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에 한국군 장교단의 死生觀을 묻는다!
노무현의 韓美연합사 해체 공작에 반대한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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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建軍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국군은 建國의 초석, 護國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였다. 국군은 앞으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뒷받침해야 한다. 국군 장교단이야말로 지난 60년간 가장 많은 피, 땀, 눈물을 흘린 직업群이다. 군인은 국가가 부를 때 死地로 달려간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한 남다른 철학이 있어야 한다. 한 미국 군인의 예를 든다.
  
   윌리엄 C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월남전 때 미군 사령관으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 뒤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몇 년 전 사망했다. 그는 '한 군인의 보고서'(A Soldier Reports)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정치와 언론이 월남전을 망쳤다고 분개하는 한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미군이 戰場에선 지지 않았는데 언론의 反戰보도와 여론의 변화, 여기에 영향을 받은 미국 국가 지도부가 전쟁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졌다고 말한다.
  
   1968년 베트콩의 舊正공세는 그들의 大敗로 끝났지만 이것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미국의 안방 여론을 反戰으로 움직였다. 존슨 미국 대통령부터 전쟁의지를 상실하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공산당측과 협상을 제의했던 것이다. 자유월남이 망한 것은 그 7년 뒤였다. 웨스트모어랜드(별명이 웨스티) 장군은 이 책에서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가장 공정한 보도를 했다고 평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군사문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생긴다.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1958년 웨스티는 미국의 정예부대인 101 공정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켄터키주 포트캠벨에 본부가 있었다. 부임한 직후 낙하훈련이 있었다. 낙하지점에 나간 장교가 풍향과 풍속을 잰 다음 녹색 연기를 뿜었다. 낙하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포함한 502 연대 장병들이 낙하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着地(착지)하니 예상하지 못했던 강풍이 낙하산을 몰고 갔다. 그는 수백 미터를 끌려가다가 다른 장병들이 낙하산을 주저앉혀 다치지 않았다. 이 强風에 걸려 일곱 병사들이 사망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악조건을 이유로 훈련을 중단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전쟁은 원래가 악조건하에서 치러지는 것이므로. 다음날 그는 훈련 강행을 명령했다. 다만 낙하훈련의 경우엔 자신이 먼저 뛰어내려 바람상태를 점검하기로 했다. 다른 사병들은 대기하도록 한 뒤 사단장이 혼자서 뛰어내렸다. 전날처럼 강풍이 불어 웨스트모어랜드는 착지한 뒤 한참 끌려가다가 설 수 있었다. 그는 낙하훈련을 중단시키고 육상훈련만 하도록 했다. 이 사고를 분석한 미군은 着地한 뒤 낙하산을 빨리 분리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 일곱 명이 낙하훈련중 죽는 사고가 한국군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단장은 조사받기에 바빴을 것이고, 훈련은 물론 중단되었을 것이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단장은 이 사고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고 판정된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피크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수년 전 이라크에서 미국의 여자 장교가 戰死했다. 미 육사 출신이었다. 그녀는 보병부대를 지휘했다. 이스라엘에서 여자 장교가 戰車 교육부대에서 교관으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軍人정신은 국가에 대한 희생과 충성을 핵심으로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死生觀은 군대의 가장 중요한 戰力이다. 북한군은 몇 번의 간첩선과 잠수정 침투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잡히기 직전에 자폭, 자살하는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의 가미가제 특공작전을 연상시킨다. 물론 병사들이 굶주리는 북한군의 일반적 士氣는 높지 않다.
  
   한국군 장교단은 좌파정권이 韓美동맹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고 전쟁이 났을 때 한국군의 사상률을 높이며 勝戰의 확률을 낮추는 韓美연합사 해체 공작을 강행해도 이에 순응했다. 연합사 해체 주장에 대해서 그렇게 반대했던 국군이, 좌파 대통령의 지시 한 마디에 그 전의 소신을 간단하게 접어버렸다. 자리를 걸고 참말을 하는 장교가 한 명도 없었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감옥에 갈 일도 아니었다. 국가와 국군을 위한 충정의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던 것인가?
  
   한국군 장교단의 死生觀을 묻고 싶다. 일본의 武士道를 定義할 때 '죽는 것에 대한 自覺'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군인, 특히 장교의 직무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自問自答해볼 일이다. 한국군이 교과서로 삼아야 할 白善燁 장군의 군인정신에 대한 자료를 아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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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 1950년 여름 多富洞 전투
   (월간조선)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기리니끼니 팀워크가 중요해요』
  
  
   한국 축구 대표팀이 폴란드를 상대로 얻은 월드컵 첫승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6월8일 오전 7시, 白善燁(백선엽ㆍ83) 장군과 기자는 대구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多富洞(다부동)이라 불리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6·25 당시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국군 제1사단을 지휘했던 白장군은 이제 팔순 노인이 됐다. 機內(기내)에서 白장군은 6월 초 일본에서 출판된 「指揮官(지휘관)의 조건」(草思社 刊)이라는 한국전 당시 지휘관의 경험을 요약한 책을 보여줬다.
  
   『축구에서는 개인기 못지않게 팀워크가 중요하잖아요. 전쟁에서도 기습은 두세 번 이상 써먹을 수가 없거든. 기리니끼니 팀워크가 중요해요』
  
   평안남도 江西 출신의 그가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말을 이어갔다.
  
   『戰場(전장)에서 학벌은 필요 없습니다. 전장에서는 作戰를 잘하는 지휘관만 중요할 뿐이지요. 유능한 지휘관은 지형을 얼핏 보고도 공격에 유리한지 방어에 유리한지 直觀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km, 尙州와 安東에서 大邱로 통하는 5번과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 이르는 908번 지방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지점이다.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가난한 삶이 싫어 사는 곳 이름마저 多富洞이라고 불렀다.
  
   多富洞 전적기념관 앞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遊鶴山(유학산?39m)을 바라보던 老兵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사단사령부가 있었던 五常中學校로 가자』고 했다. 새파란 하늘은 가을날처럼 높았고, 당시 포격으로 풀 한 포기 없었을 민둥산은 산림으로 울창해져 있었다.
  
  
   『美, 洛東江을 전략교두보로 인식』
  
  
   1950년 8월 부산-낙동강 橋頭堡(교두보)는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인민군들의 공세로 매일 좁아지고 있었다. 인구 30만 명이던 대구는 피란민이 몰려들어 70만 명으로 불었다. 8월에 접어들자 대구 북쪽으로 10km까지 남하한 전선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고 밤에는 하늘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했다.
  
   낙동강 방어선은 부산을 기지로 총반격을 위한 교두보라는 의미에서 「부산 교두보」, 또 美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설정한 최후 방어선이라는 의미에서 「워커 라인」이라고도 불렀다. 인민군이 먼저 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하느냐, 그전에 유엔군이 병력과 물자를 충분히 투입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느냐 하는 양측의 生死가 걸린 싸움이었다.
  
   金點坤(김점곤?9겿塵?П맙坪? 당시 12연대장은 多富洞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의 전략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왜관-다부동 전선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 4개 사단의 主攻線(주공선)이었고 국군에게도 主저항선이며 최종적인 固守(고수) 방어선이었어요. 미국 사람들은 한국전쟁 초기에 이미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대구 지역을 釜山에 대한 전략적 교두보로 생각했었습니다』
  
   사단병력이라고 해봐야 7000여 명뿐인 1사단은 방어 전면에 종잇장처럼 얇은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敵은 2만1500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화기도 670문 對 172문으로 성능과 구경면에서 1사단보다 10배나 강했다.
  
   8월4일 오전 7시, 金點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 방어지역인 洛井里(낙정리) 일대에서 多富洞 전투의 첫 포성이 울렸다. 강 건너에서 敵이 쏜 45mm 對전차포가 연대장의 0.25t 지프 옆에 떨어져 차가 도랑에 빠졌다. 이것을 신호로 敵의 사격이 對岸(대안)에 집중됐다.
  
   한 달여 동안 후퇴만 해 온 국군을 얕잡아 본 인민군들은 강이라는 「하천 장애물」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敵이 아군 진지 앞의 깊은 수심에 당황해 전진속도가 느려졌다.
  
   이때 예광탄 한 발이 적진의 하늘을 날았다. 이 예광탄을 신호로 아군의 일제 사격이 개시됐다. 순식간에 낙동강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후속 공격을 감행하는 적은 아군의 집중포화에 산산이 흩어졌다. 물 속의 적병들은 火網(화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水葬(수장)되고 말았다.
  
   용케 개인호로 기어오른 敵은 아군의 야전삽과 총검 세례를 받았다. 개전 이래 이런 통쾌한 싸움을 해보지 못했던 국군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해 기관총 총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쏘아댔다. 그럼에도 적은 가혹한 督戰(독전)으로 후속 공격조를 계속 강물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네이팜(Napalm)탄을 실은 아군기 F-80(슈팅 스타) 두 대가 출격했다. 아군의 對空 포판 신호와 예광탄 신호를 따라 도강하는 敵을 향해 네이팜탄을 떨구었다. 敵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고 말았다.
  
  
   「겨울날 함박눈이 내리듯」
  
  
   崔榮喜(최영희?1곺?국방부 장관) 대령의 15연대는 남쪽으로부터 328고지, 369고지 등 낙동강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강변의 주요한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李正實(이정실?9겴갱?8기 특3) 대위는 15연대 1대대 3중대장으로 328고지 전투를 치렀다. 그는 평북 龍川(용천) 출신으로 北京大 경제학부 2학년을 마치고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당했던 경력이 있었다.
  
   8월15일 새벽, 그의 부대는 328고지에 대한 3차 공격을 개시했다. 李대위의 3중대는 대대 선두에서 공격했다. 彼我(피아)간에 총탄을 어찌나 쏘아댔던지 「겨울날 함박눈이 내리듯」 돌격하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솔잎이 소복소복 내렸다. 頂上으로 돌격하던 李대위는 총을 분실한 병사에게 칼빈 소총을 쥐어주고 자신은 권총을 빼어들고 뛰었다.
  
   7~8부 능선에 오르자 敵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몸을 은폐하고 있자니 전전날 공격에서 죽은 동료들의 屍身에서 나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전 11시경, 高地 정상에 오르자 敵은 이미 고지에 각종 장비를 버려두고 도주한 후였다.
  
   다음 순간, 아군 사병 넷이 壕(호) 속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을 겨누는 쪽을 바라보니 30~40m 떨어진 맞은편에 인민군 기관총 사수가 체코제 수냉식 기관총을 겨누고 서 있었다. 그는 「저거 일 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군 병사들은 총만 겨누고 있지 머리는 땅에 처박고 잠들어 있었다.
  
   딱히 은폐물이 없어 조그만 바위에 몸을 숙이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병사의 총을 집어들었다. 그래도 그 병사는 제 총이 없어지는 줄도 몰랐다. 그 옆에 인민군 병사 두 명이 더 보였다. 순간 「저놈들을 쏘아야 내가 산다」는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다. 바위에 의지해 왼쪽과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쏘니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가 『악! 악!』 하고 쓰러졌다.
  
   그 소리에 그 옆의 인민군 둘은 어디서 총알이 날아왔는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인민군 중 하나가 李대위를 알아차리고 총을 겨눈 찰나, 李대위는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악~』 하며 더 큰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는데도 아군 병사들은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는 『전장에서 총성에 대한 반응은 전투를 치를수록 무뎌진다』고 했다.
  
  
   죽은 敵兵과 백병전
  
  
   무전병과 연락병도 물론 그를 따라올라왔겠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李대위가 「앉아 쏴」 자세에서 네 번째 인민군을 쏘려고 보니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시커멓고 덩치가 큰 인민군이 어느새 李대위 바로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인민군이 사격을 하면서 달려왔겠지만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무의식 상태여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소리는 긴장상태에서는 들리지 않거든요』
  
   둘은 총을 든 채로 작은 바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방의 총을 쳐내면서 서로 쓰러뜨리기 위해 몸이 엉켰다.
  
   『뇌에서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내가 언제 총을 놓았는지도 기억이 없어요』
  
   둘은 경사면을 따라 서너 차례 구르며 엎치락뒤치락했다.
  
   『내가 살려고 그랬던지 인민군이 밑에 깔리고 내가 위에 섰습니다. 내 팔을 꽉 끌어안고 있는데 어찌나 힘이 세던지 뺄 수가 없었어요』
  
   李대위는 후퇴하면서 미군에게서 얻었던 短刀(단도)가 생각났다. 권총에 총알이 남아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총알이 없는 것으로 생각됐다. 간신히 단도를 빼내 인민군의 목을 찌르려고 했다. 순간 인민군의 목이 힘없이 땅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뿔싸! 그 인민군은 李대위의 총탄에 맞아 瀕死(빈사) 상태에서 격투를 벌였던 것이다.
  
   『죽은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데도 그 몸을 풀지 못하겠더군요. 사람들은 영화에서 보듯 총을 맞으면 쉽게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頭部(두부)나 心臟(심장)을 정통으로 맞지 않는 한 卽死(즉사)하지 않습니다』
  
   죽은 敵의 팔을 온 힘을 다해 풀려고 하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민군 모자에 장교 표식이 눈에 띄었다. 인민군 장교가 李대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살았다고 안도한 순간 오히려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인민군 장교는 왼손에 노획한 칼빈소총을, 오른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도 나의 군복, 새 군화, 가죽 각반, 그리고 신형 헬멧을 보고 한눈에 국군 장교로 생각했을 겁니다. 갑자기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악!」 하는 비명을 질렀고, 그 다음 죽음과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아버지와 누이동생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통증이 있는 곳을 보니 왼쪽 하퇴부의 굵은 뼈가 관통당했어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어요. 차라리 뼈가 아니고 살을 맞았다면 통증이 없을 텐데, 신경을 건드리니 너무 아팠습니다』
  
   李대위는 고통 속에서 인민군의 몸을 풀고 그를 쏜 인민군 장교를 바라봤다. 「저놈이 나를 쐈구나」 李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손이 권총으로 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빼서 쏜 것이 가슴에 명중했다. 『악』 소리가 나더니 인민군 장교는 풀 위에 넘어졌다. 李대위는 군화를 벗고 상의 왼쪽 주머니에서 압박붕대를 꺼내 지혈을 시도했다. 곧이어 통신병과 연락병이 달려왔다. 그는 혼잣말처럼 『부관(李信國 중위) 보고 중대 지휘하라고 해』라고 말했다. 李대위가 5명의 인민군을 사살하는 시간은 불과 5~10분이었지만, 그에게는 마치 서너 시간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지휘관은 상식이 풍부해야』
  
   崔榮喜 대령은 15연대장으로 多富洞 전투 기간 중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 10여 년 전에는 忠正寺(충정사)를 직접 지었고 현재 육해공군 해병대 불자연합회 회장이다.
  
   『포탄이 떨어지면 병사나 장교나 전부 壕 속에 들어가서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사병이나 장교나 죽음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 아닙니까. 옆에서 사람이 죽어 자빠지면 흥분이 되고 말이 떨려서 지휘가 안 돼요. 「명색이 연대장이고 지휘를 해야 하는데…」 하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포가 떨어지는 곳에 섰어요.
  
   그 순간 내가 죽는다는 공포가 밀려오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됐어요. 남을 억울하게 한 일, 잘못한 일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어요. 그 다음 「내가 떤다고 죽을 사람이 살겠는가」라는 마음이 생기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았어요. 내가 연대장이란 자각이 생기고 「우리 아이들 어디로 갔나」 하고 챙기게 됩디다. 사실 전장에서 떨어 보았자 병사들에게 웃음거리밖에 안 되는 것 아닙니까. 白善燁 장군이 독전하러 왔다가 호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태연하게 드러누워 있는 나를 보고는 그냥 갔더랍니다. 「아, 15연대장은 부대를 장악하고 있구나!」 판단을 한 것이겠죠』
  
   그는 대대장이나 중대장 등 부하장교를 전투에 투입할 때, 부하장교의 개성을 중요시했다.
  
   『지휘관은 두 단계 아래 부대까지 파악 해야 합니다. 그래야 히딩크 감독이 사람을 쓰듯 「저놈은 침착하니까 방어를 시켜라」, 「이놈은 다혈질이고 공격적인 놈이니까 공격을 시켜라」 하는 거지요. 사람을 잘못 쓰면 전투도 지는 거지. 지휘관 중에서도 평소 큰소리 땅땅치지만 戰時에는 얼굴하나 못 내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崔대령은 전장에서의 「常識(상식)」을 강조했다.
  
   『전쟁도 상식이 풍부하고 건전한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그냥 맨몸으로 올라가도 서너 시간 걸리는 고지를 총알이 날아오는데 똑같은 시간에 올라가라고 하는 지휘관은 상식이 없는 사람이지요.
  
   부하들 심리를 이용해서 「총을 쏘거든 올라가지 말라. 그곳에서 땅 파고 적의 총에 맞지 않도록 있으라」고 하고 병사들에게 먹을 것과 총탄, 그리고 포병의 화력을 포신이 달궈져 휠 정도로 때려 줍니다. 전투병들이 안심하고 「이 정도면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돌격!」 명령을 내려야 성공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하면 전투에서 질래야 질 수가 없습니다』
  
  
   「총으로 죽이는 것은 원귀가 안 된다」는 戰場 禁忌
  
  
   674고지 탈환 전투에서 11중대장으로 고지를 점령한 朴能夏(박능하?4) 이등중사는 『적을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상대방을 죽이는 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투에서 「칼로 찌르거나 돌 등으로 敵을 죽이면 원귀가 된다」는 戰場 禁忌(금기)가 있어 병사들은 가급적 백병전에서도 총을 사용했다』면서 『밤낮 휴식없이 싸우다 보면 인간체력은 극에 달하지만 죽음에 대한 위협을 느끼면 차력사가 된 듯 평소 2~3배의 힘이 난다』고 덧붙였다.
  
   李箕衡(이기형?5겮致팀玟昰픽?경기지부장) 이등상사는 369고지 전투에서 가장 비극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8월10일 저녁, 12연대 제2대대 선임하사관이던 그는 소대장 대리로서 세 차례에 걸친 육박전 끝에 369고지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튿날, 12연대의 일부 병력이 소대와 교대하기 위해 고지에 올라왔다. 당시 12연대장 朴基丙(박기병) 대령이 고지에 올라와 이들을 위로했다. 369고지 남쪽 평평한 자리에서 대구에서 위문 온 남녀 위문대 학생들과 둥글게 앉아 음료수도 마시고 노래를 듣는 등 잠시 나마 전장의 살벌함을 잊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후방 박격포 중대 선임하사관인 韓相世(한상세겢營?26세) 상사가 헐레벌떡 올라왔다. 그는 충남 청양 사람으로 李箕衡 상사와 2년 이상 같은 중대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였다. 韓상사는 『30여 명을 희생해 가면서 기어코 팔공산의 보루인 369고지를 탈환하고 敵을 몰아낸 李상사가 자랑스러워 만나보러 왔다』고 했다.
  
   마침 6?5 전쟁 전에 韓상사와 같이 찍은 몇 장의 사진을 삼각 수건에 싸서 허리에 차고 다녔던 李箕衡 상사는 사진을 그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둘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순간, 낙동강 북쪽에서 인민군이 쏘아댄 야포탄이 고지 한복판에 명중해 위문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韓상사는 이마에 파편을 맞아 유혈이 낭자하고 두개골이 흘러나왔다. 급한 마음에 李상사는 황토흙과 땀에 범벅이 된 수건을 대주었다. 『빨리 산 아래로 내려가라』는 말에 그는 『李상사는 괜찮으냐』고 오히려 李상사를 걱정해 주었다. 韓상사는 곧 숨을 거두었다.
  
   12연대 2대대 8중대 박격포 소대장인 韓秉根(한병근?6겴갱?8기곏痕T戮凰超릴뮈六英?이사) 중위는 韓相世 상사를 그 자리에 묻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도 8월13일 369고지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敵 특무장(원사)과 마주쳤지만 내가 먼저 보고 쏘았습니다. 그도 쓰러지며 악착같이 나를 쏘았는데, 왼편 가슴에 정통으로 맞았어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했지만 왼편 가슴을 더듬어 보니 왼편 주머니에 넣어둔 포켓 성경책에 3분의 1 정도 총알이 관통해 박혀 있더군요. 天幸(천행)이었죠. 인민군 다발총은 연속해서 쏘면 총열이 달궈져 총알에 힘이 없어집니다』
  
   黃大亨(황대형?2) 일등 중사는 15연대 1대대 3중대 화기소대 분대장이다. 그는 기관총 사수였다.
  
   그는 『한여름의 찌는 더위로 시체들은 불그스름한 뼈를 노출시키며 끈적끈적한 기름처럼 녹아내렸습니다. 시체의 콧구멍엔 구더기가 들끓었고요. 썩은 시체에 작열한 포 세례를 받고도 옷을 빨 수가 없어서 흙과 솔잎으로 문질러댔다』고 했다.
  
   『빨래는커녕 식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식사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배고픔을 건빵으로 때우고 나면 찾아오는 갈증은 고통 중에 고통이었어요. 8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 건빵을 먹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고통을 상상해 보세요.
  
   지금도 나는 이 세상의 山海珍味(산해진미)는 심한 갈증에 허덕일 때 차가운 냉수 한 모금이라고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합니다. 328고지에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파리떼가 시체에 달라붙어 있다가 주먹밥을 먹으려고 하면 새카맣게 주먹밥으로 옮겨 붙습니다』
  
  
   『징집에서 빼달라고 「빽」 쓰는 사람 없었다』
  
  
   후방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인 募兵(모병)이 순조로웠던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당시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장이었던 故 崔錫(최석겳뭔澍?중장) 장군은 모병에 대해 「민족의 증언」(중앙일보 刊)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동강 공방전이 전개될 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병력보충이었습니다. 연일 혈전이 벌어지니까 소모가 엄청난데 이를 빨리 보충해야 하니까요. 8월 초에 대구에서 교육대라는 명칭으로 내가 책임자가 되어 신병모집훈련소를 차렸어요.
  
   며칠 후 제1훈련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여기에는 9개 대대가 있었어요. 1개 대대는 2000~2500명 정도지요. 입소 신병은 7일간 교육을 받았어요. 하지만 급할 때는 2~3일간 소총사격 훈련만 시켰고, 더 급할 때에는 사격장으로 가다가 도중에 그대로 일선으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보통 하루에 제1훈련소에서 500~600명을 일선에 보충했는데 많을 때는 2000~3000명을 일선에 보낸 적도 있어요. 특히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신편할 대에는 보충해 줄 병력이 달렸어요. 그럴 때는 基幹(기간) 사병들이 길거리를 막고 원주민이나 피란민 할 것 없이 20~35세까지의 청장년을 急募(급모)해 보냈어요. 비상시인 만큼 이런 비상수단을 안 쓸 수가 없었지요.
  
   그때 신병을 일선에 보낼 때는 하루 전에 집에 보내 가족과 면회하도록 했어요. 그래도 도망치는 신병은 별로 없었어요. 이 점은 참 감명깊은 일이었습니다. 또 빼달라고 소위 「빽」을 쓰는 사람도 없었고요. 8월 초부터 하순까지 훈련시켜 일선으로 보낸 신병은 약 5만 명 정도 됩니다』
  
   孫漢鐘(손한종?8곺?서울시 총무과장) 이등중사는 함북 明川 출신의 학도병으로 경북중학교 4학년 재학 중 多富洞 전투에 참전했다. 17세의 나이로 지원 입대한 그는 1950년 7월10일부터 일주일간 대구농림학교에 설치된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
  
   그는 인근 대구도립병원에 국군 부상자들이 실려오는 것을 보고는 학교에서 동급생 15명과 지원했다. 부모와 상의 한마디 없이 결정한 일에 부모는 펄쩍 뛰었다. 그가 전선으로 나가는 날, 동네사람들이 대구 삼덕국민학교 앞에서 군복을 입은 채 행군해 가는 그를 보고 그의 모친에게 알렸다.
  
   『어머니와 누이가 헌병들이 꽉 들어차 제지하는 사이를 뚫고 플랫폼으로 들어와 「한종아, 한종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도 모르게 「엄마!」 하며 부둥켜 안고 막 울었습니다. 군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우리 모습을 본 육군본부의 李鍾贊(이종찬) 대령이 고위장교들과 함께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전선에 간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라」고 위로한 기억이 납니다』
  
   11연대 소속의 柳炳鎬(유병호?4겙㈐?5기겮念예?씨는 충남 당진 출신으로 5급 상이용사다.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한 그는 多富洞에서 선임하사관으로 싸웠다. 8월20일 그는 300고지 전투에서 학도병의 총탄 장전을 돕다가 폭탄 파편에 맞았다.
  
   『학도병 1개 소대가 우리 부대에 배치돼 전투를 치렀습니다. 새벽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학도병 하나가 여덟 발 들이 클립을 다 사격하고 나서 조작법을 몰라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쳤어요. 뛰어가 탄창을 장전해 주는 순간,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이마가 찢어지는 통증을 느끼면서 의식을 잃었어요. 아군은 고지를 버리고 고지 후사면으로 후퇴했습니다』
  
   포탄의 파편은 이마 정면을 뚫고 왼쪽 뇌를 건드리며 오른쪽 귀로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그는 오른쪽 귀가 안 들린다. 적군은 고지 점령 후 전상자에 대한 수색을 했다.
  
   『인민군이 내 몸을 발로 툭툭 건드리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느껴졌어요. 아마 이마에 鮮血(선혈)이 낭자하니 죽은 줄 알았을 겁니다』
  
   이튿날 아군이 고지를 탈환할 때까지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다. 지금도 수건을 머리에 얹어야 잠이 든다고 한다.
  
   多富洞에서는 17세 이하인 소년병들도 학도병 형들 틈에 끼어 싸웠다. 소년병들의 활약은 이후로 각 전선에서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 예를 들면 제11연대 3대대 소년병들은 8월16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多富洞 지구 674고지에서 수많은 인명피해를 무릅쓰고 기어이 고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美 고문단이 전투에 큰 도움』
  
  
   白善燁은 선산군 장천면의 선산~대구 국도변에 있는 五常중학교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최후 저지선」의 위치를 선정해 두었다. Y선은 303고지(美 1기병사단 지역)~328고지~숲되미산(수암산)~유학산~356고지~273고지(인접 6사단 지역)~渭川(위천, 6사단 지역)을 의미하는 선으로 多富洞 방어의 전략요충이다. 多富洞은 왜관과 軍威(군위) 쪽에서 오는 길이 만나 대구로 빠지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공격자로서는 分進合擊(분진합격)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또 多富洞의 북쪽으로는 遊鶴山~水岩山(숲되미산)의 긴 능선이 동서로 뻗어 있어 방어전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여기서 대구까지 25km, 대구를 부채꼴로 감싸는 이 산맥이 마지막 승부처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白善燁은 石主岩(석주암) 참모장과 文亨泰(문형태?2겴갱?2기곺?국방부 장관) 작전참모(중령)를 불러 『이번 방어선이 우리의 최후 전투가 될지도 모르니 이번 전투지형은 내가 결정하고 싶다. 架山과 多富洞 일대를 정찰하고 방어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文亨泰 작전참모는 당시 작전의 성공요인으로 白善燁 장군 이하 1사단 지휘부의 우수성, 미군의 시기 적절한 화력 지원 등을 들었다.
  
   『미국이 고문단을 파견해 연합작전을 펼친 게 多富洞 전투, 나아가 지금의 한국군의 작전능력에 밑거름이 됐습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전투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는 白장군이 미군과 연합작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외국어 능력보다는 「거짓 없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고 했다. 美軍은 白장군을 신뢰했다.
  
   『작전참모로서 작전을 수립할 때 미군 고문관들에게 의견을 들어서 실패한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상급 사령부에 일일이 문의해 보고, 그네들끼리 회의도 해서 조언을 해주기 때문에 국군 지휘관들과의 불협화음도 없습니다』
  
   白善燁의 부대지휘 비결은 「go and see」였다. 몸소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美 참모대학에 있는 모토다. 전투를 하다 보면 문제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文亨泰 작전참모는 『白장군은 철저하게 「부대內 문제를 최소화하고 敵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타격을 준다」는 자세로 전투에 임했다. 그는 신념과 애국심이 대단했고, 참모들과 지프를 타고 가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꼿꼿하게 앉았다. 부하들에게는 「戰場에서 뒤통수를 보이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白善燁은 이때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과 오한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戰況(전황)의 악화와 신체의 고통은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1945년 五常중학교를 설립한 故 金東碩(김동석) 교장과 그 가족들이 白善燁을 돌봤다. 金교장의 부인이 쑤어 준 미음은 아들인 18세의 중학생 金潤煥(김윤환) 민국당 대표가 사택 응접실에 누워 있던 白善燁에게 날라다 주었다.
  
   『당시 경북중학교에 다니다가 전쟁이 나 집에 와 있었어요. 어머니가 성심껏 간호를 해주셨습니다. 옆에서 뵈니 젊은 장군이었지만 샤프하고 德將(덕장)의 풍모가 풍기는 분이었습니다. 가족들이 慶山(경산)으로 피란을 가게 되자 先親께서 白장군에게 「열여덟 살이면 군대 갈 나이가 됐으니까 이 아이를 맡아달라」고 하시며 저를 위탁하셨습니다. 그래서 학도병으로 입대하게 됐어요』
  
   金대표는 8월30일 1사단 제17 포병대대(대대장 박영석 소령)에 배속됐다. 열흘 정도 있으니 대구에 있는 경북中 동기생 權五琦(권오기?0) 21세기 평화재단 이사장, 故 吳相明(오상명) 前 모라도 회장 등이 합류했다.
  
   『8월 말 인민군이 洛東江을 도강해 사단사령부를 동명초등학교로 옮기고 나서 우리 집은 이번에는 인민군들 13사단 사령부가 됐습니다. 우리 대대 포병 관측병들이 「너희 집이 포격으로 부서졌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8월15일을 「대구 점령의 날」로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포로 신문에서 확인됐다. 이날 敵의 총공세는 어느 때보다 치열했고, 1사단의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1사단의 모든 정면은 백병전의 양상이었고 위기의 절정이었다. 이 시기는 多富洞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시기였다.
  
  
   에틸 알코올과 압박붕대가 치료약의 全部
  
  
   姜聖模(강성모?4겴갱?8기겵芟예? 중위는 11연대 1대대 의무지대장이었다. 姜중위의 11연대 의무 중대(중대장 朴時允 대위)는 多富洞에 8월 초순경 도착했다. 연대는 구호소를 유학산 고지 아래 육교 옆에 설치했다. 姜중위의 1대대 의무지대에서는 8월20일경까지 20일간 하루 평균 60~70명의 戰傷者(전상자)들을 치료했다. 이 인원은 대대 전투 병력이 150~200명이었던 당시를 감안하면 매일 1개 대대의 절반은 죽거나 다치는 셈이었다.
  
   『각 지대에는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없었고, 의정장교들이 군의관 역할을 하면서 위생병 세 명을 데리고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매일 보충병들이 왔고, 전사자를 챙기지도 못했습니다. 야간전투를 하면 새벽녘에 부상자들이 쏟아져 들어와요. 의무대에 들것이 보급되지 않아 오리나무로 들것을 임시로 만들어 부상자를 운반했습니다.
  
   연대에서 부족한 약은 美 27연대에서 제공해 주었어요. 그나마 먹는 약은 감기 처방용으로 아스피린을 조금씩 주는 것 외에는 거의 없었고, 상처소독용 에틸 알코올, 압박붕대 등 외과 약품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총상을 입은 자리에 에틸 알코올을 부으면 사람이 펄펄 뛰게 돼 있어요. 그런데도 병사들은 얼마나 긴장도가 심한지 아픈 줄 모르더군요. 발목이 절단된 병사들은 신경이 아직 살아 있어선지 발바닥이 너무나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37℃가 넘는 「가마솥 더위」가 상처치료에는 엄청난 惡材(악재)였어요』
  
   당시 구호소의 치료원칙은 계급순서가 아니었다고 한다.
  
   『희망이 없는 重傷者(중상자)는 제일 나중에 치료한다는 원칙입니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심장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난 銃傷(총상)을 입은 사람이 우리 구호소에 실려왔어요. 공기가 가슴으로 흡입돼 숨쉴 때마다 피가 꽐꽐 나왔고, 호흡이 어려워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구호소에서 內科 처방은 할 수 없잖아요. 급한 김에 기름종이를 가슴 상처부위에 덮어 응급처치를 했는데 살았어요. 사람 목숨이 질겨요. 총상으로 폐가 관통돼 내출혈이 일어나도 쉽사리 죽지는 않습니다. 전투는 사람을 超人(초인)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당시 姜중위의 11연대는 美27연대와 함께 구호작전을 했다고 한다.
  
   『차가 많아 기동성이 있었던 미군은 대대 구호소를 차리지 않았어요. 부상자가 발생하면 전투지역으로 차량을 급히 보내 환자를 응급처치해서 후방으로 후송합니다』
  
   그는 『당시 부상당한 미군들이 「전투 중 죽지만 않으면 부상을 당하더도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good luck!』
  
  
   15연대 소속인 李東植(이동식?6겴갱?8기겢酉예? 소위는 多富洞 전투 기간 중 美 1기병사단과의 작전협조를 위해 연락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미군과 접촉하면서 미군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하게 되었다고 한다. 李소위는 겉보기에는 軍紀(군기)가 문란하게 보이는 미군의 참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근무 軍紀, 그리고 왕성한 책임감이 하루 이틀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한다.
  
   『일본군의 엄격한 외형적 軍紀에 낯익었던 나는 길가에서 껌이나 씹으며 헐렁헐렁 걷고 있는 미군들을 「부잣집의 철없는 아이」쯤으로 보고 별로 신통치 않게 여겼습니다.
  
   저는 多富洞에서 그들의 무서운 내면적 軍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지에 도착하면 분대장은 곧장 중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이틈에 대원들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무기를 먼저 손질한 다음, 분대장이 돌아오면 아침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었어요. 야간에는 누구 한 사람 깨우거나 연락하지 않아도 보초들이 정확하게 5분 전에 도착해 인수인계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대대 지휘소 천막에서 장교나 하사관이 함께 자연스러운 자세로 일상회화처럼 조용히 지시하고 복창했습니다. 지시가 구차하게 반복되는 일은 없었고, 담당 장교의 지시설명도 통상 2~3분을 넘기지 않았다. 지시가 끝나면 「good luck!」 하고 수색을 나갔습니다』
  
   이후 美 제1기갑사단 제5연대에서는 제11중대 박격포 소대원 40명이 인민군에게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박격포 소대원이었던 프레드릭 라이언(Fredrick Ryan?9곙?신시네티 거주) 이병은 왜관 303고지를 지키다 소대원 46명과 함께 8월15일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인민군은 이들을 신발과 일부 옷을 벗기고 끌고 다니다 다음날 미군 포로 전원을 작오산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전우들이 붉은 피를 내뿜으면서 쓰러졌다 .
  
   쓰러진 전우의 주검 밑에 깔려 있던 라이언 이병은 인민군들이 쓰러진 시체에 일일이 확인 사살하는 것을 죽은 듯이 기다렸다. 기적이었을까. 라이언 이병과 여섯 명의 병사들은 전우의 시체 속에 파묻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
  
   현재 캠프 캐롤(Camp Carrol)內에는 1990년 당시 주임 상사였던 프레드(Fred)씨의 주도로 세워진 비극적인 사건의 기념비가 있다.
  
   白善燁은 현재 가용한 전투력과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 분석한 결과, 사단 단독으로는 이 방어선을 지탱하기 어렵다고 판단, 美 8군 사령부에 직접 증원을 요청했다. 美 8군은 8월17일 軍 예비대인 美 25사단 소속 제27연대(연대장 존 마이켈리스 대령)를 국군 1사단에 증원시켜 敵 전차 접근로를 방어하게 했다. 또 1사단 예하 17야전포병대에 신형 105mm 곡사포 18문을 지급해 화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두 가지 朗報
  
  
   白善燁은 한국전에서 美軍을 지원받아 싸운 국군의 첫 사단장이 됐다. 美 27연대는 8월18일 아침까지 多富洞에 진출, 11연대 방어선의 중간지점의 도로와 개활지에 투입됐다. 1사단은 山上에서 敵 보병과 싸우고 美 27연대는 도로상에서 敵 전차대와 싸우는 피아간 대등한 결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또 하나의 朗報(낭보)는 8월16일 정오경 사단측면의 낙동강 對岸, 즉 왜관 서부에 융단폭격을 실시할 예정이니 전방부대는 호를 깊이 파고 머리를 지면 위로 들지 말라는 통보였다. 전황은 위태했으나 승리의 瑞光(서광)이 비친 것이다.
  
   李傑(이걸?8겴갱?8기) 중위는 북청이 고향으로 多富洞 전투 초기에는 12중대 81mm 박격포 소대장이었다. 그는 유학산 공격 중 미군 최전방에는 4.2인치 중박격포 중대, 105mm 야포, 155mm 야포가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했다. 처음 보는 美軍의 155mm 야포에 포병 병사들은 신기해 했다고 한다.
  
   『美 M-26 전차 20여 대가 개울가에 포진해 유학산을 온통 硝煙(초연)과 포격 굉음으로 뒤덮는 게 장관이었습니다. 조직적인 기동력과 이것을 지원하는 막강한 화력 없이는 절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어쨌든 美軍의 화력은 多富洞 전투의 가장 힘든 시기에 결정적 힘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16일 새벽까지 최후 저지선(Y선) 중 1사단의 손에 남은 것은 수암산 일부와 多富洞 정도였고, 나머지 전선은 붕괴 직전의 상황에서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白善燁은 역습을 명령했다.
  
   『우리가 고통스러우면 적군은 그 이상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병력과 탄약 보급도 받고 있고, 공중지원도 있다. 모두 돌격하자!』
  
   8월16일 오전 11시58분. 일본 요코다(橫田)와 가네나(嘉手納)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B-29 5개 편대 98대가 호박 덩어리만한 폭탄 3234개(무게 960t)를 퍼부은 것이다. 낙동강 서쪽 若木(약목)과 龜尾(구미) 사이 가로 5.6km, 세로 12km의 직사각형 구역이 쑥대밭이 됐다. 폭격은 정확히 26분간 계속됐다. 이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생로(Saint Lo) 지역에 퍼부은 융단폭격의 再版(재판)이었다.
  
   敵의 주력부대는 이때 이미 낙동강을 도하했기 때문에 치명적 타격은 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얼마 후 포로 신문 결과, 敵의 사기는 이를 계기로 결정적으로 꺾였다는 진술을 들을 수 있었다. 보급부대에게 치명타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융단폭격 당시 328고지를 방어하던 15연대 1소대장인 劉永南(유영남곏痕T戮凰超릴뮈六英?자문위원) 소위는 『진지를 이탈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폭음 소리에 머리를 들어 강 건너 若木지역을 바라다보았다.
  
   『가을철 잠자리떼가 뜬 것처럼 B-29폭격기가 새카맣게 떠 알을 낳듯이 폭탄을 흘려댔습니다. 지상에서 올라오는 지축을 흔드는 폭음과 먼지, 그리고 그때마다 낙동강 물이 출렁출렁 움직이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통쾌해요. 우리는 기분이 좋아 「만세!」를 불렀습니다』
  
   융단폭격 후 敵은 18일부터 오히려 단말마적 기세로 덤벼들었다.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과 화력을 퍼부어댔다. 戰線은 다시 육박전으로 전개돼 수류탄과 총검으로 싸우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피아간 전사자들의 시체를 치울 틈도 없었다. 인민군 포로와 부상병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났다. 나이 어린 「의용병」들에게 술을 먹여 돌격시킨 것이다. 敵은 특공대를 후방에 투입해 기습, 교란 작전을 병행했다.
  
  
   10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白善燁 장군
  
  
   8월19일 밤, 중대 규모의 敵이 1사단 사령부인 東明국민학교를 습격했다. 白善燁은 부관 金判圭(김판규) 대위가 깨우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해서 다발총과 기관총의 총성과 수류탄 폭음이 들렸다.
  
   총알을 피해 참모들은 바닥을 기었고 벌써 美軍 통신병 등 수명이 전사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때마침 운동장에는 증원부대로 8사단 10연대의 1개 대대가 金淳基(김순기) 대대장(소령) 지휘로 오후 5시경 도착해 宿營(숙영:군대가 병영을 떠나 다른 곳에서 머물러 지내는 일) 중이었다. 다행히 적군은 8사단 병사들에 의해 격퇴됐다.
  
   나중에 들으니 敵 돌격대는 白善燁 사단장을 생포하러 사령부를 야간기습했다는 것이었다.
  
   『金日成이가 나를 붙잡는 인민군에게 1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답니다. 평양에 입성해 보니 소 한 마리 가격이 100원이었으니까 내 목숨이 소 1000마리 가격이었던 셈이지요(웃음)』
  
   10연대 1개 대대병사들이 永川(영천)에서 행군해 와 피로한 기색이 보이자 白善燁이 文亨泰 소령에게 『돼지 서너 마리를 잡아 국을 잘 끓여먹여 재운 후 새벽 3시에 가산산성으로 출발시키라』고 厚待(후대)했던 것이 도리어 그의 목숨을 살린 셈이 됐다.
  
   국군 증원부대인 8사단 10연대(연대장 高弘根 중령)는 가산산성에 투입해 인접 6사단과의 접촉부를 담당케 했다. 마이켈리스 대령의 美 27연대는 이무렵 전차 14대를 再보충받아 21대의 전차로 매일 밤 전차를 앞세우고 夜襲(야습)하는 적군을 저지해 주었다. 만일 美 27연대에 배속된 전차중대가 오지 않았던들 전차가 없던 사단의 敵 전차부대 방어능력으로 보아 천평 접근로에 돌파구가 형성돼 대구가 함락될 위기에 빠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8월19일 밤, 12연대 1대대 1중대장인 李鍾喆(이종철ㆍ74겴갱?7기겢酉예? 중위는 사단에서 보충받은 150명의 新兵(신병)들을 소총소대에 再배치하느라 밤을 지새웠다. 遊鶴山(유학산) 837고지를 10여 차례 공격하다 대대 병력의 80% 이상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화랑담배」 껍질에 소대원 이름 적어
  
  
   李중위는 비좁은 산비탈에 30~40명씩 소대별로 신병들을 모아놓고 중대에 하나밖에 없는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 다음, 『내가 1중대장 李鍾喆 중위다』고 소개했다. 그는 신병들에게 소대장을 소개하고, 신병들 중 교사나 면서기 경력자들은 분대장으로 임명했다. 소대장들에게는 화랑담배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적어 주머니에 넣도록 했다.
  
   李중위는 신병들에게 총을 쏘아야 할 방향, 후퇴시 집결지점, 돌격시 하늘을 보고 올라갈 것, 포탄이 떨어진 자리를 은폐물로 삼을 것 등 간단한 전투요령을 전달했다. 이어 신병들에게 M-1 소총 실탄 8발을 敵陣을 향해 발사하도록 했다. 敵에게 아군의 勢(세)를 과시하고 신병들의 사격훈련을 겸한 것이었다.
  
   8월20일 오전 6시, 아군의 지원포가 불을 뿜는 가운데 837고지에 대한 공격이 재개됐다. 전날 3중대장 金灝鼎(김호정ㆍ육사7기 특) 대위가 李중위를 찾아와 『이렇게 많은 부하를 죽이고 우리가 어떻게 살길 바라겠는가. 내일 공격은 죽기를 각오하고 우리 2개 중대가 연합해 정상을 탈환하자』고 제의해 와 의기투합했다.
  
   3중대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1개 분대밖에 투입할 수 없는 좁은 능선을 따라 병력이 투입됐고 이들은 고지 8부 능선에서 敵의 수류탄과 박격포, 소총사격으로 형성된 彈膜(탄막)에 희생되고 말았다. 3중대 병력은 화기소대 1개분대와 본부 요원 2~3명만 남기고 전멸했다.
  
   후속 분대는 「올라가기만 하면 사라지는」 분대원들의 뒤를 이어 죽음을 각오하고 파도처럼 고지를 향해 뛰었다. 정오를 넘긴 시각, 악에 받친 金대위가 『연락병, 물 가져와』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수통의 물을 마시려고 자세를 높이는 순간, 그의 목젓이 적의 총탄에 그대로 관통당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곧이어 李중위의 1중대가 투입됐지만 3중대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말았다. 2~3개 분대만 남게 되자 그는 『내가 죽을 차례』라며 잔여병력과 본부요원 18명을 이끌고 정상 돌격을 감행했다.
  
   『수류탄과 박격포탄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올라갔어요. 옆에 떨어지는 수류탄은 발로 걷어찼습니다. 우리가 몸을 사리지 않고 올라가니까 敵들이 겁이 났는지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상에 뛰어오른 병사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敵에게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사방에서 총격 소리와 『살려달라』는 부상병의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잔적을 소탕하고 있는데, 옆에서 섬광이 번쩍이면서 얼굴이 뜨거웠어요. 양손으로 눈을 감싸니 피가 흥건하게 묻었습니다. 귀가 포탄 파편에 찢겨져 나갔고, 오른쪽 대퇴부는 관통상을 당했어요. 전투복은 포탄 파편으로 온통 벌집이 돼 있었고요. 고지를 점령했다는 기쁨에 통증도 잊었습니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8월20일, 모든 정면의 敵의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했다. 敵의 정예 15사단이 多富洞의 저항이 완강하자 공세 전환을 위해 義城(의성) 방면으로 이동하고 9월공세 때 영천을 공격하기 위해 전선을 再배치한 사실이 후에 알려졌다.
  
   白善燁은 마이켈리스 대령과 합의해 이튿날 Y선의 완전한 탈환을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다. 敵은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탄막을 씌워 아군의 역습을 저지하고 오히려 인해전술로 공격해 들어왔다. 美 27연대도 출격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전념하게 됐다. 이때 白善燁은 美 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인민군에게 제압을 당해 448고지를 뺏기고 多富洞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美 8군사령부로부터 白善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군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도대체 싸울 의지가 있느냐』
  
   연대 측면이 뚫리자 마이켈리스 대령이 즉각 美 8군에 보고해 『한국군이 후퇴하고 있다.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철수해야겠다』고 보고한 것이었다. 마이켈리스는 白善燁에게도 전화를 해 『후퇴하겠다』고 통고했다.
  
   白善燁은 『후퇴하지 말고 잠깐 기다리라. 내가 현장에 나가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는 동명국민학교에서 多富洞으로 급히 지프를 몰았다. 과연 진목동 도로 서쪽 11연대 병사들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총을 거꾸로 멘 채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고지를 점령한 적은 산발적으로 美軍의 포병진지를 향해 측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白善燁이 대대장 金在命 소령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그는 『장병들이 계속된 晝夜의 격전으로 지친데다 고립된 고지에 給食(급식)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는 대답이었다. 배고픈 병정들을 앞에 세우고 싸우면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白善燁은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운전사가 적의 포 파편에 맞는 부상을 당했다.
  
   『그동안 여러분 잘 싸워줘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더 후퇴하면 곧 亡國(망국)이다. 美軍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명령을 어기고 후퇴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쏜다. 반대로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白善燁이 돌격명령을 내리고 선두에 앞장서자 패잔병 같던 병사들의 함성이 골짜기를 진동했다. 金在命 소령도 용감하게 부대를 지휘했다. 인민군들은 국군의 증원부대가 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고, 삽시간에 448고지를 再탈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사단은 韓美연합작전을 상호 신뢰下에 잘 치를 수 있었다. 美軍은 연합작전시 철저하게 「도와줄 가치가 있는 戰友」라는 인식을 주지 않으면 돕지 않았다.
  
  
   「報國隊」의 눈물겨운 국군 뒷바라지
  
  
   8월22일 戰勢(전세)는 아군 쪽으로 기울었다. 오전에 인민군 고위장교인 13사단 포병연대장 鄭鳳旭(정봉욱·국군 소장 예편겞自位틔체弩?역임) 중좌가 당번병 한 명을 데리고 백기를 흔들고 귀순해 오는 등 인민군의 「전장이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鄭중좌는 허리에 찬 가죽 가방에 작전지도를 넣어왔다. 그는 과수원에 위장시켜 놓은 20문의 13사단 포진지를 알려줬고, 이 포들은 유엔 전폭기에 의해 즉시 파괴되었다. 9월21일에는 참모장 李學九(이학구) 총좌가 美 기병1사단에 투항했고 하급장교와 병사들의 투항이 줄을 이었다.
  
   1사단이 8월 한 달 동안의 전투를 승리로 마치자 美8군에서는 美 2사단을 증원하면서 대구방어의 핵심인 상주-대구 간 25번 도로와 多富洞 지역을 화력과 기동력이 뛰어난 美軍이 담당하도록 전투지역을 조정했다.
  
   1사단은 6사단의 전투지대 일부를 인수하게 돼 8월29일부터 30일 양일간 多富洞 戰域(전역)을 美 기병1사단에 인계하고 8월30일 新寧(신령)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전황은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인민군은 8월31일부터 최후의 총공세를 낙동강-부산 교두보의 全전선에 걸쳐 감행했다. 金泉에 전선사령부(사령관 金策 대장, 참모장 姜健 중장)를 둔 인민군은 약 9만8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화력에 의존하는 美 1기병사단은 15연대가 피투성이가 돼 사수한 작오산 고지-328고지 등을 불과 3일 만에 내주고 말았다. 다시 한번 多富洞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이튿날 16일 오전 9시를 기해 낙동강에서의 역사적인 반격작전 성공으로 인민군은 궤멸당했다.
  
   낙동강 교두보를 위협한 최후의 공세는 저지되었다. 多富洞 방어전을 치러내고 대구 북동쪽 팔공산 전선으로 옮겼던 1사단의 白善燁도 인민군의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국의 전략가인 리델 하트는 『戰場(전장)의 縱心(종심)이 깊어질수록 병참 공급선이 길어지고, 종심의 깊이에 반비례해 戰力은 줄어든다』며, 機動戰(기동전)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보급력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 준 것이 多富洞 전투의 교훈입니다. 나는 맥아더가 한국에 왔을 때 우리는 이겼다고 생각했어요』
  
   白善燁 장군의 말이다.
  
   1사단이 多富洞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이후, 진지전의 양상을 띠게 되자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품은 전량 노무자의 손으로 운반되었다. 1개 대대에 평균 50~60명의 노무자(일명 報國隊)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수도 없었다. 참전자들은 노무자의 역할에 대해 『전투의 절반은 그분들(노무자)이 치렀다』고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전투지역 인근 마을이나 피란민 수용소에서 동원된 40代의 농촌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소박하고 부지런해 매일 새벽 4시부터 밤 늦게까지 전투원의 식사를 비롯한 탄약과 기타 보급품을 지게로 최전방 고지까지 운반했다. 되돌아갈 때는 부상자와 전사자를 실어내렸다. 이들 중 포화에 희생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투원보다 더 심한 육체적인 고통을 겪었다.
  
   「多富洞 전투」로 낙동강 전선의 최대 격전이라 알려진 이 전투에서 1사단은 8월1일부터 9월24일까지 55일간의 격전 끝에 敵을 물리쳤다. 白善燁의 1사단뿐만 아니라 국군 1개 연대, 美軍 2개 연대 등 3개 연대가 증원부대로 가담했다. 美 공군의 항공지원이 있었고, 주변의 민간인들도 가세했다. 국군겳移黎틒국민의 승리였던 셈이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敵을 「망치」로 내려친 격이라면 多富洞 전투는 이 「망치」의 「모루」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대구지역 死守를 위해 국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1사단은 多富洞에서만도 장교 56명을 포함해 2234명의 전사자를 냈다. 국군을 지원한 美 27연대, 美 23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입은 피해까지 합하면 피해는 그보다 훨씬 크다. 인민군은 이보다 2배 이상인 5690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白善燁이 그의 자서전 「軍과 나」에서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서 빛을 잃는다』고 술회한 내용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多富洞 전투가 벌어진 지 50여 년이 지났다. 당시의 노병들은 七旬(칠순)을 훨씬 넘겼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多富洞 전투는 잊혀진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多富洞의 끔찍한 동족상잔의 기억을 훌훌 털어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鄭永洪(정영홍·79·육사 3기·예비역 준장) 장군은 『國基를 흔드는 現 정권의 좌경화된 정책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祖國은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싸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多富洞전투구국용사회 金鍾杓(김종표) 회장은 『이번 월드컵에서 젊은이들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나라가 어려울 때도 의연히 일어서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면서 『잊혀져 가는 多富洞 전투에 대해 안보교육 강화와 참전자의 적절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多富洞전투구국용사회 鄭重祚(정중조)이사는 『당시 20代 청년인 우리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애국심 하나는 대단했다』면서 『나라가 생긴 지 2년밖에 안 됐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자면서 악에 받쳐 잘 싸웠다』고 회고했다.
  
   崔榮喜 장군도 『지금의 60代들도 당시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이어서 전쟁을 모르고 공산당을 모를 것』이라면서 『6?5 전쟁을 치른 우리 세대에서 오늘날의 분단을 종식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석처럼 남은 遺骸에는 그날의 참상이…
  
  
   2000년 4월, 多富洞 격전지 중 하나인 328고지. 2인용 참호 속에서 유탄에 맞은 채 묻혀 있는 全身 유해 한 具(구)가 육군 유해 발굴단에 의해 발견됐다. 치아 상태로 봐서 나이는 24~25세, 대퇴골로 봐서는 170cm 이상의 체격이었다. 발굴단이 좀더 파들어가자 호루라기, 연필, 페니실린병, 숟가락, 만년필, 라이터, 빗 등 각종 유품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삼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각자에는 한자로 「崔承甲(최승갑)」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추적 끝에 가족이 확인됐다. 쉰셋이 된 딸과 일흔이 훨씬 넘은 아내가 발굴 현장에 나타났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된 그의 부인은 한 손에 삼각자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엔 남편이 생전에 지니고 있었다는 연필을 부여잡고 손등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숲 속 개인호에서 전투화도 없이 검은 장화를 신은 채로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그는 삼각자에 이름 석 자를 남겼다. 경기도 평택이 고향인 그는 전쟁 직전 마지막 휴가 때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나왔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돌격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됐을 그 호루라기를 그대로 목에 걸고 있었다.
  
   육군은 호국용사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2000년부터 오는 2003년까지의 일정으로 위패만 모셔지고 유해가 없는 10만3000여 명의 6?5 戰死者에 대한 유해 발굴과 安葬(안장)사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경북 多富洞, 충북 진천 등 전국 15개 지역에서 유해 555구와 유품 1만9423점을 발굴했다.
  
   多富洞에서만 완전 유해 26구, 부분 유해 1212점이 발견됐다. 유류품은 파편을 포함, 의복, 군화, 탄피 등 1038점이 발굴됐다. 多富洞 지역의 경우, 전신 유해보다 부분 유해의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 지역 발굴을 책임진 전북大 고고미술사학과 朴善周(박선주?5) 교수는 『전투가 他지역에 비해 치열했고, 戰死(전사) 후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신 유해가 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지난 6월4일, 多富洞 지역 6?5 戰死者 유해발굴 책임을 맡은 전북大 朴善周 교수와 발굴에 참여한 우은진 조교, 그리고 이 지역 발굴작업에 참여한 부대의 부대장인 高景燮(고경섭?2) 중령과 함께 多富洞 현장을 찾았다.
  
   정상의 동쪽 끝에는 줄기 부분이 포탄에 맞은 듯 일그러진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증언한 「傷處木(상처목)」이었다.
  
   朴교수는 『이곳에서는 완전 유해 2具가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쪼그린 채 화석처럼 발견됐다』면서 『多富洞의 영웅은 바로 이분들』이라고 말했다.
  
   朴교수는 『多富洞 지역 유해 발굴을 해본 결과,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골의 특징이 15~17세인 유해가 14%나 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곳의 유해 발굴에서는 22~24세 연령의 유해가 60~70%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밝혔다.
  
   朴교수는 이번 육군의 유해 발굴사업이 한시적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朴교수는 하와이에 있는 미국 육군 중앙신원확인소(CILHI)의 예를 들었다. 이 부대는 150여년 전에 대통령 직속기구로 창설한 유해 발굴 부대다.
  
   『미국 정부는 전쟁포로와 실종자들의 무사 귀환, 시신 수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여 적극 대응하고 있습니다. 인류학자겙恣灼隙美?포함한 170여 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확인소 대원들은 미군의 유해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찾아나서요』
  
   그는 강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유해 발굴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입합니다. 그들은 한국전에서 전사한 美軍의 未발굴 유해 8000여 具에 대해서도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송환하는 美軍 유해를 1具당 8만 달러씩 주고 가져오는 겁니다. 이 예산은 대통령 직속 기획국 예산으로 의원들이 예산을 1달러도 안 깎아요. 미국은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白善燁 장군은 多富洞 전적기념관 광장에 있는 구국용사충혼비에 분향했다. 충혼비는 金泳三 대통령 재임시절인 1995년 6월24일 건립됐다.
  
   多富洞 전투 생존자 610명으로 구성된 多富洞 전투구국용사회가 1995년부터 지금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이 일대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여 발굴한 아군 유해 259具를 안장한 묘가 충혼비 뒤편에 있다.
  
   그 옆으로는 多富洞 전투 참전용사의 이름이 새겨진 「名刻婢(명각비)」가 있다. 白장군은 명각비에 새겨진 金東斌, 金點坤, 朴基丙, 崔榮喜, 金益烈 등 참전자 1122명의 이름을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살폈다. 그러나, 여기에 새겨진 이름은 국군과 美軍 등 아군 참전자 8000여 명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다. 아직 공식적인 참전자 명단이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1사단과 같이 싸운 6사단(당시 사단장 金鐘五 준장) 출신 李德煥(이덕환?0)씨가 손자의 손을 잡고 이곳에 왔다가 白善燁 장군을 만나자 부동자세로 『각하를 만나뵙게 돼 영광』이라며 경례를 했다. 白장군은 지갑을 열어 그의 손자에게 만원을 쥐어주기도 했다. 그는 『6?5때 할아버지가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장소에 오면 자연스레 손자에게 반공 교육이 될 것 같아서 데리고 왔다』고 했다.
  
  
   『전투 중 부하 뺨 한 대 때린 적 없어』
  
  
   기자가 白장군에게 『6?5 당시 모든 지휘관에게 재판 없이 처단할 수 있는 「즉결처분권」이 주어졌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용서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부하들도 많았을 텐데 장군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갑자기 기자의 뺨을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 기간 중 부하들을 뺨 한 대 때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며 역경을 넘겼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犯法者(범법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그 판결에 따라 처벌하도록 했어요. 무엇보다 지휘관은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기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多富洞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法傳寺(법전사)를 지나면 1951년 4월 多富洞전투 승전을 기념해 이곳 주민들이 세운 白善燁 장군 護國救民碑(호국구민비)가 있다. 이 비석의 가치는 「자발적」이라는 데서 빛난다.
  
   비석 뒤편을 보니 漆谷郡守 金玉顯(김옥현), 漆谷경찰서장 李宜承(이의승), 東明面長 李承焄(이승훈), 架山面長 李孝甲(이효갑), 架山面民 일동으로 돼 있다. 50년의 세월에도 비석은 엊그제 만든 것 같이 새로웠다. 그의 비석을 덮고 있는 온갖 잡초와 엉겅퀴가 오늘날 자유로운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스스로 무안했다.
  
   유학산 밑 마을 정자에는 마침 村老(촌로)들이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白장군이 다가가서 『내가 白善燁이오!』 하자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일어서서 『이분이 6?5 때 이곳서 사단장 했다카이. 점심 좀 같이 드시고 가이소~』 하며 손을 잡아 끌었다. 어떤 이는 白장군의 손을 어루만지며 박수를 쳤다. 할머니가 권하는 음료수에 목을 축이던 白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6?5 전쟁 중 7사단에 근무했다는 姜判守(강판수?5)씨와 權五喆(권오철?7)씨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퍼는 반쯤 열린 모습, 점퍼 차림에 무릎이 튀어나온 면바지, 누런색 운동화와 고무신 차림으로.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점퍼 지퍼를 올리고, 옷매무새를 고쳐잡았다. 허리를 펴려 했으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구부정한 채로, 白장군과 눈이 마주치자 경건하게 오른손 바닥을 펴고 이마 옆으로 갖다대고 있었다. 신병들의 군기잡힌 경례는 아니었지만 콧날이 시큰한 감동이 묻어났다. 白장군도 자세를 가다듬고 양 발을 모은 채 경례를 하고 있었다.●
  
[ 2008-10-01, 00:0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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