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걸었는데 이제는 휠체어를 탄다고 했다. 청력이 떨어져 듣지도 못한다고 했다. 가족 외엔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팔십대 중반인 그는 평생 공부하고 글을 쓰고 책을 냈다. 그의 방에는 책상 하나에 컴퓨터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더라고 했다. 내가 아는 퇴임한 한 법관의 노년의 모습이다.
도심 속의 아파트에서 은자처럼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본다. 교수에서 정년퇴직을 한 친구가 장자를 몇 년간 연구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칠십대 말의 고교 선배는 독일어를 번역하면서 책을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을 남기려고 애들을 쓰는 것 같다. 인간이 죽어도 책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인가.
오래 전 청계천 중고 서점의 바닥에서 먼지가 묻고 표지가 찢어진 책을 발견한 적이 있다. 김홍섭 판사가 살아 있을 때 쓴 수필집이었다. 주일날 그가 다니던 성당 신부의 부탁으로 산동네 빈집에서 고독사한 여인을 찾아간다. 어둠침침한 방의 아랫목에서 한 여인이 조용히 죽어있었다. 벽 아래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시집 몇 권이 놓여있었다. 죽은 여인이 쓴 시집이었다. 그 여인은 노천명 시인이었다. 표지가 찢어지고 너덜너덜한 낡은 수필집 안에 김홍섭 판사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동묘 벼룩시장의 길바닥에 쓰레기 같이 수북이 쌓아놓은 헌 책 중에서 이광수의 자전소설을 발견했었다. 열 살의 소년은 콜레라로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놓고 망연한 심정이었다. 엄마는 그 한 달 전에 죽었다. 전염될까 봐 마을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리어커에 아버지의 시신을 올려놓고 끌고 간다. 아버지의 발이 몸을 덮은 가마니 밖으로 삐죽이 나와 흔들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어린 여동생을 밥을 지어 먹여야 했다. 낫을 들고 근처 야산에 가서 마른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피가 흘러나오고 소년은 절망 속에서 엉엉 울고 있다. 책 속에서는 지금도 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나는 죽은 사람들이 쓴 책에서 진한 감동을 받곤 한다. 그 누구든 자신의 삶을 글로 남겨놓으면 먼 훗날 누군가에게 마음의 울림을 주고 위로가 되지 않을까. 죽었지만 그 책으로 존재를 계속하는 건 아닐까. 무덤이나 납골당을 장식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일생을 담은 책을 한 권씩 만들고 죽으면 어떨까.
인기가 높았던 한 미녀 탤런트의 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언니는 우리 자매들이 봐도 정말 예뻤어요. 그러니 수만 명의 경쟁을 뚫고 탤런트가 되고 바로 주연이 됐죠. 언니는 문학소녀이기도 했어요. 그런 언니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거예요. 언니는 너무 고통스러워 했어요. 그렇게 아프면서도 매일매일 진땀을 흘리면서 일기를 썼죠. 언니가 죽고 난 후 그 일기를 봤어요. 어떤 페이지에는 진물이 묻어 있더라구요. 죽음의 고통을 느끼면서 쓴 거죠. 가족이 그걸 책으로 내려다가 그만 뒀어요. 인기 탤런트의 죽음을 상품화한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그랬죠. 언니가 보통사람이었다면 그걸 책으로 만들었을 거예요.”
그 책이 나왔더라면 저세상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길잡이가 되지 않았을까.
나의 서재에는 삼십 년 동안 반복해서 읽은 스승 같은 책이 있다. 백년 전쯤 죽은 한 노인의 글들을 모아놓은 전집이다. 그 노인의 책을 통해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변했다. 그 책은 나의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을 여지없이 때려 부쉈다. 그 노인은 백 년쯤 후에는 자신의 책을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유언을 하고 있었다. 그 노인이 바라던 미래의 독자가 나인 것 같기도 했다.
이천년이 넘게 싱싱한 생명력을 가진 책도 있다. 그 시절 평범한 사람들이 쓴 책이다. 책의 삼분의 일은 편지들이다. 한 사람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의 영(靈)을 만난 개인적인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책은 지금 세계의 어느 호텔에 가도 서랍 속에 들어있다. 한 책이 이천년 이상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적이 아닐까. 그 책은 사람들 영혼에 근본적 혁명을 일으킨다. 나 역시 그 책에 의해 영혼이 바뀌었다.
잘났든 못났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사람마다 일생을 담은 책을 한 권 내고 죽으면 어떨까. 나는 정직한 고백을 담은 도둑의 이야기를 써 봤다. 탈주범의 이야기도 썼다. 건달의 후회도 썼다. 하나님은 통회(痛悔)하고 상한 마음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람마다 진실한 참회록 하나씩을 준비하면 세상이 밝아지지 않을까. 말만 해도 텍스트로 변하는 인공지능의 시대다. 책 만들기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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