜸 『그 아이가 군단장 비서실장인가, 부군단장 비서실장인가』고 힐난했다. 어이없어 하던 朴준장은 폭발했다. 『너 같은 사람이 군단장이냐? 너 같은 자 밑에서 같이 있을 수 없으니 너 혼자 다 해먹으라!』 그런 뒤 문을 박차고 나오려니까 白중장이 달려 와 부군단장을 붙들고 사과했다. 그날밤 두 사람은 화해 술판을 벌였다는 것이 朴준장의 얘기였다. 그때 朴준장의 측근이었던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白중장은 깐깐한 朴준장을 손에 넣으려다가 되물린 셈이었지요. 전임 부군단장은 白중장이 부대에 비상을 걸면 배낭을 지고 철모를 쓰고 나와 보고를 해야 할 만큼 당했었지요. 충돌사건 이후에 白, 朴 두 장군은 아무래도 같이 지내기가 거북하게 되었어요. 白중장은 형에게 부탁하여 朴준장을 다른 자리로 영전시켜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참모차장 장도영(張都暎)장군도 朴준장을 다른 곳으로 빼내 주려고 애썼다고 해요』
 
 朴正熙는 숙군시절 白善燁으로부터는 생명의 구함을 받았지만 그 동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때 또 張都暎의 도움을 받았다. 韓丙起에 따르면 육군본부에선 朴正熙에게 정보국장의 자리를 제의했으나 朴준장은 친구인 강태민(姜泰敏)준장에게 양보했었다고 한다. 만군출신 姜준장은 朴준장과 절친한 사이였다. 韓丙起는 『일요일에 장인이 충현동 집에 머물러 있으면 꼭 姜장군이 찾아와 종일 방안에서 놀다가 가곤 했다』고 회고한다. 『장인 어른은 잡기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화투나 장기, 바둑을 일체 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두 분이 무슨 일로 하루를 보내실까 싶어 문틈으로 들여다 보면 그냥 두 분이 종일 중얼중얼 이야기만 하시는 거예요. 점심 때가 되면 늘 국수를 시켜서 잡수곤 했어요. 姜장군은 5·16 직전에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셨다면 틀림없이 거사를 함께 했을 겁니다』
 
 白善燁총장은 인사국장 자리도 권유했으나 朴준장은 사양하고 『꼭 그러시다면 사단장을 한번 더 하고 싶습니다』고 했다. 그리하여 朴준장은 1957년 9월3일 제 7사단장으로 전보되어 사령부가 있는 강원도 인제로 옮겨갔다. 朴正熙준장이 7사단장으로 부임한 직후 평상시의 군대 사고로는 가장 큰 보급창고 화재사고가 났다. 운전병 李他官에 따르면 겨울 보급품이 창고에 들어온 날 밤 11시쯤 불이 났다고 한다. 朴준장은 관사에서 뛰어나갔다. 벌써 강풍을 타고 화염이 창고 전체를 휩싸고 있었다. 朴준장으 얼굴은 잿빛이었다. 인부들이 일하다가 담배꽁초를 버린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 1개 연대분의 피복들이 몽땅 타버렸다.
 
  화재 사고 봐준 宋堯讚장군
 
 사단장이 파면되고도 남을 만한 사고였다. 朴준장도 『이젠 끝났구나』고 체념하더라고 한다. 그러나 이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宋堯讚 1군사령관이었다. 宋장군은 朴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병참부장을 혼좀 내시오. 걱정마시고 불탄 피복은 다 바꿔줄테니 피해량을 조사해서 보고하시오』라고 오히려 위로를 했다. 朴준장은 그 전에 잃어버린 피복까지 피해품으로 보고하여 새로이 피복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7사단장 시절에도 朴正熙준장은 5사단때 참모였던 車圭憲중령을 인사참모로, 미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尹心鏞중령을 군수참모로 데리고 왔다. 그 뒤 1군 참모장이 되자 이 두 사람을 또 데리고 가 尹중령을 참모장 보좌관, 車중령은 대대장으로 썼다. 7사단장 시절 朴준장은 육사11기생 孫永吉소위를 총애했다. 사병용 김장을 담글 때는 孫소위를 감독관으로 내보내 떼먹는 사람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朴정권 때 尹心鏞(당시 수도경비사령관)-孫永吉(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인맥은 이른바 「尹心鏞사건」으로 거세되는 악운을 만나게 된다.
 
 朴준장이 7사단장으로 있을 때인 1958년에 4대 총선이 있었다. 청년 정치인 金大中은 민주당 후보로 인제 선거구에 등록하려고 했으나 관권의 방해를 받아 등록을 못했다고 한다. 金씨는 그 대신 무소속 후보를 지원, 자유당 후보와 맞섰다고 한다. 金씨는 「행동하는 양심으로」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이때 우연히도 인제에 朴대통령이 제7사단장으로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 그와 부정선거와는 관계가 없었던 것이지만 나는 정부와 여당의 소행이 너무나도 괘씸해서 이같은 실상을 그에게 호소해 보려고 군청에서 20m쯤 떨어진 사단장 관사를 찾아갔다. 마침 朴사단장은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지만…』
 
 朴대통령 시절의 한 측근은 朴대통령이 金大中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이 선거 때부터이며 첫 인상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고 했다. 나중에 숙명적인 경쟁관계에 서게 되었던 두 사람이 이때 만나서 가슴을 열어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면 그 뒤 두 사람의 인간관계가 좀더 부드러워졌을지도 모른다. 金大中 민주당고문은 『朴대통령과는 생전에 한 번도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본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여야 사이가 적과 아군 같았던 한국의 정치풍토에서는 사소한 인간적 인연도 소중한 것이다.
 
 朴正熙의 7사단장 시절, 양곡의 관리책임을 진 병참부장이 감사결과 쌀 4백 가마니를 결손낸 사실이 적발되었다. 사단장은 군법회의를 열고는 재판장 車圭憲중령에게 관계자들의 엄벌을 지시했다. 『쌀 도둑질 하는 이런 놈들을 그동안 군법회의에 넘겨도 결국엔 다 빠져나가 버리고 옥살이 하는 걸 보지 못했어. 이번엔 내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이놈들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할테야』 그때 법무참모는 신직수(申稙秀)중령(법무장관·중앙정보부장 역임)이었다. 朴준장의엄명도 있고 해서 군법회의는 관련자들에게 징역 10∼15년씩을 선고했다. 군법회의는 지휘관 형량확인이 있어야 형이 확정된다.
 
 그런데 朴사단장은 한달이 지나도 그 확인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하루는 朴사단장이 참모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다른 아야기를 하다가 아주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입을 떼는 것이었다. 『내가 李중령이 빼먹었다는 4백 가마니의 내역을 보니까 저 혼자 먹은 것은 얼마 안되더군. 거의 다 뜯기고 상관들에게 바친 것이더군. 아마도 그동안 내가 부대에서 가져 다 쓴 양곡도 다 합치면 그 정도가 될 거야. 李중령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맺히더군』 尹중령은 『각하의 고민을 잘 알겠습니다. 어떻게 선처를 할까요』라고 물었다. 사단장은 『李중령 보고 집을 팔든지 하여 손실분을 변상하게 하고 파면만 시키는 게 어때』라고 했다. 이 사건 직후 朴준장은 병참관계자들을 몽땅 해직하고 보병출신들을 뽑아 병참부서에 임명했다. 갓 육사를 졸업한 11기생 소위를 창고계장에 임명했다. 尹心鏞 당시 중령은 『이런 인사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그분은 설사 보병출신들이 경험부족에 의해 일시적으로는 업무가 지장을 받아도 부정 부패보다는 낫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고 했다.
 
 『남의 남편을 왜 감독해!』
 
 朴사단장은 사단장 앞으로 나오는 월정보비 7만 환을 네 참모들에게 달마다 나눠 주었다. 「예하 부대에 가서 손을 벌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7사단장이 시절로 기억되는데 국회의 국정감사반이 사단에 온 적이 있어요. 자유당 의원들은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고 민주당 의원들은 朴준장에게 꼬치꼬치 따졌어요. 감사가 끝난 뒤 朴사단장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자유당 의원들을 거명하면서, 저것들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경멸투로 욕을 합디다. 그러면서 참모장을 보고 자유당 의원들을 대접하라고 지시하더니 그분은 이철승(李哲承)씨 등 야당 위원들을 데리고 나가 접대하시더군요. 저는 좁은 소견으로 저래 가지고야 어떻게 빛을 보겠느냐, 하고 생각했었죠』(韓丙起의 증언).
 
 朴正熙는 사람을 사귈 때 좋고 나쁘고가 너무 분명했다. 직속 상관인 오덕준(吳德俊) 3군단장을 그는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韓丙起 당시 부관에 따르면 어느날 吳군단장이 朴준장을 찾는 전화를 걸었다. 韓대위가 받으니 군단장은 『나, 군단장인데 거기로 갈테니 사단장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전해줘!』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韓대위는 사단장에게 그 메시지를 전했다.
 『나, 없다고 그래!』 당황한 韓부관은 군단장실로 전화를 걸었으나 이미 7사단쪽으로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韓대위는 다시 朴사단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참모장 보고 대접하라고 해!』 그래놓고는 어디론가 나가버렸다.
 
 1958년 3월 朴준장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朴준장이 진급하는 데는 宋堯讚 1군 사령관 외에도 미 고문관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韓丙起는 말했다. 朴正熙는 숙군 뒤의 1년 남짓한 공백기간에도 불구하고 육사2기 동기생 가운데서는 가장 빨리 진급한 사람이다. 그의 능력이 인정을 받았고, 宋堯贊·白善燁·張都暎 등 그때의 군수뇌가 그런 朴장군을 알아주고 이해해준 덕분이었다. 소장 진급 소식을 李他官중사로부터 전해 들은 朴사단장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불 낸 사람을 뭣하러 진급시켜?』라고 말하면서 씩 웃더란다. 7사단장 시절 陸英修는 5사단장대와 같이 한달에 한번꼴로 인제로 와 남편을 만나곤 했다. 陸英修와 朴正熙는 부부싸움을 벌이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陸英修가 오면 7사단의 어느 장교 아내가 그동안의 사단장 행각을 고자질하여 싸움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고자질 잘하는 그 장교 집에서 집들이 회식이 열리게 되었다. 尹心鏞중령이 朴正熙사단장을 모시러 갔다. 사단장은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난 안 가겠어. 그 여편네는 이상한 여자 아냐? 자기 남편 감시나 잘 하지 남의 남편을 왜 감독해!』
 
 1958년 5월 朴正熙가 7사단장 관사에 있는 동안 陸英修는 신당동에 대지 1백 평, 건평 30평짜리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갔다. 4백50만 환에 산 집이었다. 이 집을 사는 데는 7사단의 연대장들과 포병단장 등 네 사람의 찬조가 있었다. 전속 부관 韓丙起는 朴준장이 7사단장을 할 때까지 따라갔다가 도미 유학을 위해 그만두고 그 자리를 김성구(金聖九) 중위(대사 역임)에게 넘겨 주었다. 1958년 7월에 돌아온 韓丙起는 10월3일 元容德 헌병사령관의 주례로 朴在玉과 결혼식을 올렸다. 朴正熙와 첫 아내 金浩南사이에 난 장녀 朴在玉은 朴正熙의 큰형 朴東熙의 선산 상모동 집에서 자랐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朴장군의 조카사위 金鍾泌 중령의 집에서 있었고, 陸英修한테도 자주 와 있었다. 남 앞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朴在玉은 몸가짐이나 분위기가 陸英修와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그래서 朴正熙의 결혼 전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朴在玉을 陸英修의 친딸로 생각할 정도였다. 韓丙起는 『집사람이 사춘기 때 陸여사를 따랐으므로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은인 宋堯讚 장군
 
 1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송요찬(宋堯讚)중장은 1958년 6월17일 7사단장인 朴소장을 1군사령부 참모장으로 데려갔다. 그때 宋사령관은 대외적인 활동에 바빠 1군의 운영을 朴正熙에게 맡겼다. 야전군의 안살림을 꾸려가게 된 朴正熙는 예하 사단장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인맥을 구축할 기회도 갖게 되었다. 宋장군은 장도영(張都暎)과 마찬가지로 朴장군이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을 때 여러번 도와주었지만 朴正熙는 이상하게도 宋堯讚에게 별로 고마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朴正熙는 가끔 운전병에게 『宋석두(宋장군의 별명) 차가 보이거든 추월해버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宋堯讚은 朴正熙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는 것이 거북했지만 그의 다부진 업무처리능력을 인정했고, 朴正熙는 宋장군의 지식수준을 낮추어 보면서도 통이 크고 자신에게 보인 호의를 고맙게 여기고 있었다고 당시 측근들은 말한다. 5·16 뒤 그가 청년장교들의 반대를 꺾고 미국에 있던 宋씨를 불러들여 내각수반으로 앉혔을 때 육사 동기생인 한웅진(韓雄震)준장에게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그는 나에겐 은인이다. 그에겐 장점이 있는데, 하라면 하는 복종심이 바로 그것이다』
 
 宋堯讚은 朴正熙참모장에게 작전분야는 일임했으나 중령급 이상의 인사권은 자신이 장악했다. 1군참모장 시절 朴소장이 데리고 쓴 참모들은 인사참모 박경원(朴敬遠.전 강원도지사) 작전참모 최택원(崔澤元.전 총무처 차관) 정보참모 채명신(蔡命新.전 주월사령관) 金용순(전 중앙정보부장) 준장들이었다. 모두 5·16에 가담했고 그 뒤 朴정권 시절에 중용되었던 인물들이다. 朴소장은 부하가 자신을 무시하고 계통을 밟지 않는 것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웬만한 부하들은 무서워서도 그런 짓을 하지 못했다.
 
 1군참모장 시절 헌병부장이 참모장을 우회하여 바로 宋堯讚사령관의 결재를 받아 차량관리자를 군법회의에 넘긴 적이 있었다. 朴소장은 헌병부장에게 재떨이를 넘긴 적이 있었다. 朴소장은 헌병부장에게 재떨이를 날린 뒤 사령관실로 들어가 『시정을 해주든지, 저의 사표를 받든지 하라』고 대들었다. 통이 큰 宋장군은 껄껄 웃으면서 『내가 워낙 결재를 많이 하다가 보니 그것이 그냥 묻어 넘어간 모양이구려』라면서 군법회의를 취소시켰다. 주도면밀한 朴소장과 화통한 宋사령관은 상호보완적인 성격으로 해서 일을 잘해나갔다.
 
  6관구사령부에서 또 화재 만나
 
 1군참모장 시절의 어느날 朴正熙소장은 尹必鏞보좌관을 부르더니 『기밀비에서 5만 환을 떼내 蔡命新준장 방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되 나는 전방 시찰중이라고 전하라』고 말했다. 그날밤 朴소장은 사연을 털어놓았다. 『내가 숙군시절에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조사를 받고 있을 때 아까 온 그 친구가 헌병으로서 나를 조사한 사람이었지. 내가 육사 중대장으로 가르친 5기생이야. 나는 조사받지 않을때는 취조실 문쪽 바닥에 늘 꿇어앉아 있곤 했어. 아까 그 친구는 복도를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 내가 꿇어앉아 있기 때문에 복도에서 보이지 않으니까, 박정희! 이 새끼 어딨어! 하면서 고함을 질렀어. 그 사람이 군복을 벗고서 동기생인 蔡命新이한테 돈 얻으러 온 거야. 蔡命新이 나에게 기별을 했는데, 내가 직접 돈을 전해주자니 그사람 얼굴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날 것 같아 자네를 시킨 걸세』
 
 宋堯讚은 육군참모총장이 되자 1959년 7월1일 朴소장을 6관구사령관으로 임명했다. 朴正熙는 사고를 몰고 다니는 지휘관이었다. 5사단의 설화, 7사단의 불에 이어 6관구사령부에서도 큰불을 만났다. 1959년 말, 사령부내 교육과장(과장 李洛善소령) 사무실에서 난로과열로 불이 나 사령관·참모장·고문관실과 작전·정보처 사무실을 모두 태웠다. 기밀서류는 겨우 빼냈다. 김재춘(金在春)참모장은 평소 친면이 깊은 취재기자들에게 부탁하여 기사를 안 쓰게 하여 이 사건을 별 문책없이 수습했다는 것이다.
 
 金在春 당시 6관구 참모장에 따르면 6관구사령부는 그 뒤의 수도경비 사령부와 기능이 거의 같았다. 군이 국회의원 등 권력층의 부탁을 접수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朴소장은 청탁처리 업무를 金참모장에게 맡겨놓았다. 朴正熙가 6관구사령관 시절에 元炳旿교수는 제대한 뒤였는데 가끔 신당동의 집으로 놀러갔다고 한다. 이때 들은 이야기를 元炳旿는 이렇게 기억했다. 『한번은 朴사령관이 흥분을 해서 장교 욕을 하고 있습디다. 어느 사병이 외출중에 만원 전차를 타려다가 떨어져 배가 터졌는데, 그 보고를 듣고도 본부 사령이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고 있더라고 개탄합디다. 주번사령이 아침 참모회의에서 그 사고를 보고도 하지 않았는데 朴장군이 다른 루트를 통해서 듣고는, 너희들은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느냐, 보상을 받아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꾸짖었대요』
 
  朴장군의 파워 베이스
 
 朴장군은 이 무렵에 이미 군내에서 따르는 청년장교들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파워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인사권이나 수사권을 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힘은 결백과 바른 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매력은 「늘 큰 걱정을 하는 사람」이란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는 군복을 벗어버릴 만큼 현실에 정면도전하는 무모함은 범하지 않았다. 부정에 항의하고 바른 말을 하되 어떤 한계를 알고 지키는 영리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가 나갈 수 있는 한계를 알고 그 한계안에서는 과감하게 행동함으로써 부하·동료들을 감복시키고, 상관들에게 만만치 않음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朴正熙였다. 朴正熙의 반항은 결코 직설적이거나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尹必鏞은 朴장군의 행동을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표현했다. 『상관이 朴장군의 행동에 대해 기분이 나빠도 약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지능적이고 미온적인 저항을 한 것입니다.』 朴正熙가 조직적이고 적극적 저항을 했다면 그는 군인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한 개인적 결백과 적당한 저항을 유지하여 부정·부패·모략이 판치던 시대에 부하들로부터 선망을 받아가면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어쨌든 사상문제로 교수대로 갈 뻔했던 그가 그뒤 죽어지내기는 커녕 체제에 대해 반항하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럼에도 朴正熙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내의 실력자 김창룡(金昌龍)특무부대장과 충돌할 기회가 없었고, 그 자신도 이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朴正熙는 숙군시절 金昌龍에게 혹독한 신문을 당해 본 경험 때문에 그에게 대단한 증오심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朴正熙는 대통령이 된 뒤 고 李鍾贊(전 국방장관)장군에게 『6·25 직후 한강을 건널 때 金昌龍과 같은 나룻배에 탔어요. 군 내부를 이간질시키는 그자의 소행을 생각하니 권총으로 쏴 죽여버릴까 하는 마음까지 생깁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김경옥(金景沃.육군 준장 예편·주일공사역임)은 6·25 직후 수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 朴正熙가 『金昌龍과 함께 후퇴를 했는데 내 등뒤에서 쏘지 않을까 겁이 나서 늘 뒤에 처져서 걸어왔다』고 말하더라고 회상했다.
 
 朴正熙는 이런 강박의식 때문인지 그 뒤로는 金昌龍과는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金昌龍은 당시 정계와 군인사에 깊이 관여하여 丁一權, 元容德 같은 만군출신 장성들과 알력이 심했고, 이것이 그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朴正熙는 비록 만군출신이지만 일군출신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파벌싸움이나 정치로부터는 초연하여 金昌龍과는 이해관계가 얽힐 기회도 없었다. 특무대 특무처장을 지낸 이진용(李珍鎔.전 공화당 국회의원)은 『1956년 1월에 金昌龍이 암살되지 않았다면 4·19나 5·16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능했다 해도 피를 더 흘렸을 것이다』고 했다. 李承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 金昌龍이 발포를 꺼려했을 리 없고, 거사 모의를 방관하지도 않았으리란 얘기다.
 
 대인관계에서 朴正熙의 가장 큰 장점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그는 침묵으로서 자신을 방어했고, 상대방을 긴장시켰으며, 그 귀한 침묵을 깸으로써 호의를 표현하였다. 그는 침묵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정치인으로 꼽힐 것이다. 韓丙起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늘 자세와 태도를 빈틈없이 꼿꼿하게 고쳐 잡고 딱 버티고 과묵하게 앉아 있으니 도무지 헛점이 안 보여요. 말을 많이 하면 절로 빈틈이 노출되는데 그 말을 아끼니까 파고 들 구석이 보이지 않습디다. 그분의 침묵은 그러나 사람들을 멀리 하는 게 아니라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그분을 따랐던 청년장교들이, 그분의 언변에 감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그랬지만 사단장 시절에도 부하들이 브리핑을 하면 절대로 도중에 참견하지 않고 듣기만 해요. 잘잘못을 지적하지도 않고, 좋다, 나쁘다, 표현도 안 하셔요. 다만 브리핑을 다 듣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그게 바로 핵심을 찌르는 거예요.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그 브리핑에 대한 평가가 될 만한 그런 질문이었지요』
 
  웅크린 맹수
 
 1950대의 마지막 해에, 朴正熙소장은 먹이를 향해 도약을 하기 전 힘을 팽팽하게 비축하고 있는 맹수의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 구체적으로 쿠데타 모의를 하고 다니지 않았다. 모든 큰일이 다 그렇듯 그런 결단의 계기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법이다. 그런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을 만한 투자를 해놓고 있었던 것이 朴소장이었다. 이 당시 그의 군내 인맥은 대강 이러했다. 박임항(朴林恒)·이주일(李周一)등 만주군관학교출신 선후배, 육본정보국에서 인연을 맺은 金鍾泌등 육사8기출신들, 사관학교 중대장 시절 그가 가르쳤던 5기출신들, 포병장교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일했던 장교들.
 
 朴正熙는 10여년간의 주도면밀한 인간관계를 통하여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인물들을 파악해 놓고 있었다. 나중에 거사 계획을 짤 때 朴소장은 동지들이 사람을 천거하면 『그 친구는 ○○○측근이라서 안돼』 『그 장교는 입이 가벼워』 『그 친구는 안 끼워주면 방해가 되니까 끼워주되 중요한 일을 맡겨선 안돼』라고 척척 성분분석을 하곤 했다. 그동안 축적한, 장교들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는 반증이다. 한웅진(韓雄震)은 5·16의 계획은 1년 전부터 이뤄진 것이지만 朴正熙는 적어도 위관장교시절부터 『이 사회를 뒤엎어 개혁할 꿈을 꾸고 있었다』고 했다. 朴正熙에게 있어서 5·16은 20년에 걸친 군인생활중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골똘한 구상과 인맥구축작업의 결실이었다는 얘기다.
 
[ 2003-06-30, 11:58 ] 출처 : 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