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km 군사도로 直道(직도)
흉노의 땅, 내몽골 오르도스를 가다④: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개통시킨 직도는 참으로 백성을 혹사하여 건설된 것이었다"(사마천의 '사기')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南北 흉노의 분열

 

 광무제 유수(劉秀)가 창업한 후한(後漢)은 전통적인 국책에 따라 우선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오아시스 제국을 초무하여 이곳으로부터 흉노의 세력을 일소했다. 다시 흉노의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고 포노(蒲奴) 선우의 종형 일축왕(日逐王)이 자립, 선우를 자처해 두 선우가 병립해 다투었다. 일축왕은 한에 투항을 요청, 광무제는 일축왕과 그 집단을 장성 남쪽으로 옮기게 해서 북변의 방어를 맡겼다. 이것을 南흉노라고 했는데, 이로써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했다.

 몽골에 머물고 있던 北흉노는 외몽골 오르곤 강반에 선우정(單于庭)을 설치하고 西아시아 방면과의 교통로이던 천산남로를 놓고 후한과 자주 싸웠다. 이런 시기에 동방에서 흉노의 지배를 벗어난 선비족은 흉노를 습격해서 優留 선우를 죽이고, 북방의 정령, 남방의 남흉노도 이런 기회를 타고 북흉노를 공격했다. 이에 北흉노는 버티지 못하고 알타이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한·남흉노 연합군의 토벌을 받고, 몽골의 땅을 버리고 천산북로· 이리 강반으로 도주했다.

 이것이 유럽에 나타나 로마·게르만 세계에 민족대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던 훈족이었다. 이리하여 몽골 지방은 동방으로부터 진출해 온 선비족이 점령하게 되었고, 흉노의 잔류 부족은 겨우 오르도스 일대에 산재하게 되었다.

 필자 일행은 오르도스 답사에 앞서 내몽골자치주 포두시(包頭市)에 들렀다. 包頭박물관은 다양한 암각화 전시로 유명하다. 춘추시대의 인물상(人面像) 암각화, 西夏시대의 草原牧歌(초원목가) 암각화 등이 인상적이었다. 單于天降(선우천강)이라는 글자가 양각된 기와(瓦當), 손잡이 달린 흉노시대의 청동제 훈로(薰爐) 등도 눈길을 끈다.

 

▲秦의 直道의 종점인 包頭市 九原 麻池城 유적

 

 황하 만곡부(彎曲部)의 북안에 위치한 포두라면 漢代의 오원군(五原郡)이다. 포두시의 남쪽에는 한대의 마지성(麻池城)의 유적이 있다. 마지성이야말로 오원군의 치소(治所)였던 九原이다. 마지성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황하가 흐르고, 지금도 도선장이 있다.

마지성 마을에 찾아오니 더러‘九原…’이라 쓰인 간판이 눈에 띈다. 구원이라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騎射 등 격투기에 가장 능통했던 呂布(여포)의 고향이다. 예컨대 여포는 유비(유비)·관우(關羽)·장비(張飛)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격파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물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중국인이지만, 포두 시내뿐만 아니라 마지성 마을에서도 여포의 기마상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양부로 섬기던 丁原과 董卓을 죽인 여포는 악당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인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생애는 배신의 연속이었다. 그는 처음 병주(지금의 산서성)자사 정원을 양부로 섬겼으나 동탁의 꼬임을 받아 정원의 목을 베고, 동탁의 부하가 되었다(189년). 동탁은 궁술과 마술에 있어 당대 제1인자인 여포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적토마(赤免馬)를 타고 일세를 풍미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사람 중에 여포, 말 중에 적토”라면서 그의 무용을 찬탄했다.

 헌제(獻帝)를 옹립해 발호했던 동탁은 드디어 찬탈을 기도했다. 이를 막으려 했던 사도 王允은 동향 출신 여포를 이해(利害)로써 포섭했다. 때마침 여포는 동탁의 시비(侍婢)와 통정하는 현장이 발각되어 동탁으로부터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상황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절세미녀인 그의 수양딸 초선을 여포에게 먼저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한 뒤 동탁의 첩으로 보냈다. 여포의 질투심을 불지르기 위한 왕윤의 계교였다. 이에 분노한 여포가 동탁의 목을 베었지만, 초선은 가공인물이다.

 흔히 중국인들은 춘추시대 말기 吳王 부차를 망국의 군주로 몰락시킨 서시(西施), 흉노 선우에게 시집 간 왕소군, 唐(당) 현종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유발시킨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초선을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고 있지만, 이 가운데 초선만은 역사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초선의 고향이라는 감숙성 주천(酒泉)에 가면 초선의 동상까지 세워놓고 있다. 중국인에게는 <삼국지연의>의 픽션도 역사의 사실인 것처럼 믿으려는 정서가 있다.

 여포의 출신성분은 불명이지만, 그의 출신지가 북방 초원지대인 九原이고, 騎射에 능숙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기마민족의 피가 섞인 호한잡종(胡漢雜種)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호족들은 어릴 때부터 안장은 물론 鐙子(등자)도 없는 나마(裸馬)의 등에 올라 사타구니를 바짝 조인 채 달리면서 낮은 자세로 활을 쏘았다. 중국에서 등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5세기였다. 여포가 활약했던 2세기 말에는 등자가 없었던 만큼 어릴 적부터 기사를 익혀오지 않은 漢族이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르면 낙마의 위험이 높았다. 당시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낙마하면 치명상을 입게 마련이었다.

 

 북방민족의 중국 移住

 

 북방민족의 중국 이주는 각 시대에 걸쳐 많든 적든 진행되었다. 북방민족의 침입에 앞서 최초의 大이주가 시작된 것은 실은 후한 광무제 때 남흉노의 장성 이남 이주(移住)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후한 말기, 그들 여기에서 그들은 선우를 받들던 옛 씨족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한의 郡縣과는 別계통의 자치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에 의해 생활난에 빠진 끝에 씨족으로부터 탈퇴, 한의 군적에 드는 자도 많았다.

 후한 말, 동탁과 정원이 헤게머니를 다툰 것은 감숙성·청해성에 이주해 있던 티베트계 강족을 병력으로 삼았던 세력(동탁)과 산서성 중부 이북과 내몽골 일대에 이주해 있던 南흉노·선비족 병력을 거느린 세력(丁原)의 다툼이었다.

 특히, 한의 북변인 幷州는 중앙에 위치, 그 동쪽은 기주(冀州), 서쪽은 양주(凉州)였다. 동탁은 병주자사 정원을 살해한 후 凉·冀 2州의 호기(胡騎)를 장악, 수도 낙양(洛陽)에서 마음대로 정권을 농단했던 것이다.

 후한 천하의 분열을 초래한 것은 동탁이었고, 동탁의 사후에 그 지위를 계승했던 인물이 조조(曹操)였다. 동탁에 의해 시작된 胡騎의 천하 횡행이야말로 중국의 고대사적 발전을 정지시켜 중세적 분열에 빠뜨린 제1보로 평가되고 있다.

 조조는 동탁의 옛 부하인 호병을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 유목민 기병을 징발하여 대열에 가담시켰다. 그 하나는 병주의 흉노부족이고, 그 둘은 요서(遼西)의 오환(烏桓) 부족이다. 오환은 선비와 함께 동호의 후예이며, 요서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조는 기주를 출발해 오환의 본거지 柳城(유성: 지금의 요녕선 朝陽)을 급습하여 선우를 죽이고, 1만여 落(1락은 약 20명)을 붙잡아 기주 내부로 옮겨놓고 그 중으로부터 징집한 오환 돌기(突騎)는 당시 천하의 정예로 일컬어졌다.

 북방민족의 중국 이주의 사례로 다소 자세하게 여포를 거론했지만, 포두는 진한(秦漢)시대엔 내몽골 최대의 교통요지였다. 장안 교외의 별궁인 감천궁(甘泉宮)으로부터 포두까지 길이 약 1000km의 군사도로인 직도(直道)가 건설되어 있었다. 직도는 진시황의 명에 의해 장군 몽념(蒙恬)에 의해 축조되어 한 무제 때 흉노 정벌을 위한 병력·병참의 수송로로 사용되었다.

 

▲秦의 直道 관문

 

 한 무제도 국내 순행 후 직도를 통해 장안으로 귀경했는데, 이때 사마천은 사관(史官)으로서 무제를 수행했다. 사마천의 관심은 장성과 직도 건설에 투입된 엄청난 노력과 그것을 실행한 몽념의 운명이었다. 사마천의 <사기>몽념 열전에는 그때의 인상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북변에 가서 직도를 통해 돌아왔다. 그곳에 가서 몽념이 건설한 장성의 모습을 보았다.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개통시킨 직도는 참으로 백성을 혹사하여 건설된 것이었다>

 몽념 열전에서는 환관 조고(趙高)가 위조한 진시황 명의의 조서를 받은 태자 부소(扶蘇)가 자결한 데 이어 몽념도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때 목념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몽념은 한숨을 쉬면서, “나, 몽념의 죄는 죽어도 당연하다. 임조(臨조: 감숙성)로부터 요동까지 만여리의 장성과 직도를 축조하면서 지맥을 끊은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논찬(論贊)에서 몽념의 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천하의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던 만큼 진의 명장이라면 강력하게 간(諫)하고 백성의 화합에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뜻에 영합하여 토목사업을 일으켰다. 몽념과 몽의(蒙毅) 형제가 주살된 것은 당연하다. 어찌해서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릴 것인가>

 

 황하의 大彎曲部를 건너

 

 진의 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는 오르도스(鄂爾多斯)시 동승구(東勝區)를 답사하기 위해 마지성에서 남하하여 황하 위에 걸린 포두 황하 제1대교를 건넜다. 휴대용 GPS 로 이곳 황하를 측정해 보니 高度(고도) 1005m, 북위 40도 31분, 동경 109도 54분이었다. 황하 만곡부는 고원지대를 흐르고 있는 것이다.

 

▲비에 젖은 황하. 包頭市 남방 황하 만곡부에서


 황하를 관찰하기 위해 마이크로버스를 세워놓고 대교 위를 걸었다. 강폭은 엄청 넓으나 대하답지 않게 수량은 적었다. 좌우 가장자리의 강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다. 대교 위에서 건너편 철교 너머에 위치한 도선장을 바라보았다. 대교가 건설된 이후엔 유람선의 뱃머리가 되어 있다.

 갑자기 대교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철광석을 만재한 대형 트럭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을 듯 달려왔다. 대교의 바닥은 트럭에서 떨어진 철광석 등으로 시커멓다. 삐긋하면 트럭에 깔릴 판이었다. 황급히 황하 남안으로 달려와 미니버스에 올랐다. 포두는 현대 중국 유수의 철광 산지이다.

 오르도스는 황하 만곡부 안쪽에 들어있는 고원지대로 초원·사막·황무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넓이가 함경남·북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면적만 하다. 잡초 이외엔 간간히 속성수인 미류나무의 一字 행렬로 불모지를 면할 정도였다. 가는 길에 샹샤완 사막에 잠시 들렀다. 태고엔 황하 연변에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황무지가 되고 말았을까.

 원래 중국 북부 내륙지방은 연간 강우량이 500mm 이하의 건조지대다. 그럼에도 황하는 세계 4대 문명을 일으킨 중국의 어미 땅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내륙의 황하 양안을 거친 땅으로 만든 주범이다. 고대 중국인은 경지를 늘리기 위해 산림을 파괴했다.

 특히 전국시대 이후 계속된 전란기에 부국강병을 위해 철제의 농기구와 무기를 대량 생산했다. 19세기 말기까지 그러했지만, 철을 생산하기 위한 연료로서 산림 목재가 대량으로 소요되었다. 이 때문에 황하의 산림들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외국 원정을 가장 많이 해 최대의 전과를 기록한 한 무제의 시대는 중국의 피크이자 쇠락의 출발점이었다. 한 무제 이후 세계사에 기록될 만한 漢族 국가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무제의 잦은 원정과 토목사업, 그리고 순행과 봉선(封禪)에 의한 재정의 피폐상을 기록했다.

 <사기>평준서(平準書)에 따르면 무제가 즉위하기 전까지 왕조의 창고와 府에는 곡물과 돈이 넘쳐나 곡물뿐만 아니라 동전의 꿰미가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 때, 잦은 주변국 정벌로 인한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작위를 팔고, 사형수도 돈만 바치면 사면해 주며, 소금과 철의 국가 전매(專賣) 제도를 단행했다.

 미니버스의 중국인 운전사와 조선족 가이드는 구릉과 초원·사막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끝내 직도의 유적지를 찾지 못했다. 지나가는 택시를 앞장세워 직도 유적지에 도착했다.

 

▲秦 직도 재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東勝 외곽의 직도 유적지는 오랜 침식작용에 의해 폐허화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유적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관문 현판에 예서로 秦直道(진직도)라고 씌어 있다. 관문 남쪽으로 10차선이 될 만한 곧은 도로가 몇 km 뻗어 있다. 아무튼 최근 중국은 역사 현장의 복원에 열정적이다. 그러나 너무 번듯하게 만들어 유적지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직도 관문에서 GPS로 측정해 본 결과 고도 1530m이다.

 직도 유적의 답사 후 우리 일행은 오르도스 시내로 되돌아와 1박하고, 다음날 오르도스 청동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흉노 선우의 금관은 우리 경주의 서봉총(瑞鳳冢)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처럼 새가 한 마리가 날렵하게 올라앉은 형태이다. 신라김씨와 흉노의 친연성(親緣性)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도록 사진 참조).

 

▲태양신 벽화 및 금관

 

 흉노는 궁려(穹廬)라는 방차(房車)를 타고 이동하면서 생활했던 만큼 차마구(車馬具)가 발전한 나라였다. 마구에는 동물 의장(意匠)을 베풀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생활용품과 도구는 비교적 간소했다.

 흉노의 기본 병기는 궁시(弓矢)였다. 활은 처음엔 짧은 만궁(彎弓)이었으나, 후에는 중국풍의 장궁(長弓)을 사용했다. 흉노의 독창적인 화활촉은 뿔로 만든 명적(鳴鏑)이다. 광활한 초원의 전투에서 신호용으로 사용되어 효시(嚆矢)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날“무엇을 처음 했다”고 할 때 효시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변형 더듬이식 머리 청동단검 및 고리머리 청동단검

 

 단검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흉노의 검은 스키타이(흑해 연안의 기마민족국가) 및 고대 페르시아의 아키나케스와 동형의 경로도(俓路刀)이다. 청동제의 투구·찰갑(刹甲) 등 武具도 매우 화려했다. (계속)

[ 2009-08-03, 17: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