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文學을 읽어야 하는가?
文學은 인간에 대한 탐험이다. 인간의 본질과 복잡성과 양면성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는 문학가들은 모범생일 수 없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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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承用 선생의 '영문학 산책'은 위대한 문학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준다. 文學은 인간에 대한 예술이고 기술(記述, 技術)이다. 역사는 국가와 민족을, 철학은 세상의 원리를, 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다룬다. 인간 본질에 대한 省察(성찰)이 깊을수록 작품은 위대해진다. 소설이든 詩이든 劇作이든 인간 본성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다. 지난 500년간 가장 위대한 서양의 문학작품을 두 개로 꼽는 경우가 있다.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의 햄릿,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의 동키호테.
  
  햄릿은 심각한 사람이고, 동키호테는 웃기는 사람이다. 두 작품은, 인간의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兩面性을 드러낸다. 이 두 작품을 읽어가면 나 안에 햄릿과 동키호테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문학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신중해진다. 인간의 복잡성을 알게 되면 함부로 인간을 裁斷하지 못한다.
  
  위대한 문학가중엔 모범생이나 우등생이 많지 않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 奇人, 외톨이, 그리고 천재들이다. 인생을 여러 측면에서 경험하고 사색했던 이들이다. 기복 있는 삶을 살지 않고는 인간과 인생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문학가는 그런 면에서 인간 탐험가들이다. 탐험가들처럼 문학가들은 호기심이 많다. 기복 많은 인생을 지나면서도 변하지 않는,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이 그들의 눈인 것이다. 오늘 朴承用 선생의 햄릿 해설에 나오는 한 대목을 통하여 나의 沈淵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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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왕은 남편이 죽더라도 결코 재혼하지 않겠다는 아내의 맹세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대가 지금 하는 말 진심으로 믿는 바이오.
  그러나 우리가 결심한 것을 종종 우리가 깨뜨리는 법이요.
  각오란 필경 기억의 종살이, 태어날 때는 아무리 강해도 지탱할 기운이 약한 것이요.
  선 과일처럼 지금은 나무에 달려 있어도 익으면 저절로 땅에 떨어집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에 진 빚이니 우리 스스로 갚기를 잊어버리는 것은 필연이지요.
  격정에 휩쓸려 約定(약정)한 일은 격정이 식으면 잊어버립니다.
  강렬한 슬픔이나 기쁨은 그것의 강렬한 실행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가장 큰 곳에 가장 큰 슬픔이 있어요.
  사소한 일로도 기쁨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소. 그러니 이상할 것 없어요.
  처지에 따라 우리의 사랑이 변한다 하더라도.
  
  내 말을 정리하자면
  사람의 의도와 운명은 相反(상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계획은 언제나 뒤집혀지기 마련이란 말이요.
  생각은 내 것이로되 생각의 결과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극중 왕은 아내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는 인간의 각오나 결심의 妥當性(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생각은 삶의 노예이고 삶은 시간의 어릿광대이다. 생의 道程(도정)에서 생각은 삶의 從屬變數(종속변수)이며 삶은 시간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어릿광대의 희극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과 표현이 일치하더라도 시간의 진행은 인간의 의지를 거짓말로 만든다.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에 있는 세계에서 “생각은 내 것이로되 생각의 결과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나 의도의 信憑性(신빙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간의 문제가 햄릿의 독백 “사느냐 죽느냐”를 영원한 딜레마로 만든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불확실성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불확실성은 死後(사후)세계에까지 연장되기 때문에 죽음이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햄릿의 양심은 그로 하여금 미래의 시간에 일어날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생각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우리 모두를 비겁한 사람으로 만들며,
  그래서 처음 覺悟(각오)할 때의 생생하던 決意(결의)의 색채는
  생각의 창백한 그늘 때문에 병색이 되고
  크고 중요하던 일도 이로 인해서 흐름이 뒤틀려서
  마침내 실행의 명분을 잃고 마는 것이다.〉
  
  
[ 2008-12-05, 11:5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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