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정말 實用主義를 아는가?
管仲型 지도자-등소평, 이광요, 이승만, 박정희, 명치유신 주력들이 동양적 실용주의 정치의 主流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敵將을 재상으로 중용한 桓公
  
   기원 전 7세기 春秋戰國시대의 중국에 齊 나라가 있었다. 지금의 山東지방에 있던 나라이다. 이 나라에 管仲(관중)과 鮑叔(포숙)이란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다. 두 사람은 同業을 했는데 돈을 벌면 管仲이 가져가는 일이 많았다.
   管仲은 鮑叔보다도 가난하였다. 그때마다 鮑叔은 「管仲은 나보다 못사니까」 하면서 참았다. 鮑叔이 돈을 대고 管仲이 장사를 해서 큰 손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鮑叔은 『돈이란 것은 벌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는 것이니까』라고 이해해주는 것이었다. 당시 齊 나라 왕은 襄公(양공)이란 사람인데 惡政으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두 동생 糾(규)와 小白(소백)을 추방하였다. 양공이 암살되자 齊 나라의 왕 자리를 놓고 두 동생인 규와 소백이 대결하게 되었다. 管仲은 규의 참모였고 鮑叔은 소백의 참모로서 서로 싸우는 입장이 되었다.
   管仲이 처음에는 유리하였다. 管仲이 이끄는 군대가 소백을 향해서 활을 쏘았는데 그의 허리띠에 맞았다. 소백은 일부러 죽은 척하였다. 管仲의 군대는 이제는 이겼다면서 마음을 놓고 천천히 규를 모시고 제 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백은 영구차 같은 데 숨어서 齊 나라로 급히 돌아가 먼저 王座를 차지해버리고는 군대를 끌고 와서 管仲의 군대를 격멸해버렸다.
   管仲은 포로가 되었다. 齊 나라의 왕이 된 소백은 桓公이라 불리게 되었다. 桓公은 敵將이던 管仲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管仲의 친구 鮑叔이 나섰다. 鮑叔은 桓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公께서 齊 나라만 다스리시려면 이 鮑叔의 보좌만 받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公께서 이 천하의 覇王이 되시려면 저의 실력으로써는 감당할 수가 없고 管仲의 보필을 받으셔야 합니다』
   鮑叔은 이렇게 해서 친구 管仲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천거하여 주었다. 管仲은 桓公을 극진히 받들어 곧 齊 나라를 중흥시켰다. 齊 나라는 주변의 작은 나라 35개국을 병합하여 中原, 즉 中國 중심부의 챔피언이 되었다. 春秋戰國시대에 중국에선 여러 나라들이 覇權을 다투었지만 최초의 覇者가 된 것이 管仲이 보좌한 桓公이었다.
  
   실용적인 富國强兵策
  
   管仲의 정책은 요사이 말로 하면 富國强兵 정책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万乘, 즉 万臺의 戰車를 가진 나라에는 萬金의 상인이 있고, 千乘, 즉 天臺의 전차를 가진 나라에는 千金의 상인이 있으며 百乘, 즉 百臺의 戰車를 가진 나라에는 百金의 商人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군사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즉, 富國이 되어야 强兵을 육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管仲은 이런 말도 했다.
   『나라는 원래 財貨가 많으면 먼 데서도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다. 땅을 개간하고 개발하면 몰려온 사람들은 머문다. 곡식창고가 차 있으면 사람들은 예절을 안다. 입고 먹는 것이 충족되면 사람들은 榮辱을 안다. 법을 지키면 육친(六親)이 화합한다. 禮儀廉恥(예의염치), 즉 예절과 의리와 조심함과 부끄러움이 있는 나라에서는 임금의 명령도 통한다』
   管仲의 이 말은 정치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관중을 모델로 하여 소설을 썼던 일본작가는 이 말이야말로 춘추전국 시대 최고의 名言이라고 했다.
   관중은 인간이란 것은 물질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어야 도덕도 지킬 수 있고 예절도 알게 된다고 했다. 사람이 예절을 아는 나라에서 비로소 法治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金泳三 전 대통령 식으로 개혁이니 정통성이니 민족정기니 하는 좋은 말만 쓴다고 해서 도덕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잘 돌아가면 자연히 범죄자도 줄고 도덕은 정립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恒産이 있어야 恒心
  
   管仲은 관념적인 도덕론이 아니라 아주 실용적인 정치를 말하고 있다. 朴正熙式 실용주의인 것이다. 管仲의 이 말과 비슷한 말이 孟子가 한「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는 말이다.
   <안정된 생업(恒産)이 없으면서도 안정된 마음(恒心)을 품는 것은 오직 선비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백성으로 말하자면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 안정된 마음도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안정된 마음이 없으면 방탕하고(放), 편벽되고(僻), 사악하고(邪), 사치한(侈)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마침내 죄를 저지르게 한 다음 좇아서 처벌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로 긁어서 투옥시키는 짓[罔(=網)民]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이 군주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그물질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밝은 군주는 백성의 생업을 제정해 주되,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족하게 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건사하기에 족하게 하여, 풍년에는 1년 내내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사망을 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백성들을 선하게 만들엇으니, 그런 까닭에 백성들이 따르기 쉬웠던 것입니다.>
   (孟子: 안외순 옮김>
   管仲은 위대한 개혁자였다. 당시 齊나라엔 公田法이란 토지제도가 있었다. 田畓(전답)을 9등분하여 그 가운데 8등분은 여덟 집에 나누어주고 나머지 한 등분의 농토는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경작하게 하여 거기서 나는 수입을 국가에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추수하고 남은 이삭은 과부들이 줍도록 하여 일종의 불우이웃돕기로 쓰도록 하였다. 만22세가 되면 밭을 받아 경작을 하기 시작하고 만66세가 되면 이 땅을 국가에 돌려주도록 한 제도였다.
   이 公田制는 문제가 있었다. 세금을 내기 위하여 공동으로 경작하는 농토는 아무래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등한히 하게 되었다. 세금이 적게 걷혔다. 북한에서 집단농장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개인 텃밭의 생산성이 몇 배나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인간이란 이기적인 동물이므로 자기 몫은 열심히 돌보지만 公共의 것은 적당히 한다.
   管仲은 이런 인간의 약점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公田制를 폐지하고 징세제를 만들었다. 즉, 농사를 지어서 일정한 비율의 수확을 세금으로 낸 나머지는 개인 몫으로 했다. 개인은 열심히 일한 만큼 자신이 갖게 되는 몫이 많아지니 모두가 倍前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齊 나라의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군사력의 증강으로 나타나 齊 나라가 中原의 覇權국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 개혁은 북한의 집단농장을 개혁하여 私有化를 허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북한에 만약 管仲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집단농장을 과감히 철폐하고 그 땅을 중국처럼 개인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할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식량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다. 러시아의 개혁이 실패하고 중국의 개혁이 성공한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러시아에서는 집단농장의 私有化를 하지 못했던 데 대해 중국은 鄧小平의 지도력에 힘입어 이것을 해냈던 것이다.
  
   상공업자들에겐 兵役면제
  
   管仲의 개혁이 또 있다. 관중은 齊 나라를 21개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들 중 6개 지역은 상공업자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管仲은 이 상공업자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兵役의무를 면제해주었다. 管仲이 보기에는 상공업이 농업보다는 생산성이 높으므로 상공업자들을 군대로 데리고 가는 것보다는 이들로 하여금 열심히 돈을 벌고 물건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도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것도 管仲의 아주 유연한 발상을 보여준다. 경직된 도덕론이나 기계적 평등론으로 보면 말이 안 될지 모르지만 管仲은 富國强兵이란 大命題를 위해서 實利와 國益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管仲의 이런 실용적 개혁정책으로 해서 齊나라에는 많은 상인과 기술자들이 몰려와서 장사도 하고 물건도 많이 만들게 되었다. 특히 해안지방에서는 소금을 만드는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 소금은 곡식만큼이나 중요한 물자였다.
   요사이 말로 하면 管仲은 외국인들이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상공업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병역면제와 같은 특혜를 주었던 것이므로 기술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齊나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일종의 자유무역지대 구상이라 할까. 나라의 富가 증가하니 자연히 세금도 많이 걷히게 되었다. 세금이 많이 걷히니 군대도 강력하게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管仲의 개혁정책은 기원 전 7세기의 일이다. 로마가 겨우 생겨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런 시대에 벌써 管仲과 같은 실용주의 정치인이 중국에 나타났으니 人間事의 원리라는 것은 결국 그 본질은 변함이 없고 시대에 따라서 형식만 조금씩 바뀔 뿐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戰國시대 최고 인물로 꼽히는 管仲은 또 관리들의 임무를 전문화한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齊나라의 공무원들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들을 총람하는 식이었다. 관중의 건의에 따라 桓公은 전문영역을 설정하여 업무를 세분하였다. 사회가 발전하여 복잡하게 되는 데 따른 정부기능의 조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管仲의 사상을 담은 책이 「管子」 24권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고사리는 어느 나라 것이었나”
  
   司馬遷은 史記의 列傳부분을 쓸 때 맨 먼저 義理의 인간으로서 백이와 숙제를 소개하고 그 다음에 管仲을 소개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周 나라 사람이었다. 백이 숙제는 지금으로부터 한 3000년 전의 殷나라 고죽국이란 나라의 왕자형제였다. 아버지가 사망하자 서로 왕이 안 되겠다고 양보하는 경쟁을 벌리다가 두 사람이 함께 나라를 떠버렸다. 이 무렵 殷의 주왕이 실정을 거듭하자 은 나라에 복속하고 있던 周 나라의 무왕이 혁명을 일으켜 殷나라를 뒤엎고 周 나라를 중국의 정통왕조로 세웠다.
   백이 숙제는 이런 혁명은 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주장하여 周 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는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만 먹다가 餓死했다. 백이 숙제가 먹었던 고사리도 따지고 보면 周 나라 땅에서 난 것이 아닌가.
   管仲은 齊 나라의 재상이 되어 40년간 桓公을 보필하여 이 나라를 최강국으로 만들고 죽었다. 그는 生前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를 나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鮑叔이었다』
   鮑叔이 그를 桓公에게 천거해주지 않았더라면 管仲은 桓公의 명령에 의해 사지가 찢기는 처지에 빠졌을 것이다. 포숙과 관중의 이런 우정을 우리는 管鮑之交라고 부른다.
   중국에 管鮑之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돈을 벌어서 논을 사는 것은 괜찮은데 자신과 친한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두고 못 본다는 뜻이다. 왜 이런 생각이 생기는 것일까.
   첫째는 한국인의 지나친 오기. 한국인들은 유달리 남에게 지기를 싫어한다. 특히 친구나 친척들 사이에서 그러하다. 그러다가 보니 멀리 있는 진짜 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가까이 있는 友軍을 敵으로 돌리는 나쁜 전통이 생겼다. 이런 성격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생존전략으로서 견지해온 事大主義와 관련이 있다.
  
   敵을 내부에서 찾는 한국인들
  
   사대주의는 우리의 국방을 중국이나 미국에 맡겨버리려는 자세이다. 국민과 국가의 존립과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국방을 외국에 맡겨놓고 우리 정치인들은 바로 자신의 주변에서 내부의 敵을 만들어내어 제 살을 뜯어먹는 자해적인 싸움박질만 벌였다. 조선조 시대에는 당파싸움에 눈이 멀어버린 관리들이 우리를 치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倭敵보다도 상대 당파를 더 적대시했다. 상대방이 하자는 데 대해서는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고 倭敵의 침략 의도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문제에까지 그런 당파적 이해관계를 개입시키는 바람에 우리 朝廷은 倭敵이 침략할 의도가 없다는 誤判을 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중동의 어느 나라에 나가 있던 우리 정보부 요원들 사이에 內紛이 있었다. 불만을 품은 요원이 자신이 미워하는 상관을 제거해달라는 편지를 북한 대사관측에 보냈다. 그 상관의 人的 사항뿐만 아니라 그 상관이 다니는 루트와 시간표까지 가르쳐주어 테러를 할 수 있도록 안내까지 해주었다. 이 편지가 잘못 배달되어 우리 대사관에 전달되었다. 정보부 수사팀에서는 이 편지의 筆跡을 추적하여 범인을 체포하였다. 이 범인은 현역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이와 유사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예컨대 金玉均은 守舊派를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守舊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가 실패하였다. 많은 민주투사들은 북한에 이득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朴正熙 대통령을 골려주기 위해서 김일성의 염원이던 주한미군철수에 찬성하고, 한국 정부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고 미국에 요구하였다. 요즘도 與野 정치인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이들이 主敵을 북한정권으로 삼고 있는지 상대당으로 삼고 있는지 혼돈이 생길 정도이다.
  
   인간본성을 간파한 사람
  
  
   管仲의 위대성은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정확하게 간파했다는 점이다. 인간을 미화하지도 않고 인간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富國强兵 정책을 폈지만 전쟁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管仲은 그러나 백성의 약점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凡人은 남에게서 혜택받기만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미움의 시작이고 德은 원망의 바탕이 된다>
   인간심리의 통찰자인 管仲의 현대성은 그가 法治를 德治 위에 놓은 점이다.
  <聖君은 나라를 통치할 때 法에 의존할 뿐 良識에 의존하는 일이 없다. 근거 있는 계수에 의존할 뿐 막연한 이론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공적인 기준에 의존할 뿐 개인적인 사정에 의존하는 법이 없다. 당당한 태도에 의존할 뿐 임시변통의 책략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聖君은 몸을 편하게 하여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도 헛된 이름을 얻으려고 헛된 언변을 일삼지 않게 된다>
   管仲은 '법은 변하지 않아야 변란이 생기지 않는다. 법을 자주 바꿔서 백성을 지배하는 나라는 불행을 당한다'고 말했다. 管仲은 富國强兵을 통해서 백성이 ‘배 부르고 등이 따뜻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君主의 권력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대목을 읽으면 근대 정치학의 개척자인 16세기 프로렌스 사람 마키아벨리의 ‘君主論’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만큼 기원 전 7세기 사람 管仲의 선견지명에 놀란다. 한편으로는 정치의 본질이 時空을 초월하여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管仲은 말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지나치게 미워해서도, 지나치게 사랑해서도 안 된다. 지나치게 사랑하면 失德, 지나치게 미워하면 失威가 된다. 총명한 군주가 쥐고 있는 여섯 가지 권한이 있다. 그것은 살리고 죽이고 부유하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는 것이다. 군주가 처해 있는 자리가 네 가지이다. 文과 武, 威와 德이다. 그럼에도 군주가 쥐고 있는 권한을 신하에게 넘겨주는 수가 있는데 이를 脫柄이라고 한다. 군주가 처해 있어야 할 자리를 신하에게 넘겨주는 것을 失位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군주의 명령은 먹히지 않는다>
  
   非戰論 비판
  
   중국의 戰國시대에 齊나라를 패권국가로 만들었던 桓公의 명재상 管仲은 인물을 평가하는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놓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도 알아낼 수 있다. 그 사람이 교제하는 상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이 현명한 사람인지 못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다>
   管仲은 또 이렇게 경고했다.
   <군주된 사람이 늘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될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신하가 그 지위에 어울리는 德을 갖추고 있는가. 둘째, 신하가 봉록에 어울리는 공적을 세우고 있는가. 셋째, 신하가 그 관직에 어울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가>
   管仲은 요사이 한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평화지상주의를 예감한 듯 이를 兼愛사상이라고 부르면서 비판했다.
  <非戰論이 판을 치면 아무리 견고한 요새가 있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兼愛사상(남이나 자신을 똑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묵자의 사상)이 판을 치면 병사들은 戰意를 상실한다. 無爲長生 사상이 판을 치면 염치심이 없어진다. 민본사상이 판을 치면 군주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는다. 다수결주의가 판을 치면 賢者와 愚者의 구별이 없어진다. 拜金사상이 판을 치면 작위와 家門의 가치는 떨어진다. 정실만능 사상이 판을 치면 법률은 제 구실을 못한다. 아첨과 거짓이 판을 치면 간교한 인간이 득세한다>
   管仲은 위정자가 명심해야 할 國政운영의 다섯 가지 원리를 이렇게 제시했다.
  
   1. 토지는 정치의 기본이다.
   2. 朝廷은 사회질서의 중추이다.
   3. 市況은 물자의 수급상황을 보여주는 기본이다.
   4. 화폐가치는 경제 동태의 척도이다.
   5. 軍備는 國力에 맞추어야 한다.
  
   너무나 명확한 뜻이므로 달리 해설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오늘날 한국의 위정자들에게 특히 의미 있는 말이 있다면 '조정은 사회질서의 중추이다'라는 대목이다. 좌파정권 시절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헌법에 기초한 法治주의를 우습게 보는 듯한 언동이 朝廷, 즉 청와대發로 매일같이 나왔다. 사회질서의 중추가 이 모양인데 治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부안군수가 집단린치당해도 경찰이 눈치만 보고 방관했으니 위정자로선 이 이상의 타락이 없는 것이다.
  
   管仲의 제자들: 鄧小平, 명치유신 主力들, 李承晩, 朴正熙, 李光耀
  
  
   管仲의 동양적 실용정치의 泰斗이다. 주자학적 관념론과 명분론, 그리고 科擧制로 뽑힌 文民 출신 관료집단이 지배해온 동양(일본은 예외)에서도 富國强兵과 생산적 정치의 전통을 이어온 이들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명분론이 퇴색하자 管仲型의 실용론자들이 東洋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이것이 東北亞와 東南亞 발전의 리더십이 되었다.
   일본의 明治維新 주도세력, 중국의 鄧小平, 싱가포르의 李光耀, 한국의 李承晩 朴正熙가 성공한 동양적 실용정치가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렇다.
   1. 富國强兵을 국가목표로 했다.
   2. 이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對外的으로는 개방정책을 썼고, 對內的으로는 시장주의에 따른 경쟁과 자율을 촉진시켰다.
   3. 애국적 국가엘리트 집단을 만들어 이들이 민중지향적인 정책을 펴도록 했다.
   4. 이들은 自主的이었으나 닫힌 自主가 아니라 열린 자주를 지향했다.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국가주의자였고, 배타성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애국자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5. 이들의 행태는 합리성, 과학성, 愛國愛族心에 바탕을 두었다. 朱子學的 명분론의 결정적 결함은 명분을 실천할 방법론이 없었다는 점인데 管仲型 지도자들은 효율적인 공조직을 건설하여 생산성을 확보했다.
   6. 이들 실용정치인들이야말로 동양의 先進세력이다. 毛澤東과 金日成으로 상징되는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은 주자학적 명분론의 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守舊세력이다.
  
   李明博 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주의가 ‘장돌뱅이의 타산’을 벗어난 역사적 맥락을 갖추려면 自主, 愛國, 富國强兵, 反共이란 단어를 낡은 이념으로 경멸하고픈 유혹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 2008-03-30, 11: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