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博 정부의 對北政策
對北정책의 정상적 추진을 위해서는 좌경적 교과서를 정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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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아래에 첨부하는 글은 지난 2월14일에 있었던 <신아시아연구회>(회장: 李相禹) 15주년 기념 춘계 세미나에서 발표한 필자의 발제 논문이다. 독자 여러분이, 특히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 관계자들이, 한번 읽고 참고해 주었으면 한다. 李東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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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아연> 2008 춘계세미나
  일시: 2008.2.14.14:00~18:00
  장소: 렉싱턴 호텔
  주제: “李明博 정부의 통일안보 정책”
  발표: 李東馥 [E-Mail: db1937@hanmail.net; Home Page: http://www.dblee2000.pe.kr]
  
  李明博 정부의 對北政策
  
  
  I. 들어가는 말 - 李明博 당선인의 2월1일자 기자회견이 의미하는 것
  
  李明博 대통령 당선인이 2월1일 한국ㆍ일본ㆍ미국의 3개 ‘대표신문’과 가진 ‘공동 인터뷰’는 오는 25일 출범할 李明博 정부가 추진할 대북정책의 방향과 지표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風向計였다. 한국의 <동아일보>ㆍ일본의 <아사히신문>ㆍ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 등 3개 일간지들과의 공동회견에서 이 당선인은 특히 새 정부의 당면한 대북정책에 관한 의문의 상당부분을 해소시켜 주었다. 이 당선인은 향후 그가 이끄는 새 정부의 ‘대북 경제협력 원칙’ 4개 항목을 제시했다. 그것은 ① 북핵 문제의 진전, ② 경제적 타당성, ③ 재정부담 능력, ④ (특히 대형 프로젝트의 경우) 국민적 합의 등이었다. 그는 남북간에 이미 ‘합의’된 경협 사업들에 대해서는 이 네 가지 원칙에 입각한 타당성 검토를 통해 ① “우선 추진할 것,” ② “나중에 추진할 것,” ③ “추진하지 않을 것”으로 나누어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 당선인의 ‘공동 기자회견’은 새 정부의 對北정책이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당면한 과제에 대한 解法을 제시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것은 임기 말의 盧武鉉 정권이 작년 10월초 무리하게 성사시켰던 <남북정상회담>과 이에 후속하여 11월에 있었던 <남북총리회담>에서 무분별하게 양산해 놓은 ‘합의사항’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특히 11월의 <남북총리회담>에서 남의 盧武鉉 정권과 북의 金正日 정권은 상식적으로는 누구도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합의사항’들을 무책임하게 양산해 놓았다. 이 ‘합의사항’들 가운데는 남에서 때마침 여야 정권교체가 걸려 있는 대통령선거가 진행되는 기간인 11월과 12월 사이에 무려 14건의 각종 남북회담을 서울과 평양, 그리고 개성과 금강산 및 부산 등지에서 개최한다는 것과 함께 8건의 ‘주요 경협 사업’들을 2007년 내에 착수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북은 또한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ㆍ<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ㆍ<남북철도운영공동위원회>ㆍ<남북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와 같은 개념조차 분명치 않은 대화기구들을 구성ㆍ운영하기로 합의하는가 하면 <6.15 민족공동 기념일> 제정 및 ‘남북의 법률ㆍ제도적 장치’ 정비와 같은 南南葛藤(남남갈등)의 불씨를 안은 문제에도 덜컥 합의했고 “<남북총리회담>을 6개월마다 정례적으로 개최한다”는 합의도 생산되었다. 盧武鉉 정권과 북한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사항’이 무려 190건”이라고 집계한 보도도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盧武鉉 정권이 이렇게 무더기로 양산한 남북간의 합의들은 大選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鄭東泳 후보를 지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는 의혹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盧武鉉 대통령의 意中에는 “나가는 CEO가 어음을 발행해 놓음으로써 들어오는 CEO로 하여금 결제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저질러 놓고 보겠다”는 계산이 없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大選 결과는 정권교체였다. 盧武鉉 정권을 계승할 鄭東泳 정권은 탄생하지 않았다. 이제 임기 말의 盧武鉉 대통령이 방만하게 북한과 이룩해 놓은 ‘합의사항’들을 처리하는 문제는 대선의 勝者인 李明博 당선인의 몫이 되었다. 이 당선인이 이 문제에 관해 내놓을 해법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 문제에대한 이 당선인의 해법은 결국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이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이 추진해 온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 판을 짜는 것인지의 여부를 가름하는 試金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선인이 2월1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꺼내 든 해법은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다. 그는 일단 전반적인 대북정책은 건드리지 않고 임기 말의 盧武鉉 정권이 무리하게 양산해 놓은 ‘합의’들에 국한하여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大選 이후 전개되고 있는 남북관계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靜中動의 상황을 보여준다. 2007년 大選에서 李明博 후보가 승리한 이후의 남북관계는 남북간에 서로 유리한 ‘멍석’을 차지하기 위한 ‘氣 싸움’의 마당이 되고 있다. 이 ‘氣 싸움’의 단계에서 이 당선인은 2월1일자 기자회견을 통해 포석에 선착하는 선택을 했다. 그의 선택은 “대북정책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의 2월1일자 기자회견 발언에는 “북한이 이에 대해 반발하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북관계를 서두르지 않고 그 대신 한-미ㆍ한-일ㆍ한-중 관계를 ‘복원’하고 ‘개선’하고 ‘강화’하는 일을 서두르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 같은 이 당선인의 입장과 생각은 그 동안 ‘햇볕정책’ 또는 ‘평화번영정책’이라는 이름으로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이 지난 10년간 추구했던 대북정책 기조와 궤를 크게 달리 하는 것으로 북한의 대남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2월1일 기자회견에 밝힌 이 당선인의 입장은 ‘상황 관리’의 차원의 당면한 현안에 대하여 대응한 것이지 새 정부가 추진할 ‘대북정책’의 큰 그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이끌게 될 <李明博 정부>가 앞으로 5년의 임기 동안 추진할 ‘대북정책’은 아직 앞으로 白紙위에 그려져야 할 그림이다.
  
  이 글의 목적은 우선 남북관계의 현 상황과 함께 이에 대처하는 남북 쌍방의 입장 차이를 개관하고 이번에 남쪽에서 이루어지는 정권교체의 의미를 음미하는 한편 이에 기초하여 앞으로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형성되고 추진될 것인지를 예측해 보고자 하는데 있다.
  
  
  II. 남북관계의 現住所 -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對北 ‘퍼주기’의 決算表
  
  지난 10년간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이 일관되게 추진한 대북정책은 소위 ‘햇볕정책’이다. [2003년에 출범한 盧武鉉 정권은 ‘평화번영정책’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지만 이는 ‘햇볕정책’에 수반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한 편법에 불과했다] 이 두 ‘左派’ 정권들이 일관되게 추진한 ‘햇볕정책’을 상징한 ‘키워드’는 “(북한에게) 주어서 (북한을) 변화시킨다”였다. 2000년6월 金大中(당시 대통령)의 평양 방문 직후 靑瓦臺에서 있었던 회동에서 그와 李會昌(당시 <한나라당> 총재) 사이에는 가벼운 舌戰(설전)이 있었다고 李會昌은 회고한다. 李會昌이 ‘상호주의’를 주장하자 金大中은 손사래를 치더라는 것이다. 金大中은 “우리의 목표는 ‘주어서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상호주의’를 내세우면 북한이 주어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金大中 정권을 계승한 盧武鉉 정권의 대북정책은 “주어서 변화시킨다”는 기조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었다.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이 지속된 10년 동안 “북한에 얼마를 주었느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지금 나와 있는 정답이 없다. 아마도 이 의문에 대한 정답을 찾는 것은 새로 출범하는 <李明博 정부>가 대북정책의 틀을 짜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일 것 같기도 하다.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이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일은 결국 그 동안의 대북정책을 “계승할 것이냐” 아니면 “새 판을 짤 것이냐”를 놓고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다. 이 양자택일을 위해서는 우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수순이 아닐 수 없다. 거기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도대체 그동안 실제로 “얼마를 주기로 약속”했고 “과연 그 가운데 얼마가 집행되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계승’이냐 ‘새 판’이냐의 두 길 가운데서 택일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金大中ㆍ盧武鉉 정권 하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으로 얼마나 되는 액수의 對北지원이 이루어지고 약속되었는지에 관하여 지금까지 나와 있는 유일한 정부측 자료는 2006년10월 <통일부>가 내놓은 <대북지원 규모 관련 설명자료>라는 제목의 문건뿐이다. 이 ‘자료’는 “金大中ㆍ盧武鉉 정권 8년간의 대북지원 총규모가 8조원”이라는 언론보도에 대한 반론 자료로 작성된 것이었다. 여기서 盧武鉉 정부의 <통일부>는 “8년간의 실제 대북지원액은 2조3천3억원”이며 이것도 “현금이 아닌 현물로 지원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통일부>의 주장은 문제의 ‘8조원’에 포함시킨 ‘경수로 분담금’ 2조1천690억원과 같은 ‘국제기구 분담금’과 ‘금강산 관광대가’ 9천8백억원(9억8천181만 달러)과 같은 ‘정상적 경제행위, 그리고 대북지원용 국산 쌀 가격 차이보전을 위해 <양곡관리특별회계>에서 결손 처리한 2조3천억원을 “‘대북지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통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시 반론이 제기되었다. 작년 9월 국회의 대정부 국정감사 때 <한나라당>의 陳永 의원은 <통일부>가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1995년부터 2006년까지 12년 동안에 남한의 정부, 지방자치단체 및 민간단체가 북한에 제공한 경제지원 규모가 총 6조6천억원 이상이라는 집계 결과를 내놓았다. 2000년 金大中의 평양방문 대가로 金正日의 은행계좌로 송금한 4억5천만 달러 + 알파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陳 의원에 의하면 6조6천억원 가운데 2,300만 달러는 金泳三 정권 때(1995-1997), 1조5천억원은 金大中 정권 때(1298-2002), 그리고 3조1천억원은 盧武鉉 정권 때(2003-2006) 집행되었다. ‘경수로 분담금’을 제외한 대북지원의 64%가 盧武鉉 정권 때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기에 2007년 발생 분이 포함되면 그 액수는 더욱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작년 정기국회에서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감의 중요 이슈의 하나도 대북지원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金大中 정권 이후 이루어진 대북 ‘현금’ 지원 총액이 30억 달러를 상회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내역에는 ①金大中의 방북 대가 4억5천만 달러, ②‘개성공단’ 사업권, 노동자 임금, 세금, 통신료 등 5억 달러, ③‘금강산 관광’과 ‘아리랑 축전’ 대가 4억5천만 달러, ④‘금강산 관광’ 관련 건물 매입 대금(1억5천만 달러)ㆍ‘통일축전’ 행사 비용(4천만 달러)ㆍ경의선/동해선 철도건설 토목사업 자재구입비(7천만 달러)ㆍ북한 방문 합산 비용(2억 달러) 등 5억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을 제기한 <한나라당>의 崔炅煥 의원은 “여기에 남북한 교역 적자액 13억 달러를 합치면 대북 ‘현금’ 지원 총액은 30억 달러 이상”이라고 주장했었다.
  
  金大中ㆍ盧武鉉 정권 하에서 발생한 대북 경제지원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다른 자료 하나가 있다. <통일부>가 작성한 <남북 협력 기금>의 조성 및 집행 규모다. 이에 의하면 1991년부터 2006년까지 조성된 <남북 협력기금> 총규모는 7조4천억원이다. 이 가운데 金大中 정권 출범 이전에 조성된 규모는 전체의 8.3%인 6천억원에 불과하다. 金大中 정권 기간 중 조성된 규모가 33.5%인 2조5천억원, 盧武鉉 정권 기간 중 조성된 규모가 58%인 4조3천억원으로 전체 기금의 88.8%인 6조6천억원이 2000년 金大中의 평양방문 이후에 조성되고 또 집행되었다. 이 돈의 일부가 245만톤의 양곡(쌀 225만톤ㆍ옥수수 20만톤)과 225만톤의 비료를 사서 북에 제공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쯤 되면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을 상대로 대북 ‘퍼주기’ 논란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 같은 ‘퍼주기’ 식 대북지원의 목적이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의미 있는 변화’는 없었다. 盧武鉉 정권의 <통일부>는 특히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북한이 ‘新思考’(2001년1월 ‘연두 공동사설’)와 ‘경제관리 개선조치’(2002년7월1일 시행) 등을 통하여 ‘변화’의 길을 걸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북한의 변화’는, 있었다면, 무의미한 겉치레에 불과했다. 그 동안 中國이 金正日의 베이징 ‘中關村 과학단지’ 시찰(2001), 샹하이 ‘浦東 개발구역’ 시찰(2002), 中國 남부지역 시찰(2006) 등을 주선하면서 “中國式 ‘개혁ㆍ개방’ 모델의 모방”을 완곡하게 종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正日의 북한은 좀처럼 ‘의미 있는 변화’로의 발걸음을 내디디지 못하고 있다.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변화’가 아니라 남한을 엉뚱한 내용과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逆부메랑 효과를 발생시켰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 발표 이후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에 대해서는 ‘친북ㆍ좌파’ 성향 시비가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었었다. 한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정권의 ‘인적 구성’ㆍ‘지지 기반’ㆍ‘정책 노선’ 등의 세 가지를 그 잣대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면 金大中ㆍ盧武鉉 두 정권이 “우리는 좌파 정권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南勞黨’의 잔존 세력과 ‘386’ 세력이 靑瓦臺 등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盧武鉉 정권의 ‘左向左’ 행보는 국민적 불안감을 키워서 작년 12월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정권교체’ㆍ‘좌파퇴출’ㆍ“잃어버린 10년 되찾기”라는 ‘키워드’를 탄생시키면서 530만표의 큰 표차로 이루어진 여야 ‘정권교체’의 길을 열어 놓았다.
  
  盧武鉉 정권의 대북정책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이 정부가 자랑해 마지않는 남북 ‘인적 왕래’의 허구성이다. 盧武鉉 정권의 <통일부>는 작년 11월에 발간한 <제1차 남북관계 발전 기본계획>이라는 책자에서 그 동안 추진된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성과로 “남북 연간 왕래인원 10만명”ㆍ“남북 연간 교역액 10억 달러”를 크게 꼽았다. 이 책자에서 <통일부>는 그 이전 10년에 비해 지난 10년간 남북회담은 225회로 8배, 남북간 체결된 합의서는 145건으로 24배였으며 남북 교역액은 70.5억 달러로 5.7배, 남북경제협력 사업은 209건으로 35배, 남북 왕래인원은 37.5만명으로 216배, 이상가족 상봉인원은 3.1만명으로 200배로 늘어나는 量的 팽창이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통일부>의 주장은 사실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6.15’와 ‘8.15’를 계기로 하고 ‘민족’과 ‘평화’를 명분으로 하여 지난 7년간 서울과 평양, 그리고 금강산과 개성 및 제주도 등지를 오가면서 진행되어 온 각종 ‘축제’ 행사는 물론이고 ‘금강산 관광’을 비롯한 남북간의 ‘인적 왕래’는 대부분 남한 사회의 주류 세력인 ‘보수ㆍ우파’는 배제ㆍ소외된 가운데 북한과 남한 사회의 소수 ‘친북ㆍ좌파’ 세력 사이의 ‘잔치판’이 되어서 “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의 주문대로 남이 길들여지는 ‘容共’化ㆍ‘聯共’化의 공간”을 마련하는 촉매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남북관계는 북한의 ‘남조선혁명론’의 틀 안에서 형성되는 ‘상층 통일전선’의 무대를 제공하는 모양과 내용으로 전개된 것이다.
  
  盧武鉉 정권에서 전개된 상황은 더욱 비정상적이었다. 주한미군을 유지하기 위해 평택으로의 기지이전을 추진하는 정부의 국무총리의 夫君이 “주한미군의 평택으로의 기지이전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좌익’ 단체의 간부인가 하면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체결을 추진하는 정부의 대통령 부인은 이 두 가지에 대한 반대 운동의 주동자를 그녀의 ‘부속실장’으로 기용하고 있었다. 이 정부 아래서 “맥아더 銅像 철거를 주장”하고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을 반대”할 뿐 아니라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좌익’ 시민단체들에게 국고로부터 ‘보조금’이 지급되고 ‘南勞黨’ 참가자들은 물론 제주 ‘4.3 사건’을 비롯하여 과거 ‘좌익’ 관련 사범으로 법원에 의하여 實刑 선고를 받았던 자들을 법원 판결의 번복도 없이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둔갑시켜서 6.25 戰死ㆍ傷者나 심지어 ‘西海交戰’ 희생 장병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개되었다.
  
  ‘보수ㆍ우파’로부터의 ‘좌경화’ 시비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보수ㆍ우파’ 세력으로부터는 “아직 적화통일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은 이미 ‘적화’되었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남쪽의 ‘보수ㆍ우파’ 세력의 비명에 대해 북한이 “맞다”고 화답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金正日의 북한이 金大中ㆍ盧武鉉 졍권을 싸잡아서 공공연하게 ‘친북ㆍ연공’ 정권이라고 호칭하기에 이른 것이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2000년6월15자 <남북공동선언> 이전의 남한에서는 “반공ㆍ보수 세력이 주류”였지만 그 이후에는 “반공ㆍ보수 세력은 소수의 변방 세력으로 전락했고 그 대신 친북ㆍ연공 세력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의 대북 ‘퍼주기’는 ‘받는 쪽’인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는 쪽’인 남한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들이 건설하겠다고 했던 ‘오아시스’는 실제로는 ‘蜃氣樓(신기루)’였다.
  
  
  III. 異曲同奏의 ‘통일 교향곡’ - 구별되어야 할 ‘통일정책’과 ‘통일방안’
  
  남한 사회에서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이 추진한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정책은 또 하나의 엉뚱한 결과를 불러왔다. ‘햇볕정책’ 추진 과정에서 ‘통일정책’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朴正熙로 상징되는 권위주의 시대의 대북정책은 ‘선건설ㆍ후통일’의 기조 하에서 사실상 ‘통일논의’를 禁忌로 만들었었다. 그래서 이때의 ‘통일논의’는 金大中이 이끄는 ‘좌파’ 세력의 독점물이 되었다. 1998년 金大中 정권의 등장을 기점으로 하여 이 나라에서는 10년간의 ‘좌파 천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좌파 천하’가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은 ‘속빈 강정’이 되었다. 그 핵심이어야 할 ‘통일정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60년 전인 1948년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출현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2개의 ‘분단국가’는 각기 상반된 ‘통일정책’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건국 초기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통일’은 ‘수복통일’이었다. 반면,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추구하는 ‘통일’은 ‘해방통일’이었다. 남북이 각기 추구한 상반된 통일정책은 서로 뿌리를 달리 하는 것이었다. 남의 ‘수복통일’론 의 뿌리는 1948년5월10일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있었다. 반면, 북의 ‘해방통일’론의 논거는 이른바 ‘미완성 해방’론에 있었다.
  
  남의 ‘수복통일’론의 논거는 1948년5월10일의 ‘제헌국회의원 총선거’가 유엔총회 결의에 의거하여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것이라는데 있었다. 북한이 이 같은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같은 해 9월9일자로 북한 땅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분단국가’를 일방적으로 수립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며 더구나 유엔이 총회 결의로써 대한민국을 ‘한반도 상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한 이상 이렇게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는 길은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북한 땅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유엔 감시 하의 보궐선거’를 실시하여 그 당선자들을 대한민국 국회에 추가로 합류시키거나, 아니면, 그 같은 원칙에 입각한 남북한 총선거를 다시 실시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북의 ‘해방통일’론은 1945년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반제ㆍ반봉건ㆍ민족해방ㆍ인민민주주의 혁명’이 북한 지역에서만 수행되고 남한 지역에서는 “미국의 방해”로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이 반 쪼가리 ‘미완성 해방’이 그쳐 버렸다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은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남한에서도 문제의 ‘혁명’을 수행하여 한반도 전체의 ‘해방’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른바 ‘남조선혁명을 통한 조국통일’론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한의 혁명 역량을 강화”하고 “북한을 ‘남조선혁명’의 기지로 강화”해야 하며 “‘남조선혁명’의 국제적 지원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소위 ‘조국통일 3대 혁명역량’이다. 북한은 “‘통일’은 ‘남조선혁명’의 수행을 통해 마저 ‘해방’되는 남한과 이미 ‘해방’되어 있는 북한 사이에 ‘합작’을 통해 이루어질 때 ‘평화적 방도’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 같은 ‘남조선혁명’이 수행되지 않을 때는 ‘비평화적 방도’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무력통일’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통일정책’은 당연히 헌법의 틀 속에서 추진되어야 하는 정책 영역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이 추진할 ‘통일정책’에 관하여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헌법은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명시하여 ‘국가주권’의 주체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헌법은 예외성을 인정하는 조항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제4조가 그것이다. 제4조는 대한민국이 “통일을 지향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스스로 ‘분단국가’임을 인정하고 있다. ‘분단국가’의 상대방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존재를 우회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4조는 이어서 ‘통일’의 ‘내용’과 ‘방법’을 명시하고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내용’이 되어야 하며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은 ‘통일 이전’은 물론 ‘통일 이후’에도 ‘계급주의’와 이에 입각한 정치제도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는 조항들을 가지고 있다. 제1조(국체)와 제8조(정당해산) 및 제11조②항(사회적 특수계급 불인정)이 이에 해당하는 조항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계급정당’인 ‘공산당’은 헌법에 의하여 불법화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헌법은 제10조로부터 제23조에 걸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내용이 되어야 할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들을 열거해 놓고 있다.
  
  2000년6월15일자 <남북공동선언> 제2항이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문면은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 조항은, 비록 ‘낮은 단계’라는 수식어가 첨부되기는 했지만, ‘연방제’를 ‘통일방안’의 하나로 수용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 정당’인 <조선노동당>이 지배하는 국가”(북한 헌법 제11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과 함께 ‘연방국가’인 ‘통일국가’에서 하나의 支邦정부가 될 뿐 아니라 聯邦정부에도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한다는 것이 된다.
  
  <6.15 선언> 제2항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은 ‘연방제’로 이루어지는 ‘통일국가’에 북한이 ‘공산국가’인 채로 참여하는 것을 대한민국 헌법이 허용하느냐의 여부이지만 문제가 여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정치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심지어 ‘從北主義’를 공공연히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이나 사실상 ‘南勞黨’ 잔존세력과 ‘386’ 主思派들에 의하여 장악되었던 <열린우리당>과 같은 ‘친북ㆍ좌파’ 성향의 정당들이 허용될 뿐 아니라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발생할 정도로 다양성이 허용되는 개방체제인 반면 북한은 수령독재라는 이름의 전근대적 세습에 의한 개인숭배 체제가 ‘先君政治’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군사계엄 통치로 주민을 억압하고 있는 획일적인 폐쇄체제라는 데서 초래되는 문제다.
  
  남북한의 인구비례는 2대1이다. 이 같은 인구의 차이를 도외시하면서 게다가 左右가 공존하는 남한과 사상적으로 획일화된 북한에게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여 1대1로 형성되는 ‘연방’을 구성하는 내용의 ‘통일’을 이룩한다면 그 같이 이루어지는 ‘통일국가’가 어떠한 정체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같은 ‘통일국가’는 당연히 북한이 지배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은 상황을 예방하기 위하여 인구비례 적용 등, 남북한을 차등화하는 내용의 ‘연방제 통일’을 이론적으로는 거론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 같은 차등화 개념이 햇볕을 볼 가능성은 없다. 북한이 수용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지금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 안팎의 객관적 현실에 의거한다면, 시기의 早晩은 있을지라도 언젠가 필연적으로 실현되지 않을 수 없는 ‘통일’의 그림은 실제로는 이미 그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에 도달하는 길에는 다양성이 있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한반도의 ‘통일국가’는, 그것을 ‘흡수통일’이라고 호칭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는 상관없이, 북한의 체제가 ‘붕괴’되거나 ‘해체’된 뒤 대한민국의 체제로 북한이 편입되는 내용이 될 것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지난 60년간 남북의 두 상반된 체제 사이에 진행된 適者生存(적자생존)의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은 ‘성공한 체제’로 승자가 된 반면 패자가 된 북한은 이제 자력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한 것은 고사하고 주민들의 의식주마저 해결할 수 없는 ‘실패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 상황 속에서 ‘실패한 체제’인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은 물론 북한의 ‘실패한 체제’와 대한민국의 ‘성공한 체제’를 뒤섞는 ‘비빔밥’ 식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반하면서 정체불명의 ‘韓半島旗’ 아래서 이루어지는 ‘합의통일’을 상정하고 있는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은 당연히 폐기되어야 마땅한 군더더기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은 북한의 독재자 金正日을 상대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여건의 성숙에 따라 ‘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金正日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도태’와 ‘관용’의 대상이지 ‘주주’로 참가할 자리는 없다.
  
  지난 6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문제는 ‘핵’을 카드化하여 ‘생명의 밧줄’로 이용하면서 버티고 있는 金正日의 북한이 하나의 역사적 필연인 대한민국 주도형 ‘통일’에 끝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통일’은 북한에서 그 같은 ‘통일’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변화’가 발생할 때까지 유보되어야 하는 미래의 명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처럼 ‘통일’이 유보된 상황에 대처하는 정책수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화적으로 ‘분단’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키며 긴장을 완화하고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교류와 협력의 길을 트고 이산가족과 국군포로 및 납북자 등 인도적 문제와 같은 시급한 현안들을 해결해야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정책수단이 ‘대화’다. ‘통일’과 달리 ‘대화’의 상대방은 金正日과 그가 이끄는 독재체제일 수밖에 없다.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그들을 북한지역을 유효 지배하는 통치세력으로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분단관리’ 체제 하에서 그 동안 남북한 사이에는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홍보ㆍ선전전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통일방안’이다. 그 동안, 남북한은 다 같이 ‘통일정책’과 ‘통일방안’의 혼동을 의도적으로 허용하고 이용함으로써 ‘통일’ 문제에 관하여 많은 인식의 혼란을 초래해 왔다.
  
  지난 60년간의 한반도 分斷史에서는 남북 쌍방이 제기했던 다양한 ‘통일방안’들이 끊임없이 명멸했었다. 북한은 1950년대부터 각양각색의 ‘정치협상회의’ 방식의 ‘통일방안’으로 시작해서 1980년대 이후에는 이른바 ‘연방제 통일방안’으로 홍보ㆍ선전전 차원의 ‘통일논의’를 주도하는데 골몰해 왔다. 1980년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내놓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은 그 압권이다. 대한민국도 뒤늦게 1970년대부터 남한판 ‘통일방안’으로 역공을 시작했다. 1970년대의 ‘6.23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朴正熙), 1980년대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全斗煥), 1990년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盧泰愚)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이들 ‘통일방안’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통일정책’이 아니었다. 남북을 가릴 것 없이 ‘통일방안’들은 모두 외형적인 합리성과 적극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합의통일’을 표방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통일방안’들은 하나 같이 상대방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의 ‘전제조건’들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합의’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들 ‘통일방안’들은, 이에 의한 ‘통일’의 성취가 아니라, 한결같이 상대방에 대한 홍보ㆍ선전전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통일방안’을 이용한 홍보ㆍ선전전은 대한민국이 여론사회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가열된 점이 없지 않았다. 북한의 ‘통일방안’들은 주로 남한사회를 분열시키고 때로는 한-미 관계를 이간시키는 수단이었다. 남한에서 서로 권력을 놓고 경쟁하는 정당과 정치세력들이 무분별하게 제기한 ‘통일방안’들은, 주로 유엔을 무대로 한 남북 외교대결에 이용된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 ‘통일논의’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유권자들의 票心을 낚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IV. <李明博 정부>의 對北정책
  
  1. 2007년 大選 결과가 의미하는 것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금년에 다시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작년 12월19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남한에서 정권교체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는 본래 12명의 후보가 등록하고 그 가운데 2명이 도중 하차하여 10명이 완주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李明博 후보와, 그렇게 단정하는 것을 애매하게 만들었던 정치적 상황이 있기는 했더라도, 여당임에 틀림없는 <대통합민주신당>의 鄭東泳 후보 사이의 양자 대결이었다. 이 대결의 결과는 李明博 후보의 압승이었다. 두 후보의 득표 수는 李明博 11,492,398표(48.7%) 대 鄭東泳 6,174,681표(26.1%)로 그 표차 531만표는 그 동안 대한민국에서 실시된 열 차례의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이다.
  
  이번의 정권교체에는 다른 정권교체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몇 개의 측면이 있다. 그 하나는 비단 여야간의 정권교체일 뿐 아니라 이념의 차원에서 ‘左’로부터 ‘右’로의 권력 이동이라는 측면이다. 대한민국은 1997년 대선을 통해 ‘左向左’라는 외도를 경험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으로 그 동안 ‘친북ㆍ반미’ 시비를 끊임없이 증폭시켜 왔던 ‘좌파’ 정권이 10년 만에 퇴진하고 “한 때 낙타에게 밀려서 천막을 내준” 신세였던 ‘보수ㆍ우파’ 세력이 정권을 탈환한 것이다. 이번 대선의 경우, <무소속> 李會昌 후보가 득표한 3,559,963표(15.1%)까지 가산하면 ‘우파’의 득표 수는 전체 유효 투표의 63.3%나 되는 것으로 집계된다.
  
  또 하나의 측면은 승자인 李明博 후보와 패자인 鄭東泳 후보 사이의 530만표라는 표차가 갖는 정치적 함의다. 이 엄청난 표차에는 분명히 두 개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첫째로는, 이변이 없는 한, 오는 4월9일 실시되는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도 <한나라당>의 압승이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햇볕정책’의 그늘에서 이루어진 방만한 대북 ‘퍼주기’를 포함하여, 그 동안 金大中ㆍ盧武鉉 두 ‘좌파’ 정권이 추구했던 내외정책 전반에 대한 총체적 불신임과 함께 “모든 것을 바꾸라”는 ‘변화’의 명령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당선인의 행보는 그 자신도 그 같은 ‘변화’의 요구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작년 12월20일 그의 승리를 확인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변화’를 특히 강조했다. 그는 “변화는 우리 시대의 酸素”라면서 “변화 없이는 선진화도 新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변화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면서 “국민은 이번에 이념을 버리고 실용을 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변화’와 ‘실용’이 그의 대북정책에는 과연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지를 우리는 따져 보아야 한다.
  
  2. 李明博 당선인의 ‘對北觀’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연히 李明博 당선인 자신의 ‘對北觀’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이끌 정부 출범을 3주일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서 정리된 형태와 내용으로 그의 ‘對北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우선 제기되는 의문은 그가 국정과제에서 ‘대북정책’에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입수되어 있는 자료에 의하면 그의 국정과제 어젠다에서 ‘대북정책’이 차지하는 우선순위는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2003년 출범 시점에서 盧武鉉 정권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12대 국정과제의 머리에 올려놓았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대선 공약은 1-8위가 ‘민생ㆍ경제’ 분야였고 ‘대북정책’이 포함된 ‘외교ㆍ안보’ 분야는 19-20위로 밀려나 있었다. 이것은 李明博 당선인 자신이 후보 시절부터 ‘경제’를 강조, “‘경제 대통령’으로 승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BBK 의혹을 둘러싼 攻防에 함몰되었던 이번 대선은 ‘정책 공방’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이상한 선거였다. ‘대북정책’은 선거쟁점으로도 부각되지 못 했고 바로 이 때문에 盧武鉉 대통령이 억지로 성사시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일으키고자 했던 ‘北風’은 微風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李明博 당선인은 물론 <한나라당>도 집권했을 때 시행할 ‘대북정책’에 관하여 포괄적인 ‘그림’을 내놓은 것이 없었다. 대선 기간 중 ‘대북정책’에 관하여 <한나라당>이 내놓은 주요 정책 문건은 단 3건에 불과하다. 한창 후보 경선이 진행 중이던 작년 6월 ‘정책토론회’에서 李明博 후보가 제시한 <비핵-개방-3000> 구상과 7월 당에서 작성ㆍ발표했던 <한반도 평화비전>이라는 이름의 이른바 ‘신 대북정책’, 그리고 11월8일 <재향군인회>에서의 李明博 후보의 연설문 등이다.
  
  이 가운데 국내 ‘재야 보수세력’으로부터 ‘햇볕정책의 剽竊(표절)’이라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소위 ‘신 대북정책’은 11월8일의 <향군> 초청 연설에서 이 후보 자신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그는 문제의 ‘신 대북정책’은 “<한나라당>의 공식 당론도 아니고 나의 대북정책과도 차이가 있다”고 일축했다. 이날 연설을 통해 그는 <비핵-개방-3000>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서 그가 공약하는 ‘대북정책’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그의 <비핵-개방-3000>이 “북한 정권이 아니라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며 “원칙 없이 북의 요구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스스로 전략적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이라고 강조하고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단행한다면 국제사회와 더불어 10년 내에 소득 3천 달러 수준의 경제를 만들도록 북한을 돕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비핵-개방-3000>에서 확고하게 ‘상호주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의 <비핵-개방-3000>의 알맹이는 5대 프로젝트로 이루어진 대북 경제협력 패키지다. ① 3백만 달러 이상 수출기업 100개 육성, ② 30만면의 산업인력 양성, ③ 4백억 달러 상당의 국제협력 자금 조성, ④ 新 경-의 고속도로 등 산업 인프라 구축 및 ⑤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복지 지원 등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제시한 대북 경협 패키지는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이 추진했던 대북 경협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엄격한 ‘조건부’인 것이다. 그는 북한에게 두 가지의 절대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① ‘완전한 비핵화’와 ② ‘개혁ㆍ개방’의 수용이다. 그는 “북한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없는 남북관계의 정상화는 불가능”하고 “개혁ㆍ개방을 거부하는 한 (남북경협의) 열매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대북정책’에 관한 李明博 당선인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對北觀’은 ‘통일정책’의 차원이 아니라 ‘남북대화’ 또는 ‘남북관계’의 차원에 국한하여 ‘대북정책’을 인식하고 또 이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관한 그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해프닝이 최근 발생했다. 그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정부조직 개편의 일환으로 <통일부>를 <외교통상부>로 통폐합하여 <외교통일부>로 개편하기로 한 데 대해 반대 여론이 일자 이에 대하여 그가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는 지난 1월17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통일부>를 <외교통상부>와 통합하는 것”은 “남북문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제 남북관계도 한 단계 더 올라가서 보다 적극적 경협으로 통해 통일까지 대비한다면 전략적으로 한 부처가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날 회견에서 “핵 문제가 해결되어 경협이 적극화된다면 모든 (정부) 부처가 다 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민주노동당> 심상정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이제 남북문제를 (남의) <통일부>와 (북의) <통일전선부> 둘이서 수군수군해서 밀실에서 (흥정)하는 시대는 지냈다. 전면적으로 확대하면서 (관련) 부처끼리 협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발언의 일관된 맥락은 <통일부>를 ‘통일정책’ 주무 부처라는 관점이 아니라 철저하게 ‘남북대화’ 주무 부처라는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부>를 폐지하기로 했던 <인수위>의 결정은 李明博 당선인의 인식이 <통일부>가 ‘남북대화’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데 북한의 협조(?)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부처의 의사를 무시ㆍ유린하면서 대북 ‘퍼주기’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체제홍보 도구가 되어 金正日 독재정권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급급해 왔다는 비판에 공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3. ‘대북정책’의 열쇠는 북한 ‘變數’
  
  앞으로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이 형성되는 과정에 작용할 가장 큰 ‘變數’는 당연히 북한의 동향이다. 대선 후 달포가 경과하고 새 정부 출범을 3주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이르도록 李明博 정부의 등장에 대한 북한측의 공식 반응은 없다. 1992년ㆍ1997년ㆍ2002년에 각기 실시된 제14대(당선인 金泳三)ㆍ제15대(당선인 金大中)ㆍ제16대(당선인 盧武鉉) 대통령선거 때는 다음해 1월1일 ‘신년 공동사설’에서 남한의 새 정부를 직접 거명하지 않은 채 북한의 ‘희망사항’을 표현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구사했었다. 금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나타난 북한의 행태도 여전하다. 이번 ‘신년 공동사설’에서 북한은 <한나라당>과 李明博 당선인에 대한 직접적 공격을 자제하고 작년 10월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ㆍ발표된 “<10.4 선언>의 이행”과 이에 기초한 “다방면의 남북간 교류ㆍ협력”을 강조했다.
  
  이것을 가지고 남쪽에서는 북한이 李明博 정부의 등장을 수용하고 이를 상대할 움직임의 한 수순일 수 있다는 분홍 빛 분석이 잠시 머리를 들었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6자회담> 등 현안 문제는 외면하면서, 여전히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문제,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주한미군 기지 문제, 북한군에 대한 ‘主敵’ 호칭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을 시비하고 ‘수령 결사 옹위’ㆍ‘계급적 원칙 고수’ㆍ‘반동적 사상문화 침투 분쇄’를 다짐했다. 경직성을 풀지 않겠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한 것이다. 李明博 정부 등장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 이른 시일 안에 긍정적인 것으로 선회하고 이를 통해 <남북대화>가 재개되어서 남북관계의 진전에 새로운 시동이 걸릴 전망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李明博 당선인이 강조하고 있는 ‘상호주의’의 장벽을 넘어서기가 결코 용이치 않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李明博 정부의 ‘상호주의’가 엄격한 것일지, 아니면 유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결국 “포용을 우선시하는 상호주의”보다는 “상호주의를 우선시하는 포용”의 형태가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李明博 당선인이 언급하고 있는 ‘상호주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매우 난감하게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당선인의 <비핵-개방-3000>은 북에 대한 ‘誘引劑’로 제시하고 있는 ‘5대 프로젝트’의 추진을 위한 ‘대가’로 “북한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우선 문제는 “북한 핵문제의 완전한 해결”이라는 표현이 안고 있는 개념상의 모호성이다. 지금 이 문제에 관해서는 <6자회담>의 상황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 동안 진행된 <6자회담> 과정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해결되어야 할 북핵 문제”가 사실은 분명치 않은 것이다. 그동안 일반화되어 있는 인식에 의하면 “해결되어야 할 북한 핵문제”에는 ① 寧邊 소재 핵시설과 핵물질, ② 북한이 이미 생산한 플루토늄과 이를 이용하여 이미 개발ㆍ제조한 핵무기와 2006년10월9일 실시된 핵실험 장소, ③ ‘우라늄 고농축’(HEU)에 의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람의 존재 여부 및 ④ 시리아ㆍ이란 등에 대한 핵무기 및 설비와 기술 수출 여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6자회담>은 미국조차도 이 ‘북핵 문제’의 ‘일괄 해결’은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우선 ①항에 대한 ‘不能化’와 ‘申告’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이다. ②ㆍ③ㆍ④항에 대해서는, 그 가운데서도 ②항의 ‘핵무기’ 문제는 건드리지도 못한 채,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신고’와 ‘설명’을 북한에 요구하는데 그치고 있는 형편이다. 여기서 ‘핵무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의 일방적인 ‘핵무기 보유’ 주장 때문이다. 북한이 실제로 실전용 ‘핵무기’를 제조ㆍ보유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핵실험 성공’ 주장을 근거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여 북한의 ‘기보유(?) 핵무기’ 문제는 지금의 베이징 <6자회담>이 아니라 모든 다른 ‘핵 보유국’들의 핵무기 문제와 함께 별도의 ‘국제적 핵 군축회담’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이 처럼 ‘핵무기’ 문제는 유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은 <10.3 합의>에 의거한 작년 말 시한을 넘기고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의 ‘핵무기’를 제외한 다른 ‘북핵 문제’에 관한 협상도 ‘북핵 문제’에 국한된 ‘비핵화’(denuclearization)가 아니라 ‘미국의 핵’과 맞물린 ‘비핵지대화’(nuclear free zone) 차원의 협상으로 변질시키고 이른바 ‘말 대 말’ㆍ‘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앞세워 철저히 “주고받기” 식으로 단계화함으로써 협상의 진전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있는 중이다. 북한의 속셈은 이렇게 하여 북한이 실제로 보유하는 ‘핵 능력’의 실체를 은폐하는 애매모호성(ambiguity)을 가능한 한 최후까지 유지함으로써 한국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체제유지에 필요한 물질적 양보를 갈취하는 협박 카드(예컨대 핵실험 재개 위협 등)로 핵을 꺼내 드는 ‘벼랑끝 전술’(brinkmanship)을 언제든지 반복 구사할 수 여지를 확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작년의 <2.13 합의>와 <10.3 합의>에 의거한 의무 시한인 작년 말까지 보유한 핵의 ‘不能化’와 ‘申告’를 완료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새삼 ‘2월말 時限’說이 거론되고 있지만 지금의 정황으로 볼 때 이 같은 ‘時限’說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 당선인의 ‘북핵 문제’에 관한 발언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완전한 해결’이라는 표현이 ‘북핵 문제의 진전’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의 <6자회담>의 교착 상태는 李明博 당선인이 바꾸어 말하고 있는 ‘북핵 문제의 진전’이라는 조건도 쉽사리 충족되기 어려울 것임을 예고한다. 북핵 문제의 교착상태가 이처럼 지속되는 동안 <李明博 정부>가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은 고사하고 盧武鉉 정권 말기에 벼락치기로 시작해 놓은 여러 갈래 ‘대화’들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슬그머니 계속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당선인이 또 하나의 ‘대가’로 절대화하고 있는 ‘개혁ㆍ개방’도 문제다. 그 동안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의 대북 ‘퍼주기’를 정당화시킨 논거는 “주어서 북한의 개방ㆍ개혁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개혁ㆍ개방’은 ‘中國式 개혁ㆍ개방’을 의미하는 어휘다. 그런데, ‘中國式 개혁ㆍ개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3대 요소가 있다. 그것은 ① 개인숭배의 지양, ② ‘法治’에 의한 ‘人治’의 대체, ③ 시장경제의 수용 등이다. 이 때문에 중국도 毛澤東의 死後에, 그리고 베트남도 胡志明의 死後에야 ‘개혁ㆍ개방’ 추진에 착수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이 3대 요소의 해결은 당연히 金正日 수령독재의 청산을 의미한다. 金正日의 북한에서는 원천적으로 ‘中國式 개혁ㆍ개방’의 수용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작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의 金正日이 남의 盧武鉉 대통령을 상대로 남쪽에서 북의 ‘개혁ㆍ개방’을 거론하는 데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엉뚱한 상황이 전개된 배경도 바로 이 같은 사정에 있었다. 金正日의 항의에 “눈앞이 캄캄해진” 노 대통령은 평양으로부터 서울로 귀환하는 도중에 방문한 <개성공단>에서의 연설을 통해 “적어도 정부 차원에서는 앞으로 북을 상대로 개혁ㆍ개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희한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과연 북한이 향후 남북관계 진전의 ‘대가’로 李明博 정부가 요구하는 ‘개혁ㆍ개방’ 수용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李明博 당선인의 ‘대북정책’ 관련 발언 가운데는 그 밖에도 북한측이 클레임을 걸 대목들이 허다하다. 그는 “(지금까지는) 통상 미국과 관계가 나빠지면 북한과 좋아진다고 생각해 왔지만 다음 정권은 한미관계와 한일관계가 좋아지면 남북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것은 근본적인 생각의 전환이며 북한에도 이를 알리겠다”고 말했다. 또 그는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하여 “전략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의 차원에서 거론할 것”이고 그 틀 속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및 이산가족 문제들을 풀어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당선인은 그 동안 남의 盧武鉉 정권과 북의 金正日 정권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사항’들에 대한 개별적 타당성 검토와 분류 처리 의사를 밝히면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한 ‘이산가족 재회’ 사업도 추진을 계속할 의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李明博 정부의 이 같은 ‘選別主義’를 과연 북한이 수용할 것이냐는 것이다. <李明博 정부>의 출범이 임박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북한측의 부정적 반응도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조금씩 더 노골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李明博 당선인의 ‘신년 기자회견’ 내용을 집중적으로 거론하여 비난한 1월26일자 주간 <통일신보> 기사와 “외세와의 공조”를 비난하고 <6.15 선언>을 옹호한 2월18일자 온라인 매체 <우리민족끼리> 기사가 그 사례들이다.
  
  
  4. 2008년의 남북관계 - 하나의 전망
  
  2008년 새해에도 ‘남북대화’는 일단 형식적으로는 이어지는 모습이다. 남북간에는 1월29-30일 개성에서 <남북철도협력분과위원회> 제1차 회의가, 2월4일에는 역시 개성에서 <베이징 올림픽> 남북 응원단 관련 제2차 실무접촉이, 그리고 5일에는 이 역시 개성에서 <금강산 관리위원회> 관련 제2차 실무접촉이 각기 진행되었다. 이들 회담은 모두 작년말에 합의된 일정에 따라 개최된 것이다. ‘남북대화’의 이 같은 계속은 2월24일 끝나는 盧武鉉 대통령의 잔여 임기 중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문제는 이 같은 ‘남북대화’가 2월25일에 있을 李明博 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이어질 것이냐의 여부다. 아무래도, 그 동안 평양과 서울, 개성과 금강산 및 부산과 제주도 등지에서 진행되어 온 다양한 ‘남북대화’들은 새 정부 출범과 더불어 일단 休眠(휴면) 상태로 들어갈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인수위>에서의 대통령직 인수 작업 진행 과정에서 터져 나온 ‘북한 경축 특사’의 ‘대통령 취임식’ 참가 초청론은 하나의 돌발적 해프닝이었다. 이미 원론적인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표명했던 李明博 당선인이 ‘북한 특사’의 취임식 참가에 대해서도 ‘원론적 환영’ 의사를 표명하자 이 문제는 이 당선인 캠프와 북한 당국 사이의 ‘제3국 비밀접촉’설 보도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프닝은 이 당선인 캠프와 盧武鉉 정권 사이에 일종의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던 ‘햇볕’론자들의 ‘희망사항’이었던 것으로 일단 결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남북대화’ 전반, 그리고 남북관계에 관한 북측의 입장은 새로 출범하는 李明博 정부가 이에 대한 새 정부 차원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내놓을 때 이에 대한 대응의 차원에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금년의 남북관계의 향배를 판단할 수 있는 계기는 곧 펼쳐지게 되어 있다. 금년도에 있게 될 양곡과 비료의 대북 지원 문제의 추이가 그것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합의ㆍ공표된 2000년 이후의 남북관계는 남한이 매년 상반기 중에 40만톤 전후의 양곡(주로 쌀과 옥수수)과 30만톤 전후의 비료를 북한에 제공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 <통일부> 집계에 의하면 2000년부터 2006년 상반기까지 정부 차원에서 북에 제공된 양곡은 ‘차관’ 방식으로 제공된 2백만톤의 쌀과 20만톤의 옥수수 및 ‘무상’으로 제공된 10만톤의 쌀 등 도합 230만톤이며 비료는 정부 차원으로 제공된 221.5만톤과 민간 차원으로 제공된 4만톤 등 도합 225.5만톤이다.
  
  작년의 경우, 북한은 8월 평양을 중심으로 큰 홍수가 발생하여 8월말로 예정했던 <남북정상회담>을 10월초로 연기해야만 했었다. 이 비 피해로 인하여 북한의 작년 秋穀 농사는 큰 타격을 받아서 금년도의 양곡 부족량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북한은 이미 작년에 있었던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를 통해 이미 금년도분 쌀과 비료 지원을 요청해 놓고 있는 상황이다. 예년 같으면 북한이 새해 1-2월 사이에 적절한 ‘남북대화’(예컨대, <남북총리회담>이나 <남북장관회담> 또는 <남북적십자회담> 등) 통로를 통하여 양곡과 비료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금년 초 관심의 대상은 북한이 과연 <李明博 정부>를 상대로 그 같은 요청을 공식적으로 제기할 것이냐의 여부다. 그 같은 요청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대응이 李明博 정부의 몫이 되었다. 새 정부는 우선 양곡과 비료의 대북지원 여부와 함께 그 양을 결정해야 하며 지원 방식도 盧武鉉 정권 때의 방식을 답습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을 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李明博 당선인이 주목을 요하는 ‘語錄’을 남기고 있다. 그는 2월1일자 <동아일보>ㆍ<아사히신문>ㆍ<월스트리트저널> ‘공동 기자회견’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북한을 인도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이상적인 것은 북한 ‘정권’이 아니라 ‘주민’에게 직접 지원하는 것”이라고 전달 방법에 이의를 제기했고 “북한 주민에게 급한 것은 빵이지만 먹는 문제를 도와주면서 인권 문제를 등한시 할 수는 없다”는 입장도 밝혔다. “‘정권’과 ‘주민’을 현실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면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전략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가치 차원에서 거론하겠다”는 ‘설명’을 추가하기는 했지만 그의 이날 발언은 어쩌면, 어떻게 할 것인지 또는 과연 그렇게 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그의 정부가 대북 식량 및 비료 지원 문제에 관하여 ‘전달’ 과정의 ‘투명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과 함께 북한 인권 문제와 ‘연계’시키는 문제를 고려할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새 정부, 남북관계 ‘甲ㆍ乙’을 바꾼다”는 제목의 2월5일자 <중앙일보> 8면 머리기사 내용도 이 같은 이 당선인의 ‘語錄’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인수위>, 앞으론 조건부 대북지원 ․․․․ 주도권 확보”라는 副題를 달고 있는 이 기사는 <인수위>의 외교통일분과위원들이 “이 당선인의 머릿속에는 퍼주면서도 북한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과거 남북관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李明博 정부가, 최소한 출범 벽두에는, 전반적인 남북관계는 물론 양곡ㆍ비료 등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도 종래와는 다른 ‘행태’를 보여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7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금액이 집행된 ‘남북협력기금’ 운영 실태에 대한 李明博 당선인의 곱지 않은 시선과도 연계되어 있다. 그 동안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에서 사실상 “묻지 마” 식 집행으로 聖域化(성역화)되어 온 <통일부>의 <남북협력기금> 운영 실태에 대해서는 지금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 중에 있는 것으로 보도되어 있다. 盧武鉉 정권의 임기가 남아 있는 동안에 착수된 이번 감사는 아직은 <협력기금> 전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극히 부분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남북협력기금’ 운영 실태에 관한 <감사원>의 부분 감사가 전면 감사로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결국, ‘인도적 대북 지원단체’들에 대한 보조금은 물론 당국 차원에 대한 <협력기금> 지원 요건이 지금보다 훨씬 까다로워지리라는 것은 분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실수요자’에 대한 ‘전달’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건’이 괄목할 정도로 강화될 뿐 아니라 제공되는 식량과 비료의 양도 축소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보도마저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북한이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는 것이다. 북한의 반발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북한의 반발이 강경 일변도가 될 수 있을 것인지도 역시 의문이다. 북한이 강경하게 반발한다고 해서 지금 처해 있는 형편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중단하고 남으로부터의 양곡 및 비료 지원을 사절하는데까지 나갈 수 있는 것이냐는 데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 동안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의 ‘햇볕논자’들은 “대북 경제지원은 북의 대남 의존도를 높여 줄 것”이라는 이론으로 대북 ‘퍼주기’를 옹호해 왔다. 만약 그 같은 논리에 정당성이 있는 것이라면 대북 ‘퍼주기’가 8년여에 걸쳐 진행된 지금의 시점이면 북한의 남한으로부터의 ‘離乳(이유)’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대남 의존도’는 제고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강화되는 남측의 조건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라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인수위>로부터 들리고 있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6자회담>은 분명히 2008년도의 남북관계를 좌우할 중요 ‘變數’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최근의 진전 상황은 <6자회담>의 前途가 밝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9.19 공동선언>은 물론 <2.13 합의>와 <10.3 합의>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시원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 없다. 북한 보유 ‘핵 시설’과 ‘핵 물질’ 및 ‘핵 프로그람’의 ‘申告’는 작년 12월31일의 時限을 달포 가까이 넘기고 있을 뿐 아니라 寧邊 소재 ‘핵 시설’과 ‘핵 물질’에 대한 ‘不能化’도 아직 완결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는, 특히 대선 정국 속의 미국 정가에서 對北 强硬論의 대두를 자극하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만약 경화되는 워싱턴의 대북 자세가 李明博 당선인의 ‘한-미’ㆍ‘한-일’ 관계 ‘강화’론으로 탄력을 받아 한-미 양국, 또는 한-미-일 3국 共助에 의한 압박 위주의 대북 전략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면 한반도를 중심한 동북아에서는 새로운 냉전 기류가 조성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남북관계의 경색은 보다 깊어지고 장기화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워싱턴에서는 그 반대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6자회담>의 파행이 혹시라도 북한에 의한 두 번째 ‘핵실험’을 유발하는 것이 아닐까 겁을 먹고 있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요구조건을 더욱 완화시키면서 ‘申告’ 문제의 벽을 넘으려고 진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2년부터 <6자회담>의 장기화를 초래한 주요 요인인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에 대해 “북한이 아직 능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하는가 하면 ‘申告’할 플루토늄의 양에 대해서도 종래의 50kg 주장을 접고 ‘30~40kg’說을 흘리는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의 최근의 언동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소식이 최근 평양과 베이징에서 들려오고 있다. 胡錦濤(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특사 王家瑞(왕자루이)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평양방문 소식이다. 평양에서 왕자루이를 접견한 金正日은 “중국을 절대로 배신하거나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소식이다. 중국의 官營 <新華通信>은 金正日이 <6자회담>의 교착 상태를 걱정하는 왕자루이에게 “현재 출현한 곤란은 일시적인 것이며 극복 가능한 것'이라면서 '회담은 장애를 극복하고 앞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金正日 역시 <6자회담>이 지금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는 ‘申告’ 문제로 난파하도록 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李明博 정부에게 오히려 보다 더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종용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왕자루이에게 했다고 <新華通信>이 전하는 金正日의 ‘말’은 중국을 통해 미국에게 사탕을 먹여서 미국으로 하여금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을 견제하게 하는 다단계 포석으로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적어도 2008년의 남북관계와 이를 축으로 하는 한반도 내외 정세가 “주면 바뀐다”는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의 ‘對北觀’을 “핵을 버려야 준다”로 바꾸겠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李明博 정부의 ‘대북정책’이 종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懷妊(회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애매한 상황은 미국의 대선 기간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북핵 문제가 선거쟁점으로 ‘뜨거운 감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의 북핵 대책은 남은 임기 중 핵문제 해결보다는 <6자회담>의 난파 없는 관리를 중시하는 쪽으로 초점이 바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짚어두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금의 한반도 내외 정세는 북한의 金正日에게도 그렇게 한가한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이 2002년7월1일자로 실시한 ‘경제관리 개선조치’는, 남쪽 ‘햇볕’론자들의 열띤 ‘변론’과 ‘옹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제난국을 해결하는 ‘魔術 지팡이’가 되는데 이미 실패했다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의 경제난은 개선되지도 않았고, 개선될 기미도 없으며, 개선될 전망도 없다. ‘先軍政治’라는 이름의 북한판 군사계엄체제는 여전히 ‘개혁ㆍ개방’을 거부하면서 그 延命을 중국과 남한으로부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이 같은 북한이 李明博 정부가 대북정책에 가미하려 하는 ‘변화’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냐가 의문이다.
  
  이 같은 사정과 관련하여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지난 1월11일자에 실린 “공화국은 우리 인민의 자주적 삶과 행복의 요람”이라는 제목의 논설 내용이 흥미롭다. 이 논설은 “미국에서 북한 붕괴론이 번지던 때” 金正日이 했다는 “미국 등에서 제기되는 공화국 붕괴론은 오판”이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金正日은 “우리가 저들의 군사적 압력과 공갈, 경제봉쇄로 얼마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가 나온 것만 보아도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얼마나 오판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면서 “미국은 아직도 상대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도대체 <노동신문>이 무엇 때문에 이 시점에서 金正日의 그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북한 붕괴론’은 어느 곳에서도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결국, 문제의 <노동신문> 논설은 북한의 권력 핵심부에서 밖에서 알지 못하는 ‘위기론’이 머리를 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과거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나 毛澤東 시대의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관영 선전기관의 보도 내용은 흔히 “逆으로 읽는 것이 진실”이라는 격언을 만들어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북한은 이번 ‘신년 공동사설’에서도 한편으로는 ‘강성 경제대국 건설’을 운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 시기 인민들의 식량 문제,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절박하고 중요한 과업은 없다”는 이율배반의 표현을 등장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의 지속되고 있는 열악한 경제형편은 이미 내부적으로 ‘체제위기’론을 새로이 대두시켜 지도부에게 전략 차원이 아니라면 전술 차원에서라도 보다 유연한 자세를 강요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남쪽에서의 李明博 정부의 등장으로 새 판이 짜여 지게 되는 2008년의 남북관계는 역시 ‘시간과의 싸움’이다. 기본적으로 2008년의 남북관계는 金正日의 북한과 남쪽에서 10년간의 ‘좌파 천하’를 끝장내고 권력을 탈환한 ‘보수ㆍ우파’ 정부 사이에 ‘멍석’을 차지하기 위한 ‘氣 싸움’의 무대가 되고 있다. 문제는 어느 쪽이 서두를 것이냐이다.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2008년에 전개될 이 ‘氣 싸움’에서 이기는 쪽에서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에서 살펴보았듯이 2월1일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李明博 당선인이 “서두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밝힌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월6일 <인수위>가 당선인에게 보고한 <李明博 정부의 국정과제>도 대북정책에 관한 한 그 같은 틀을 유지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인수위>가 분류한 ‘5대 국정지표’ㆍ‘192개 국정과제’에는 ‘글로벌 코리아’라는 ‘국정지표’ 안에 도합 9개의 대북정책 관련 ‘국정과제’가 제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대북정책에 직접 해당하는 ‘과제’는 ‘핵심과제’로 분류된 ①북핵 폐기의 우선적 해결ㆍ②<비핵-개방-3000> 구상 추진ㆍ④남북간 인도적 문제의 해결과 ‘중점과제’로 분류된 ①‘나들섬’ 구상 추진ㆍ③비무장지대 평화적 이용ㆍ⑩북한 군사위협 대비태세 강화 등이다. 그 밖의 관련 ‘과제’로는 ③한-미 관계의 창조적 발전ㆍ⑥국방개혁 2020 보완 추진이 ‘핵심 과제’로, ⑪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의 적정성 평가 및 보완이 ‘중점 과제’로 제시되어 있다. [동그라미 번호는 ‘핵심’ㆍ‘중점’ 별로 제시된 순위]
  
  ‘李明博 정부의 국정과제’에서 2008년도 남북관계에서 가장 먼저 이슈化 될 식량ㆍ비료 대북지원 문제가 ‘핵심과제’의 “④남북간 인도적 문제의 해결” 과제로 包裝되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더구나 비록 중요도에서 한 발 뒤지는 ‘중점과제’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⑩북한 군사위협 대비태세 강화”와 “⑪전작권 전환의 적정성 평과와 보완”이 ‘과제’로 제시되었다는 것도 그 의미를 읽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이는 李明博 정부가 남북간 군축 및 군비통제의 차원에서 비단 ‘북핵 문제’뿐 아니라 화학ㆍ생물 무기 등 다른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무기 체계도 문제 삼을 것이며 盧武鉉 정권이 2012년으로 못 박아 놓은 “전작권 전환” 시기도 실질적으로는 “북한 핵문제 해결”에 연계시킬 생각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 같은 ‘과제’의 구성에는, ‘국정과제’의 차원에서도, ‘대북정책’은 “서두르기보다 판을 새로이 짜겠다”는 당선인의 意中이 녹아 있음을 읽게 해 주는 것이다.
  
  
  IV. 맺는 말 - 몇 가지 懸案과 代案
  
  2008년 중 남북관계의 이 같은 유동적 상황은 李明博 정부의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대북정책’의 차원에서, 몇 가지 현안의 제기와 함께 이에 대한 대책 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북핵 문제’는 ‘우선 해결’ 원칙을 견지하되 한-미를 축으로 하는 한-미-일 3角共助의 틀 속에서 중국의 협력을 얻어서 해결을 모색하겠다는 것, 남북관계에서는 서두르지 않는 가운데 ‘상호주의’를 되살리겠다는 것, 대북 인도적 지원에도 북한 인권이나 국군포로 및 납북인사 문제 등과 연계시키는 ‘상호주의’ 적용을 고려하겠다는 것, 그리고 ‘남북대화’는 ‘甲’의 입장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주도하겠다는 것 등의 입장변화가 李明博 당선인과 <인수위> 차원에서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에 추가하여 고려되어야 할 문제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첫 번째로는 ‘대북정책’의 核이면서도 지금은 亡失되어 있는 ‘통일정책’을 확실하게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정책’에서 중요한 사항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통일’의 ‘목표’와 ‘방법’ 및 ‘과정’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의 ‘목표’에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통일국가’의 내치ㆍ외교시책 차원뿐 아니라 체제에 관한 ‘미래상’이 분명히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갖게 하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긍지’에 기초하여 ‘비전’을 가지고 자라게 하며 독재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북한 동포들에게도 ‘희망’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통일정책’을 각급 학교의 ‘교과서’를 통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교육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지난 60년간 남북간에는 死活을 다투는 ‘체제경쟁’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대한민국이 이 ‘체제경쟁’의 당당한 勝者라는 사실을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그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통일’의 ‘꿈’을 가꾸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정부 안에는 조사ㆍ연구ㆍ교육ㆍ홍보 등의 차원에서 ‘통일정책’을 전담하는 <통일부>를 존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통일정책’과 차별화 하여 별도로 관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대화’ 관련 업무를 <통일부>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남북대화’ 추진 업무를 <외교통상부> 쪽으로 이관하는 것은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과거 兩獨 분단 시기 西獨이 채택했던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西獨은 ‘통일정책’ 관련 업무는 우리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내독관계성>(<전독성>의 후신)으로 하여금 전담하게 하고 東獨과의 ‘협상’은 <내각수상실>에 전담 <무임소 국무위원>을 두고 그로 하여금 사안 별로 관련부처 관계관을 모아서 태스크포스 식 ‘협상전담반’을 구성하여 추진하게 했었다. ‘협상’에서 합의되는 사항의 이행은 관계 부처로 하여금 東獨의 관련 부처와 쌍무적으로 추진하도록 했었다.
  
  우리의 경우는 ‘남북대화’ 업무를 <외교통상부>로 이관하기보다는 <인수위>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에 반영된 <무임소 특임장관>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통일부>의 <남북회담본부>를 특정 <무임소 특임장관>이 전담 지휘하도록 편제를 조정하고 적임자를 <특임장관>에 임명하여, ‘내각책임제’ 국가인 西獨과는 달리, <특임장관>으로 하여금 대통령의 직접 지휘를 받아 ‘남북대화’ 업무를 전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안 별 관련부처와 함께 <통일부>와 <외교통상부>도 ‘대표단’ 구성은 물론 대화 전략ㆍ전술 협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두 번째로는 왜곡되어 있는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남북관계의 틀을 왜곡시키고 있는 원인은 <햇볕정책>과 그 결정체인 <6.15 남북공동선언>에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해악은 우선 그 제2항이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내용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선언의 해악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선언의 더 큰 해악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여 남북관계 기본 틀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동안 <6.15 선언>으로 인하여 남한사회에서는 주류여야 할 ‘保守ㆍ右翼’ 세력이 ‘변방 세력’으로 밀려나고 태생적으로 비주류인 ‘親北ㆍ聯共’ 세력이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여 “북이 아니라 남의 옷을 벗기는” 비정상적 상황의 전개가 강요되었다. 그 결과 金正日의 북한과 ‘보수ㆍ우파’ 세력을 배제한 남한의 ‘친북ㆍ연공’ 세력 사이의 ‘야합’이 ‘민족화해’로 둔갑했고 이들은 상호 제휴한 가운데 허구적인 ‘민족공조’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남북관계의 틀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왔다.
  
  작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남의 盧武鉉과 북의 金正日은 <6.15 선언>의 “정신을 재확인”할 뿐 아니라 이를 “고수하고 적극 구현”하고 “이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ㆍ발전”시키며 그 같은 ‘의지’를 ‘반영’하여 “6월15일을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하는 합의했다. 이어서 11월의 <총리회담>에서남북 쌍방은 ① 매년 6월15일을 ‘민족 공동의 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내부절차와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② 2008년 <6.15 선언> 8주년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당국과 민간 참여 하에 서울에서 개최하며 ③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각기 법률ㆍ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한다는 합의를 추가적으로 생산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와 마찬가지로 盧武鉉 정권 안팎의 ‘햇볕’론자들 사이에서는 문제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대한 “국회 비준”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盧武鉉 정권은 10월30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는 절차로 이를 ‘발효’시키는 절차를 가름했다.
  
  이제 이 같은 무리한 ‘합의사항’들을 처리하는 것은 李明博 정부의 몫이다. 李明博 정부는 “남북관계의 비정상 상태를 정상화 한다”는 차원에서 <6.15 공동선언> 문제를 근본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절대적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우선 시급한 문제는 <6.15 선언> 제2항이 대한민국 헌법에 합치되느냐의 여부를 규명하는 것이다. 새 정부는 당연히 문제의 제2항의 헌법 합치 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헌재)>의 심판을 청구함으로써 <헌재>의 판단을 통하여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헌재>가 ‘違憲’ 판정을 할 경우에는 <6.15 선언>은 당연히 무효가 되어서 폐기되는 것이다.
  
  <6.15 선언>을 폐기하는 것이 <남북대화>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남북관계의 왜곡된 기본 틀을 바로 잡는 길은 <6.15 선언>을 폐기하고 1992년 남북이 합의하여 발효시켰던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당시 남북 쌍방이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어서 3건의 분야별 <부속합의서>를 생산하고 이에 따라 5개의 ‘공동위원회’와 ‘판문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운영에 착수하기까지 했던 사실을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남북기본합의서>는, 체제와 내용면에서, 남북간에 언젠가는 정식으로 체결되어야 할 ‘평화협정’에서 고려해야 할 모든 요소들을 망라하여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정상적인 ‘남북대화’는 <남북기본합의서> 체제로 복귀하기만 하면 순탄스럽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정상적인 ‘대북정책’ 추진을 뒷받침하는 것이 가능해 질 수 있게 국내의 지원체제를 정상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 정부 출범 시점에서 정부 안팎의 대북정책 수행체제의 전면적 人的 ‘물갈이’가 필요하다. 남북대화의 영역에서 주로 ‘386’ 출신의 ‘친북ㆍ좌파’ 인맥이 판을 치는 ‘秘線’ 활동은 억제되어야 하고 남북 간의 통신선(lines of communication)은 모두 공식 통로로 통합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盧武鉉 정권 하에서 국가는 물론 공공기관과 단체들을 대거 침투ㆍ점거하고 있는 ‘친북ㆍ좌파’ 인맥에 대한 청소가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북정책의 모든 영역이 제반 헌법적 가치의 수호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人的 자원에 의하여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라는 이름의 “평화통일정책 수립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구”(헌법 제92조)의 구성과 운영을 정상화하는 일이다. 1980년대 초 <평통>이 창설될 때 당초의 구상은 이 헌법기관을 200명 내외의 ‘전문가’들로 구성하여 명실겸전하게 ‘통일정책’에 관한 ‘자문기구’로 역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구상은 1981년1월 全斗煥의 대통령(제12대) 당선을 계기로 변질되었다. ‘간선제’로 대통령에 당선된 全斗煥이 그를 당선시킨 ‘선거인단’을 ‘禮遇’하기 위하여 <평통>을 ‘자문기구’라는 이름의 ‘군중기구’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평통>은 ‘대통령 간선제’ 때는 ‘선거인단’을 위주로, 그리고 1987년의 ‘직선제’ 개헌 이후에는 ‘지역별ㆍ직능별’ 선발 방식에 의거하여, ‘전문성’을 도외시한 ‘군중조직’으로 구성ㆍ운영되었다.
  
  그 과정에서 <평통>은 역대 정권이 국내정치적 목적 위주로 대북정책을 운영할 때마다 ‘박수’로 이를 뒷받침해 주는 어용 조직으로 변질되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대 정권의 집권정당이 주요 선거 때마다 득표 조직으로 이를 활용하는가 하면 특히 해외 교포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을 제공하는 부작용을 일으켜 왔었다. 게다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金大中ㆍ盧武鉉 정권은 이 기구를 ‘친북ㆍ좌파’ 성향의 인물 위주로 재구성함으로써 남한사회의 ‘左向左’를 위한 人的 ‘물갈이’를 견인하면서 ‘햇볕정책’의 전위 조직으로 이를 이용해 왔다. 이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는 이제 종지부가 찍혀져야 한다. 새 정부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법>을 개정하여 <평통>을 당초의 구상대로 200명 내외의 ‘전문가’들로 구성ㆍ운영함으로써 이 기구가 ‘민간 차원’에서 대통령의 ‘대북정책’ 수립 및 추진에 필요한 전문적 ‘자문’과 ‘조언’을 제공하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게 해야 한다.
  
  네 번째로는 <국가정보원(국정원)>의 기능과 역할을 재정비해야 한다. 그 동안 金大中ㆍ盧武鉉 정권 때처럼 <국정원>이 공개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통일부>와 함께 <남북대화>를 견인해 온 쌍두마차 체제는 즉각 해체되어야 한다. <국정원>은, 적어도 남북관계에 근본적 변화가 생길 때까지는, 북한을 ‘假想 敵國’으로 하는 국가안보 ‘최후의 불침번’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국정원>이 ‘찢어진 自鳴鼓’가 되어서 <남북대화>의 ‘연락병’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국가안보의 기본을 파괴ㆍ유린하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국정원>의 본연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먼저, 대북 정보와 공작 수행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정원>이 하는 일은 ‘대북정책’의 제3의 영역이다. ‘통일정책’이 북한의 ‘變化’를 통한 대한민국 체제로의 수렴통일이라는 ‘현상타파’를 추구하는 정책 영역이고 ‘남북대화’가 분단된 남북관계의 평화적 관리라는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정책 영역인 반면 <국정원>이 맡는 역할은 북한의 동정을 면밀하게 감시하면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북한의 ‘變化’를 자극하고 촉진시키는 ‘공작’을 수행하는 일이다. ‘남북대화’에 <국정원>이 관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철저하게 신분을 은폐하는 지하화된 ‘黑色’ 활동이 되어야 한다. <국정원> 기능 재정비의 요체는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때의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止揚한다”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對北 정보 및 공작 위주의 전문적인 정보기관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對北정책’의 정상적 추진을 위하여 새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들을 정비하는 일이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교과서가, 그것도 국사뿐이 아니라 도덕과 사회는 물론 어떤 경우에는 수학 교과서마저도, 대한민국의 탄생 경위를 폄훼ㆍ비하하고 대한민국의 건국ㆍ호국ㆍ산업화ㆍ민주화 과정을 왜곡하여 대한민국을 부끄럽게 느끼게 하는 반면, 터무니없게도, 북한의 역사를 긍정적 시각으로 수용하게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6.25는 북침”이고 “우리의 主敵은 미국”이며 “북한의 핵이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게 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운위한다는 것은 緣木求魚(연목구어)일 뿐이다.
  
  이 같은 교과서로 학생들을 교육하는 지금의 교육 상황은 이른바 <전국교원노동조합(전교조)>라는 ‘친북ㆍ좌파’ 조직이 저질러 놓은 일이다. 이번 대선에서의 참패를 딛고 기사회생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소집된 <민주노동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비상집행기구가 내걸었던 ‘從北主義’ 청산이 부결되는 것은 고사하고 바로 그 대회장에 “우리는 더 親北해야 한다”는 플라카드가 공공연히 걸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편향된 이념으로 왜곡된 내용의 교과서를 가지고 그 같은 교과서를 만들어 낸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세대가 펼쳐 내는 현실 세계의 단면이다. 李明博 정부는 교과서와 <전교조>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끝]
[ 2008-03-30, 20:1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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