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열우당 탈레반 비교
오는 12월 19일은 이제는 카멜레온이 된 열우당 탈레반들에게 철퇴를 내리는 날이 될 것이다.

강철군화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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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非운동권 출신, 2.개혁주장, 3.과거지향적, 4.독선적 원리주의, 5.비포용적, 6. 민생 무관심, 7. 폐쇄적 민족주의, 8.지역주의 회귀 9. 한 순간에 몰락 10. 상대의 실정 틈타 재기 모색
  
  
   탈레반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비호하다가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된 지 6년 만에 그들은 자살테러와 인질극, 그리고 카르자이 정권에 대한 성공적인 반공(反攻)으로 다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탈레반은 1989년 소련군의 아프간 철군 이후 발생한 권력의 진공(眞空) 상태를 틈타 1994년 출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말한다. ‘탈레반’이란 ‘이슬람학교(마드라사) 학생들(탈리브)의 집단’이라는 의미다.
  
  탈레반이 등장할 당시 아프간 국민들은 소련군 철군 이후 아프간 각지를 장악한 군벌(軍閥)세력들 간의 상쟁(相爭)과 부패, 무능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애꾸눈 지도자 물라(‘스승’이라는 의미) 무하마드 오마르가 이끄는 탈레반이 개혁과 ‘본래의 이슬람’으로의 복귀(근본주의, 원리주의)를 주장하며 등장하자 아프간 민중들은 이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1990년대 중반 이들은 소련군 침공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내로라하는 군벌들을 차례로 무찌르면서 세력을 확대했고, 1996년에는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1979년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 이래 30년 가까이 전쟁과 내전에 시달려온 아프간인들은 탈레반의 집권을 환영했다.
  
  하지만 이들은 국민들에게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행복 가운데 그 무엇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탈레반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꾸란의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해석하는 중세적 신정(神政)정치 체제를 구축했다. 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전폐했고, 남자들에게는 수염을 기르도록 강요했다.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였고, 도둑질한 자는 손을 잘랐으며, 동성연애자들은 탱크로 깔아 죽였다.
  
  탈레반의 가혹한 근본주의 통치 아래서 민심은 이반했고, 이를 틈타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옛 군벌세력들이 다시 등장했다. 민생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2001년 3월에는 우상을 금하는 꾸란의 가르침을 이유로 6세기에 건립된 바미안 석불(石佛)을 파괴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온 세계가 나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석불 파괴를 만류했지만, 탈레반 정권은 이 세계문화유산에 포격을 가했다.
  
  그해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게 아프가니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세력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탈레반 정권은 자신들과 일란성 쌍생아인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집단 알 카에다를 비호했고, 결국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공격을 받아 불과 3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후 한동안 잠잠하던 탈레반은 친미 카르자이 정권의 무능과 부패,분열를 틈타 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근래 들어서는 다시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탈레반’들
  
  꾸란의 가르침을 이유로 동성애자들은 탱크로 깔아죽이고,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에까지 거침없이 포격을 가하는 탈레반의 비타협적인 근본주의 노선 때문에 탈레반은 이후 ‘비타협적 원리주의’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무현 정권 이후 여권의 강경 ‘개혁세력’을 한동안 ‘탈레반’이라고 일컬었다.
  
  정치권에 ‘탈레반’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03~2004년 민주당 분당의 와중에서였다.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열린우리당(열우당) 창당에 앞장선 세 사람을 일컬어 ‘탈레반’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앞서거니뒷서거니 해 가면서 열우당의 원내 대표, 당의장 등을 맡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낙제점이었다. 이들은 민생에서도, 개혁에서도 아무런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등장한 지 채 1년만인 2005년 1월, 당 지도부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자 ‘신(新)탈레반’이라고 일컫는 세력이 등장했다. 유시민, 김원웅, 임종인, 송영길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주’와 ‘개혁’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노골적으로 김일성을 찬양하는데에 이르렀다.
  
  정부 부처 내에서도 이들과 코드를 맞추는 자들이 생겨났다. 외교통상부 내에서 비주류에 속해 있던 젊은 중견간부들은 ‘자주노선’을 내걸고 청와대 386들과 야합해 대미(對美) 외교라인의 인사들을 ‘숭미(崇美)사대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이들이 '외교부 탈레반 3인방'이라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합리적인 대미외교노선을 추구하던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을 몰아냈다. 심지어 이들은 친북적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조차 ‘위장된 숭미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민감한 외교안보문건들을 언론에 유출해 이종석을 몰아내려다가 역공을 당해 몰락했다.
  
  
  아프간-열우당 탈레반 비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들과 열우당의 탈레반들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공통점들이 발견된다.
  
  첫째, 이들은 정통 운동권 출신들이 아니다.
  
  아프간 탈레반들은 소련 침공에 맞서 싸웠던 무자헤딘들이 아니라, 소련군이 철수한 후 생겨난 권력의 진공상태를 틈타 1990년대 중반 출현했다.
  
  열우당 탈레반들도 대부분 정통 ‘민주화 운동가’ 출신이 아니다. 열우당 탈레반의 원조(元祖)인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을 보자.
  
  천정배는 지주, 신기남은 친일파 경찰간부 출신 정치인, 정동영은 도의원의 아들로서 비교적 여유있는 집안 출신이다. 이들은 대학시절 운동권과도 거리가 멀었다. 정동영이 유신반대 시위에 가담했다가 잠시 구속된 적이 있지만, 곧 석방돼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이들의 사회생활은 순탄했다.
  
  정동영은 5공 시절 땡전뉴스를 외쳐대던 MBC 정치부 기자이자 앵커였다.
  
  천정배는 사시에 합격한 후 군법무관 시절 군간첩사건 연루자들로부터 압수된 책을 읽으며 뒤늦게 의식화되긴 했지만, 김&장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그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창립멤버가 된 것은 민주화 이후인 1988년이었다.
  
  역시 변호사 출신인 신기남은 TV출연으로 얼굴을 알리다가,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면서 화면발 잘 받고 이름 좀 알려진 외부 인사들을 영입할 때 영입됐다.
  
  ‘진보’와 ‘개혁’을 넘어 ‘친북용공’ 성향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임종인은 육군중령으로 예편한 군법무관 출신이고, 김일성을 노골적으로 찬양했던 김원웅은 공화당과 민정당 사무처 간부를 지내면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외교부의 탈레반들도 외교부 내 비주류였다고는 하지만, 남들 민주화 운동할 때 외무고시 패스해서 고생 모르고 공무원 생활하던 인사들이다.
  
  소련군과 직접 싸우지 않았던 탈레반, 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집권 세력 내 탈레반들이, 본래의 항소(抗蘇) 무자헤딘이나 ‘민주화운동가’들보다 더 큰소리친다는 것, 이건 웃기는 얘기 아닌가?
  
  
  둘째, 개혁을 주장한다
  
  탈레반은 소련군 철군 이후 중앙정부와 군벌들의 무능과 부패로 민생이 파탄난 틈을 이용해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등장했다. 이들 ‘학생개혁가’들은 등장 초기 자신들의 점령지에서 이슬람 율법에 근거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부패를 일소해 민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열우당 탈레반들도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한국 보수우익세력응 물론, 김대중 정권까지도 ‘지역주의 구태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개혁’을 주장하면서 정권을 잡았다. 천정배는 원내대표 시절 “첫째도 개혁, 둘째도 개혁, 셋째도 개혁”이라며 ‘탈레반’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셋째, 과거지향적이다.
  
  아프간 탈레반들이 지향하는 것은 이슬람 초기의 신정(神政)일치체제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유와 인권과 법치와 같은 근대적 가치들을 거부하고, 1400년 전 무하마드가 세운 이슬람 율법을 통치의 전범(典範)으로 삼는다.
  
  열우당 탈레반들도 세계와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시대에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해 형평과 분배를 말하고, 지구촌 시대에 자주와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한다.
  
  
  넷째, 이념에 치우친 독선적 원리주의를 추구한다
  
  아프간 탈레반들은 꾸란의 가르침과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원리주의자들이다. 여성의 교육을 가로막고, 동성연애자들을 탱크로 깔아죽이는 것은 그들에게는 율법에 따른 정당한 행동이었다.
  
  열우당 탈레반들도 자신들이 설정한 ‘원칙’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으로 밀어붙였다. 신기남은 민주당 분당시 “선혈이 낭자하게 싸우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심지연 경남대 교수는 이들을 두고 “독기 같은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다섯째,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한다
  
  아프간 탈레반들은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정권을 잡았지만, 반대파들을 포용하지 못했다. 이들은 옛 공산정권의 인사들은 물론 대소항전의 영웅인 마수드 장군 같은 이들은 이슬람에 충실하지 못한 세속주의자로 배척했고, 우즈벡인이나 하자라인 등 소수민족들을 박해했다. 결국 이들은 2001년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자 미군과 연합해 탈레반 정권 축출에 앞장섰다.
  
  열우당 탈레반들이 한나라당이나 보수우익세력을 향해 어떤 독설을 퍼부어댔는지는 새삼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이들은 더 나아가 김대중 직계세력조차 용납하지 못해 민주당을 깨고 열우당을 만들어 분가했던 인간들이다. 천-신-정에게 붙은 ‘탈레반’이라는 별호도 바로 민주당 내 반대세력들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붙여진 것이다. 심지연 교수는 “이념에 치우쳐 반대파를 포용하지 못하고 찬바람 나는 개혁을 했다. 머리는 명철했지만 가슴은 차가웠다”고 평가한 바 있다.
  
  
  여섯째, 파괴에는 능하나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는 무관심하다
  
  탈레반은 기존 군벌세력들을 물리치고 수도 카불을 점령한 후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는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그들은 1979년 이후 30년 가까지 계속된 전쟁과 내전의 상처를 치료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들은 결국 내부의 부패와 무능,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로 아프간을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다.
  
  열우당 탈레반들도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고, 노무현에 대한 국회의 탄핵을 ‘의회쿠데타’로 몰아붙이면서 홍위병들을 동원한 협박정치로 노무현에 대한 탄핵결정을 무산시키고 2004년 4-15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들은 기성 정치의 틀을 부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후 언론법-사학법-과거사법-국가보안법 문제로 나라를 시끄럽게 했을 뿐,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는 실패했다.
  
  
  일곱째, 폐쇄적 민족주의를 주장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탈레반은 폐쇄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이슬람 세력의 단결을 주장하면서, 미국 등 서방세계을 ‘악의 세력’으로 간주한다. 이 점에서 이들은 '아프간 민족주의'가 아닌, '이슬람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무슬림에 대한 동류의식은 무척 강하지만.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개념은 약하다)
  
  열우당 탈레반들도 마찬가지다. 정동영은 통일부 장관 시절 ‘우리 민족끼리’를 소리높여 외쳤고, 천정배는 한미FTA에 반대해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김원웅은 반미-반일을 선동하는 자리에는 빼놓지 않고 얼굴을 내밀더니, 대놓고 김일성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여덟째, 한순간에 몰락했다
  
  탈레반 정권은 2001년 9-11 테러 후 오사마 빈 라덴의 인도를 거부하다가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공격을 받아 3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열우당의 천-신-정 체제는 등장한 지 1년만인 2005년 1월 끝장났고, 열우당 역시 지금 현재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아홉째, 결국은 지역주의로 회귀한다
  
  탈레반은 정권을 잃은 후, 자신들의 출발지였던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외부인들에 대해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파슈툰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기를 도모했고, 근래 들어 카르자이 정권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따지고 보면 파슈툰 족에 기반을 둔 전근대적 부족주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열우당 탈레반들은 당초 열우당을 만들면서 ‘지역주의 정치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동영은 알게 모르게 ‘DJ이후의 호남맹주’ 자리를 의식했었다.
  
  노무현과 열우당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이 극에 달하자. 연초부터 열우당 탈당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DJ가 전면에 나서 범여권 재결집을 지도하면서, 탈당극의 진상이 드러났다. 더 이상 ‘개혁’장사도, ‘민족’장사도 바랄 수 없게 된 그들은, 결국 이번 대선을 지역구도에 의지해 치르기로 결심했고, 우리 정계에서 가장 확실한 지역기반을 가진 DJ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된 것이다.
  
  
  열째, 상대방의 실정을 틈타 재기를 노린다
  
   미국에 의해 축출됐던 탈레반은 미국이 내세운 카르자이 정권의 무능과 실정을 틈타 최근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미 카르자이 정권은 카불 인근 지역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역정부로 전락햇다. 탈레반의 카불 진격이 머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열우당은 금년 초까지만 해도 재기 불능의 지경이었다. 노무현과 열우당에 대한 국민의 환멸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최근 그들은 다시 일련의 탈당극 끝에 재기를 꾀하고 있고, 재집권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들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후보들이 비전을 제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열우당 탈레반은 카멜레온 집단
  
  물론 아프간과 열우당 탈레반 사이에는 다른 점도 많다.
  
  아프간 탈레반은 이슬람 율범에 따라 한번도 정당을 만든 적이 없다.
  
  하지만 열우당 탈레반들은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열린민주당으로,중도통합민주당으로, 미래창조대통합신당으로 정신없이 정당을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었다. 탈당과 분당, 창당과 합당, 재탈당과 통합이 하도 현란하게 진행되다 보니, 그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이강래 의원은 자기가 입당한 적도 없는 중도통합민주당에 탈당계를 내는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더 큰 차이점은 아프간 탈레반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슬람 원리주의를 전면에 내건 ‘탈레반’이지만, 한국의 탈레반들은 그때그때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짐단이라는 점이다.
  
  열우당 탈레반들은 그동안 ‘민주세력’,‘개혁세력’,‘진보세력’을 표방하다가, 민주니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약발이 떨어지자 한동안 ‘중도평화실용세력’이라는 간판을 다는 듯 했다.
  
  그 간판이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하자 근래에는 ‘미래창조세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들이 아무리 현란하게 야바위쇼를 해도, 국민들은 속지 않으리라는 것을.....
  
  오는 12월 19일은 이제는 카멜레온이 된 열우당 탈레반들에게 철퇴를 내리는 날이 될 것이다.
  
  강철군화(출처: 프리존)
[ 2007-07-30, 11: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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