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바디스'와 아프간 拉致의 해법
인질들을 그곳으로 보냈던 사람(또는 사람들)’이 ‘쿼바디스’에서 사도 베드로가 보여주었던 감동의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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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拉致 解法 있다 -- 그들을 보낸 이들이 그곳으로 가라”
  
  아프가스탄의 탈레반 반군에 의한 한국인 봉사단원 23명 납치 사건의 미해결 상태가 열흘을 넘기면서 언론이 일부 인질들과의 전화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언론은 이지영ㆍ유정화ㆍ임현주 씨와 이루어진 전화 대화 내용을 보도했다. 이것은 탈레반의 장기(長技) 중의 하나인 심리전 활동의 일환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과의 전화 대화 내용은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들은 물론 전해 듣는 모든 이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들이 조속히, 그리고 무사하게, 풀려나서 가족들에게 돌아오게 해야 하겠다는 간절한 기원(祈願)을 이 사건의 추이(推移)를 주시하고 있는 모든 국민이 공유(共有)하고 있다.
  
  세 사람의 전화 대화 내용 가운데 고통과 공포를 호소하는 유정화ㆍ임현주 씨의 말은 듣는 이들에게 사태의 절박성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들의 말 가운데 듣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대목이 있다. 오히려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이지영 씨의 말이다. 이 말이 갖는 함의(含意)가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는 무엇을 미안하게 생각하는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그는 그가 위험한 땅인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탈레반 반군들에게 납치되어서 가족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걱정과 근심을 끼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가족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고 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고와 관련하여 이지영 씨의 이 말들이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번 납치 사고의 책임이 어디에, 그리고 누구에게 있느냐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번의 사고에 관하여 진짜로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이지영 씨가 아니다. 이번에, 이지영 씨를 포함하여, 납치된 봉사대원들이 그 곳에 간 것은 아마도 자원(自願)에 의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그들이 아프가니스탄 행(行)을 자원한 것은 그들이 그 같은 자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사람(또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누군가가 지금 아프가니스탄이 이번에 발생한 납치와 같은 불행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나라인 것을 알면서도 무엇인가 다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 같은 위험을 무시ㆍ외면하거나 아니면 과소평가한 나머지 그들을 그곳으로 보낸 것이다. 아마도 그가 (또는 그들이) 봉사단 참가를 자원하는 사람들을 그곳으로 보낸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또는 그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그 같은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결국 바로 그 ‘판단’이 이번의 불상사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의 불상사에 대해서는 문제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또는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해야지 이지영 씨가 그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단순히 “미안하다”고 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에 걸맞게 책임 있는 ‘행동’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제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는 납치되어 탈레반 반군의 손 안에 들어 있는 무고(無辜)한 이들이 시시각각(時時刻刻)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납치범들은 벌써 몇 차례 시한(時限)을 바꾸면서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이들의 석방 협상이 의외로 장기화(長期化)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어떻게 건져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시급하게 찾아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억류(抑留)가 장기화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필자는 한 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납치범들이 정하는 ‘최후의 시한’이 종료되기 전에 ‘그들을 그곳으로 보낸 사람(또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필자는 ‘그들을 그곳으로 보낸 사람(또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가 (또는 그들이) 누구이든지, ‘그들을 그곳으로 보낸 사람(또는 사람들)’이 스스로 지금 당장 아프가니스탄 현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또는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할 일이 있다. 그는 (또는 그들은) 탈레반 반군에게 자신(또는 자신들)이 “지금 억류 중인 봉사대원들을 그곳으로 보낸 사람(또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무고한 22명의 인질들을 석방하고 그 대신 자신(또는 자신들)을 인질로 억류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을 그곳을 보낸 사람(또는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믿는 하느님에게 납치된 사람들이 조속히 석방되도록 ‘역사(役事)’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가 문제다.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어린 고등학교 학생으로 극장에서 ‘쿼바디스’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면서 로마의 투기장(鬪技場)에서 사자(獅子)의 밥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 교도를 뒤로 하고 로마를 떠난 사도(司徒) 베드로가 노상(路上)에서 “너는 어디로 가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발길을 돌려 투기장으로 돌아가 찬송가를 부르면서 사자 밥이 되는 신자들과 합류(合流)하는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뭉클한 감동(感動)을 지금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필자는,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납치범들의 총검(銃劍) 앞에서 전율(戰慄)하고 있는 22명의 무고한 인질들을 위하여 ‘그들을 그곳으로 보냈던 사람(또는 사람들)’이 ‘쿼바디스’에서 사도 베드로가 보여주었던 감동의 장면을 연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 말로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세속률(世俗律)에도 부합(符合)되는 길이 아닐 수 없다. [끝
[ 2007-07-30, 15: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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