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治化가 사회의 선진화와 一流化
전쟁중에도 法治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한국은 一流국가로 갈 것이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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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분자들에 대한 李 대통령의 엄단 방침를 받은 趙 장관은 '법대로 옥석을 가려라'고 경찰에 지시했다.
 
 
한국이 1948년에 자유民主국가로 출범하였다는 말은 法治국가임을 선언하였다는 말이 된다. 대통령의 명령보다도, 군대의 탱크보다도, 폭도들의 함성보다도 헌법이 더 무서운 규범이라는 데 합의한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고 폭도들이 法治를 유린한 적도 있었지만 '법대로'가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선진화와 민주주의의 성숙은 이제 法治확립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한국의 法治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先覺者들과 선배세대의 놀라운 용기와 희생과 고민을 딛고 여기까지 왔다. 전쟁중에도 한국은 법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전쟁중에도 李承晩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고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으며 선거까지 치렀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1950년 8월은 대한민국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여름이었다.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다. 대구, 경주까지 공산군이 들어오면 부산 교두보를 지킬 수 없다. 준비중이던 인천상륙작전도 의미가 없어진다. 미군은 상륙작전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론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대구에 내려와 있던 李承晩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장소는 曺在千 경북지사의 관사였다. 각료중 조병옥 내무장관, 신성모 국방장관이 왔고 몇 몇 장관들은 다른 일로 불참했다. 이때 기록을 담당했던 김수학 전 국세청장에 따르면 李承晩 대통령은 후방의 좌익분자들에 대한 엄중한 조치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동안 같은 동포라고 관용으로 대해주었으나 이젠 단호하게 처리하라'
   李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6.25 전 좌익활동가 출신으로 전향했던 인사들이 검찰과 경찰의 지도하에 보도연맹을 결성해놓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보고 이들을 소집한 뒤 집단적으로 처형하는 일이 있었다. 정부는 좌익분자들뿐 아니라 억울한 이들도 예비검속하여 가두어놓고 있을 때였다. 전향했다는 좌익들이 공산당 천하가 되니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군경 가족들을 찾아내 죽이는 만행을 벌였다. 벼랑으로 몰려 생존투쟁을 하던 李承晩 정부로서는 뭔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李 박사가 자리를 뜨자 趙炳玉 장관이 입을 열었다. 그는 배석한 경찰간부들을 향하여 말했다.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이고 법치국가입니다. 아무리 重罪人이라도 玉石을 구분하여 법에 따라 신중하게 처리하여야 합니다'
  
   앞의 대통령 지시를 상당히 완화시키는 말이었다. 소인배들은 상관의 지시를 더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일을 악화시키는데 趙炳玉 장관은 상관의 과격한 지시를 법의 테두리 안에 수렴하는 완충역할을 했다. 趙장관의 이 조치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면했을 것이다. 그 趙장관은 군대가 대구를 포기하면 경찰병력으로 막겠다는 이른바 대구死守 선언을 한 사람이다. 당시의 주한미국 대사 무초의 증언에 따르면 李 대통령이 존경하고 두려워 한 유일한 사람이 趙 장관이었다고 한다. 趙炳玉씨의 아들이 趙舜衡 민주당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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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非子와 法治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인물 가운데 韓非라는 사람이 있었다. 韓나라의 왕족이었다. 기원 전 3세기 그가 쓴 책이 韓非子이다. 한비자는 또한 韓非를 높혀 부르는 존칭어이다. 이 책은 55편 22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韓非子는 말더듬이로서 말은 서툴렀지만 글은 잘 썼다. 韓非子에 실린 문장은 단순 명쾌하여 지금 읽어보아도 요사이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여러 가지 생각하게 하는 바가 있다.
  
   그는 君主, 즉 위정자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고 신하들을 어떻게 부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로 助言과 충고를 하고 있다. 그는 군주가 法治를 엄하게 실천함으로써 권력기반을 확고하게 하고 신하들의 발호를 견제하여야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고 富强兵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韓非子는 「유교를 숭상하는 儒者들은 글로써 법을 어지럽히고 俠者, 즉 武士들은 무기로써 禁令까지 마음대로 범하였으며 평화시에는 영예 있는 사람을 높이다가도 사태가 급하면 무사들을 쓰게 되므로 그들의 맡은 직무가 평소 배운 것과는 달라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경향을 개탄했다. 秦始皇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韓非子를 읽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
  
   진시황은 『아, 이 사람을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구나』하고 감탄했다. 秦나라가 한나라로 쳐들어간 이유도 韓非를 얻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한나라 왕은 韓非子를 重用하지 않았는데 진나라가 쳐들어오자 화평사신으로 진시황에게 보냈다.
  
   한비자는 여기서 친구 李斯를 만났다. 韓非子와 李斯는 性惡說의 주창자 荀子의 제자였다. 李斯는 말은 잘했으나 글은 韓非子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자기보다 실력 있는 친구 한비자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李斯는 친구를 모함했다. 그리하여 한비자는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이국의 감옥에서 독살되었다.
  
   참모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뜻을 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군주론, 정략론, 전략론을 써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연 마키아벨리도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플로렌스에서 불우한 나날들을 보낸 관료였다. 마키아벨리도 끝내 자신의 웅대한 뜻을 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꿈을 담은 군주론은 불후의 명작으로 남아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의 참고서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도 군주의 힘을 강화하여 신하들을 눌러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약1천7백년의 時差를 가진 사람이지만 나라를 부강시키고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려면 군주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서양의 한비자인 셈이다.
  
   책 「韓非子」의 도입부는 신하가 군자에게 진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하는 難言이란 제목의 글이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말을 지나치게 잘 하면 믿음이 가지 않고, 빈틈이 없는 말은 옹졸하게 들리며, 事例를 많이 인용하여 쉽게 설명하면 내용이 공허하고, 요점만을 말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무례하게 들리며, 듣는 이의 마음을 살펴 그럴 듯하게 설명하면 군주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다고 불쾌감을 갖게 된다. 詩經이나 書經에 있는 가르침을 무조건 인용하는 사람은 지금 세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꼴이다. 이것이 내가 함부로 말함을 두려워하고 어떻게 하면 나의 진정이 받아들여질까 하고 항상 근심하는 이유이다>
  
   한비자는 孔子와 孟子의 유교가 관념적인 도덕론만 주장하고, 老子 - 莊子의 도교는 허황한 이야기만 퍼뜨린다고 비판했다. 그는 법치의 확립과 경제발전을, 나라를 다스리는 핵심으로 파악했다. 이런 韓非子의 실용적 통치술을 이어받은 동양정치가로는 秦始皇, 漢武帝, 鄧小平, 李光耀, 朴正熙 같은 이들을 꼽을 수 있다. 「한비자」는 권력자들의 교과서라고 하여 유학자(儒者)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다. 도덕을 앞세운 유교적 정치노선이 주류(主流)를 이룬 동양에서는 한비자 계통(系統)은 이단시(異端視)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이 모두 천사이면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고 법률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한 韓非子의 법치론은 영원히 유효할 것이다.
  
[ 2009-03-26, 11: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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