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對北 침투공작의 실상
인민군 50명, 북한주민 250명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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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 對北 침투공작 책임자 金晋洙의 최초 증언
  
  인민군 50명, 북한주민 250명 데려와(월간조선 2006년4월호)
  
  ●함경남도 원산 앞 雄島가 HID 전진기지… 각종 對北 공작 참여
  ●인민군 대좌 이영희와 소좌 김대영, 북한 어선 30여 척을 귀환시켜
  
  金 泰 完 月刊朝鮮 기자
  
  한국외국어대학에서 中南美 문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몇 년간의 강사생활을 하다가 문득 어디로 떠나고 싶어 칠레에 도착, 칠레의 대학에 강의 계획서를 보낸 끝에 2004년부터 칠레 가톨릭大와 칠레 발파라이소 가톨릭大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20여 개의 무공훈장 받아
  
  休戰(휴전) 이후 북한에 침투했던 육군첩보부대(HID) 북파공작원의 실체가 月刊朝鮮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단순 정보수집을 위해 북파한 증언은 있었어도 무장대원을 이끌고 침투, 인민군과 북한 주민들을 남한으로 歸還(귀환)시킨 사례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는 5개월간의 취재와 설득 끝에 육군본부 공작처장 출신인 金晋洙(김진수·76)씨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1951년 3월부터 HID에 복무하면서 모두 250여 차례 북한에 침투해 공작활동을 벌여 20여 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여기에는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이후의 북파 공작활동도 포함돼 있다.
  
  그는 1950년 5월 육군 보병학교 갑종간부 제2기로 입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1년 3월 대구 달성초등학교에서 육군첩보부대가 창설되자 육군 보병 1사단 문산 파견대장으로 부임했다.
  
  1952년 8월 육군 4862부대 제36지구대로 발령받아 북한 원산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 「雄島(웅도)」에 파견됐다. 雄島는 현재 북한 땅이지만 한국전쟁 당시 HID의 전진기지였다. 휴전 이후 雄島에서 철수해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에서 제62지대 동해안 공작대장으로 1961년 1월 중순까지 근무했다.
  
  
  베일에 가려진 HID의 역할
  
  休戰 이후 HID의 역할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왔다. 이들이 어떤 경로로 북한에 침투해, 어떤 공작활동을 벌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북파 임무의 비밀을 棺(관) 뚜껑을 닫는 순간까지 지고 간다」는 HID 부대의 불문율은 깨어지지 않았다. 간혹 명예회복과 정부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구체적인 활동상과 과거사 규명이 이뤄지지 못했다. 軍당국이 스스로 정전법 위반을 인정할 수 없는 까닭에서다.
  
  사망·실종자에 대해서도 확인된 것이 없다. 간혹 사망·실종자 수(1951~ 1959년까지 5576명, 1960~1972년까지 2150명이 사망·실종 추정)가 공개됐지만, 이름과 군번·계급 등이 공개되진 못했다.
  
  이마저도 군사정전委에서 북측이 체포했다고 주장한 북파공작원 명단을 통해서만 간접 확인했을 뿐이다.
  
  지난 2월4일 「대한민국 HID 북파공작원·유족동지회」가 공개한 북파공작원 체포자 41명의 명단도 1969년부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전까지 판문점에서 개최된 군사정전委 회의록에 게재됐던 것이다.
  
  
  한 달에 세 번 침투, 인민군 포함해 300여 명 귀환
  
  金晋洙씨는 1952년 8월부터 동해 제36지구대 雄島 파견대장으로 근무하며 각종 북파작전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북한 원산항을 끼고 있는 영흥만 일대가 主활동무대였다. 雄島에는 HID 파견 부대와 함께 해병대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주변 여도·모도·황토도에도 해병대와 해군첩보부대 진지가 있었다.
  
  그의 휘하에는 K선과 S선 부대가 있었다. K선은 함경북도 고원 출신 북파공작원이 주축으로 김영철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함경남도 영흥 출신들이 중심인 S선에는 윤일제·신유덕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金晋洙씨는 1961년 1월 중순까지 K선과 S선 무장 공작대원들을 데리고 250여 차례 북한에 침투했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은 해상·공해상의 방어력을 상실한 상태여서 HID 요원들이 동해안을 「제 집 드나들 듯」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 敵地(적지) 휴전선 인근은 물론 강원도 통천, 함경남도 원산·함흥·단천·이원·차호, 함경북도 청진은 물론 최북단 나진까지 무차별 침투해 공작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기상조건에 따라 한 달 평균 서너 차례 침투했습니다. 많이 가면 여섯 차례도 갔어요.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 두려울 게 없었어요. 주된 임무는 아군 측 북파공작원을 파견하거나 접수하는일을 했습니다. 북한 해안에 몰래 상륙해 인민군과 「적성 인물」을 생포·귀환하는 공작을 주로 했어요. 敵의 선박을 나포하기도 했습니다』
  
  전과도 상당했다. 북한 인민군에서조차 「물쥐」처럼 해안에 자주 출몰한다고 해서 HID 36지구대를 「물쥐 부대」라고 불렀을 정도다. 「金晋洙」란 이름은 인민군 사이에서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 인민군 군관과 하전사(사병) 등 50여 명과 「적성 인물」 250여 명을 생포해 남한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해 왔다. 「적성 인물」이란 북측 정보를 캐기 위해 데려온 북한 민간인을 말한다. 金晋洙씨의 회상이다.
  
  『HID 부대는 인민군이 몸서리를 칠 정도였어요. 오죽했으면, 인민군이 북한 어민에게 疏開令(소개령)을 내렸겠습니까. HID가 하도 자주 출몰하니 밤에는 주민들을 해안 2km 후방으로 이동시켰어요.
  
  심지어 인민군 2개 전투사단이 HID 방어 작전에 투입하게 되자 최전선 병력이 약화돼 휴전선이 동해안 38선 위쪽으로 올라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美 8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저서 「불확실한 나팔」에는 「이 부대(HID)의 공작활동이 없었다면 현 휴전선은 상당히 남하되어 그어졌을 것이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 생포
  
  金晋洙씨의 전과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 대좌의 생포다. 대좌는 한국군 계급으로 치면 준장 정도의 위치다. 이영희 생포는 지난해 10월 HID 제36지구대장을 역임했던 金東石(김동석·83) 前 함경북도 지사의 회고록 「金東石 이 사람!」(이하 「이 사람!」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인민군 사단장 이영희를 적지에 잠입한 공작대원들이 강원도 통천 부근의 해안에서 매복 중 생포, 귀순케 한 일이다(「이 사람!」 130쪽)>
  
  그러나 金東石씨는 HID 36지구대를 지휘하는 입장이었으나 북파공작원을 데리고 직접 임무에 가담하진 않았다고 한다. K선·S선을 현장 지휘한 金晋洙씨는 金東石씨가 쓴 「이 사람!」에 불만이 많다.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일방적인 자기 진술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金東石씨는 회고록에서 「朴正熙(박정희) 前 대통령과 丁一權(정일권) 前 국회의장이 만주에서 일본군으로 근무하던 중 소련군에 체포, 이송되다 탈출했다」고 주장해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趙甲濟 月刊朝鮮 기자는 『金東石씨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朴正熙·丁一權 두 사람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에서 근무했지 일본군으로 근무한 적이 없고, 朴正熙가 소련군에 잡혔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한 金東石씨는 「金日成(김일성)을 간발의 차이로 놓쳤다」고도 했다.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한국전쟁사에 획을 긋는 엄청난 증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지난해 10월2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金東石 증언에 대한 반박
  
  <내가 지휘했던 (육군첩보부대) 제36지구대는 원산 앞바다 웅도와 여도에 제2지대를 배치했다. 당시 원산을 방문했던 金日成을 잡기 위해 투입됐으나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다. 다시 매복에 들어간 공작원들이 이영희 사단장을 생포·귀순시켰다. 이 사단장은 현재 사망한 상태다>
  
  인민군 대좌 이영희의 생포를 현장에서 지휘했던 金晋洙씨는 金東石씨가 「원산을 방문했던 金日成을 잡기 위해 투입됐으나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거짓이라고 말했다.
  
  『金日成이 원산에 온다는 사실을, 아무리 HID 부대라고 해도 어떻게 압니까. 설령 북한에 우리 쪽 「세포」가 있다고 해도 북한 인민군이 그런 어마어마한 정보를 흘린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세포」란 북한에서 활동했던 남한 측 첩보원을 뜻한다.
  
  ―金東石씨는 이영희가 인민군 사단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金東石씨는 이영희를 사단장이라 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부사단장 겸 포병 사령관입니다. 사단장과 부사단장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金日成을 잡기 위해 투입됐으나 실패하고 다시 매복에 들어가 이영희를 생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에 두 차례 침투한 것은 사실입니까.
  
  『(두 차례 침투 사실은) 맞습니다. 당시 육군첩보부대장인 이철희 대령의 명령에 의해 1954년 1월 하순쯤 강원도 장전 근처의 小港(소항)인 두백에 상륙했습니다. 보통 12월에는 파도가 커 작전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철희가 「명색이 첩보부대인데 정보가 없다」고 통사정을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파도를 헤쳐 가며 막상 도착하니 눈이 수십 cm나 쌓여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2시간 가까이 매복했지만 너무 추워서인지 개미 새끼 하나 지나가질 않았어요. 그래서 눈 발자국을 지우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2월8일 다시 출동했습니다. 왜 2월8일이냐 하면, 지금은 아니지만 한국전쟁 당시엔 이날이 인민군 창군 기념일이었습니다. 기념일이니 만큼 軍紀(군기)가 느슨해졌을 것이라 짐작했지요. 제가 배를 타고 두백港 가까이 접근했는데 트럭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부대원 5명이 보트에 옮겨 타고 육지에 도착해 트럭에 위협사격을 가했습니다.
  
  트럭에는 장교와 운전병, 호위병 등 인민군 3명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영희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대위 정도라고 생각했지요. 고위 장성이 트럭을 탔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이후 이영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영희는 전향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정보를 내놓긴 했지만 별게 없었습니다. 美8군이 심문을 하다 안 되니 다시 첩보부대로 넘겼습니다. 이후 그를 만났습니다. 그가 하도 고
  
  집을 피우니, 저보고 만나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구에 내려가 그를 만났어요.
  
  이영희는 저를 보자마자 욕을 하더군요. 제가 「잡혀온 것도 운명이다. 여기서 잘 살자」고 달랬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죽일 수도 없고, 북한에 돌려보낼 수 없어 다시 美8군에 넘겼습니다. 이후 소식은 모릅니다』
  
  金東石씨는 인민군 부사단장 이영희를 「귀순」시킨 공로로 그 당시 동해에 진입한 美 전함 미조리號에 초청됐다고 했다. 다음은 「이 사람!」 135~136쪽의 일부다.
  
  
  이영희와 金東石의 미조리號 초청 의혹
  
  <이영희를 귀순시킨 공로로 김동석은 며칠 후 그 당시 동해에 진입한 「미조리」號로 초청되어 그곳에서 바로 헬기 편으로 주한미군사령관격인 유엔군사령관이 위치한 서울 용산으로 직행하였다. 4성 장군인 미군사령관과 동석이 포옹한 다음에 나눈 뜨거운 악수는 의미심장하다. 북한 지도 상의 동그라미를 쳐 놓은 위치를 확인한 다음 계속적인 임무수행을 위한 메시지를 직접 전달받은 것이다>
  
  미조리號는 미군이 1944년에 만든 전함이다. 1945년 9월2일 도쿄灣(만)에 정박 중 함상에서 일본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된 것으로 유명한 배다. 한국전쟁 때는 인천 상륙작전에 참여했고, 흥남 철수작전 때는 군인과 일반인 20만 명을 피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미조리號가 휴전 직후인 1954년 2~3월쯤 동해에 들어왔다는 것은 넌센스라는 지적이다. 당시 HID 대원들도 미조리號가 東海상에 왔는지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또 그 일로 해서 주한미군사령관격인 유엔군사령관 4성 장군(클라크 장군)과 만났다는 점도 미스터리다.
  
  HID 공작과장(소령)을 역임한 한 퇴역 군인은 『미조리는 美 7함대의 기함인데 휴전 직후 이 기함이 동해에 온 적이 없다. 휴전 후에는 해안경비를 우리 해군이 담당했는데 왜 기함이 오느냐. 이해할 수 없는 증언』이라고 했다.
  
  또 다른 대원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주한미군사령관이 어떻게 해서 지휘체계가 다른 한국군 소령을 불러 포옹하고 계속적인 임무수행까지 지시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金晋洙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金東石씨의 책에는 「미조리號로 초청돼 그곳에서 바로 헬기 편으로 서울 용산에 갔다」고 썼습니다.
  
  당시 이영희를 생포했다고 보고하니 軍에서도 깜짝 놀랐습니다. 본부로 귀환했더니 육군첩보부대 이철희 대장과 나중 경희大 교수까지 했던 김점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 육군본부 수집과장, 美8군 정보참모부장 등이 마중 나왔을 정도입니다. 軍 장성들은 HID 북파공작원들을 격려했고 다과회 같은 약식 환영회도 가졌습니다. 그리고 美8군이 이영희를 헬리콥터에 실어 데려갔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물어보기로 했다. 한 관계자는 『美 해군사와 국방사 연표를 확인해 봐도 미조리號가 東海 에 왔다는 기록이 없다』며 『휴전 후에는 美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활동했으며 1955년 퇴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북한 어선 「건국 10호」의 나포, 인민군 소좌 김대영 생포
  
  金晋洙씨는 1957년 7월쯤 65t급 북한어선 「건국 10호」를 나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함정을 어선으로 개조한 「건국 10호」에는 인민군 동해경비대 소속 특무장 1명과 9명의 선원이 승선하고 있었다.
  
  ―「건국 10호」는 어떻게 해서 나포하게 됐나요.
  
  『S선 대원을 데리고 함경북도 삼호 해안까지 침투했습니다. 인민군은 잡지 못하고, 민간인 2명을 나포했습니다. 50代 남자와 중학교에 다니는 그의 아들이었는데, 아무리 채근해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환하려는데 원산 쪽에 인민군 소형 함정이 보이더군요.
  
  함정이라도 폭파시켜 전과를 올리자는 생각에 5~6m 앞까지 접근해 75mm 무반동 로켓포를 쏘려고 했습니다. 당초에는 배를 폭파할 계획이었는데 함정도 아니고 어선이어서 나포하게 된 겁니다.
  
  「건국 10호」는 우리 軍이 「동명호」로 개칭해 고기잡이 어선으로 활용했지요』
  
  金晋洙씨는 「건국 10호」 외에도 30여 척의 크고 작은 선박을 나포했다. 국군이 休戰 이후에도 북한에 침투해 어선들을 나포한 사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또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중순 북한 인민군 제54 독립 기포대대장(장진 발전소 소재)인 인민군 소좌 「김대영」을 생포해 귀환시켰다. 김대영은 원산 포병사령부에서 작전 계획서를 가지고 자기 부대로 귀환하는 길이었다. 그는 생포 후 곧바로 전향해 국군에 많은 도움을 줬다. 金晋洙씨는 『全軍(전군)이 그가 제공한 작전 계획서를 토대로 전쟁 상황도를 모두 고칠 정도로 전과가 컸다』고 회고했다.
  
  ―金東石씨는 책에서 「차량통과 예정시간에 맞춰 도로변에 매복하여 대기하던 중 차량을 습격해 고사포 대대장 김대영을 포획, 귀순케 하였다」고 표현했습니다. 맞습니까.
  
  『(매복한 것은) 맞기는 맞는데, 거기에 김대영이 오는 것을 몰랐습니다. 戰時(전시) 상황에서 누가 어디로 온다는 식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 힘듭니다. 공작을 하려면 먼저 적진에 침투해서 정보가 나올 만한 사람을 잡아와 그의 진술을 토대로 작전계획을 세웁니다.
  
  그런 예는 있지만 사전 공작을 통해 특정 간부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경로로 가는지 안다는 것은 힘들뿐더러 그런 주장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HID 요원의 실종 悲話
  
  金晋洙씨는 HID에 복무하며 을지 금성무공훈장, 미국 동성 무공훈장 등 9개의 무공훈장과 대통령 방위포장, 육군 총참모장 공로표창 등 20여 개의 공로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HID 북파공작원의 인명 손실도 적지 않았다.
  
  『1951년 3월~1961년 1월까지 HID 36지구대에서 사망·실종된 사람이 200여 명에 달합니다. 부상자만도 30여 명이 넘습니다』
  
  200여 명의 사망·실종자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일부는 적지에서 부하 북파공작원을 내팽개친 무능한 상관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HID 장교들은 작전계획을 세우고 공작원들을 적지에 투입하는 역할만 했다. 따라서 직접 북한 땅을 밟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침투조가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면, 대원들을 구출하기는커녕 혼자 귀환해 버린 일도 많았다고 한다. HID 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모 장교는 5~6개월 동안 요원을 40~50명가량을 잃고 HID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金晋洙씨 역시 부하들을 잃을 뻔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1957년 가을의 일이다. 그는 S선 대원들을 이끌고 원산 밑 통천 인근에 도착했다. 북한 원산 인근 해역에 배 세 척이 나란히 정박 중인 것을 레이더로 확인했지만, 어선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S선 대원들을 침투시킨 뒤 10분 정도 지나자 세 척의 배가 「이글호」(HID 공작선) 쪽으로 접근해 왔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어선이 아니라 북한 경비정이었습니다. 겁이 덜컥 났어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허리가 빠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와 그냥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공작선에 저와 함께 있던 기관사가 「우리라도 살자. 돌아가자」고 애원했습니다.
  
  세 척의 배가 우리 공작선을 둥글게 에워싸고 투항을 요구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쪽 화력이 북한 경비정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도 선제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급히 무전을 쳐서 S선 대원들의 귀환을 명령했습니다. S선 대원들을 모두 싣고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대원들이 저를 신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HID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던 K선 대장 「김영철」을 두고 온 기억이 있다. 작전계획이 노출돼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北에 생존해 있는 「실종」 HID 요원들
  
  『김영철은 함경북도 고원 출신이었어요. K선에는 그와 동향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김영철이 자기 고향 친구와 후배들을 많이 데려왔기 때문이지요. 1955년 가을쯤으로 기억합니다.
  
  K선 대원들이 북한 원산 밑 인민군 예비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안변」 지역에 침투해 해안에서 1km쯤 들어갔는데 이미 작전계획이 누설됐습니다.
  
  제36지구대 김○○이 간첩활동을 하며 작전계획을 북측에 알린 거지요. 나중에 드러났는데, 김○○은 종전 이후 북한에 몇 차례 드나들며 훈장까지 탔다고 하더군요. 당시 저는 김영철을 보내고 母船(모선)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해안에서 1km 침투한 지점에서 예광탄과 함께 총성이 울렸어요. 더 이상 대원들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金晋洙씨는 귀환 후 상부에 김영철이 전사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김영철은 죽지 않았고, 7년 뒤 그의 생존 사실이 알려졌다.
  
  『1962년 10월 어느 날 남북을 오가며 암약하던 女子 북파요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7년 전 죽은 줄만 알았던 김영철이었어요. 사진을 동봉했는데, 사망·실종 처리했던
  
  HID 대원 10여 명이 인민군 군복을 입고 찍은 것이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죽은 줄만 알았거든요.
  
  사진에는 제가 육군 보병 제1사단 파견대에 근무할 때부터 제 당번병으로 늘 함께 다녔던 「원석희」라는 부하도 있었습니다. 당시 김영철과 원석희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래서 답장을 써서 女子요원에게 보냈는데, 그 요원이 휴전선을 넘다 지뢰를 밟아 죽고 말았어요.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사망·실종자로 처리된 북파공작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생존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가의 지시에 의해 적지에 투입됐음에도 수십 년간 버려진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찾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따라서 HID에 대한 각종 증언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가 계속 외면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을 살해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게다가 북파공작원들이 아직 생존하고 있다면 60代 이상의 고령이 대부분일 것이다.
  
  
  北, 민간인 납치의 眞相
  
  북파공작원의 보상을 위해 만든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상 이들의 生死(생사) 여부를 밝혀 신원을 회복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국군포로 송환과 함께 북파공작원도 올 수 있도록 북한과 교섭해야 한다. 게다가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납북자 문제를 다루기로 합의한 바 있다. 국방부 역시 북파 공작활동에 대한 과거사 규명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金晋洙씨가 데려온 인민군과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들은 대부분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 정착했다고 한다. 특히 속초 「아바이村(촌)」에 많이 거주하며 가족을 이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말이다.
  
  『속초에 살 때 제가 데려온 북한 주민들이 많이 살았어요. 남쪽에 와서 자수성가한 이는 명절날 정종이나 어물을 들고 찾아왔지요. 하지만 정착을 못한 이는 술에 취해 찾아와 원성을 높이기도 했
  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쩝니까. 분단이 가져온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국가를 위해 일했을 뿐입니다』●
  
  
  
  
  
  
[ 2006-04-15, 06: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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