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의 6.25/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새벽에 걸려온 합참의장의 전화:“대통령 각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아주 비관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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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간극 80km
  
  
   6.25 전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쌍방이 비슷한 방식으로 실수와 성공, 그리고 起死回生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起死回生한 유엔군-한국군측은 오만해진 맥아더의 치명적 誤判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허용한다. 중공군-북한군이 이번엔 起死回生하여 재공세를 펴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벼랑으로 몰린다.
   맥아더는 北進할 때 미8군을 주력으로 하는 서부군과 미10군단을 주력으로 하는 동부군으로 나눴다. 서부군은 평양-신의주-압록강을 향해 진군했고 동부군은 원산에 상륙한 이후 동해안을 따라 北上했다. 8군과 10군단 사이엔 거의 80km나 되는 간극이 벌어져 있었다. 산악지대였다. 이 산악지대를 통해서 중공군이 들어와 8군과 10군단의 양측방을 치게 될 줄은 맥아더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V자형의 進擊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부른 바보 같은 布陣이었다.
   毛澤東이 彭德懷에게 지시한 최초의 작전방침은 수세적이었다.
   <북쪽 산악지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敵軍이 평양-원산선을 고수하고 더 이상 北上하지 않으면 우리도 평양, 원산을 공격하지 않는다>
   유엔군의 北進속도는 너무 빨랐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 19일에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彭德懷는 신의주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그는 6개월내의 작전지침으로서 북부의 일부 산악지대와 중국과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조차 보증하기 어렵다고 毛에 보고했다. 맥아더에 못지 않은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毛澤東은 유엔군의 동서 兩軍의 진격로 사이에 드러난 80km의 간격에 착안했다. 이 틈을 타고 大迂廻 (대우회)전략을 쓸 수 있겠다고 본 것이다. 그는 방어전 계획을 機動戰 개념으로 바꾼다. 방어전을 준비하기 전에 우선 잡은 戰機를 살려 적을 먼저 공격한 다음 戰局의 주도권을 잡은 뒤 상황을 봐가면서 공세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과 한미군 사이 최초 교전은 10월25일에 있었다. 그 전날 맥아더는 유엔군에 대해 총공세를 명령했었다. 白善燁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과 미 騎兵1사단(騎兵으로 출발한 사단이나 이때는 騎兵이 아님)이 청천강을 넘어 운산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逆攻을 당했다. 중공군은 주로 한국군 부대를 겨냥해서 공격했다. 한국군 1, 6, 8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 미 1기병사단은 1,500여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냈다. 6사단은 10월26일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여 강물을 수통에 담아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직후 중공군의 공세로 물러나야 했다. 11월6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1차 공세로 유엔군의 北進에 제동이 걸렸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은 청천강 남쪽으로 물러났다. 중공군은 그 뒤 산악지역으로 숨어버렸다. 맥아더는 중공군 포로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개입한 중공군의 병력을 數萬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이때 북한지역에 전개된 중공군은 40만을 육박하고 있었다.
   불과 열흘 전 웨이크 섬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고 있다 하더라도 소규모일 것이며 그마저 공군력에 의해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 있게 예언했던 맥아더는 한국인과 자신의 운명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말 실수를 거듭한다. 평양-원산선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할 맥아더는 공세를 재개하기로 한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걱정이 많았다. 11월7일 영국군 참모총장 슬림 원수는 영국 합참회의에서 이런 견해를 밝혔다.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좁은 지역(注: 평양-원산선)을 선택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한다. 유엔군의 현재 포진은 너무 넓어 방어하기가 쉽지 않고 한국군은 중공군의 첫 공격에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하면 중공군도 압록강 남쪽에서 머물면서 협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
  
   11월28일: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11월24일 맥아더는 또 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언론이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북한의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중공군 병력이 45만 명에 달하고 있음을 알고도 이를 워싱턴에 알리지 않은 채 무모한 공세를 폈을 가능성이 있다.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공세를 유발하여 트루먼 정부로 하여금 전쟁을 중공으로 확대시키고 원자폭탄 사용도 검토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함정을 팠다는 說이 유력하다. 트루먼 대통령이 擴戰과 原爆사용을 거부함으로써 맥아더가 판 함정은 자신이 빠지는 곳이 된다.
   유엔군은 11월 24일 하루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다음날 중공군 45만명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11월28일은 한국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날이었다.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이 미8군과 10군단 사이의 간격을 뚫고 남하하여 미8군의 후방으로 돌아 배후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에서 敵이 등 뒤에 나타나는 날은 비극의 시작이다. 이날 밤 맥아더는 도쿄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워커 8군 사령관과 알몬드 10군단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미8군의 후퇴와 10군단의 흥남 집결(사실상의 후퇴)을 승인하였다. 대공세 4일만에 유엔군은 철수로 전환한 것이다. 11월28일은 毛澤東版 인천상륙작전이었다. 11월 28일 밤 毛澤東은 흥분했다. 그는 彭德懷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好機가 왔다”라고 했다.
   워싱턴 시각으로 11월 28일 오전 6시15분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각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아주 비관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날 아침 백악관 참모회의에서 트루먼은 “우리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말을 꺼냈다. 이날 회의에는 작가인 존 허시도 배석했다. 그는 뉴요커 잡지에 트루먼 대통령의 근황을 기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허시의 同席을 허가했다. 미국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특혜였다. 허시는 이렇게 썼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볼이 붉어졌다. 흐느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그러나 용기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가는 수밖에 없다”>
   트루먼 대통령은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급변한 한국사태에 대한 책임을 그 누구한테도 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참전,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 맥아더에 대한 신임 등 모든 결정은 그 자신이 내린 것이었다.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억울한 심정이야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은 누구한테도 발설할 수 없었다. 그토록 걱정하던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11월 1일엔 푸에르토 리코 독립 투사 두 명이 백악관으로 들어와 트루먼 대통령이 2층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서 경비원을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도 있었다. 11월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11월보다 더 암울한 12월, 그리고 새해 1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28일 오후 3시 백악관의 각료실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가 열렸다. 트루먼 傳記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로프는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電文에서 엄청난 요구사항을 내어놓았다.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의 蔣介石 군대의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본토 폭격, 擴戰의 권한 등. 맥아더는 “나의 군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타격을 입어 피폐한 상태이다”면서 “우리 사령부는 능력을 초과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이 맥아더를 비판하자 트루먼은 이를 제지했다. 싸움을 지휘하는 장군을 공격하여 敵 앞에서 체면이 손상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셜 국방장관은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에서 계속 싸워야 하지만 명예롭게 발을 빼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과 전쟁을 해선 안 된다. 그런 전쟁은 러시아가 깔아놓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제한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우리는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지탱할 수 있는 방어선이 어딘인지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맥아더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셈이다. 한국을 포기해서도 안되고 擴戰도 안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 2007-06-23, 06: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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