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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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글/영화 ‘화려한 휴가’의 解毒劑(해독제)로서
  
  
   격동기의 역사 무대로 불려가다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金鍾泌, 金大中씨 등 정치인들이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본부장 全斗煥)로 끌려간 사건을 언론은 5.17 계엄확대 조치라고 불러왔다. 5월17일 오후부터 작전이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요사이는 5.18 사건으로 불린다. 新軍部에 저항한 광주사태를 중심으로 설정한 호칭이다.
   나는 1979년 10월16일부터 격동기 역사의 현장으로 불려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한 기간의 목격자, 또는 기록자가 되었다. 부산에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때였다. 10월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反정부 시위에 시민들이 가세했다. 朴正熙 대통령의 강력한 통치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학생과 시민들이 뒤섞인 시위대가 경찰 트럭을 불질렀다. 밤하늘을 향하여 펑 하고 화염이 치솟는 현장에서 나는 朴 정권의 종말을 예감했다. 金載圭 정보부장은 이틑날 부산의 시위 현장을 둘러본 뒤 民亂이라고 규정했다. 10월18일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공수부대가 진주했으나 시위의 불길은 마산으로 옮겨 붙었다. 마산엔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10월26일의 朴正熙 대통령 피살은 30년간의 현대사를 결정 지은 사건이었다. 그날 하루의 일로 해서 18년간의 朴正熙 시대가 끝나고 13년간의 全斗煥-盧泰愚 시대가 열린 것이다. 朴 대통령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긴 가운데 12.12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 도심지에서 총격이 오고간 ‘장군들의 밤’이었고 진공상태가 새로운 권력으로 채워지는 과정이었다.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의 진공상태는 오래 가지 못한다.
   12.12사건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全斗煥 소장 그룹이 상관인 鄭昇和 계엄사령관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사변란이었다. 鄭昇和 장군 연행이 계획대로 저항 없이 이뤄졌더라면 全斗煥 소장은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으리라는 가정도 성립한다. 流血 사태가 생겼기에 全斗煥 세력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執權으로 매진하여 두 대통령이 생겼다. 그런 우스개를 한 사람이 바로 鄭 총장의 수사 책임자였던 李鶴捧 합수부 수사국장이다.
   1980년 봄은 戒嚴令下였으나 정치의 계절이었고, 주인공은 3金씨였다. 崔圭夏 대통령은 憲法 개정을 약속한 상태였고, 그렇게 되면 공화당의 金鍾泌, 신민당의 金泳三, 연금에서 풀려난 金大中씨 중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힐 것이라는 기대가 드높았다. 이 봄은 동시에 욕구분출의 시대였다. 강원도 사북탄광에서 광부들의 소요가 일어나고 개학한 대학은 민주화 운동의 본부로 변했다. 1972년 10월17일 유신선포 이후 8년 만에 처음으로 정치가 生動하기 시작했으나 경제는 불안했다.
  
   중산층 民心의 離反
  
   1년 전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 혁명으로 기름값이 배로 뛰었다. 중화학공업 건설 사업을 한창 벌여놓았던 朴正熙 대통령은 물가 暴騰(폭등)으로 중산층의 지지를 잃고 있었다. 여기에 야당과 대학생층의 反정부 투쟁이 기름을 부어 일어난 것이 釜馬사태였다. 이 사태는 대통령 측근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10월26일 밤 金載圭의 발작적 총격으로 이어졌다.
   1980년 봄에 들어와서 발생한 정치과열은 중산층의 경제적 불안감을 자극했다. 釜馬사태 때 시위 학생들에게 콜라를 사주고 담배를 던져주던 시민들은 “시위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중산층은 민주화를 희망했으나 동시에 안정을 바랐다. 이런 민심 변화에 3金씨, 특히 金大中, 金泳三씨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兩金씨는 대통령이 될 욕심으로 서로 분열하여 민주화 욕구만 자극하는 모습을 보였다.
   民心과 정치인들 사이에 생긴 이런 틈을 타고 全斗煥 그룹의 執權공세가 전개되었으니 5.17 계엄확대 조치였다. 그 다음날 광주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날 광주의 한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사회부 기자가 “釜馬사태 있었죠? 그와 비슷한 상황입니다”라고 말했다. 부산으로 들려오는 소문은 경상도 군인들이 투입되었다고 해서 경상도 번호판을 단 차량이 시민들의 습격을 받았고 경상도 말씨를 쓰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10.26사건의 원인이 된 釜馬사태의 顚末(전말)을 책으로 만들려고 취재중이었다. 광주사태가 터졌으니 여기에도 가야 한다는 욕심, 그리고 反정부 기자로 찍혀 있으니 몸을 피해보자는 생각들이 나를 광주로 보냈다. 아프지 않았던 나는 病暇願(병가원)을 내고 5월23일부터 5월27일까지 광주를 취재했다. 이 취재가 꼬투리가 되어 나는 회사에서 잘렸고, 그해 가을 新軍部가 내려 보낸 해직기자 명단에도 등재되어 일종의 확인사살을 당했다. 1981년 나는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고 1983년부터는 조선일보 月刊朝鮮에서 일하게 되었다. 광주취재가 나의 활동 무대를 바꾼 셈이다.
   月刊朝鮮에서 나는 10.26사건, 12.12사건, 광주사태를 다시 취재하게 되었다. 1980년대의 잡지시대를 연 政治秘話 붐을 탄 것이다. 이렇게 하여 釜馬사태에서 시작되어 광주사태를 거쳐 全斗煥 집권으로 이어진 약10개월의 격동기에 관하여 가장 많은 취재를 하고 가장 많은 글을 쓴 기자가 되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역사
  
   광주사태는 1988년의 국회청문회와 1989년 12월31일의 全斗煥 국회증언, 그리고 鄭鎬溶 의원의 사퇴로 정치적으로 정리되어 일단 역사의 장르로 넘어갔다가 되살아났다. 1995년 金泳三 대통령이 盧泰愚 비자금 사건으로 궁지에 몰리자(그가 이 비자금의 공동 사용자였으므로) 소급입법인 5.18 특별법을 만들어 12.12사건과 광주사태 진압, 그리고 全斗煥 집권까지를 총망라하여 살아 숨쉬는 현대사를 법정에 세웠다. 정치적 목적이 앞선 역사재판이었다. 全斗煥, 盧泰愚 전 대통령이 옥살이를 하고 광주사태 진압행위는 內亂으로 규정되었다. 이 수사는 한국의 보수세력을 분열시켰고 약해진 金泳三 대통령은 外換관리에 실패하여 IMF 사태를 불렀으며 金大中 집권, 그리고 좌파 10년의 길을 열었다. 역사가 무덤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면서 또 다른 역사를 만든 것이다.
   이 책은 영화 ‘화려한 휴가’가 없었으면 만들 이유가 없었다. 광주사태는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를 통해서 그 진상이 다 드러나 의문이나 의혹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없다. 청문회와 수사의 초점이었던 발포의 경위도 정밀하게 조사되었다. 발포는 있었으나 명령자는 없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와 트럭 버스로 공수부대를 밀어붙여 깔아죽이니 공수부대 장교들이 조건반사적, 자위적 대응사격을 한 것이 발포의 시작이었다. 검찰과 법원은 광주사태 진압을 이유로 해선 아무도 처벌하지 않았다.
   大選의 해에 나온 이 영화는 이렇게 확정된 사실을 무시하고 예술의 美名으로 역사를 조작했다. 영화에서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민들을 향하여 무릎쏴 자세에서 집중 사격 한다. 흡사 나치군인들이 유태인을 학살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사실이라고 믿는 관객들이 많았다. 反軍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영화는 도입부에서 字幕으로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요지의 公知를 했고 金大中, 盧武鉉, 朴槿惠씨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는 정치적 반응을 보였다.
   正史 三國志보다는 소설 三國志를 더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소설이 더 재미 있고 正史보다도 더 널리 읽히기 때문이다. ‘화려한 휴가’의 관객이 7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광주를 聖域視하는 언론도 이 영화에 대해선 일체의 비판을 삼갔다. 사건의 진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광주로부터도 비판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국방부도 군을 학살집단으로 몰아간 이 영화에 대해서 한 마디 설명이나 항의도 하지 않았다.
  
   역사의 전환점에서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썼던 대로 한국이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화려한 휴가’의 문제점은, 광주사태에 대한 세밀한 사실까지 다 밝혀진 2007년에 1980년대의 의식으로 만든 영화란 점이다. 1988년 여름에 내가 月刊朝鮮에 썼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를 다시 읽어보고, 그 기사에 등장했던 당시 공수부대 대대장을 찾아가 영화를 함께 보고, 그리고 검찰 수사 자료를 뽑아서 이 책을 만들었다.
   12.12 사건이 두 대통령을 만들었다면 광주사태도 두 대통령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朴正熙 대통령 피살을 국가위기로 해석한 세력과 민주화의 찬스로 본 세력 사이의 대결이 28년간 계속되다가 올해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새로운 章으로 넘어간다. 이 나라가 명분의 시대에서 실용의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이 책이 할 역할이 있을 것이다. ‘화려한 휴가’를 본 이들에겐 이 책이 解毒劑(해독제)가 될 것이다.
  
  2007년 9월26일
  趙甲濟
  
  
  
  盧 대통령은 평양에서 반역 작당을 하지 말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700만 학살자 김정일을 상대로 NLL 흥정, 연방제 통일 논의, 평화선언, 對北퍼주기에 합의한다면 이는 모두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되므로 차기 대통령이 지킬 의무가 없음을 선언한다!
  
  흔들리는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 개천절 국민대회: 오는 10월3일(水) 오후 2시 서울역 광장
  
  1. 10월초 개천절을 전후하여 평양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핵무장한 김정일에게 굽히고들어가 국민들의 안전과 생활을 위협하는 반역적 합의를 하고 올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평양에서 노무현-김정일 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에 애국시민들과 성도들은 서울역 광장으로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외칩시다!
  2. 2000년 6월 평양에서 있었던 김대중-김정일 회담은 6.15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 문서는 그 뒤 반역면허증이 되어 한국사회를 일대 혼란속에 빠뜨렸습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국민들을 속이고 현대그룹을 앞세워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으로 보내주고 매수한 회담에서 약점 잡은 김정일이 들이민 對南적화전략문서에 서명했습니다. 6.15 선언대로 하면 대한민국은 공산화됩니다. 萬惡의 근원인 6.15 선언에 기초하여 열리는 2차 평양회담은 나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궐기한 대한민국 세력에 결정적 타격을 주어 좌파의 영구집권을 꾀하려 할 것입니다.
  3.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장 큰 규범은 대한민국 헌법입니다. 노무현, 김정일이 무슨 합의를 하든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된 내용이면 차기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민, 국군, 그리고 공무원들이 그 합의를 지킬 수도 지켜서도 안됩니다. 예컨대 10월3일 개천절을 맞아 평양근교의 가짜 단군릉을 찾아간다든지, 서울 등 수도권의 방어의 최일선인 서해의 휴전선 NLL을 흥정대상으로 올린다든지, 연방제 또는 국가연합식 통일방안을 논의한다든지, 核폐기 이전에 북한군의 증강을 도와줄 것이 분명한 대규모 對北경제지원을 약속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에 위반함으로 국민과 공무원들은 이를 거부할 의무와 권한이 있습니다.
  4. 남북한 좌익들이 손을 잡고 대한민국을 뒤엎고 수호세력을 압박하려 한다면 우리는 ‘호국의 칼’인 대한민국 헌법을 믿고 궐기하여 국민저항권 행사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몰아내고 반역세력을 단죄할 것임을 경고해둡니다. 우리는 특히 70만 국군장병을 대표하는 김장수 국방장관이 敵都 평양을 찾아가 전쟁범죄자이자 민족반역자인 학살자 김정일에게 경례하고 NLL을 허무는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사표를 내고 평양으로 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애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올해 大選에 개입하지 않도록 엄중경고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국가기관과 선관위는 애국단체의 反좌파투쟁을 선거법위반으로 고발하면서도 남북한 좌익들의 反한나라당 선동은 방치하고 있습니다. 공명선거를 관리해야 할 盧 대통령은 김정일이 선동과 폭력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여 국가를 위기로 몰아가지 않도록 막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의무를 다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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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甲濟의 現代史 추적
  
  空輸부대의 광주사태
  
  
  *당시 空輸대대장과 함께 본 '화려한 휴가'의 '화려한 造作'
  *공수부대원들의 手記/시민측에서 본 空輸부대
  *광주사태의 진상: 검찰수사발표全文
  
  
  
  
  
  공수부대 대대장과 함께 본 영화 '화려한 휴가'의 '화려한 造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에 대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는 과연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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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無人 돌진 차량이 有人 돌진 차량으로 바뀌어 속도도 엄청났지만, 방향이 일정치 않고 오히려 우리 대형을 찾아서 돌진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우리의 위험성은 훨씬 높아졌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과연 화물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이제 有人 돌격 차량의 출현으로 가스탄도, 곤봉도, 포승줄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마치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았다. 최선의 공격이라고 떠오른 대대장의 전략(?)이라는 게 차량의 바퀴를 펑크 내는 일이었다. 얼마나 非폭력적인 방어대책인가? 또 그와 같은 생각이 순간적 발상이라는 면에서 얼마나 순수했던가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대대원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다. 포승줄과 최루탄도 과잉장비라고 투덜댔던 우리가 실탄이 소요될 상황을 예견이나 했겠는가? 총은 다만 군인과 떨어질 수 없는 分身의 개념으로 휴대한 것이었지, 쏘려고 휴대한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공수대가 출동명령만 받으면 반사적으로 들고 나서는 약간의 탄약은 전남대학에 남겨놓은 상태였다. 유일한 총기는 대대장인 나의 45구경 권총과 실탄 14발뿐이었다.
   순간 나의 병력을 뚫고 화물차가 돌진하고 있었다. 총을 꺼냈다. 탄창을 장전하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타이어를 조준하는 순간 차는 이미 분수대에 가까워져 명중되어 봐야 목적지까지는 쇠바퀴만으로도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연료탱크를 조준했다. 제1차적 안전은 연료탱크와 내 총구 앞에 내 병력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다음은 실탄이 빗나가서 맞은편 가게나 民家에 피탄되었을 경우의 안전을 고려하여, 차량이 民家 지역을 통과한 후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3여단 15대대장 朴琮圭 手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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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수부대출신들의 성명서
  
  
  영화 ‘화려한 휴가’의 反軍선동을 규탄한다!
  -영화사측에 경고하고, 국방부에 요구하며, 광주시민들에게 호소한다!
  
  우리는 공수부대에서 근무하면서 북한군의 再남침을 저지하여 오늘날 국민들이 누리는 대한민국의 자유, 평화, 번영을 지켜내는 데 일조했다고 자부해왔다. 최근 개봉되어 7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KTX에서까지 상영되고 있는 영화 ‘화려한 휴가’는 광주사태 진압 공수부대를 표적으로 삼아 터무니 없는 왜곡과 조작을 자행하여 反軍감정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정치권은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광주사태 진압군으로 출동했던 공수부대 지휘관 출신들을 비롯한 우리 특전사 동지들은 이런 사태에 분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뜻을 밝힌다.
  
  1. 영화 ‘화려한 휴가’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통해서 영화내용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려는 숫법을 썼다. 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당연히 공수부대와 국군에 대해서 反感과 증오심을 품게 되어 있다. 이 영화는 사실에 입각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진압과정을 편파적으로, 악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왜곡, 조작하였다.
  2. 특히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발포장면은 터무니 없는 날조이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탄창을 M16 소총에 끼우고 무릎쏴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민들을 향해서 아무런 경고 없이 집중 사격하여 수백 명을 살상하는 장면은 완전한 造作이다. 1980년 5월21일 낮에 전남도청 방어 임무에 투입된 공수 7, 11여단의 부대원들은 장갑차, 트럭, 버스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시민들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었다. 실탄은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만 1인당 15발씩 지급된 상태였다. 시민측이 장갑차와 버스를 몰고 공수부대원들을 향해서 돌진하여 한 병사를 깔아뭉개 즉사케 하자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자위적으로 발포했을 뿐이다. 사격명령을 내린 사람도, 요청한 사람도 없었음은 1995년의 검찰 조사에서도 확인되어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3. 그럼에도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진은 공수부대만 표적으로 삼아, 유태인을 학살하는 나치군대처럼 그리고 있다. 특히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민들을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게 사살하는 장면을 통해서 공수부대가 마치 대한민국에 대해 총을 쏘는 반란군인 것처럼 묘사했다. 전남도청을 死守했던 공수부대원들이 뻔히 눈을 뜨고 살아 있는데도 이런 조작과 명예훼손이 자행되고 있으나 국방부는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영화제작사가 오는 9월30일까지 이에 대해서 사과하고 광주투입 공수부대원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성의 있는 조치가 없을 때는 民刑事上의 自救조치를 취할 것이다.
  4. 국군장병들의 사기를 무너뜨리고 軍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약화시키게 될 이 영화의 왜곡과 조작에 대해서 침묵해온 국방부에 요구한다. 국군뿐 아니라 국가의 정통성을 지켜가야 할 국방부 장관은 영화사측에 대해서 의법조치를 취하고 국민과 국군 앞에서 공개적으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없었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군의 신뢰를 회복하라!
  5. 정치인들에게 경고한다. 이 영화를 競選과 선거에 이용할 목적으로 선전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6. 광주진압 초기에 공수부대는 최루탄과 방패도 없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시민들의 投石과 차량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실탄을 휴대하지 않고 오로지 곤봉으로써만 진압했다. 계엄령하에서 민간인이 군대에 대해 投石과 차량돌진으로 대항할 때 어느 정도의 진압이라야 적정한가. 민간인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소총, 기관총으로 중무장하고 헬기에 대해서도 사격하고 광주교도소도 습격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경상도 군인들만 배치했다는 유언비어가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167명의 민간인과 함께, 4명의 경찰관과 23명의 군인이 戰死했다. 그렇다면 광주시민과 공수부대도 다 같은 역사의 피해자가 아닌가? 피해 시민들에 대한 보상도 끝나고 역사적 단죄도 끝나 民軍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해야 할 시점에서 또 다시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으로 왜곡하여 反軍감정을 확산시키는 저의는 무엇인가?
  6. 우리는 광주시민들의 양식에 호소한다. 1980년 5월21일 대낮에 전남도청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광주시민들이 먼저 ‘화려한 휴가’의 왜곡을 지적해줄 것을 기대한다. 사실은 신념보다도 중요하다.
  7. 국군은 국가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자유통일을 뒷받침하는 武力이다. 우리는 남북한의 반역세력이 대한민국을 뒤엎는 데 장애가 되는 국군을 국민들과 이간질시키기 위하여 예술을 정치선동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계속해서 감시할 것이다. 국군도 헌법 5조의 명령에 따라 국가안보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다하라!
  
  2007년 9월21일
  
  민병돈 전 특전사령관, 안부웅 제11여단 61대대장, 조창구 제11여단 62 대대장 등 공수부대 출신 예비역 장병 일동.
  
  
  
  
  
  
  
  
  
  
  
  
  
  
  
  
  
  계 최대 비행기 A380 조종실 同乘記
  
   411t의 쉿덩어리를 조이 스틱으로 가뿐히 들어올려
   최다 800명 탈 수 있는 완전 2층 비행기, 스탠드 바, 호텔 객실 같은 화장실.
  
   당당한 2층 비행기
  
   지난 9월6일 인천국제공항 한 구석에 다소 외롭게 서 있는 세계 최대 비행기 A380을 향해서 버스로 다가갔다. 멀리서 보니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접근해서 보니 全層이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점보는 앞부분의 비즈니스 클라스席만이 2층이다. 비행기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2층 여객기가 등장한 셈이다. 趙亮鎬 대한항공 회장은 'A380은 보잉 747과 777을 포개 놓은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점보에 비해서 뚱뚱하게 보이는 A380은 착륙바퀴도 22개로 점보보다 4개가 많다. 착륙바퀴의 완충작용이 비행기의 안전을 보장한다. 나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퀴들을 만져주었다. 최근에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A380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기록영화에서도 착륙직전 바퀴가 제대로 빠지도록 하는 시험을 여러 번 하는 장면이 있었다.
   실내에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당당했다. 비행기나 배안의 좁은 계단과 달리 일반 건물의 계단처럼 넓고 높았다. 화장실에 들렀다. 호텔 객실의 화장실 정도로 넓고 창까지 나 있다. 비행기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느껴야 하는 폐쇄감이 없어졌다. 1층의 1등석은 완전히 누울 수 있게, 뻗은 발의 받침도 놓여 있었다. 스탠드 바도 있고 항공사에 따라선 샤워 시설도 붙인다고 한다.
   이날 A380 試乘(시승)은 이 비행기를 도입하여 2010년부터 운항하기로 한 대한항공을 위하여 제작사인 에어버스(본부는 프랑스의 툴루스에 있다)가 마련한 것이다. 에어버스는 A380을 주문한 항공사를 순회하면서 이런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날은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탔다.
   A380의 최대 이륙 중량은 560t으로서 점보 747보다 약120t이 무겁다. 비행기는 착륙할 때는 무게를 줄여야 한다. A380의 최대 착륙중량은 386t이다. 날개 길이는 79.8m, 동체 길이는 73m, 꼬리 날개 꼭대기까지의 높이는 약24m이다. 최대 시속은 음속의 0.85이고 항속거리는 1만5186 km이다. 점보 747-400은 最多 탑승인원이 416명인데 A380은 525명이다. A380의 全 좌석을 이코노미석으로 바꾼다면 800명 이상을 태울 수 있다.
  
   조종석에 同乘
  
   이날 A380은 오전 10시1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여 구름 낀 제주도 상공을 돌아서 다시 인천으로 귀환했다. 이륙 직전에 趙亮鎬 회장이 나에게 '조종실에 타 보시죠'라고 했다. 내가 비행기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배려해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국에서 이륙하는 최초의 A380의 조종실에 들어가는 첫 손님이 되었다. 이날의 이륙중량은 411t, 그 가운데 약90t은 기름이었다.
   411t의 쇳덩어리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기장이 '브이 원'이라고 말했다. 시속 220km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이 속도를 넘어서면 무조건 이륙해야 한다. 갑자기 고장이 생기더라도 이륙을 포기할 수 없다. 이륙 속도는 시속 290km였다. 조종간을 당겨서 기체를 들어올리지 않고 사이드 스틱으로 조작하니 이륙감이 달랐다. 이륙 각도가 아주 부드러웠다. 조종실의 계기판도 기존 비행기보다 적고 단순화되어 있었다. 전자화가 진행되면서 手動부분 장치가 줄어든 덕분인 듯했다.
   에어버스가 최근에 만들어내는 여객기의 특징은 핸들 같은 조종간을 쓰지 않고 조이 스틱이란 별명을 가진 사이드 스틱으로 조종한다는 점이다. 막대기를 요리 조리 돌려서 방향과 고도를 바꾸는 방식이다. 7년 전 독일 스튜트가르트에 있는 벤츠 자동차 회사에 갔더니 자동차의 핸들을 조이 스틱으로 바꾸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날은 난기류가 심해 가끔 비행기가 흔들렸다. 순항중 난기류에 걸려 대형 여객기가 추락한 적은 없지만 탑승자들이 가장 불안해 하는 것이 난기류 경험이다.
   이날 체험비행은 두 명의 프랑스 조종사에 의해서 이뤄졌다. 대한항공측의 신일 기장이 동승하여 도움말을 주곤 했다. 부기장(P. Perrin)은 프랑스의 유명한 우주인으로서 미국 우주 왕복선에 탄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 큰 비행기도 두 사람이 조종한다. 1970년대엔 네 사람이 조종실에 있었다. 기장, 부기장, 항법사, 항공기관사. 신일 기장은 “A380은 내릴 때 저속 접근이 가능하여 착륙 후 빨리 정지한다”고 했다.
  
   대당 2억5000만 달러
  
   다시 객실로 나오니 조용했다. A380은 '더 크고 더 조용하다'는 점을 자랑한다. 점보보다도 소음발생률이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네 개의 엔진을 개량한 덕분이다. A380은 연료비를 줄인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판매 전략으로 써 먹는다. 1인당 100km 비행에 2.9리터가 든다. 현재의 여객기 평균은 5리터이다.
   대한항공은 2010년부터 A380을 도입하여 취항시킨다. 1대당 도입가격은 2억5000만 달러이다. 점보보다도 약 1억 달러가 비싸다. 損益을 결정하는 좌석당 원가가 점보보다도 20% 이상 싸다.
   7년 전에 시작된 에어버스社의 A380의 개발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88억 유로가 들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10억 유로를 초과했다. 조립과 설계상의 문제로 제작완료 기한이 세 번이나 연기되고 최고 경영자가 인책 사임하기도 했다. A380의 첫 시험비행은 2005년 1월18일 프랑스의 툴루스에서 있었다. 2006년 1월10일엔 대서양 횡단 비행을 했다. 작년 3월26일엔 독일 함부르크에서 대피 시험을 했다. 16개의 비상구 중 8개를 막고 873명이 탈출하는 데 78초가 걸렸다.
   A380의 就役(취역)으로 공항 시설도 바뀐다. 2층에서 바로 내릴 수 있게 하는 2층 搭乘橋(탑승교)가 나와야 한다. 활주로는 점보가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충분하다. 날개가 길어 유도로와 탑승구가 개조되어야 할 곳도 있다.
   세계에서 맨첨 A380을 인수하여 비행에 투입하게 된 항공사는 싱가포르 항공사이다. 오는 10월25일부터 싱가포르-시드니 노선에 투입된다. 세 차례의 引渡 기간 연기로 에어버스에서는 약60억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주문했던 항공사들의 취소도 잇따랐다. 화물용 A380에 대한 주문량은 제로가 되어버렸다. 에어버스가 보유한 주문량은 174대이다.
   에어버스사에선 750대를 팔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약2000억 달러어치이다. 손익분기점을 이루는 판매대수는 원래 270대였는데 제작 지연으로 해서 420대로 늘었다. 모든 경제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納期(납기)를 맞추는 일임을 잘 보여준다. 가장 많은 A380을 주문한 항공사는 두바이의 에미레이트 항공사이다. 55대를 주문했다. 대한항공은 5대를 주문해놓고 있다.
   대한항공은 A380 이외에도 보잉에서 A380과 경쟁하기 위하여 개발중인 B787기종 10대를 주문해놓고 있다. A380은 인천공항과 북미, 유럽의 허브 공항을 잇는 노선에, B787은 남미, 아프리카, 북유럽 등에 투입한다. 130대의 여객기를 보유한 대한항공은 화물수송량에선 세계 1위, 여객수송에선 세계 16위이다. 이날 趙亮鎬 회장은 대한항공을 2014년까지 10조원 이상을 투자하여 종합랭킹으로 세계 10위까지 키우겠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조종사는 약 2000명, 그 중 약 200명이 외국인이고, 800명이 軍 파이롯 출신이다. 軍출신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하루 60%의 시간 동안 떠 있는 것이 여객기
  
   항공사는 비행기를 하늘에 얼마나 오래 띄워놓는가에 의해서 損益이 결정된다. 대한항공의 경우 1대가 한 달 평균 450시간을 비행한다고 한다. 한 달이면 약 720시간이므로 약 60%의 시간 동안 비행기는 공중에 떠 있다는 이야기이다. 올해 약 1300만 명의 한국인이 외국으로 나가고 약 600만 명의 외국인이 입국할 것 같다. 이런 어마어마한 여행 붐과 함께 팽창해온 것이 항공산업이고 여객기 회사이다. 비행기 요금이 그동안 별로 오르지 않은 것은 여객기가 대형화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살아가는 모습을 바꾼 것이 점보였다. 1970년부터 날기 시작한 점보는 지금까지 1387대가 제작되었다.
   대한항공의 趙亮鎬 회장은 연간 50만 마일(비행에서 마일은 海里와 같은 1852m)의 비행을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1000명 이상이 누적 비행 거리 100만 마일 이상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비행기를 아무리 자주 타도 점보가 이륙하는 모습은 항상 경이롭다. A380은 점보보다도 더 뚱뚱하고 무겁고 고래를 잡아먹는 킬러 웨일, 즉 솔피의 몸을 닮았다. 5t 트럭 100대분의 쇳덩어리가 하늘로 치솟는 장쾌한 장면을 바라보면서 과학 기술의 위대성, 인간의 위대성을 새삼 느낀다.
  
  
  金正日의 對南적화 전략과 그 대응책
  
  趙甲濟(月刊朝鮮 기자)
  
  
  1. 봉이 된 한국, 더 큰 위기의 시작!
  
  오늘(9월19일) 북경에서 발표된 6자 회담의 6개항 공동선언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더 큰 위기의 시작이다. 이 공동선언은 특히 한국을 '봉'으로 삼고 있다. 관련 6개국은 북한정권의 핵무기 개발과 국제법 위반행위에 대해서 벌금을 물리는 대신 북한 편을 드는 한국이 문제해결에 필요한 천문학적인 경비를 대부분 부담하도록 했다. 6자 회담은 국제법 위반자인 북한을 피고석에 세워야 할 터인데 피해자인 한국이 북한의 변호사役을 자원하는 바람에 피해자가 피고석에 앉아 선고를 받는 것 같은 해괴한 재판정이 되고 말았다.
  
  1. 6자 회담 공동선언문은 모든 문제가 북한정권이 1994년의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여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계속해왔다는 데서 출발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도 않았다. 국제正義가 없는 합의를 한 것이다.
  2. 6자 회담은 북한정권이 199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이미 포기해야 했던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다시 포기하는 대가로 아래 것들을 제공해주기로 했다. 상습범의 再犯에 대한 두번째 보상 약속이다.
  가. 미국은 재래식 무기로도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 핵무기가 한국에 없다는 확인, 미북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 일본은 2002년9월17일의 고이즈미-김정일간의 평양선언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취하기로 했다.
  다. 미국, 일본, 중국, 한국, 러시아는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라. 한국은 핵무기를 반입하지 않기로 거듭 확인했고, 이미 제안한 對北200만kw의 전력 제공안을 재확인했다.
  마. 한국 등 5개국은 북한의 평화적 핵 사용 권리를 존중하기로 하고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바. 직접 당사국들은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협상을 하기로 했다.
  사. 6개국은 동북아 안보 협력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3. 이상의 對北보상건 가운데 에너지, 경수로, 200만kw 전력은 거의 전부를 한국이 부담할 것이다. 그 액수는 수십 조에 이를 것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공은 불가능해졌다.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은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존재를 어렵게 만들 것이다. 북한정권은 앞으로 對南평화공세를 강화하여 남한의 親北化를 가속시키고 2007년 大選에서 盧정권보다 더한 친북정권의 등장을 꾀할 것이다.
  盧정권은 '우리민족끼리'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구호 아래서 '민족'과 '평화'라는 명분을 장악하고 김정일 정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대한민국 수호 세력을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 정권-노무현 정권-남한내 김정일 추종세력이 직 간접으로 연대하여 대한민국의 헌법과 國體에 심각한 도전을 가할 것이며 反美시위가 확산되고 미국에서는 反韓감정이 일어나 한미동맹의 기초가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과정에서 연방제赤化통일론이 부각될 것이다.
  4. 6자회담은 그러나 다음 회의 때부터 실천 방안을 둘러싸고 난항할 것이다. '6자는 말대말, 행동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서 앞서 언급한 합의를 실현하기 위한 조율된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는 5항의 해석을 놓고 美北의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이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합의를 만들어내는 데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북한과 한 원칙적 합의는 합의문의 해석 문제로 해서 거의 실천된 적이 없다는 역사적 경험을 뒤돌아본다면 오늘의 합의는 또 다른 긴 실랑이의 시작임을 알 수 있다.
  5. 결국 김정일은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데 있어서 시간을 벌었다. 이 시간을 활용하여 韓美동맹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거나 변질시키고 5개국의 갈등을 확대시키려 할 것이다. 이번 6자회담에서 김정일이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시간이다.
  이제 김정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벼랑에 섰다. 대한민국은 지금 外敵에 호응한 內敵의 반란에 직면했고 동맹국의 외면까지 당할 처지로 빠져들고 있다. 국체와 헌법과 한미동맹을 지키겠다는 세력과 김정일과 손잡겠다는 세력 사이에 내전적 상황이 조성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부른 것은, 통일방해자 모택동을 존경하면서 李承晩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을 '분열정권의 수립'이라고 보는 역사관의 소유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이다. 盧정권이 이번 6자회담에서 미국 일본과 협력했다면 중국을 끌어당겨 북한을 고립시킴으로써 아무러 보상 없이도 핵포기를 강제할 수 있었다.
  한국이 동맹국을 버리고 독재국과 반역집단 편에 서서 이뤄진 利敵외교의 결과물을 어용친북언론은 칭송해마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또 국민들이 속아넘어간다면 한국은 선진화의 문턱에서 퇴보하든지 赤化될 것이다. 문명국가의 수준에 맞는 국민들의 각성과 행동만이 이 위기를 극복하도록 할 것이다.
  
  *데일리엔케이 손광주 편집국장 칼럼
  
  '말攻防'에서 문서화 단계, 실천 안되면 휴지조각
  
  제4차 6자회담이 19일 6개항의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공동성명의 핵심은 ▲평화적 방식의 검증가능한 한반도 비핵화 ▲미-북, 북-일간 평화공존 및 관계정상화 ▲관련 5개국 對北 에너지 제공 ▲별도 포럼을 통한 한반도 평화협정체제 협상이며, ▲합의 실천을 위한 조율된 조치. 11월 초 5차회담 개최는 공동성명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부칙의 성격을 띤다.
  이로써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 시인으로 재발된 제2차 북핵문제는 거의 만 3년만에 큰 틀에서 합의를 이루었다. 환영할 일이다.
  
  미-북 이해관계, 큰 틀에서 합의
  
  93-94년의 제1차 북핵사태가 미-북 양국간의 ‘제네바 합의’로 종결되었다면 이번 ‘9.19 베이징 공동성명’은 관련 6개국이 공동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합의실천을 위해 6개국 및 NPT, IAEA 등 국제기구의 감시 하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점에서 북핵문제 해결의 실천 가능성을 훨씬 높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번 공동성명의 내용을 압축하면 1)북핵폐기와 對北 체제안전보장 및 에너지 지원 2)미-북, 북-일간 관계정상화 3)한반도 평화협정체제 협상이다.
  비록 ‘별도의 포럼을 통해’라는 전제가 달려 있긴 하지만, 북핵문제를 ‘매개’로 하여 한반도의 평화체제문제와 넓게는 동북아 안보협력체제 구축으로까지 외연이 확대됐다. 따라서 과거 1차 북핵사태의 해결패턴과는 국면 자체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공동성명에 열거된 순서로 보면 북핵폐기와 對北 체제안전보장 → 미-북, 북-일관계 정상화 → 對北 에너지 제공 및 경제협력 →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 협상 및 동북아 안보협력 순이다.
  물론 공동성명에 나타난 순서대로 북핵폐기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과 동북아 안보협력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제1항에 해당하는 '검증가능한 비핵화'와 ‘적당한 시점에서의 경수로 제공문제 논의’부터 논란에 휩싸일 여지는 많다.
  그러나 관련 6개국의 이해관계가 이번 공동성명에 포괄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중에서도 미-북간의 이해관계가 큰 틀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주요내용이다.
  
  북핵문제, 한반도 문제 포괄
  
  미국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프로그램 포기’라는 약속을 받아낸 대신,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지금까지 북한이 주장해온 ‘對北 체제안전보장’ 요구가 6개국 공동으로 문서화된 것이다.
  특히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라는 구체적 표현까지 삽입돼 있는 점을 보면, 김정일 정권이 그동안 체제안전보장에 얼마나 목을 매달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미국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거듭된 천명을 재확인했고, 또 ‘모든 옵션’에서 무력사용이 배제되었다는 사실도 동시에 확인해준 셈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2항 중 “북미는 상호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그들의 양자간 정책에 따라서 그들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는 표현이다. 이중 ‘양자간 정책에 따라서’라는 표현은 미-북관계 정상화 문제부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까지 맞물리는 대목이다.
  특히 4항에 해당하는 “직접 당사자들은 한반도에서의 영구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을 적절한 별도의 포럼을 통해서 평화협정 체제를 협상하기로 했다”는 대목과 맞물리면서 한국은 미-북 사이의 수교협상이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2000년 10월 ‘북미 공동코뮈니케’에서 명시한 (평화보장체계 수립에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는 표현에서 ‘미-북 사이의 문제’로 좀더 압축되어버린 느낌이다. 또 미국이 그동안 수차례 천명해온 ‘북한은 주권국가’라는 표현이 문서화된 것이다. 물론 ‘직접 당사자들은...’이라는 표현에서 한국전쟁 교전 당사국이 배제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북핵문제를 비롯하여 향후 미-중, 미-북관계가 어떻게 풀려나가느냐에 따라 한국의 입지가 축소될 수 있는 문제다.
  
  첫 행동은 북 핵폐기 실천이행
  
  중국은 이번 공동성명을 끌어낸 주역으로서 6자회담에서의 지위가 한층 높아졌으며, 앞으로 각종 ‘국제회담’을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이 확인되었다. 일본도 對北관계 정상화까지 갈 수 있는 모멘텀을 확보했다. 이로써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이번 공동성명을 기점으로 북핵문제와 더불어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의 변화까지 더욱 중층화(中層化) 되었다. 이제부터 무엇이 진정 한반도 평화보장과 평화통일로 가는 데 이익이 되는가를 근본적으로 따져볼 때가 되었다.
  어쨌든, 이번 공동성명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가닥을 잡은 것은 큰 수확이다. 문제는 핵폐기와 이에 따른 검증을 실천해가는 것이다. 2년 여 동안의 6자회담이 순전히 ‘말 공방’에 불과했다면
  이번 공동성명은 공중에 떠도는 말들을 모아 이제 문서화 한 것이다. 문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그 행동의 첫 번째는 이번 공동성명에 나타난 순서대로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빠른 시일내 NPT와 IAEA 체제에 복귀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번 공동성명을 휴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담보하는 첫 행동이다.
  
  2. 韓美동맹 와해 가능성과 2007년 大選
  
  요사이 對北전문가들 사이엔 盧武鉉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상대로 聯政을 제의한 것을 두고 남북관계 속에서 그 진의를 해석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6.15 선언을 실천한다면서 연방제 (적화) 통일방안을 사실상 수용하기 위한 여론의 탐색 및 整地 작업을 盧대통령이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한다.
  이는, 盧대통령이 지역구도를 극복하려 한다면서 한나라당을 상대로 연정을 제의한 연장선상에서 남북분단 구도를 극복하기 위한다는 구실을 앞세워 金正日과의 聯政, 즉 연방제와 연합제를 뒤섞은 이상한 남북聯政을 ('통일단계의 시작'이란 간판하에서) 제의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인 것이다.
  이런 제의는 물론 헌법 제3조와 제4조를 정면으로 위반한 반역이다. 헌법 제3조는 북한지역을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북한지역을 강점한 김정일 정권과는 대등한 수준에서 통합이나 연정을 할 수 없다. 헌법 제4조는 평화적 방법의 자유통일을 강제하고 있으므로 적화통일이 목표인 연방제를 수용할 수 없게 한다. 우리 대법원은 연방제에 호응하거나 이를 주장하는 자들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판례를 계속해서 남기고 있다. 6.15 선언 이후에도 그런 판례가 유지되고 있다.
  金正日과 盧武鉉대통령은 '연방제 통일 운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2000년 6.15 선언을 실천한다고 말할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반역적 합의인 '연합제와 연방제 혼합식 통일방향'을 실천한다는 것은 사실상 연방제를 하자는 것인데 이를 '6.15공동선언의 실천'이라고 위장하여 합법인 것처럼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남북한 좌파들은 계산할 것이다.
  金正日은 앞으로 盧정권의 입지를 강화시켜주고 2007년 大選에서도 친북정권이 등장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6자회담을 깨지 않고 끌고나가면서 핵포기 약속을 하고 '국립 묘지 방문' 등 對南평화 공세를 강화하여 反美운동을 지원할 것이다. 盧정권의 위험한 도박을 뒷받침해주기 위한 김정일의 분위기 조성에 남한의 친북 언론과 단체들이 일제히 호응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國體와 政體를 변경하려는 이런 움직임이 2007년 大選과 맞물려 전개된다면 한국은 결정적 순간으로 들어갈 것이다. 盧정권과 김정일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정권이 재집권해야 한다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정치의 세계에선 이해관계를 공유하면 결탁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盧武鉉 정권은 한국이 미국 및 일본과 손잡고 김정일의 핵개발 모험을 포기시키는 것이 2007년 선거에 유리하지 않다고 계산할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김정일의 편에 서서 미국의 對北압박정책을 희석시켜주고 10년에 25조원이 들어갈 對北送電 제안으로 김정일의 환심을 삼으로써 남한내 從金세력과 6.15 선언의 당사자인 金大中 지지세력의 지원을 얻어 大選에서 승리한다는 계산을 할지 모른다.
  좌파의 재집권을 위해서 김정일은 핵개발 포기를 약속한 연장선상에서 韓美동맹 해체, 주한미군 철수, 또는 無力化를 최종목표로 삼고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을 들고 나와 戰犯이 평화의 사도인 것처럼 행세하려 들 것이다.
  김정일은 지금 핵카드를 이용하여 한국내의 反美운동을 격화시키고, 한국인의 손으로 한미동맹을 깨게 하려 한다. 그런 뒤 남한내에 친북정권을 세우고 이 정권을 상대로 결국은 군사력의 활용으로써 적화통일을 결착지으려는 일종의 대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통일단계의 개시'를 선언하거나 관계국들이 '평화협정 체결'을 목표로 협상을 시작한다면 김정일의 미군철수 요구는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통일과 평화프로세스가 함께 시작된 마당에 왜 북한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韓美동맹과 한미연합사가 있어야 하는가'라는 선동이 좌경화된 여론에 잘 먹혀들 것이다.
  
  한미동맹이 깨졌을 때 한국의 행동하지 않는 보수층은 자신을 잃고서 이민을 가든지 김정일 세상에서 살아남을 궁리를 할 것이다. 김정일은, 혼이 빠져버린 한국의 보수층을 남한내 친북세력을 동원하여 고립시키고 친북정권을 조종하여 국군을 무력화 내지 혼란에 빠뜨린 뒤 북한군을 남한으로 무혈입성시키든지 기습점령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군사문제 전문가는 '북한정권은 탄생 때부터 전쟁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조직이 되었다. 그 관성과 생리상 또 한번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설사 김정일이 원하지 않더라도 모든 논리와 구조가 전쟁을 향해서 달리도록 설계되어 있는 괴물이 북한체제이다'라고 말했다.
  '북한경제가 무너졌으니 북한군이 무너졌다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오히려 반대일 것이다. 북한군사체제를 온존시키려다가 보니까 북한경제가 무너진 것이다. 인원과 장비가 양적으로 우리의 두배인 북한군이 기습을 감행한다면 종심이 얕은 우리는 미군의 도움이 없을 때 회복하지 못하고 뻗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단기전에선, 남한 경제력이 북한보다 수십 배나 강하다는 것은 쓸모가 없다. 동원 가능한 戰力으로 싸우는 것이지 잠재력으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다. 80개 보병사단 및 여단, 30여개 포병여단, 10여개 전차여단 및 7개 전차연대, 20여개 기계화 여단, 25개 특수전 여단 등 총170개 사단 및 여단을 가진 약100만 명의 육군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3700대의 전차(우리는 2300대)를 갖고 있고 4600여문(우리는 200여문)의 방사포를 보유하고 있다. 그들의 예비전력은 770만 명, 우리는 300만 명이다. 그들은 걸프 전의 교훈까지 참고로 하여 군사체제를 공격용으로 개혁해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군은 북한군과의 1 대 1 대결을 위해 軍구조를 개혁한 일이 없다.
  미군의 도움 없이 한국군이 1 대 1로 북한군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더구나 남한내 친북세력을 고려하면 한국이 결정적으로 불리하다고 봐야 한다.
  '對北송전 200만 킬로와트'라는 利敵행위가 그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이는 친북세력의 위력을 보여준다. 그런 대규모 전력이 전기가 모자라 녹쓸고 있는 북한군의 지하시설內 무기들의 녹을 닦아주고 탱크의 기름통을 채워주는 일을 할 것이 분명한데 우리 군은 입을 열지도 못한다. 나는 요사이 잠을 자지 못한다. 군대를 모르는 사람들은 김정일이 벼랑에 몰렸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김정일이 드디어 한국을 벼랑으로 몰았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 결정적 순간이 찾아오고 있다. 전쟁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전쟁이란 적의 군사력을 파괴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북한군은 남침 때 서울 같은 큰 도시를 우회할 것이다. 그들이 기습으로써 한강 이북에서 예비부대인 기갑사단까지 파괴하면 그 남쪽으로는 저항수단이 없다. 거대한 기갑사단으로 정면을 돌파하고 10만 명이나 되는 특수부대로써 후방을 강습한다고 예상해보라. 지금 駐韓미군의 감축으로 문산, 동두천 兩大 축선(북한군의 예상 공격로)중에서 문산쪽엔 미군이 없다. 문제는 우리는 원천적으로 기습을 할 수 없고 북한군은 기습하기 좋도록 병력을 전진배치해놓아 숙명적으로 기습을 허용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한미군이 없을 때 기습까지 허용하고도, 그리고 체제안에 강력한 利敵세력을 두고도 우리가 반격을 할 수 있는가, 정말 자신이 없다'
  盧정권의 비극은 김정일에게 너무 깊이 굴종함으로써 그 노선을 수정하기도 어렵고 그 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 반역자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자신들을 세웠다는 점이다.
  盧정권과 그 지지세력이 2007년 大選에서 김정일의 도움을 받아 재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파세력은 열린당 후보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과 싸우는 선거 아닌 전투를 치러야 할 것이다.
  2007년 大選은 實戰으로 가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는 毛澤東과 蔣介石이 싸웠던 전선 없는 중국內戰, 남북으로 갈려져 싸웠지만 전선이 남쪽에 설정되었던 월남전을 혼합한 방식의 2차원 방정식과 같은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악한 金正日과 종잡을 수 없는 盧武鉉 두 사람이 주도하는 한반도 상황이 正道로 가서 해결될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북한내부의 모순만큼 한국내의 모순도 심각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사이의 모순도 심각하다. 이런 내외모순이 겹쳐서 일순에 폭발할 때가 전쟁이다. 지금 남북한의 내부정세는 너무나 비정상적이라 그런 변고를 통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지 않았는가 하는 악몽을 꾸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래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놓지 않으면 한국인으로 사는 데 있어서 책임회피를 하는 것이다.
  
  요약: 위기의 구조를 요약하면 이렇다. 김정일은 핵카드로써 한미동맹 와해와 주한미군 철수(또는 중립화)를 가능성의 영역안에 놓게 되었다. 한국내의 좌파정권과 그 지지세력도 한미동맹의 해체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바라고 있는 듯하다. 김정일과 남한내 從金세력이 협력하여 한미동맹을 해체한다면 그때는 김정일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잡고 미군을 몰아낸 민족의 챔피언으로 자처하면서 고립된 대한민국내 애국세력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모택동도 미국이 장개석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직후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월맹도 미군이 떠난 뒤 월남을 공격해 점령했다. 미군이 한국을 포기하는 날 김정일 군대가 서울로 들어갈 준비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 길로 가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 2007년 大選이다.
  
  3. 미국의 '韓美동맹 해체 시나리오'
  
  미국은 한국의 反美움직임에 심각한 대응을 고려하고 있다. 2008년까지 한국정부가 평택 미군 이전기지를 확보해주지 못하면 추가 감군, 2007년에도 좌파정권이 反美세력의 지원으로 집권하면 한미동맹 해체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수빅 방식'이나 '베트남 방식'의 대응을 검토할 것이라고 한다. 수빅 방식이란 필리핀이 수빅만의 클라크 미군기지 철수를 요구하여 미군이 철수하니 경제가 엄망이 되어버린 경우를 말한다.
  베트남 방식이란 미군이 철수하니 월남이 적화되어버렸으나 20년 뒤 그 베트남이 미국과 수교하여 중국을 공통의 가상적으로 놓고 상호협조하게 된 상황을 가리킨다.
  駐韓미군이 철수하고 한미동맹이 해체되어봐야 한국인들은 미국의 필요성과 고마움을 알게 될 것이라고 워싱턴의 對韓정책전문가들은 말한다. 한미동맹이 해체되면 외국자본이 빠져나가고 주식값이 폭락하며 국제금리가 올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은 동북아에서 북한정권의 속국처럼 취급을 받아 국가이익의 확보가 어렵게 될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인 나라의 사람들이 경제파탄의 고통을 20년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3년만 지나면 다시 미국과 손잡자고 할 것이고 그때는 미국이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국의 정책전문가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 한국이 赤化되어도 미국의 국익은 크게 손상되지 않는다. 한반도를 적화통일한 김정일 정권이 월남처럼 反中親美 노선을 택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미국이 우리를 한반도의 챔피언으로 인정해주면 우리는 親美노선을 택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고 한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이 아무리 미국을 상대로 행패를 부려도 미국은 미국의 필요성 때문에 계속 한국에 머물러 있고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소리이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기술이 경이적으로 발전하고 군사편제가 개편된 지금 미국은 일본과 괌을 기지로 해서도 충분히 동북아에서 국익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에 냉전시대 때처럼 한반도는 미국의 死活的(Vital) 국익이 걸린 곳이 아니란 것이다.
  
  참고로 미국정책전문가들은 국가이익을 '死活的', '중요한(Important) 등의 등급으로 분류한다. 전쟁을 해서라도 지켜내어야 하는 미국의 死活的 국익은 대강 이런 것들이다.
  1. 대량살상무기확산의 방지
  2.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국가의 등장 저지
  3. 중동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석유수송로의 안정확보 포함)
  4. 미국적 가치(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과 영토의 수호
  
  한총련이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려 끌고다녀도 경찰이 이를 방관하고 인천시민들이 저지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사태가 미국언론을 통해서 미국의 서민들에게 알려질 때 미국인들이 먼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내의 反美운동이 미국내의 反韓여론을 키우고 있는 현실이 몇 걸음 더 나아가면 낭떠러지라는 이야기이다.
  
  4. 한국정치 속으로 들어온 金正日
  
  웰빙黨으로 조롱받고 있는 한나라당안에서 그래도 가장 용감하게 북한정권을 비판하고 북한동포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金文洙의원은 한 달 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도 북한정권을 비판할 때는 김정일을 의식하게 된다. 다른 한나라당 의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김정일은 한국의 정치판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정일이 무서워 북한정권 비판을 삼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金大中 정권 이전의 대한민국 정부는 김일성-김정일 세력이 한국의 정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차단했다.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김정일이 보낸 간첩을 잡고 김정일을 추종하는 從金세력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군 검찰 경찰 안기부들을 동원하여 북한정권의 영향력을 차단해준 무대위에서 與野정치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 싸움이 國基를 파괴하는 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김대중 정권은 김정일 정권에 굴종하고 남한내 從金세력의 발호를 방치함으로써 김정일 세력을 한국의 정치판으로 불러들였다. 盧武鉉 정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김정일 세력과는 우호관계, 대한민국 정통세력과는 적대관계를 형성했다.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도 한국에서 선거에 이기고 정권을 잡는 데는 김정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朴槿惠 대표는 2002년 봄 김정일을 만나고 와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그 뒤 김정일에 대해 일언반구 비판도 하지 않고 있다. 김정일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對北정책도 견제할 수 없다. 朴대표는 한나라당을 이끌고 金正日 앞으로 가서 침묵의 굴종을 시키고 있는 셈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정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朴대표가 자진해서 김정일에 대해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의지할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이로써 김정일은 한국내부 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중대 요소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정권 내부 사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단이 없고 있던 수단(북한정권 전복공작 계획 등)도 폐기했다. 정치력의 면에서 김정일 정권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다.
  이는 경비원이 문을 따고 바깥에 있던 살인범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사이좋게 지내면서 주인을 겁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주인이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몰래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출동을 요청해야 한다. 경비원과 살인범이 그 전화기를 잡고 있는데 이런 自救노력도 쉽지 않다. 경비원의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다. 이런 위기를 맞아 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자 국민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이다.
  
  5. 黃長燁의 김정일 정권 붕괴 전략
  
  '냉전전략으로 전쟁하지 않고 붕괴시키자'
  
  김정일이 지난 2월에 발표한 ‘핵무기 보유 선언’은 놀랄 일도 아니며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것은 자신의 ‘株價’를 올리려는 얕은 술책 밖에 안 된다. 부시정부 2기가 출범하면서 국제정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이런 발언이 나오게 된 것으로 봐서 북한체제가 약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국민은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무서워할 것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김정일은 핵을 가지고 있어도 절대로 쓰지 못한다. 김정일로서는 지금 아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을 왜 쏘고 자기가 죽겠는가. 절대로 쓰지 못한다.
  김정일이 붕괴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조금 더 살 수도 버틸 수도 있지만, 붕괴는 초 읽기에 들어갔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평양에서도 김정일에 대한 불평,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국경지대에서만 나타나던 현상이 내륙의 주민들에까지 번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사안이다.
  현재 중국이 북한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정일을 미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중국의 이익과 맞지 않기 때문에, 김정일이 전쟁을 못하게 막고 있다. 한국사회가 중국을 ‘중재자’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중국은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에 맞게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은 경제발전은 이룩한 반면, 사상과 문화, 정치발전은 그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한국과 북한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한국의 일부세력들이 북한을 찬양하고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바로 사상과 정치의식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에 상응한 사상과 문화, 정치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때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승리는 대단한 것이다. 1, 2차 대전은 인류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 하지만 냉전시대에서는 총 한발 쏘지 않고 승리한 것으로 위대한 승리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냉전식 전략’이다. 냉전식 전략은 위대한 전략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자는 것이고, 그것이 또한 최선이다.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이 있다. 민주주의 방식에 의한 북한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냉전전략으로 김정일을 붕괴시킬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의 친북좌파세력들은 그 위대한 승리의 전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무슨 얘기를 하면 ‘냉전식 사고방식’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냉전전략’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전략인지 알지 못한다. 미국이나 구라파지역에서 냉전이 끝났다고 해서 한반도도 냉전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반도에서 냉전이 끝난 것처럼 말하는 이유는, 바로 사상이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냉전전략’이라는 것은 싸움(전쟁)을 못하게 하고, 경제에서 경쟁하여 실력(경쟁력)을 쌓아 나아가게 하는 전략이다. 만약 싸움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은 무조건 단결하기 때문에 이기기가 힘들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경제발전은 개인의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한반도가 분단된 후 남한에 미국군대가 주둔하면서 전쟁을 방지하고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북한은 붕괴하게 된 것이고,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도 바로 미국이 냉전전략에서 이긴 때문이다.
  냉전의 본질은 바로 제도의 차이, 대립이 아닌가. 왜 서로 대립되어 있는가. 바로 하나는 집단주의적 공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개인중심의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대립되어 있는 것이다. 남북간에는 명백히 이런 두 개의 사회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냉전이 사라진 것처럼 말하는 것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남의 얘기만 듣고서 하는 말이다.
  냉전전략으로 한국이 경제부문에서 승리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만도취 되어 적아(敵我)도 구분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냉전이 끝났으니 적을 포섭해야 한다면서 ‘포용정책’을 펴는 것이다. 갑자기 경제가 발전하면서 잘 살게 되니까 敵我를 구분하지 못하고, 북이 계속 위협하니까 평화주의가 대두되고, 평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상과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술 더 떠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려고 적과 ‘타협’을 하고 있다. 대가로 5억 달러 이상을 주고 그렇게 해서 국민들을 속여 전쟁 위협이 없어지고 평화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얘기한다. 북한이 전쟁을 못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는 소리이다.
  한국에서 지원한 돈이 어디로 갔는가. 바로 핵무기 개발하는 곳에 쓰였고 남한의 친북좌익세력들의 활동 지원금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바로 잡아야 할 정당, 정치인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선동하고 있다. 이런 이유가 바로 경제발전에 비해 사상, 문화, 정치의식이 뒤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제와 선진기술은 외자도입을 통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의 자질을 높이고 국가관리 능력을 높이는 것은 사람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전후(戰後)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상상할 수 없는 큰 발전이다. 그런데 사상에서는 변화가 없으니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건 우리 모두가 노력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사상적으로 뒤떨어져 있다보니 남의 흉내만 내고 따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상을 중요시해야 한다.
  (黃長燁 전 노동당 비서가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발행하는 'Justice' 2005년 5월호에 실린 글을 옮겨 온 것이다)
  
  6. 국회는 6.15 공동선언을 무효화해야 한다
  
  유세환(국회 입법조사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시 당시 대통령 김대중이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만나 이른바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은 그 反헌법적, 反국가적 내용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국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對北 및 통일인식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으며 대한민국을 순식간에 종식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회는 늦었지만 이른바 6.15 공동선언의 反헌법성을 확인하고 무효화를 결의하고 한반도의 통일은 대한민국의 헌법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함을 대내외에 천명함으로써 6.15 공동선언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국가전복가능성을 제거해야 한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현실에서 통일이 국가적, 민족적 과제임이 분명하나 조국의 통일은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며, 통일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우리 헌법의 기본원칙에 따라 추진되어야 하며, 이를 벗어나거나 반하는 그 어떤 남북간의 합의도 무효이며 용납될 수 없음이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당시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 사이에 합의된 이른바 6.15 남북공동선언은 대한민국 헌법을 중대하게 침해하고 있다.
  먼저 남북공동선언의 제1항을 보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하여 남과 북을 통일의 대등한 당사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하여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과 이에 따라 대한민국내에서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의 변란을 꾀하고 있는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는 통일문제에 있어서 자주성을 강조함으로써 그간 줄기차게 反美자주화와 민족해방을 주장해온 북한의 주장에 노골적으로 동조하여, 은연중 對北 국가안보의 기본틀이 되어 온 한미동맹관계가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로 비쳐지게 하였다.
  또한, 공동선언의 제2항을 보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국민적 합의를 거치지 아니한 정체불명의 통일방안을 우리의 통일방안으로 제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를 다시 북한의 赤化통일전략의 수단인 고려연방제 간에 마치 공통성이 있는 것 같이 합의하고 이 방향으로 통일을 추진하기로 함으로써, 反국가단체가 주장하는 국가변란목적의 적화통일방안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헌법을 정면으로 유린하였다.
  대한민국의 최고규범인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이며 한반도의 통일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확하게 통일의 목표와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넘어서 反국가단체와의 어떠한 형태의 연합제나 연방제를 수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체를 변경하는 것으로 위헌일 뿐만 아니라 헌법파괴행위이다.
  특히, 노동당 규약에서 全 한반도의 적화를 최고의 목표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북한의 對南적화전략의 수단인 고려연방제 통일방안과 우리의 통일방안과 공통점이 있고 이러한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겠다고 한 것은 명백한 반역행위이다.
  이러한 反헌법적, 반역적 6.15 공동선언의 폐해는 심각했다. 북한은 그간 기회있을 때마다 6.15 공동선언을 내세워 대한민국에 대해 미국에 대항하는 이른바 ‘민족공조’를 요구하였고, 국내의 친북공산주의세력은 6.15 공동선언을 反美자주화투쟁 및 국가보안법폐지운동의 논리적 근거로 삼아 국내에서 그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핵심논리로 이용하였다. 이 결과, 국민들의 對北인식의 혼란이 극에 달하여 反국가단체인 북한이 아닌 동맹국인 미국을 대한민국의 主敵으로 보는 국민들이 다수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장 경악할 만한 사실은 무엇보다 6.15 공동선언이 일순간에 대한민국의 국체를 변경할 수 있는,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종식을 선언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 개인적 소신과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만나 남북연합제나 연방제를 논의할 남북한공동협의기구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고 국회가 이를 묵인한다면, 그것으로 대한민국의 國體는 치명적으로 훼손되고 사실상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뒤 절차는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될 이름뿐인 고려연방공화국의 탄생이 될 것이다.
  헌정질서의 수호기관인 국회가 이와 같은 6.15 공동선언의 反헌법적, 반역적 성격을 확인하고 무효화를 다음과 같이 결의,선언함으로써 이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국가존립의 위협을 제거하여야 한다.
  
  1. 헌법파괴적, 反국가적 내용을 담고 있는 6.15 공동선언은 무효이며, 대통령과 정부는 즉각 6.15 공동선언의 무효를 선언해야 한다.
  2. 남북간의 통일은 대한민국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헌법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남북간의 어떠한 형태의 연합제나 연방제 합의도 대한민국의 헌법과 대한민국을 파괴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다.
  4. 대통령과 정부는 향후 어떠한 경우에도 북한과 연합제나 연방제를 논의할 기구를 설치 또는 이를 위한 사전준비를 할 수 없고, 이를 추진하는 것은 국가반역행위에 해당하는 바 국가공무원은 이와 관련된 명령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열린 우리당의 모든 애국세력은 6.15 공동선언이 갖고 있는 反헌법적, 反국가적 위협요인을 직시하고, 즉각 국회를 소집하여 이의 무효화를 지금 즉시 선언함으로써 그 뇌관을 제거해야 한다.
  
  7. 평균키로 본 김정일의 민족사적 범죄
  
  1. 1913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1-163cm였다.
  2. 1940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6.12cm로 컸다.
  3. 1956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6.46cm로 약간 컸을 뿐이다.
  4. 1975년 한국 남자의 평균 키는 169.2cm로 훌쩍 컸다. 근대화의 성공으로 영양섭최가 좋아진 때문이다.
  5. 1985년 한국인의 평균 키는 171cm로
  6. 1995년엔 172cm로
  7. 2002년엔 173.3cm까지 높아졌다.
  8. 그런데 북한 남자의 평균 키는 2001년 현재 158cm이다. 이 평균 키는 한일합방 이전 아마도 조선조 말기 수준인 것 같다. 남북 분단될 때의 북한 사람 평균 키보다도 약10cm 짧아졌다. 왜인가. 북한 사람들의 영양섭최가 조선조 말기보다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의문을 풀어주는 조사 보고서가 있어 소개한다.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2001년에 펴낸 安秉直 편 「韓國經濟成長史」에서 영남대학교 차명수 교수가 쓴「제1장. 우리나라의 생활수준, 1700-2000」엔 재미 있는 대목이 있다.
  <남한이 식민지 시대에 지펴진 근대적 경제성장의 불씨를 상당한 규모의 모닥불로 키워낸 데 비해 북한은 이 불씨를 비벼 끄고 飢餓(기아)와 질병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木村光彦(1998)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하루 식량소비는 2차대전 발발 직전 756g에서 1984년
  약800g정도까지 증가한 뒤 1996년에는 540g으로 하락했다.
  식민지 시대의 쌀임금(임금을 쌀값으로 나눈 값으로서 생활수준을 보여준다)이 하루 2.5되 수준에서 정체하고 있었는데 1인당 식량소비와 쌀임금 수준 사이에 비례관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1996년의 북한 하루쌀 임금은 약1.8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 남한의 10분의 1정도, 조선시대에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19세기말의 수준과 비슷한 것이다. 남한과 식민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적 후퇴는 무엇보다도 경제성장의 필요조건인 私的 소유권과 市場을 파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정권은 시장을 파괴한 대신 1937년 전쟁체제로의 돌입과 함께 등장했던 통제경제체제를 계승해서 이를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포장했다>
  차명수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은 18세기초부터 계속해서 악화되어 1900년경에 최악의 바닥에 이르렀다고 한다. 車교수는「조선 후기 경제적 후퇴를 가져온 원인은 농업생산성의 지속적 저하였으며 농업생산성 감퇴 원인은 水利시설의 퇴락이었던 것
  으로 보인다. 水利시설의 쇠퇴는 지배 및 행정 체제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즉 조선조 末期 순조 현종 철종 고종 시대에 오면 행정력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방치할 뿐만 아니라 못 제방 등 水利시설을 제대로 손보지 않아 농산물의 생산이 격감했다는 뜻이다. 200년에 걸친 이런 下落의 끝은 일본에 의한 朝鮮倂合이었다. 생산
  력이 악화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니 강력한 군대도 유지할 수 없어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1900년 무렵부터 생활수준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車 교수는 「일본에서 새로운 볍씨가 도입되고 우리나라로 건너온 일본인들이 水利시설을 재건, 확충하면서 비로소 (생활수준의) 하강이 중단되고 상승으로의 反轉이 일어났다」고 썼다.
  日帝에 의해 생활수준의 향상이 일어났다는 지적이다. 인정하기 싫은 현상이지만 이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19세기말 조선조 시절의 수준보다도 못하다고 한다. 이 또한 맞는 말일 것이다. 1995년부터 약5년 사이에 전쟁이 일어
  난 것도 아닌데 수백만 명이 북한에서 굶어죽었으니 19세기말보다 못한 생활수준이란 말이 맞다. 19세기말의 생활수준은 18세기보다도 훨씬 나빴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 북한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최악일 것이다.
  생활수준뿐 아니라 인권탄압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역사의 어느 왕이 김일성 김정일처럼 수용소를 만들어 수십만 명을 가두어놓고 유태인 학살 같은 인간도륙을 강행했던가. 어느 왕이 주민들의 국내 여행을 제한했던가. 어느 왕이 수백만 명을 사실상 굶겨죽이면서 자신과 그 측근들은 곰발바닥요리를 먹고 한 병에 수천 달러 하는 최고급 꼬냑을 마시며 즐겼던가. 어느 왕이 주민들을 굶겨죽이면서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어 공갈을 일삼았던가.
  생활수준이 역사상 최악이었다는 것은 지배층의 능력도 최악이고 그들의 인간성도 최악이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로 북한주민들은 심하게 말하면 난쟁이들이 되어가고 있다. 북한주민들의 키는 남한사람들보다 평균 7-10cm가 작고 몸무게는 15-20kg이 가볍다고 한다. 한 탈북 청년은 「누가 나를 난쟁이로 만들었습니까」라고 항변했다.
  인간도륙에다가 인간변종까지 일으킨 김정일을 부를 때 나는 평소에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守舊反動 세력」이라고 못박곤 한다. 이는 차명수 교수의 논문에 의해 실증된 셈이다. 인류가 풍요와 자유를 즐기고 있는 21세기의 북한을 우리 민족사상 가장 가난했던 19세기말보다 더 낙후된 상황으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 놓은 者, 그가 바로 守舊반동인 것이다.
  
  
  부록/한국인의 꿈: 일류국가 건설
  
  1. 일류국가의 5大 조건: 역사의 깊이(군사통치-봉건제도-근대화의 경험이 필수적), 지정학적 위치(현대문명의 중심에 있어야), 국민국가 건설의 年輪(길수록 유리), 현재의 정치제도(자유민주주의), 국민들의 자질과 품성(높아야). 지난 200년간 일본만이 유일하게 非서구 국가로서 선진국 클럽에 진입했다.
  2. 한국의 조건: 통일신라가 약200년간 세계의 일류국가였다. 오늘의 일류국가는 과거 일류국가였던 적이 있는 국가이다. 한국은 문명과 物流의 중심인 東北亞의 한복판에 있다. 한국은 국민국가건설의 과정이 60년밖에 되지 않아 西歐보다 수백년이 모자라며 북한은 봉건독재체제 상태로 남아 있다. 한반도는 아직도 국민국가 건설의 과정에 있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다. 국민들의 선천적 자질은 좋으나 품성 면에서 민주, 법치국가의 시민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
  3. 한국은 기업, 군대, 행정, 과학 등 물질적 면에선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으나 정치, 언론, 이념 등 정신적 면에서는 아직 근대화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신적 면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한반도의 봉건잔재 총사령부인 金正日 정권이 제거되어야 한다. 金正日은 국가선진화의 결정적 걸림돌이므로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조속히 제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득이 된다.
  4. 국가선진화를 위한 제언
  -국어의 일부인 漢字의 한글과의 혼용을 복원하여 한국의 정신문화와 人文學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입시에 漢字가 출제되어야 한다.
  -지역엘리트, 기능엘리트, 당파엘리트가 아닌 국가엘리트가 國政을 주도해야 한다. 일류인물들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제도개혁을 해야 한다.
  -국민 교양의 향상을 위한 전면적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해양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韓美동맹이 통일 후에까지 계속되어야 하며 어느 주변국도 적대국으로 삼아선 안된다.
  -金正日을 빨리 제거할수록 비용은 싸다.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유일한 정통 합법국가라는 확신을 버려선 안된다.
  
  *한국이 세계화, 선진화로 가는 문을 연 10대 사건
  
  1948년 이후 한국은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4단계를 거치면서 근대화를 성공시켰다. 그 과정에서 해양정신, 기업가정신, 尙武정신, 자주정신을 재발견했다. 근대화의 성공을 이어받아 자유통일의 관문을 지나 국가선진화를 이룩하는 것이 다음 세대 한국인의 역사적 의무가 되었다.
  
  1. 1948년: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원칙하의 건국
  2. 1953년: 한미동맹(상호방위조약 체결)으로 자유진영의 일원
  3. 1962-64년: 수출입국 정책으로 해외시장 겨냥
  4. 1965년: 韓日수교로 韓美日 해양 삼각동맹 체제 완성.
  5. 1965년: 월남파병으로 해외진출 시대 개막
  6. 1973년: 중화학공업 건설 시작
  7. 1974년: 中東 건설 시장 진출
  8.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9. 1980년대: 해외 여행 자유화 등 개방정책
  10. 1990-92년: 韓러, 韓中 수교로 대륙진출 길 열다.
  
  
   趙甲濟의 심층취재
  
   空輸대대장과 함께 본 영화 ‘화려한 휴가’의 ‘화려한 造作’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무차별 집중 사격하는 공수부대원’은 조작이다. 그날 공수부대는 사격명령 없이 시위대의 장갑차와 차량 공격에 대해서 살기 위하여 조건반사적으로 사격했다. 전남도청 앞에서 11여단 61대대를 지휘했던 安富雄 대대장의 광주사태 證言과 檢證.
  
  
  
  
   보기 싫었던 영화
  
   ‘화려한 휴가’는 정말 보기 싫은 영화였다. 너무나 우호적인 언론보도를 통해서 영화의 의도와 내용이 알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좌파-어용 언론뿐 아니라 정상적인 언론도 이 영화에 대해서는 好評 이외엔 일체의 비평을 삼가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김대중, 박근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 나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大選을 앞두고 개봉되어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영화이니 공수부대를 惡으로 시민들을 善으로 그렸을 것이 뻔하다. 한편으로는 하나의 의무감이 생겼다. 1980년 5월,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필자가 광주사태(공식적으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나 선입감을 배제하고 객관적 기술을 하기 위해서 이 기사에선 광주사태라고 표기한다)를 취재하러 가지 않으면 기자로서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의 評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20代 직장여성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숨과 눈물 훔치는 소리도 관람석에서 들리더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왜 공수부대가 야수처럼 변하여 잔학한 진압을 해야 했는지 그 영화로썬 잘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이 영화를 보면 국군에 대해서 치를 떨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親韓派 일본인은 두 번 보았다면서 다소 흥분해 있었다.
   “저 나름대로 광주사태를 조사한 적도 있어 잘 알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서 화가 솟았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왜곡한 데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공수부대의 잔혹상을 강조한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을 敵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에 대해서 집단발포 하는 장면,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기자는 혼자서 이 영화를 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황산벌이 사실을 왜곡하고 역사를 戱畵化하였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쓰도록 했던 나는 일부러 시간을 쪼개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볼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혼자서 보는 것보다는 누구 하고 같이 가서 보는 것이 마음이 좀 편할 듯했다. 同行할 사람을 생각하다가 安富雄이란 이름이 떠올랐다.
  
   공수부대 대대장 출신과 영화관으로
  
   安씨는 1988년에 月刊朝鮮 기자로서 ‘공수부대의 광주사태’(그해 7월호 게재)를 취재할 때 만난 공수 11여단 61대대장 출신이다.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와 트럭 등을 몰고 돌진해오는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했을 때 그는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화려한 휴가’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집단발포의 현장, 바로 거기에 있었던 실제 주인공이다. 고참 대령일 때 그를 만나 취재를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격정적으로 쏟아놓았던 이야기는 月刊朝鮮 기사에선 匿名의 증언으로 처리되었다.
   1988년 가을 국회의 광주사태 청문회 때 증인으로 불려나온 그는 내가 쓴 기사로 해서 곤욕을 치렀다. 月刊朝鮮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는 청문회 국회의원들의 교재가 되어 증인신문에 자주 인용되었다. 1995년 5.18 사건이 재수사될 때도 安씨는 여러 번 검찰에 불려가 신문을 받았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지휘관들 가운데 가장 많이 조사를 받은 이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도 나와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다. 그는 광주사태의 핵심인 발포 경위를 조사할 때 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66세인 安富雄씨를 19년만에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교회 입구에서였다. 그는 내가 찾아온 의도를 묻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공수 대대장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화려한 영화'를 보았는데 군인들이 너무 했더군이라고 그러셔요. 제가 말했지요. 아니 목사님, 그런 영화를 믿으십니까? 그런데 저도 한번 영화를 보기는 해야겠는데 내키지가 않아요”
   “그, 잘 되었군요. 우리 식사하고 같이 영화 보러 갑시다”
   安富雄 예비역 대령은 서울 출생이다. 갑종 출신 장교이다. 월남 전선에 두 번 파견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 대대장 가운데서 공수부대 경력이 경험이 가장 길다. 직업군인출신답게 모양과 행동이 아직도 각이 진 느낌을 준다. 그는 “이제 잊을 만하니 그 영화 때문에 또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청문회, 검찰, 법정에 여러 번 불려다니는데 신경을 쓰던 부인은 심장병을 얻었다고 한다.
   “저는 지난 3년간 호스피스 일을 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들이 수용된 시설에 매일 나가서 죽어가는 이들의 말동무를 했습니다. 저의 인생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사이는 교회 일을 돕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서 섹스폰 연습도 자주 합니다”
   安씨는 검찰이 결론 내린 것을 되풀이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조 선생도 잘 아시겠지만 광주에서는 발포명령이 없었습니다. 군인들이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돌진하는 시위대 트럭과 장갑차를 향해서 쏜 것이 발포의 시작입니다. 검찰이 그렇게 캐보았지만 발포 명령자는 찾아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우리 두 사람은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영화관으로 갔다. ‘화려한 휴가’의 다음 상영까지는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그렇게 공을 들여 영화를 본다는 건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다시 오기로 하고 헤어졌다.
  
   감정 없는 살인기계
  
   그 다음 월요일 오후 기자와 安 전 대령은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공수부대를 惡의 化身 정도가 아니라 살인기계로 그린 영화였다. 반면 궐기한 광주시민측의 인물들은 至高至善의 영웅이요 천사들이었다. 너무 도식적 설정에서 감동은 없었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시민들을 두들기는 퍽 퍽 소리가 일종의 영화 음악이었다. 왜 공수부대가 이런 진압방식을 썼는가에 대해선 설명이 부족했지만 왜곡이라고 볼 수는 없다. 광주사태 직후 계엄사가 발표한 檢屍조서상의 死因분류 통계가 있다.
   165명의 사망자 중 18명이 타박상, 4명이 刺傷으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타박상은 주로 머리이다. 주로 공수부대가 진압봉으로 시민들의 머리를 난타하고 찔러 죽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대도시의 대낮 거리에서 공수부대원이 몽둥이로 시민과 시위대를 때려죽이고 찔러 죽였다. 그 모습을 본 온건한 광주시민들까지도 화가 나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다가 나중엔 트럭, 택시, 버스, 장갑차를 몰고나와 軍警을 몰아붙였다. 5월21일 공수부대가 발포를 시작할 무렵엔 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하여 카빈, 기관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여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화려한 휴가’는 그런 시각에서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선 공수부대원들이 야수 같지도 않고 기계 같아 보인다. 야수는 감정이라도 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공수부대원들에게선 인간적 감정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공수부대가 흥분하여 몽둥이질을 하게 된 것은 공수부대의 특권의식에다가 “계엄령 하에서 민간인이 감히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져?”라는 감정이 출발점이었다. 安富雄씨는 “釜馬 사태 식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나기만 하면 시위는 자동적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 대항한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위 진압장비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을 던지는 다수 시위대를 향하여 쏠 최루탄도 가져가지 않았고, 돌을 막아줄 방패도 없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防石網은 군 수송반에서 엉성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영화에선 시민을 추격하여 골목으로 들어온 공수부대원을 시민이 쏴 죽이고 때려눕히는 장면이 나온다. 공수부대 장교 출신 시민이 빌딩 옥상에서 공수부대를 향해서 기관총 난사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가 시민들에게 기관총 쏘는 교육을 시킨다. 트럭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들어가 탈취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이런 장면을 보고도 관객들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문제의식이 별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공수부대는 惡黨으로, 시민은 正義로운 사람들로 극적 대비를 이룬다.
  
   나치 군대의 유태인 학살 같은 장면
  
   이 영화엔 공수부대의 사격을 유발한 시위대의 장갑차, 버스 돌진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수십 명(또는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목이다.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집단학살하듯 하는 장면이다. 관객들이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연출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온 이들은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安富雄 예비역 대령에게 물었다.
   “줄곧 피고인석에 앉은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까?”
   “완전히 만화더군요. 그런 식의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감옥에 갔지 내가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서 발포하라고 명령했다면 부대원들이 나를 가만 두었겠습니까? 부대원들 중엔 호남 출신도 많았는데. 그 영화에선 왜 ‘김대중을 석방하라’ ‘최 돼지는 물러나라’는 구호는 안나옵니까? 군에서 장비를 지원해준 것 같은데 왜 가만 있는지 모르겠네요. 공수부대가 살인마가 되었는데”
   다음날 국방부에 알아보니 군에서 장비를 지원해준 사실은 없다고 했다. 영화 제작사에서 각종 장비를 모형으로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군에서는 영화사측에 사실왜곡에 대해서 항의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어보냈다. 집단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 없이 造作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없는 내용을 극화’한 것이다.
   첫째, 영화에서는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일제히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한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도 사격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째,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하여 돌진,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그리고 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이때도 공수부대 중대장들에게만 15발씩 지급되고 일반 사병들에겐 실탄이 거의 지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셋째,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가 집단 발포하는 장면은 공수부대가 대한민국에 대해서 발포하는 듯한 상징성을 풍긴다. 영화 관람자는 공수부대가 반란군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공수부대만 표적으로 삼은 저의는?
  
   국방부는 이 장면에 대해서 영화사에 항의하고 국민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해명을 했어야 했다. 군 장병들에게도 특별한 政訓교육을 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공수부대의 난폭한 몽둥이 진압이 광주사태의 한 원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을 확대하여 공수부대를 “동족을 무차별 사살하는 살인집단”으로 그릴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영화는 시작되기 전 “이 영화는 史實과 다릅니다”라는 주의를 주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고 한 것은 2중의 왜곡이다. 국방장관은 영화를 보았다는 대통령을 찾아가 이 영화의 이 장면은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9월1일 서울시내 영화관에서 김지운 감독·기획시대 제작의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대통령은 영화를 본 후 눈시울을 붉혔고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오마이뉴스는 그가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아 봤으면 좋겠어요. 관객이 얼마나 들었습니까?'(DJ)
   '400만 조금 넘었습니다.'(유인택)
   '얼마나 더 들겠습니까?(DJ)
   '700만~800만 정도 예상합니다.'(유인택)
   '좀더 노력해서 1000만명이 됐으면 좋겠습니다'(DJ)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셨습니까?'(유인택)
   '마지막 결혼식은 명장면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DJ)
  
   朴槿惠 한나라당 전 대표는 경선기간에 광주의 한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후 “마음이 아프고 무거운 심정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인데도 上記 정치인들은 事實이라고 전제하고 감정적 반응을 보인 듯하다. ‘이 영화는 사실을 극화했다“는 영화 제작자의 선전이 먹힌 셈이다.
   이 영화는 공수부대의 ‘蠻行’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수부대 이외의 진압부대, 즉 31 사단이나 경찰은 열외시켰다. 광주사태는 특공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시위 진압에, 그것도 진압장비 없이 투입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수부대의 투입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全斗煥 장군 그룹, 이른바 신군부가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고 학교를 휴교시킨 이른바 5.17 조치의 일환으로 공수부대가 광주에 내려 간 것이다. 1996년 대법원은 全斗煥 그룹의 이 조치를 내란행위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광주사태 진압도 내란행위가 되었다.
   영화는 이런 배경 설명을 소홀히 하고 공수부대의 강경진압만 부각시켰다. 광주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공수부대에만 집중시키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反국군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5.18 재판 때도 법원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에겐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검찰은 집권과정의 주모자만 기소했고,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군인 신분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수행했으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 영화는 검찰이 ‘처벌불가’라고 결정했던 공수부대를 처벌하고 있는 셈이다.
  
   非체험 세대를 誤導할 영화
  
  
   1985년 국회에서 광주사태가 再論되고 月刊朝鮮과 신동아가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을 때 광주사태에 관한 많은 신화가 있었다. 全斗煥 정권이 이 사건에 관한 보도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과장된 소문이 기승을 부렸다. 사망자 2000명설을 비롯하여 경상도 군인이 많았다, 여자의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기총소사를 했다 등등의 소문은 그 뒤의 여러 차례 조사를 통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月刊朝鮮은 1985년 7월호 특집에서 공수부대 등의 과잉진압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사망자는 정부 발표에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었다. 이 기사로 해서 광주에선 月刊朝鮮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6공화국 때의 국회 청문회, 金泳三 대통령이 지시한 5.18 사건에 대한 재수사로 해서 광주사태의 진상은 거의 완전하게 드러났다. 시민측의 시각과 정보가 지배적이던 데서 벗어나 이제는 진압군측의 정보도 많이 공개되었다. 진압군과 시민 양쪽에서 이 사건을 종합적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고, 피해보상도 이뤄졌으며, 고위 책임자들이 斷罪도 당했고, 사람들도 성숙해졌다. ‘화려한 휴가’는 이런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못했다. 시민측의 시각에만 충실하다가 보니 진실에서 멀어졌다. 이런 영화는 1980년대에 나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사태는 벌써 27년 전의 사건이 되었다. 광주사태를 잔인하게 진압한 全斗煥 정권에 대한 분노가 1980년대 학생운동권, 즉 386 세대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이 사건을 日帝 시대 사건 정도로 아득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가 잘못된 선입감을 이들 白紙 상태의 젊은이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非체험 세대에겐 이 영화가 광주를 이해하게 하는 교과서 역할을 할 위험이 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공수대대장 安富雄의 광주사태’를 기록하기로 했다. ‘화려한 휴가’는 시민측의 시각을 편파적으로 대변했지만 나의 기사는 공수부대의 시각을 공정하게 소개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安富雄씨가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과 최근 기자에게 증언한 내용, 그리고 검찰 수사로 확정된 사실들을 종합한다. 기사에서 나오는 질문은 검사가 한 것이다.
   전국 비상계엄 확대, 공수부대 투입
  
   11공수여단의 61 대대장이었던 安富雄 당시 중령은 1980년 5월19일부터 광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11여단은 강원도 춘천에 본부가 있었다. 全斗煥이 장악한 군부는 5월17일 全軍지휘관 회의를 열고 전해 10.26 사건(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이후 계속되어온 비상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하여 全國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되면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으로부터만 지휘를 받아 三權을 통제하게 된다. 학생 시위의 확산을 막는다는 구실로 5월18일 0시를 기해서 발령된 계엄확대조치와 동시에 합동수사본부(본부장 全斗煥)는 金大中, 金鍾泌 등 정치인들을 연행하고 국회를 봉쇄하여 崔圭夏 대통령을 포함한 기성 정치 세력을 무력화시키고 국가보위비상대책기구를 통한 정권 인수에 들어갔다.
   5월15일까지 전국적으로 학생 시위가 확산되어 계엄해제를 요구했으므로 군은 부대를 출동시켜 지방의 대학교를 점령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던 서울, 광주엔 주로 공수여단을 중심으로 편성된 강력한 진압부대를 투입하였다. 신군부의 집권과정에서 실무 간사 역할을 했던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 權正達씨는 이렇게 진술했다(1996년 검찰).
   <釜馬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初動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 교훈이,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방침을, 신군부 핵심세력이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진압’으로 설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1979년 10월 釜馬 사태 때 공수 부대의 강경진압이 먹혔던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鐵拳통치 체제하에서 일어난 시위였기 때문에 지속력이 약했고 시위대가 비상 계엄령 선포에 눌려 아예 저항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도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1980년 5월은 달랐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金 세력이 주도한 ‘80년의 봄’이 민주세력을 고무했고 학생 노동자들이 한창 욕구를 분출시키고 있을 때였다. 釜馬사태 진압이 불씨를 끈 것이라면 광주진압은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을 잡는 일이었다. 이 점을 신군부는 간과했던 것이다.
  
   타작당하는 공수부대
  
  
   “1980년 5월17일 새벽 주둔지에서 출발,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포 1공수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5월18일 12시경 동국大에서 천막을 한참 치고 있는데 오후 3시경에 여단장으로부터 광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실탄은 개인에게는 지급되지 않았고 후속 부대가 가져오도록 조치했습니다”
  -당시 출동장비는 어떤 것이었는가요.
   “개인장구로 M16, 군장, 방석모 등과 부대장비로 팀 단위 무전기, 가스 살포용 화염 방사기 등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계엄군으로 출동하면 대학을 점령하고 운동장에 주둔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둔 개념으로 장비를 가지고 다녔던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TV, 테니스 라켓 등 개인 私物도 전부 가져 갔습니다”
   -1980년 당시 진압봉은 어떤 재질이며 어떻게 준비했는가요.
   “진압봉은 사령부에서 제작하여 대대에 보급해 주어야 하는데 1980년 김포지역으로 출동하기 전에 대대에서 제작하라고 지시하여 개인별로 제작을 시켰더니 엉망이어서 오음리에 있는 제재소에서 대대 운영비로 제작했습니다. 방석망도 없었는데 제작하라고 하여 처음에는 철사를 구부려서 방석망을 만들었으나 엉망이어서 수송부에서 제작했는데 개인당 1개씩도 보급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광주로 공수된 11여단은 5월19일 새벽 조선대학교에 본부를 설치했다.
   “1980년 5월19일 새벽이라 그런지 시위대와 충돌은 없었습니다. 배치된 병력들로부터도 「이상無」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특이 상황은 없었습니다. 그 뒤 (여단 본부인) 조선大로 복귀하여 잠시 정돈을 하면서 지내다 세면을 하려고 준비하는데 1지역대장으로부터 무전보고가 왔습니다. ‘충장로 파출소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지대가 시위대에 완전 포위되어 돌과 화염병으로 얻어맞고 있는 상황이다. 지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1지역대장에게 침착하게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확인을 지시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지역대장이 ‘지금 병사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으니 대대장님이 빨리 나와서 확인을 해 보십시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급히 지프에 작전장교 등을 태우고 금남로로 갔습니다.
   차량 사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10여 명 정도가 200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받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군인에 대항하는 데 흥분, 무차별 폭행
  
   광주에 맨 먼저(5월18일) 투입됐던 공수 7여단 35대 대장 김일옥 중령은 대구사람, 33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전주사람이었다. 35 대대 3중대장 朴炳洙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朴씨는 『5월 17일 저녁에 트럭으로 전북 금마의 여단본부를 떠났는데,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가지고 갔다. 대학에 진주한다는 것을 놀러 가는 일 정도로 생각했다』 고 말했다. 朴씨는 또 『우리 부대는 주둔지가 전북이라서 그런지 전라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고 했다. 『실탄은 개인별로 가져가지 않았으며. 소나무로 만든 진압봉을 하나씩 들고 갔다』는 것이다. 방석모·방패·최루탄 발사기는 없었다.
   「특전사의 작전일지」는 5월18일의 상황을 이런 요지로 기록하고 있다.
   <18일 새벽에 전남대, 조선 대학에 진주한 계엄군은 학교에 남아 있던 40 여명의 학생들을 연행했다. 오전 9시쯤 전남대학교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광주시 중심부 금남로로 이동, 계속 시위를 벌였다. 정오 무렵 33대대는 가톨릭 센터로 출동,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1백3명을 포고령 위반혐의로 체포했다. 33·35대대는 다시 충장로와 금남로로 진출, 시위자 2백83명을 체포했다. 시위대는 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7여단의 朴炳洙씨는 1988년에 필자를 만났을 때『학생 편에서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이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하더라. 특히 동료가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했다. 최근에 광주사태 비디오를 보니까 우리가 너무 심하게 한 면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고 했었다.
   시민측에서 본 7여단 진압 상황은 사뭇 달랐다. 당시 ㄷ일보의 광주주재기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18일 오후 4시쯤 나는 광남 로터리 부근에 있는 고층빌딩의 광고탑에 올라가 밑에서 벌어지는 데모 장면을 사진촬영하고 있었다. 시 외곽 방면에서 군인들이 탄 트럭 수십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터리 앞에서 전원 하차하더니 대오를 정비했다. 그걸 보고 시위 학생들은 벌써 달아나 버리고 길가에는 구경 나온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 속에서는 군인들을 환영한다는 뜻에서 멋 모르고 박수치는 사람도 있었다. 공수부대 병력은 횡대로 늘어섰다. 장교가 핸드 마이크로 경고 방송인가를 하더니 그대로 시민들을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를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광고탑이 세워진 건물의 옥상으로 피신해 올라오는 것을 나는 광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공수부대원들이 뒤따라 올라왔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꼭대기에 있는 나를 발견하면 당장 요절을 낼 것 같았다. 나는 「하느님, 이번만 저를 살려주시면 성당에 열심히 나가겠습니다」하고 기도했다. 탑 아래 옥상에서는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인들은 야구 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머리, 어깨 등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몽둥이가 머리를 칠 때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게 보였다. 군인들은 시민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참 있다가. 광고탑에서 내려왔다. 계단은 온통 피칠갑이었다. 양동이로 핏물을 부어놓은 것처럼 아래 계단에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윗몸이 발가벗겨진 청년들이 「원산폭격」을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청년을 붙들면 윗옷을 찢어 머리를 덮어씌우고는 머리를 땅에 박게 하였다가 트럭에 던져 넣듯이 하여 어디론가 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첫날은 사망자가 없었다. 이틀째인 5월19일 두 시민이 타박상으로 사망했다. 5월20일엔 네 시민이 타박상으로 죽었다. 이날엔 네 경찰관이 시위대가 몬 버스에 치여 죽었다.
  
   경북 번호판 차 불타고 운전사 쓰러져
  
   -고소·고발인 및 당시 광주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주장하기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심지어 군화발로 얼굴을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병사들에게 교육을 시킬 때에 하반신을 때리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타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5월19일 날이 어두워지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약 20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북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운전사는 경찰에 인계하여 후송시키고 다시 로터리로 복귀했습니다”.
   첫날부터 광주지역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칼로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찔러 태아를 꺼내 길에 뿌렸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따위였다(검찰 수사 보고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이 평민당에 신고한 「피해자 신고서」를 살펴보면, 김인윤(21·남)은 『5월19일, 공용터미널 앞에서 착검한 공수에 쫓겨 터미널 안으로 피신했는데 공수가 유리창을 부수며 쫓아 들어와 칼로 얼굴을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후두부를 구타했으며 이 때 칼에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진압봉으로 얼굴 등을 구타당했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그 당시 보고받은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5월20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그날 오전에는 별다른 충돌상황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1개 내지 2개 팀을 주요 목지점에 배치해 놓았는데 12시경 되니까 시위대가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계엄군을 습격하는 방법은 대략 이러했습니다.
   시위대 중 40~50代 정도의 사람 2~3명이 계엄군에게 먼저 말을 걸어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디 부대냐, 언제 내려왔느냐』라고 물으나 저희 병력은 답변하지 않고 『해산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삽시간에 100여 명 이상의 시위대가 집결했습니다.
   시위대가 집결하면 앞에서 말을 걸던 사람이 군중 속으로 빠지면서 「우우」하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러면 군중들도 따라하다 계엄군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200~300명이 모여들어 같이 돌을 던지곤 해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우리 대대는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습니다.
   그런 상황이 저희 대대 작전 지역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며, 순식간에 금남로 전체에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습니다. 여단에 즉각 상황보고를 하니 여단에서는 『도청을 死守하고 宣撫작전을 통해 시위군중을 해산하라』고 막연하게 지시했습니다. 금남로에는 1개 지역대밖에 없었는데 시위군중은 계속 불어나 도청 쪽으로 진출하려고 해 할 수 없이 노동청 쪽 등에 배치되어 있던 대대병력을 금남로 쪽으로 끌어들여 시위군중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시위군중이 많아져 도저히 우리 대대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62대대도 시위군중에 밀려 금남로로 들어와 우리 대대와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차량 공격 시작
  
   -고소·고발인들의 주장 및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조비오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5월20일 10시20분경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30여 명의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갖가지 기합을 당하고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동작이 느린 사람은 사정없이 진압봉으로 구타해, 이를 가톨릭센터 건물에서 지켜보던 조비오 신부가 『M16이 있다면 쏘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증언했는데요.
   “저는 그런 사실을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병력배치를 한 다음에는 상황이 어떠했나요.
   “여단에서 지시받은 대로 宣撫작전을 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위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오히려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장에 있던 돌을 공수부대에게 던지고 화염병도 던져 그때부터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돌, 화염병과 최루탄을 투척하는 상호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19시경이 되자 최루탄이 다 떨어지고 날도 어두워지고 해서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지금 무등 경기장에 차량 100여 대가 집결, 금남로를 향해 오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단에 보고하니 여단에서는 『선무작전으로 해산시키라』고만 하고 더 이상 지원도 해 주지 않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차량들이 강습 돌파한다고 하니 걱정이 되어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물마다 셔터가 내려져 있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장애물로 사용할 만한 물건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주위를 자세히 보니 화단이 있어 이를 도로에 옮겨놓도록 지시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줄 알았던 그 화단이 시멘트로 만들었는지 너무 무거워 병사들이 겨우 3개 정도를 도로상에 설치했을 즈음에 금남로 끝부분에서 차량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번쩍번쩍하며 도청을 향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밀려 들어오는 차량들을 보니 분명히 저희 병력을 향해 밀고 들어올 것 같아 병력을 인도 쪽으로 비키게 했습니다.
   저희 뒤에는 경찰병력도 횡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인도로 비키니까 도로상에는 경찰병력들만 횡대로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경찰병력들은 당황해서 저희들에게 시위차량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지급받은 최루탄 2개씩을 전부 소비한 상태였습니다. 경찰에 최루탄을 달라고 했으나 처음에는 없다고 하다가 『그러면 우리는 막을 수 없다』고 하자 그때야 최루탄 한 박스를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페퍼포그 차량을 도로상에 설치한 화분대 사이에 설치하고 있으니까 버스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화분대를 향해 돌진해 오다 장애물을 발견하고 주춤거린 뒤 핸들을 꺾어 충장로 방향인 62대대 쪽 가로수를 받고 정지했습니다. 62대대 병력이 정지한 버스에 최루탄을 투척해 버스 안에 타고 있던 약 10여 명 정도의 시위대들을 체포했습니다.
   그 버스가 도로를 가로 질러 정지했기 때문에 그 뒤에 따라 오던 다른 차량들이 그 버스에 막혀 더 이상 앞으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그 버스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해 뒤에 따라 오던 택시, 대한통운 트럭 등도 전부 정지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막히고 얽혀 뒤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니 시위대는 전부 차에서 내려 도망갔습니다. 정지 차량을 장애물 내지 엄폐물로 삼아 다시 정렬을 정비했는데, 조금 있다 보니 시위대가 다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병력은 정지한 차량을 엄폐물로 삼아 시위대를 진압했습니다.
   21시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宣撫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끊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對南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같아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면 분노를 느낄 만한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렬해졌습니다“
  
   진압병력, 공포에 떨어
  
   -당시에 시위대들의 무장상태는 어떠했던가요.
   “몽둥이, 쇠파이프, 갈고리, 도끼 등 흉기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다 들고 있었으며 시위 상태도 이전과 약간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저희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해 돌진하면 잡히지 않기 위해 멀리 도망을 갔습니다. 이번에는 멀리 도망가지 않고 저희 병력들이 돌진하면 잠시 도망갔다가 전진한 병력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올 때면 다시 나타나서 저희 병력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62대대장과 의논하여 서로 원위치로 돌아올 때 보호해 주는 축차 진입 및 후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서로 과잉하여 때리고 하는 상황이었는가요.
   “5월20일 금남로 상황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때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병력이 시위대로부터 구타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병력들이 완전히 의기상실하고 공포감에 눌린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병력들을 향해 『대대장과 너희들이 여기서 죽는다. 이 자리를 물러날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자리를 지키자』라고 병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다음날 새벽 3시 정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객관적인 위치에 있었던 한 전경(南東成)이 기자에게 증언했던 내용을 手記 형식으로 소개한다.
  
   경찰관 네 명 버스에 깔려 죽다
  
   <나는 경북 대구의 경북대학교 정외과 2년을 마치고 전투경찰관으로 입대, 전남 도경 2기동대 소속으로 광주에서 근무하다가 광주사태를 맞게 됐다.
   광주사태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던 5월20일 밤, 나는 전남도청 앞에서 데모대를 막고 있었다. 광주의 밤하늘은 여기저기서 타오르는 불길로 환했다.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와 가끔 「펑!」하면서 치솟는 화염이 전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 전경부대는 도청 앞의 네거리 중 노동청 광주지방 사무소 쪽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군중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들을 우리 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트럭, 버스, 승용차, 지프 등 갖가지 차들이 슬금슬금 밀려오다가 중간 지대에서 멈췄다. 불타거나 불탄 차들이 서로 뒤엉켜 절로 바리케이드가 쳐진 형세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가 한 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부서지고 불탄 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와 우리 戰警부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피해라!』하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그 버스를 향해 돌을 집어 던졌다.
   그때 우리는 최루탄이 거의 떨어져 데모대가 몰려오면 投石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戰警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오른쪽에 있는 담벼락을 긁으면서 스르르 멈추었다.
   버스 쪽으로 달려가 보니 어둠 속에서 비명이 새나오고 있었다.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끼거나 깔려 뒤엉켜 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어머니!』하는 신음이 들렸다. 우리는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겼다. 벌써 축 늘어진 팔, 다리였다.
   거의 같은 순간 운전석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담벼락을 넘고 달아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이미 달아났고 다른 한 사람이 담벼락에 다리를 걸친 순간, 두 명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 뚱뚱한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 사람은 뒷발길질을 하여 뿌리치고는 달아났다.
   우리는 플래시로 버스 바퀴를 밝히면서 사상자들을 끌어내 병원으로 옮겼다. 이들 경찰관들은 사고 당시 담벼락 밑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전열(前列)에 있었던 젊은 전경대원들은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 피해 달아날 수가 있었으나 이 경찰관들은 앉아 있다가 뒤늦게 버스를 피하기 위해 담벼락에 붙어 서 있다가 버스와 담 사이에 끼이거나 깔린 것이었다.
   (편집자 주: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경장,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순경 등 네 명이 숨졌고 김대민 순경 등 네 명이 중상을 있었다. 이 버스를 몬 운전사 김갑진, 배용주 씨 등 2명은 그 뒤 경찰에 구속, 복역하다 석방됐다. 이들은 군중들이 버스를 탈취, 몰지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하여 몰고 가다가 연기 등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차를 세웠는데 그런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20일 자정인지, 21일 새벽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 밤에는 데모대가 밤을 새워 시위를 했다. 중학생에서 노인까지, 여대생에서 할머니까지 남녀노소 구별이 없었다. 골목골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손에는 몽둥이, 쇠파이프 등이 들려져 있었다. 모두가 악에 바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자가 마이크로 군중들을 격려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경찰이 던지는 것은 수류탄이 아니고 최루탄입니다. 맞아도 죽지 않으니 전진합시다』
   도청에서 가까운 충장로로 우리 부대가 진압 차 출동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데모군중의 습격을 받고 우리 몇 명은 고립됐다.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곁에 있던 동기생 한 놈이 『우린 여기서 죽는다』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달아나다가 쓰러졌다. 『여기서 맞아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데 저쪽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1개 소대 병력이 횡대로 우리를 구원하려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 속으로 돌입했고, 군중은 흩어져 달아났다.
   갑자기 주위가 깨끗이 청소된 듯 비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이 휩쓸고 지나간 저쪽 길 바닥에 중학생 교복을 입은 두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달려갔다. 한 중학생은 가슴이 밟혔는지 푹 꺼져 있었다. 이미 숨은 끊어져 있었다. 다른 중학생은 『엄마! 엄마!』라고 신음하고 있었다. 곧 신음도 끊어졌다.
   나는 이 소년도 가망이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소년을 길에서 들어내 가게 옆에 붙여놓고는 부대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도청 옆 주유소 근방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끌려가는 중학생 한 명을 목격했다. 나는 저놈이 군 부대로 넘겨지면 혼이 날 것 같아 공수부대 사병에게 『이 놈은 나에게 넘겨주십시오. 혼을 내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인수받은 소년을 도청 근방의 民家로 데리고 가 넘겨주면서 잘 보호했다가 부모를 찾아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도청 쪽으로 돌아와 보니 데모군중과 진압부대가 충돌, 군중들이 노동청 사무소 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주유소 앞에 두 20대 청년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한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치명상이 어딘지는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다른 청년은 숨이 끊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방독면을 벗고 5분쯤 인공호흡을 시켰다.
   나는 엉엉 울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인데 『하느님! 왜 이 사람을 죽였습니까』하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망함이 그 때의 내 심경이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내가 본 사례로는 18일인가 19일쯤의 일로서 금남로 부근에서 대낮에 구타당하는 대학생을 할머니가 감싸고 말리는데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할머니를 때렸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퍽 쓰러졌다. 공수부대의 진압봉은 약 70cm. 야구방망이처럼 앞이 굵다. 단단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휘두르면 앞이 무거워 가속도가 붙는다>
   5월20일 사망자는 경찰관 네 명을 포함하여 11명인데 동신중학교 3학년 박기현(14세)도 끼여 있다. 타박상으로 죽었다. 이 手記에 나오는 중학생일 가능성이 있다. 다시 11여단 安富雄 61대대장의 증언으로 돌아간다.
  
   암흑속 아수라장
  
  -당시 5월21일 03시까지 시위대와 충돌하면서 최루탄 등 진압장비는 충분했나요.
  “최초 차량들이 진입할 때 경찰로부터 얻은 최루탄은 순식간에 다 소비하고 오직 진압봉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상황은 마치 적은 병력의 공수부대와 무수한 수의 시위대가 야간에 패싸움을 하는 듯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금남로에는 시간이 늦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건물들의 불은 전부 꺼진 상태였고 날씨도 맑은 날이 아니고 그믐 때 정도여서 달빛도 없고, 가로등마저 꺼진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히 암흑속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물 한 방울 먹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5월20일경의 광주 시내 全 상황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공수부대원들이 최루탄이 부족하여 전부 소비한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최루탄 보급이 되지 않았는가요.
   “처음 출동할 때 개인당 최루탄 2발씩 지급받았으며, 그날 밤 약 7~8회 밀고 밀리는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최루탄은 금방 동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시위군중에 포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단 입장에서는 최루탄을 보급해 주려 해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여단본부도 시위대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자기들 공격 막느라고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 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땅을 치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 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安富雄씨는 이날 공수부대원들이 잠도 못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군중들에게 포위되어 공포감과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광주에 온 이후 더운 밥을 먹은 것은 두끼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시위대에 포위되어 있었고 취사반이 접근을 못해 비상식량으로 때웠습니다. 부상자가 많았는데도 앰뷸런스도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대대원 300여 명 중 약7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주로 돌에 맞은 이들이었습니다. 공수부대는 훈련이 세기 때문에 직속 상관과 동료들에 대한 戰友愛가 강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戰力이지요. 공수부대의 이런 특성상 동료가 시위대로부터 얻어 맞으면 복수심에 불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는 지휘관이 통제하기도 어렵습니다. 공수부대가 아닌 일반 보병부대였다면 시위대에 포위된 상태에서 공포감에 휩싸여 무질서한 사격으로 더 많은 피해를 냈을 것입니다. 나는 수십 만의 무장 시위대에 포위된 상태에서 1000명 남짓한 공수부대가 21일 오전까지는 총도 안 쏘고 전남도청을 死守한 데 대해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공수부대, 실탄 배급 늦추고 사격을 자세
  
   5월21일 오전 전남도청을 지키던 공수부대에 대한 실탄 배급 상황에 대해서는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의 조사로 밝혀졌다. 수사발표문을 인용한다.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 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5월20일 24시경 대대장 지프차 등에 통합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1탄창(15발씩) 분배했다. 63 대대는 5월21일 오전 10시30분경에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13시경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장교를 위주로 실탄이 분배되어 있었다>
   공수부대는 1명의 대대장-3개 지역대-9개 중대-27개 팀으로 구성된다. 1개 팀은 장교 1명에 사병 10명이다.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1인당 15발씩 실탄이 배급되었으니 사병들에겐 1인당 한 발씩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계산이다.
   安富雄 당시 61 대대장의 검찰 진술을 본다.
   “5월20일 야간 시위대의 차량 시위를 진압한 뒤 22시~23시경 사이에 어느 지역대장이 와서 저에게 『62대대는 경계용 실탄을 소지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고해 제가 62대대장에게 『실탄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니 62대대장이 처음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실탄이 있다고 하는데 있으면 나누어 달라』고 하니 62대대장이 『2탄통(1탄통은 150발)이 있다』고 해 제가 『그러면 1탄통만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를 62대대장에게 보내 실탄 1탄통을 빌려 오게 했습니다. 빌려온 실탄은 저의 지프에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실탄을 얻어 오는 것을 저의 대대 중대장들이 본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니 지역대장과 중대장 명 사람이 저에게 와서 실탄을 분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안 된다고 했으나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불안해 하고 또 『사격을 할 것도 아닌데 분배해 달라』고 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대장들에게 1탄창씩 지급했습니다“
   -당시 어느 정도 분량의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지급했나요.
   “1탄통에 10탄창이 들었는데 1탄창에는 약 15발 정도 들어 있습니다. 원래는 20발까지 장전할 수 있는데 20발을 전부 다 장전하면 탄창 스프링에 무리가 가서 15발씩 장전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총 150발 정도의 실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대장 9명에게 1탄창씩 돌아가도록 분배하고 나머지 1탄창은 탄통에 넣어 저의 지프 밑에 놓아 두었습니다”
  
   대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 사격 말라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분배할 때 어떤 지시를 했는가요.
   “이 실탄은 절대로 사격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 마음의 안정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중대장들이 휴대하라고 주는 것이지 절대 사격하라고 주는 것은 아니므로 대대장 지시 없이는 사격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피의자는 소속 대대의 중대장 이상에게 150발 정도의 실탄만 지급하고 나머지 실탄은 추가로 다시 지급한 적이 없는가요.
  “5월21일 도청 앞에서 발포가 있은 후 조선大에서 주답마을로 철수하면서 실탄을 지급했습니다”
   -공수부대의 특성상 주둔지를 떠나면 대대단위 또는 팀 단위로 실탄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아는데, 광주로 출동하면서 피의자 대대는 경계용 실탄을 가지고 가지 않았나요.
   “저희 대대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비행기로 급히 공수되는 바람에 실탄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열차편으로 투입된 저희 대대 후발대 병력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대대 부대대장이 실탄을 가지고 조선大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5월20일 야간이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지급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었던가요.
   “실탄을 나눠 주지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평소 훈련시에도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나누어 주는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에, 당시도 시위대의 격렬한 차량 시위가 있은 뒤 중대장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실탄을 분배했던 것입니다”
   5월20일엔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격화되어 3공수여단 상사 한 명과 경찰관 네 명이 깔려 죽었다. 그럼에도 공수부대는 이날 차량에 대한 대응 사격을 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실탄을 중대장 이상에게만 나눠주었다. 공수부대의 몽둥이 진압은 과했지만 실탄 및 사격통제는 상당한 자제력을 보여주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시민들이 총으로 무장하게 된 시점에 대해서 서울지검-국방부 수사 보고서는 이렇게 정리했다.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5월19일 15시15분경 시위대다가 기독교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 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되었다. 그 후 5월20일 23시경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時 지하실 무기고에서 카빈 17정을 탈취했고, 5월21일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되었다. 본격적으로 무기 탈취에 나선 것은 5월21일 13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이다>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5월20일의 차량 공격에 대해서 1995년의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수사발표문은 이렇게 설명했다.
   <5월 20일 17시경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 기사들이 50여 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결의했다. 18시경 무등 경기장에 100여명의 택시기사들이 택시를 몰고 다시 집결하여 군 저지선을 돌파하고 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하였다. 5~6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전조등을 켠 채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진입하여 전남도청 앞까지 진출했다. 경찰과 11공수여단 61, 62 대대는 도로변에 있는 장식용 대형 화분대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시위대의 차량을 저지하려 했다. 19시30분경 다시 공용 터미널쪽에서 1만 여명의 시위대가 수십 대의 차량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와 합세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저지했다. 경찰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면서 시위대의 도청쪽 진출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5월20일 22시경 갑자기 시위대의 11t 트럭 한 대가 광주역 쪽에서 돌진하여 오다가 방향을 틀면서 전복되어 공수부대 하사관 한 명이 트럭에 깔려 사망했다(편집자 注: 당시 사망자는 3공수여단 16대대 소속의 육군상사 정관철)>
   <광주역 앞에서 공수 3여단 12, 15 대대는 5월20일 20시경 시위대가 드럼통에 휘발유를 넣어 불을 붙여 굴려 보내고 트럭 버스 등 차량돌진 공격을 계속하자 인도로 피하거나 가스탄 투척 등으로 시위대를 저지했다. 22시경 돌진하는 시위대의 트럭에 하사관 3명이 깔려 중상을 입자, 일부 대대장은 권총을 차량 바퀴 등에 쏘아 돌진하는 차량을 정지시키고 운전자 등 시위대를 체포했다>
   <차량 돌진 등 시위대의 강력한 공격에 위협을 느낀 대대장들이 실탄 지급 등 지원을 요청했다. 崔世昌 3 공수여단장은 22시30분경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위협용 이외의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 주도록 지시했다. 여단 정보참모가 먼저 신안동 굴다리에 있던 16대대에 경계용 실탄 100발을 전달했다. 여단 작전참모와 함께 광주역으로 진출하면서 수백명의 시위대의 저지에 부딪쳤다. 경고 방송에도 불구하고 시위대가 해산하지 않자 차량에 거치한 M 60 기관총을 위협 발사하고 권총과 M16으로 공포 사격을 하고, 최루탄을 발사, 시위대를 해산했다>
   실탄을 갖고 있던 공수부대원들도 21일까지는 차량, 휘발유, 투석 공격에도 조준사격은 하지 않았다. 장교들만 소수의 실탄을 갖고 있었을 뿐 하사관 이하 사병들은 실탄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安富雄씨 증언으로 돌아간다.
   -5월21일 오전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1일 08시경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 완전히 꽉 찰 정도로 운집하여 저희 병력 약 10m 전방까지 진출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떻게 진압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시위대도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고 우리 앞 10m 전방까지 전진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병력들에게 『눈도 돌리지 말고 서 있으라』고 지시해 병력들은 不動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돌, 화염병, 쇠파이프 등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9시경 정도 되니 어제 선동방송을 하던 여자가 시위 군중 사이를 헤치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리어카를 끌고 앞으로 나왔는데, 나오면서 『죽은 사람이 내 동생인데 계엄군이 죽였다. 살인마 계엄군을 쫓아내야 한다』는 취지로 선동을 했습니다.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던 여자가 대화를 하자고 제의하여 62대대장이 앞으로 나가 여자와 대화를 조금 하고 있으니까 갑자기 군중 속에서 62대대장을 향해 돌이 날아와서 62대대장이 대화를 하다 말고 들어와 대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여자가 방송을 통해 『남자가 칼을 뺐으면 무라도 잘라야지』라고 하며 다시 나오라고 했으나 62대대장이 안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63대대장과 35대대장도 우리 지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63대대장 보고 『당신이 말을 잘 하니까 당신이 나가서 이야기 한번 해 보라』고 하자 『35대대장과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안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나가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청을 死守하라』
  
   -그 당시 밀려오는 시위대들을 왜 해산시키지 않고 대화에 응할 생각을 했던가요.
   “그날 오전에는 시위대가 먼저 돌과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또 시위대의 수가 엄청나 충돌이 있었다가는 저희 병력들이 전부 맞아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병사들도 상당히 불안해 했기 때문에 충돌할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화에 응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대화를 해보니 시위대가 요구하는 내용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① 계엄군은 즉각 철수하라 ② 체포해 간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라 ③ 계엄군은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여 잠시 기다리게 한 뒤 대대장들과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의논한 뒤 이렇게 답했습니다.『우리는 전방 지휘관이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 때문에 도청을 死守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상 우리 마음대로 철수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들이 요구했던 사항을 상급부대에 보고하겠다. 둘째, 체포한 사람들은 모두 경찰에 인계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 시위대는 없다. 셋째, 우리 계엄군도 국가와 국민을 위한, 국민으로 구성된 군인이다. 우리가 쓸데없이 폭력을 쓰겠느냐. 지금 봐라, 당신들이 폭력을 쓰지 않으니까 우리도 폭력을 쓰지 않고 있지 않느냐』
   우리의 답변을 듣고 그들이 도지사와의 대화를 요구해 여단에 보고하니 『답변을 잘했다』고 하며 도지사와 연락해 만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35대대장으로 하여금 도지사에게 안내토록 했습니다.
   여자와 남자 3~4명 정도가 시위대 대표로 나와 35대대장의 안내로 도청에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광주시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우리 쪽으로 오더니 62대대장에게 시위대와 대화를 요청하며 시위대를 향해 앞에 서 있는 택시 지붕 위로 올라가 『광주시장입니다』라고 이야기한 뒤 『광주市 만세』라고 하자 시위대가 함성을 지르며 시장을 에워싸고 시위대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조금 있으니 경찰 헬기 한 대가 도청에서 이륙하더니 도청 상공을 선회하면서 『나는 전남도지사다. 지금 계엄회의차 戰敎司로 가는데 오늘 낮 12시까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다. 시민들은 모두 해산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3회에 걸쳐 방송한 뒤 戰敎司 쪽으로 갔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여단에 무전으로 우리의 철수여부에 대해 문의하니 약간 시간이 경과된 뒤에 무전으로 연락오기를 『철수계획이 없으니 도청을 死守하라. 그리고 계속 宣撫활동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 12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도지사가 철수시키겠다던 12시를 기다리면서 시계를 자주 보았기 때문에 시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12시가 되니까 운집한 시위대가 『왜 12시가 되었는데도 물러가지 않느냐』며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단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더니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되고 있으니 아직 알 수 없다』고 회신이 와서 제가 시위대에 『지금 계엄회의가 계속 중이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시위대가 웅성웅성해 살펴보니 시위대 뒤편에서 장갑차와 시위대가 가득 탄 5t 군용트럭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차량을 몰고 저희 병력 앞으로 나와 장갑차와 트럭 등을 저희 병력을 향해 횡으로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병력들과 시위대 차량이 마주 보고 있게 된 것이지요“
   安富雄씨는 나에게 여러 번 “전남도지사가 12시에 계엄군이 철수한다는 방송을 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시위대를 고무시켰고 공수부대를 수세로 몰았다는 것이다.
  
   장갑차에 깔려 공수부대원 1명 사망
  
   “61대대와 62대대가 시위대 쪽으로 제일 전면에 나가 있었습니다. 저희 대대에는 장갑차가 배속되지 않아 前面에 병력들만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시위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 거기에 탄 시위대가 보였는데 그들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흉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니 총을 가진 시위대가 군데 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병력의 뒤에는 62대대 뒤에 장갑차가 1대가 있었고, 그 장갑차 뒤에 63대대 1개 지역대 병력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防毒面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의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前列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慶箕萬씨의 증언―.
   “우리 등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나면서 보니까 시민측의 장갑차 한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명이 깔리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 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공수부대 대열의 뒷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했다』
   이때 동료가 치여죽는 장면을 목격 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 고 실토했다. 한 공수부대원도 『동료가 죽고 다치는 것을 보니 내 마음 속에 잠재해 있던 야수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 했다. 이 차량돌진은 공수부대와 시민측의 총격전이 시작된 계기였다. 공수부대는 이때부터 경계용 실탄을 개인에게 지급하기 시작했고 도청주변의 옥상에 군인들을 올려 보내 아래에 있는 시위군중을 견제하게 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이때도 조준사격이라기보다는 공중을 향해 쏘는 위협용 사격이 主였다고 증언한다.
  
  
   “사격 중지” 명령 안 먹혀
  
  
   -시위대 장갑차가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총을 쏘는 것을 피의자가 직접 보았나요.
   “저의 대대는 당시 도청을 향해 시위대를 등지고 도망가는 상황이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위대에서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를 보고 발포한 것은 아닌가요. 시위대가 발포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나요, 아니면 그 총소리가 M16 총소리가 아니라 카빈 총소리라는 것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었나요.
   “제가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카빈 총소리인지 여부를 확인했던 것도 아닙니다”
   -당시 상황을 계속 진술하시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하고 나간 뒤 저의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약간 스칠 정도로 총알을 맞아 비틀비틀 하길래 자기가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뒤 도망을 가 분수대에 도착한 후 전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4개 대대병력이 서로 뒤섞인 상태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시위대도 더 이상 분수대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약간 소강상태였습니다. 대대장들이 분수대 옆 상무관 쪽에 모여 철수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62대대장이 『명령도 없는데 우리가 임의로 철수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뚜렷한 결론 없이 도청을 계속 死守한다는 생각으로 자기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조금 있으니 여단으로부터 무전이 왔습니다. 참모장이 지시하기를 『20사단과 교대할 예정이니 헬기장을 확보하라』는 말을 하여 제가 『상무관 앞과 도청 옥상은 헬기가 착륙할 수 있다. 염려 말고 교대 병력을 보내 달라』고 한 뒤 교신을 끝냈습니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기에 제가 벌써 교대 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 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 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쉬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 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버스가 달려드니까 누군가가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한 것입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고 분수대에 부딪친 뒤 방향을 바꿔 충장로 쪽으로 가다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때 관광호텔 쪽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차를 향해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사격을 하니까 시위대 차량이 주춤하더니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큰일 났구나」 생각하며 뛰어 다니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 중지를 외쳐도 동시에 사격 중지가 되지 않아 제가 병사들 속을 뛰어 다니며 발길로 걷어차면서 사격 중지를 외쳤습니다.
   사격을 중단시킨 뒤 병력을 집합시켜 상무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62대대장은 충장로 방향에 있는 농협 공판장 쪽으로 들어가면서 62대대에 배속된 장갑차 소대장에게 시위대의 장갑차가 들어오면 막으라고 지시한 뒤 장갑차 1대만 남겨 놓은 채 도청 앞에서 주변으로 전부 피신했습니다. 이제 도청 앞 광장에는 계엄군이 거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장 시민군 등장, 交戰 시작
  
   1995년의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 합동 수사 보고서는 이렇게 정리했다.
   <(5월21일) 13시30분경 시위대 쪽으로부터 장갑차 1대가 빠른 속력으로 도청 쪽으로 또 돌진하자 그 순간 경계 중이던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하여 일제히 發砲하여 장갑차 위에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이 피격되었다.
   공수부대의 發砲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가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이고, 그 중 5~6명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나오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그 무렵 방송국 등의 警戒임무를 수행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철수해 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師團으로 철수하면서 경계용 실탄 200여 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에 넘겨주어,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분배받았다.
   한편 시위대는 軍輛(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강진·완도·송주·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武器를 확보, 무장했다. 13시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 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카빈 9정을 탈취했다. 고속버스·트럭 등 1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群衆 示威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00여 정, 실탄 2상자를 확보했다. 13시35분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다. 14시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카빈 20여 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했다.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 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커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카빈 500여 정, M1 소총 200여 정, 실탄 4만6000여 발을 탈취했다.
   15시35분경 화순광업소에서 카빈 1108정, 실탄 1만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카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000천여 발을 탈취했다.
   그 밖에도 이날 하루 동안 일산방직·호남전기·연초제조창·영암경찰서·화순경찰서·지원동 석산 화약고·한국화약·강진 성전파출소 등을 습격하여 카빈·M1·AR·LMG 등 총기 4900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70여 발을 탈취했다.
   시위대는 이들 武器를 가져와 광주 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銃器 사용 교육을 실시했다. 15시경 광주공원에서 銃器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했다. 17시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 사용 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組를 編成하여 정찰, 도청 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 받고 시내 요소에 배치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市民軍이라 불리우는 武裝 示威隊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4시 50분경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水協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屋上에 일부 병력을 배치하여 도청부근으로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銃擊을 가하였다.
   15시15분경 전남도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000여 명이 모여 일부 시위대는 카빈과 실탄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5시 50분경 카빈을 휴대한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道警 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이동했다.
   16시경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의 카빈을 분배했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 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방송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사격 명령을 한 적도 받은 적도 없다
  
  
   安富雄씨는 영화를 보고 난 뒤 나에게 “그때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지시를 내린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었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돌진하는 시위대의 장갑차와 버스에 깔려죽지 않기 위하여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검찰 조사로써 이미 입증되었다.
   -실탄이 지급된 뒤 돌진하는 시위차량을 향해 사격 명령을 내렸는가요.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壓死당할지도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당시 실탄을 가진 병사들을 사격 통제하지 못한 점은 인정하는가요.
   “예. 하지만 저의 대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도 전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 돌진하던 시위대 버스에서 먼저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버스에서 카빈 총소리가 먼저 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시위대의 장갑차가 먼저 밀고 들어오자 저희 대대 병력들은 분수대 쪽을 향해 도망가 시위대 장갑차가 분수대를 돌아 나간 뒤 잠시 분수대 근처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약 20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카빈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뭐야』 하며 일어서 보니 시위대 버스 1대가 밀고 들어오며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했고 그와 동시에 계엄군도 버스를 향해 사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대대의 병력이 먼저 시위대 버스를 향해 사격했는가요.
  “분수대 근처에 서로 섞여 있었기 때문에 어느 대대가 먼저 사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피의자는 5월21일 시위대가 카빈이나 기타 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본 사실이 있으며 시위대의 차량 돌진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그 소리가 카빈인지 아니면 M16 소리인지는 모른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61·62대대 장교들을 조사한 결과 도청 앞에 있던 상당수의 장교들이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위대가 건물 옥상 등에서 먼저 선제사격을 했다면 당시 61·62대대가 좁은 장소에서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상당수 사상자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위대가 선제사격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을 보이는데 진실은 어떠한가요.
   “병력들에 의한 사격이 있기 전 무장 시위대가 있다는 보고를 부하로부터 받고 저 자신도 직접 카빈으로 보이는 총을 가진 시위대 1명을 목격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들이 실탄까지 소지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시위대 쪽에서 차량 돌진과 동시에 사격을 했다는 것은 당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총소리를 들으며 차량까지 돌진하는 상황에서 난 총소리라 막연히 시위대가 사격한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저의 진술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지금까지 출석한 장교들의 진술에 따르면 1차 발포가 있은 후 공수부대원들이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 배치되어 차량 돌진자나 시위대열 선두의 주동자들을 겨냥해 사격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고소인들의 주장과 달리 공수부대엔 저격수 같은 직책은 없지만 당시 상황이 긴박해 도청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을 올려 보내 그들이 경계병 임무와 차량 돌진자나 극렬주동자 및 옥상에서 사격하는 시위대에 사격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軍끼리 誤認 사격 9명 사망
  
   -조선大로 철수한 뒤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조선大에 해지기 전이니까 17시경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병사들을 식사시킨 뒤 병사들에게 실탄을 휴대시키라는 지시를 여단 작전참모로부터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大에 통합 보관되어 있던 실탄을 병사들에게 기본 휴대량인 60발씩 분배했습니다.
   철수는 63대대, 여단본부, 62대대, 61대대 순으로 했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각 대대는 도보로 조선大 뒷산을 거쳐 주답마을로 갔습니다. 주답마을로 철수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으며 조선大 주변 건물에서 시위대가 저희들을 향해 사격을 했습니다.
   응사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아 응사하지 않고 우리 위치를 노출하지 않은 채 산을 넘어 주답마을로 갔습니다. 1개 여단 병력이 야간에 이동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 우리는 소태동을 지나 대로로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주답마을에는 5월22일 새벽 해 뜨기 전에 도착해 병사들을 취침시켰습니다“
   -5월24일 상황을 진술하시오.
   “5월24일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한 후 10시경 20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여단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출발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20사단 병력이 저희 지역에 와서 그 차량을 이용해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63대대가 먼저 출발했습니다. 지프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니까 앞서 가던 제1梯隊 방향에서 계속 소총 소리가 났습니다.
   잠시 후 「꽝」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연기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63대대장을 무전으로 호출했더니 응답이 없었고 63대대 후미까지 접근해 보니 63대대 앞 쪽에서 사격이 있었습니다.
   제가 사격중지를 지시하며 63대대 앞쪽으로 가는 도중에 여단장으로부터 무전이 와 『3대대 무슨 일이야』고 하여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쪽으로 가는 도중입니다』라고 답변한 뒤 63대대 앞 쪽으로 가 보니 장갑차가 부서져 있었고 심한 총격전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보병부대 병력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있어서 『너희들 뭐야』라고 했더니 보병학교 교도대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다 여단장님이 헬기로 오셨습니다. 장갑차 안을 보니 63대대장이 부상당해 있었습니다. 부상자들을 헬기로 후송하고 주변 정리를 한 뒤 나머지 여단 병력을 이끌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갔습니다“
   보병학교 병력이 매복중 11여단 공수부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무장 시위대라고 誤認하여 무반동포 등으로 사격하여 9명의 공수부대원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誤認 사격 전에 무장 시위대가 공수부대 트럭을 향하여 총격을 가해 공수부대가 응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총격전을 듣고 있던 교도대는 視野에 공수부대원들이 탄 트럭이 들어오자 무장시위대라고 착각하여 사격한 것이다.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자신들이 시위대로부터 공격당했다고 오판하여 인근 마을로 뛰어들어 수색하다가 1명의 무장한 사람과 네 명의 비무장 시민을 연행하여 사살했다.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동원한 것이 잘못
  
   -당시 광주 상황이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강경한 진압만 하면 진정될 것으로 보이던가요.
   “우선 시위대들의 수나 시위양상으로 보아 방석모, 방석복 등 진압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봉 하나만 들고 진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만 상부의 명령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시위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저희들이 진압을 하려니 일부 과잉행위도 발생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태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나 여러 자료들을 보면 단순히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과잉진압이나 발포가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공수부대의 특성상 원천적으로 과잉진압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고, 제도적·조직적인 과잉진압이나 살상행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공수부대가 유사시 敵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하는 게릴라부대로서 성격상 시위진압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수부대를 시위진압에 동원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쓸쓸한 墓所
  
  「육군하사 이영권의 묘」 「육군상사 정관철의 묘」 「육군상사 박억순의 묘」 「육군중사 최갑규의 묘」 「육군병장 이상수의 묘」 「육군일병 최필양의 묘」 「육군병장 변광열의 묘」. 김용식, 김경손, 권석원. 이관영, 차정환, 김지호, 김인태, 권용문, 손광식, 권성찬, 김명철, 강용래, 이종규, 이병택, 변상진, 최연안. 서울 국립현충원 제29, 30 墓域의 墓碑銘들에 쓰여진 이름들이다. 이들 23명의 戰死 일자를 보면 1980년 5월20일에 1명, 21일에 3명, 22일에 3명, 23일에 1명, 24일에 11명, 25일에 1면, 27일에 2명, 28일에 1명이다.
   20일의 사망자 육군상사 정관철은 제3여단 16대대 소속으로서 20일밤 10시10분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위대가 몰고 돌진해온 차량에 깔려 죽었다. 공수11여단 이상수 병장 등 21일과 22일의 사망자 6명은 3개 공수여단 병력이 광주시내를 철수할 때 무장 시위대의 발포에 걸려 죽은 이들이다. 공수 11여단의 차정환 소령 등 24일과 25일의 사망자 12명은 11공수여단과 광주보병학교 교도대, 제31사단과 광주기갑학교 하사관 생도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두 차례의 誤認사격에 의한 피살자들이다.
   20사단 소속 병장 이종규 등 27일과 28일의 사망자 3명은 계엄군이 광주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소위 시민군에 의해 사살된 이들이다. 23명의 소속부대는 공수부대 18명, 31사단 3명, 보병학교 1명, 20사단 1명이다. 이 숫자로 광주사태의 主役은 무장시위대와 공수부대였고, 다른 부대는 助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88년 5월29일(일요일) 오전 10시, 눈부시게 화창한 늦봄, 화사하고 신선한 공기 속에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 앞에 30대 청년 다섯 명이 모였다. 김동철(金東哲.32) 김은철(金殷鐵.30) 경기만(慶箕萬.31) 이명규(李明珪.31) 배동환(裵東煥씨.33). 20사단 출신인 李씨는 5월 27일 새벽에 광주로 진입했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공수 11여단 출신들. 金東哲·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金殷鐵· 裵東煥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다. 결혼한 지 몇달 안 된다는 金殷鐵. 李明珪씨는 부인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동료들의 묘비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 고 했다. 이들의 감회를 뒷받침하듯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고, 해마다 한번씩 열리는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광주사태 전사자들을 국가유공자처럼 대하여 추모행사도 규모있게 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80∼82년쯤까지는 특전사나 육군본부측에서도 신경을 써주고 참배객들도 많았다. 그 뒤로 차츰 시들해지더니 요 몇 년간은 군에서 화환하나 보내오는 적이 없고 모이는 사람들도 수백 명에서 수십 명 수준으로 줄어들더니 한 자리 수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 11일 전 5월18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했었던 수만 人波와 비교 할 때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이 다섯 명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요즈음은 우리가 죄인이 된 것 같다』면서 『우리나 광주사람들이나 똑같이 잘못된 정치의 피해자가 아니겠는가』 라고도 말했다. 19년 뒤 등장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자신들을 殺人기계로 그리고 있는 데 대해서 이들은 어떤 감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풀린 의문들
  
   그동안 쟁점으로 되어 있다가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의 합동조사로 확인된 사실들이 있다.
   1. 사격명령 없이 자위적으로 발포: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自衛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계속된 발포에선 군에 대하여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사격통제에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2. 공수여단장들이 과연 현지 사단장 말을 안 들었나: 공수여단의 부대 운용에 대한 지휘를 현지 31사단과 戰敎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된다. 지휘권의 二元化는 없었다.
   3. 무장헬기 사격 없었다: 헬기 장착 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人命 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
   4. 군 헬기에 대한 시위대의 사격은 있었다: 5월21일 오후 2시45분경 20사단 61항공단 소속 정찰용 헬기가 전남도청 상공에서 시위대의 對共 사격으로 여섯 발을 맞았다. 오후 3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방송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항공단 소속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5. 시위대의 기관총 사격: 5월21일 오후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헬기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6. 군인의 대검 사용 있었다: 9명의 死體에서 刺傷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휘관의 의사와 무관하게 공수부대원들에 의하여 시위진압 현장에서 대검이 사용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7. 화염방사기 사용하지 않았다: 화염용 약품 자체가 지원된 사실이 없다.
   8. 연행자에 대한 가혹한 구타로 사망자 있었다: 3여단이 연행자를 싣고 광주 교도소로 철수하면서 과다한 인원을 트럭에 싣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 차량에는 질식사 등으로 사망한 5~6구의 死體가 있었다.
   9. 비무장 민간인 피살 있었다: 11여단 병력이 매복중인 戰敎司 교도대로부터 폭도라고 誤認되어 공격을 당해 9명의 공수부대원이 사망했다. 63 대대 병력이 이에 격분하여 부근을 수색하여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마을 청년 3명, 마을 주민 1 명이 피살되었다.
   10. 사망자는 193+47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민간인 166명 외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이다.
   12. 유방을 도려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경상도 군인들만 왔다는 식의 유언비어는 모두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12. 시민끼리의 誤認 사격 사망도 많았다: 1980년 5~6월 검찰의 檢屍 조서에 따르면 사망한 165명의 민간인과 경찰관 중 총격 사망이 131명, 찔려서 죽은 사람이 4명, 맞아죽은 사람이 18명, 차에 깔려 죽은 사람이 12명이었다. 총격사망자중 군인들이 쏜 것으로 보이는 M16 소총 실탄 피격자가 96명, 시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카빈 소총탄에 의한 피격사망자(군인 제외)는 26명, 기타 9명이었다. 카빈탄 피격자는 시민끼리의 誤認사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주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全斗煥 그룹의 5.17 집권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 국군 保安司의 정보처장 權正達씨는 1996년 1월4일 검찰 조사 때 이런 진술을 했다.
   <광주사태의 근본원인은 공수여단이라는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계획을 입안, 실행한 全斗煥, 黃永時, 鄭鎬溶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런 정치적 의도를 전혀 모르는 채 상부 명령에 복종했던 것에 불과하므로 그들 또한 광주사태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휴가’는 공수부대 투입 명령자에 대한 照明(조명)이나 추궁은 거의 생략하고 명령을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예고도 없이 무차별로 집단 사살한 살인집단으로 그렸다. 군대에 갈 많은 젊은이들은 이 영화를 사실이라고 믿고 反軍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정치인들도 이 영화를 나름대로 이용하고 있다. 국군의 정통성과 권위를 수호해야 할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특전사령관도 침묵하고 있다. 광주사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영화 ‘화려한 휴가’의 터무니 없는 왜곡에 왜 軍은 침묵하는가?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시민들을 향해서,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학살하듯 집중사격하는 장면은 완전한 날조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국군을 殺人기계로 왜곡한 영화가 7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데도 침묵하는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은 무슨 낯으로 70만 將兵들을 지휘할 것인가? 이런 영화를 보고 누가 군대에 자식을 보내려 할 것인가?
  
  1. 상영중인 ‘화려한 휴가’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진압작전을 시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 수십 명이,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예고 없이 집중 사격하여 최소한 수십 명을 사살하는 장면은 터무니 없는 날조입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므로 관객들의 판단을 결정짓게 되어 있습니다.
  2.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발포한 것은, 탈취한 장갑차와 트럭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공수부대를 향하여 돌진, 한 사병을 깔아죽이자 조건반사적으로, 자위적 차원에서 사격을 하게 된 것입니다. 1995년의 검찰 조사에서도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을 명령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져 공수부대 지휘관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날 밤 전남도청 부근에서 시위대가 밀어붙인 버스에 깔려 네 명의 경찰관이 죽은 뒤에도 공수부대는 발포를 하지 않고 곤봉으로 대응했습니다. 진압작전 초기 돌을 던지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방패 등 진압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과잉진압한 사실이 있고 이것이 광주사태를 촉발한 한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트럭, 장갑차, 버스 등으로 밀어붙이는 시위대를 향해서는 발포하지 않고 인내한 것도 사실입니다.
  3. 그럼에도 이 영화는 죽지 않으려고 한 자위적 발포를,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민들에 대한 집단 발포로 날조하여 공수부대가 마치 대한민국에 총질을 한 반란군인 것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이 영화 제작자에 대해서 법적 조치를 취하고 국민들에게 이 집단학살 장면은 거짓말이란 점을 알려야 하고 군 장병들에겐 특별 정훈 교육을 실시하여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하는데 굴욕적 침묵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대통령까지 봤다고 하니 군 지휘부가 입을 닫고 있다면 이런 날조는 머지 않아 사실로 굳어질 것입니다.
  4. 지난 27년간 광주사태에 대한 여러 차례의 여려 방면의 조사를 통해서 진실이 다 드러났는데도 이런 反軍 날조를 한 제작사측은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취지의 말을 자막에 넣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꾸몄습니다.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으로 믿고 있을, 이 영화를 본 많은 국민들에게 이제는 국군이 답해야 합니다. 광주사태 진압 과정에서 27명의 군인과 경찰관도 죽었습니다. 5.18 재판에서도 책임은 정권장악을 위하여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광주에 공수부대의 투입을 결정한 신군부 인사들이 졌고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공수부대도 역사의 피해자입니다. 국군을 매도하는 그 마음을 김정일에게 돌립시다.
  
  
  
  반역좌파들이 또 다시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려 합니다!
  맥아더를 지키는 것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입니다. 오는 9월15일(土) 오후 2시 인천 맥아더 동상 앞 자유공원에서 ‘친북좌익 척결 및 인천상륙작전 기념 국민대회’가 열립니다.
  
  1. 오는 9월15일은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낙동강 戰線(전선)까지 밀렸던 유엔군과 국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반격의 발판을 만든 57주년 기념일입니다. 친북좌파 발호 10년의 청산을 다짐해온 우리는 이날을 계기로 삼아 ‘나라를 바로 세우는 北進’에 들어갑니다.
  2. 국군의 저항과 미군의 지원으로 赤化에 실패한 것을 원한으로 품고 있던 친북좌익들은 좌파정권이 등장하자 맥아더 장군 동상을 파괴하려고 책동해왔고, 애국세력은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친북반역자들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시 결집하여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애국시민 여러분, 또 다시 궐기하여 싸웁시다.
  3.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北進에 나선 유엔군과 국군은 1950년 10월에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에 도달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때 毛澤東(모택동)이 수십만의 중공군을 불법으로 투입하여 통일의 꿈을 짓밟고 1.4 후퇴와 이산가족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민족의 원수인 통일방해자 毛澤東을 존경한다고 公言(공언)한 노무현 대통령은 단 한번도 맥아더 장군을 好評(호평)한 적도 없고 좌익들을 비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좌익들이 마음 놓고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4. 맥아더 동상을 우리가 지킬 수 없다면 대한민국 수호도 불가능해집니다. 미국 사람들이 먼저 배신감을 느끼고 미군을 철수시키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남침 당했을 때 미국은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보내 5만 명이 전사하고 10만 명 이상이 다쳤습니다. 이라크에서 죽은 미군보다 약15배나 많은 미군이 한국전선에서 戰死했습니다. 부산 교두보를 지켜낸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과 후임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조종사)도 한국전에서 죽었습니다. 이런 미국에 감사할 줄 모르고 저주를 퍼붓는 좌익들과 그 비호세력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5. 노무현 대통령은 핵무장한 反국가단체 수괴를 만나러 평양을 찾아 갑니다. 盧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 바다의 휴전선인 NLL을 양보한다면 이는 敵과 손잡고 대한민국에 敵對하는 행위임으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救國의 의지와 미군에 대한 감사와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을 담아 국민대회를 개최하오니 많은 동참을 호소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자유통일 만세! 韓美동맹 만세!
  
  공동주최: 인천상륙기념사업회(상임대표 李憲崎 전 노동부 장관)/국민행동본부(본부장 徐貞甲 대령연합회 회장)
  
  
  
  
  
  
  
  
  
  
  
  
  영화 ‘화려한 휴가’의 터무니 없는 왜곡에 왜 軍은 침묵하는가?
  
  공수부대가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시민들을 향해서, 나치 군대가 유태인을 학살하듯 집중사격하는 장면은 완전한 날조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영화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국군을 殺人기계로 왜곡한 영화가 7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는데도 침묵하는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은 무슨 낯으로 70만 將兵들을 지휘할 것인가? 이런 영화를 보고 누가 군대에 자식을 보내려 할 것인가?
  
  1. 상영중인 ‘화려한 휴가’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진압작전을 시민들에 대한 집단 학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 수십 명이,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예고 없이 집중 사격하여 최소한 수십 명을 사살하는 장면은 터무니 없는 날조입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므로 관객들의 판단을 결정짓게 되어 있습니다.
  2. 1980년 5월21일 낮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발포한 것은, 탈취한 장갑차와 트럭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공수부대를 향하여 돌진, 한 사병을 깔아죽이자 조건반사적으로, 자위적 차원에서 사격을 하게 된 것입니다. 1995년의 검찰 조사에서도 전남도청 앞에선 사격을 명령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져 공수부대 지휘관은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그 전날 밤 전남도청 부근에서 시위대가 밀어붙인 버스에 깔려 네 명의 경찰관이 죽은 뒤에도 공수부대는 발포를 하지 않고 곤봉으로 대응했습니다. 진압작전 초기 돌을 던지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방패 등 진압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과잉진압한 사실이 있고 이것이 광주사태를 촉발한 한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트럭, 장갑차, 버스 등으로 밀어붙이는 시위대를 향해서는 발포하지 않고 인내한 것도 사실입니다.
  3. 그럼에도 이 영화는 죽지 않으려고 한 자위적 발포를,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민들에 대한 집단 발포로 날조하여 공수부대가 마치 대한민국에 총질을 한 반란군인 것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국방부 장관은 이 영화 제작자에 대해서 법적 조치를 취하고 국민들에게 이 집단학살 장면은 거짓말이란 점을 알려야 하고 군 장병들에겐 특별 정훈 교육을 실시하여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하는데 굴욕적 침묵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대통령까지 봤다고 하니 군 지휘부마저 입을 닫고 있다면 이런 날조는 머지 않아 사실로 굳어질 것입니다.
  4. 지난 27년간 광주사태에 대한 여러 차례, 여러 측면의 조사를 통해서 진실이 다 드러났는데도 이런 反軍 날조를 한 제작사측은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취지의 말을 자막에 넣어 마치 사실인 것처럼 꾸몄습니다.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으로 믿고 있을, 이 영화를 본 많은 국민들에게 이제는 국군이 답해야 합니다. 광주사태 진압 과정에서 27명의 군인과 경찰관도 죽었습니다. 5.18 재판에서도 책임은 정권장악을 위하여 전국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광주에 공수부대의 투입을 결정한 신군부 인사들이 졌고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공수부대도 역사의 피해자입니다. 국군을 매도하는 그 마음을 김정일에게 돌립시다.
  
  
  
[ 2000-05-23, 20: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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