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과 맥아더, 에고(ego)의 대결
인천상륙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재가한 이는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언론타기 좋아하는 프리 마돈나'라고 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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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계획 재가한 트루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최종적으로 허가한 것도 트루먼이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이 모험적 작전에 반대했다. 나중에 미8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이 되는 릿지웨이도 반대였다. 그는 극동군사령부가 주관한 도쿄 회의에 참석할 때는 반대를 분명히 하기로 결심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맥아더의 브리핑에 설득 당했다. 70 老將 맥아더의 知的 능력과 업무장악력에 압도당한 것이다. 릿지웨이는 워싱턴으로 돌아와선 인천상륙작전을 지지하는 핵심인물이 되었다. 1950년 8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은 고위전략회의에서 인천상륙작전을 裁可했다.
  
   이날 트루먼은 맥아더가 해외참전용사 모임 앞으로 보낸 글이 보도된 것을 읽어보고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맥아더는 “대만을 지키려 하면 아시아에서 고립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라고 猛攻했다. 사실상 트루먼 행정부를 겨냥한 연설이었다. 트루먼은 기사를 크게 읽더니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에게 이를 취소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존슨 장관이 머뭇거리자 트루먼은 지시문을 구술하곤 즉시 실시하라고 했다. 트루먼은 전부터 맥아더를 ‘이기주의자’, 언론 타기를 좋아하는 ‘프리 마돈나’라고 부르면서 경멸했다. 이런 私感에 흔들릴 트루먼이 아니었다. 그는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은 전쟁지휘관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 해병1사단이 이끄는 10군단 소속 약7만 명과 262척의 함정이 9월15일 인천에 상륙했다. 지칠대로 지친 북한군은 무너졌다.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과 미8군이 반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협공 당했다. 국군은 기습을 당해도 후퇴는 할지언정 부대 단위로 항복하지는 않았으나 북한군은 조직적으로 와해되어갔다. 세계전사에서 유례가 드문 일대 전환이 이뤄졌다. 그때까지 유엔군은 부산교두보를 지켜낼 수 있는가의 생존투쟁에 급급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엔 북한군의 섬멸과 통일이란 새로운 목표가 눈앞에 열리게 되었다.
   미국의 政界와 언론은 흥분했다. 맥아더는 영웅에서 神으로 승격했다. 이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당초의 전쟁목표(침략군의 격퇴와 한국의 수복)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의 38선 돌파와 北進을 허용하여 북한군을 섬멸하고 한국을 통일한다는 것이 새로운 전쟁 목표가 되었다. 미 국무부 안에서 소수의 異見이 있었다. 칩 볼렌, 폴 니츠, 조지 케난 같은 우수한 인재들의 신중론은 워싱턴을 달군 勝戰 무드에 묻혔다. 냉철한 마셜 신임 국방장관도 맥아더 사령관에 전폭적인 재량권을 주었다. 마셜은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제약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電文을 보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정치인이었다. 설사 그가 맥아더의 北進에 제동을 걸고싶어도 그렇게 했다가는 “목전에서 완전 승리를 포기한 비겁한 대통령‘으로 낙인 찍힐 터였다.
  
   웨이크 섬의 트루먼과 맥아더
  
   이런 가운데 중국의 周恩來 수상은 중국주재 인도대사를 통해서 워싱턴에 경고를 보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는 ‘가벼운 공갈’로 간주되었다. 한국군 3사단은 10월1일 동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 北進하기 시작했다. 미군을 主力으로 하는 유엔군은 10월9일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10월10일 트루먼은 맥아더 원수를 만나러 웨이크 섬으로 날아가겠다고 발표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회담 장소를 정하라고 했다. 맥아더는 태평양상의 작은 섬 웨이크로 결정했다. 이 섬에 가는 데는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보다도 세 배나 더 긴 여행을 해야 했다. 트루먼은 “전쟁지휘관이 현장을 너무 오래 비워선 안된다”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고사령관과 부하의 회담이 아니라 두 주권국가의 頂上이 각각의 부하들을 데리고 회담하는 식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영웅이자 일본의 통치자인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기적적 성공으로 신격화되고 있었다. 그는 1937년 이후 미국을 줄곧 떠나 있었다. 맥아더는 이때 로마의 시저가 골 지방을 다스렸던 것처럼 자신은 赤化된 중공까지 해방시켜 아시아의 시저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충만해 있었다. 미조리 시골 출신인 트루먼이 아시아에 가장 가까이 갔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였다.
  트루먼은 중공의 개입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11월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원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이런 정치적 계산이 그를 웨이크로 가게 했다.
   1950년 10월15일 오전 6시30분 대통령 전용기가 웨이크섬 활주로에 착륙했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가 상공을 선회하면서 대통령 전용기가 먼저 내려 자신을 마중하도록 했다는 神話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맥아더는 전날 밤에 도착해 있었고 비행장엔 30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와서 맥아더와 함께 대통령을 기다리던 에브럴 해리만 대사는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지지했던 것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잘못되면 대통령도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었으니 큰 모험을 한 셈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맞는 맥아더의 복장은 缺禮였다. 작업복에다가 낡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거수경례도 하지 않았다. 트루먼도 처음엔 약간 놀라는 듯했으나 다정하게 말했다.
   “장군을 만나기 위해 오래 기다렸습니다”
   “각하, 다음번 만남은 그렇게 길지 않았으면 합니다”
   두 사람은 시보레 차의 뒷좌석에 동승했다. 앞자리에 탔던 대통령 경호원에 따르면 트루먼은 타자마자 “나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퀸세트 兵營에서 마주 앉았다. 배석자가 없었다. 기록자도 없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먼저 일전의 해외참전용사 모임 앞으로 보낸 성명서로 해서 심려를 끼쳤다고 사과했다고 기록했다(회고록). 트루먼은 “그건 이미 끝난 일이다”고 말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고 안심시켰다. 맥아더를 만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듯이 트루먼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쁜 듯했다. 그는 감동을 주는 흥미로운 인간형이었다”고 썼다. 맥아더도 회고록에서 “나는 트루먼이 성격이 급하고 편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보고를 받았으나 만나보니 예절 바르고 우스개를 잘 하며 말도 직설적으로 하는 좋은 사람이었다. 만나자마나 나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썼다.
  
   “중공군은 개입 못한다”
  
   단독 면담 뒤 두 사람은 배석자를 두고 2시간 더 회담했다. 맥아더는 한국의 戰況을 장밋빛으로 그렸다.
   <평양은 일주일 안으로 떨어질 것이다. 추수감사절까지는 북한군의 조직적 저항은 끝날 것이다. 미8군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일본으로 복귀할 것이다. 내년엔 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미군은 전부 철수할 것이다. 군사적 점령으로 얻을 것은 없다>
   트루먼은 “이 전쟁을 制限戰으로 축소시켜야 한다. 중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이렇게 斷言했다.
   <그들이 전쟁이 터진 후 한두 달 사이에 개입했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개입을 겁낼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은 30만 군대를 만주에 갖고 있는데 10만에서 12만5000명이 압록강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들은 공군도 없다. 우리는 한국내에 공군기지를 갖고 있으므로 중국이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면 사상최대의 떼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1000대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 공군력과 중공 육군이 결합되면 큰 문제이지만 그런 작전은 매우 힘들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약6만 명의 북한군 포로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그들은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잘 먹고 깨끗한 데 머물고 있으니까”라고 농담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회담을 종결지으면서 “성명서를 기초할 동안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말했다. 맥아더는 이 친절한 제안을 거절했다. “도쿄에 빨리 돌아가고싶다”는 게 이유였다. 이만저만한 무례가 아니었지만 트루먼은 내색하지 않았다.
   성명서를 정리하는 동안 맥아더가 트루먼에게 물었다.
   “각하께선 차기 선거에 출마하십니까? 일본 천황이 궁금해합니다”
   트루먼은 대답 대신 反問했다.
   “장군의 정치적 설계는 무엇이오?”
   “없습니다. 장군이 각하에 도전한다면 그의 이름은 아이젠하워일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정치의 1조1항도 모르는 인물이요”
   트루먼은 비행기에 타기 전에 맥아더에게 훈장을 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트루먼은 미국의 소리로 중계된 연설을 통해서 맥아더를 격찬했다.
   “그는 세계戰史의 새로운 페이지를 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全세계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위대한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입니다”
   맥아더도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연설을 전해 듣고는 감사 電文을 트루먼에게 보냈다. 트루먼 전기를 써 퓰리처 상을 받은 데이비드 매컬로프는 이렇게 썼다.
   <트루먼은 역사적 위인은 適期에 죽음으로써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나 맥아더가 웨이크 섬 회담 직후에 죽었다면-비행기 추락이나 심장마비로-그들의 역사적 위치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후 죽을 때까지 서로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 2007-06-22, 10: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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