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國家목표와 국가意志, 그리고 국민行動윤리
헌법 1,3,4조는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고 자유통일하라'는 명령을 국가와 국민들에게 내리고 있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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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세적 國家의지: “북한노동당 정권의 해체에 의한 자유통일”

 

  우리 헌법은 ‘북한노동당 정권의 평화적 해체’에 의한 자유통일을 國家의지와 國家목표로서 명시하고 있다.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선언하고,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못박음으로써 북한지역도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國家의지를 확실히 하였다. 북한지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려면 통일을 해야 하는데,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추진하라고 명령하였다. 헌법 1, 3, 4조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正體性을 담은 헌법의 뇌수요 심장이다. 여기에 손을 대는 것은 國體변경을 가져오므로 개정 불가조항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여 북한지역까지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자유통일 사업을 위하여 헌신할 의무’를 지게 된다.

  대한민국 헌법 1, 3, 4조는 한반도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의 이념-무장대결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善과 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의 각성

 

  우리의 국가적 목표는 자유통일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최종적인 국가목표는 자유통일을 달성하여 북한주민들까지 자유민으로 만든 뒤 7000만 민족집단이 一流국가를 건설함으로써 구성원이 창조적으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즉, ‘통일되고 번영하고 강력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이런 국가목표에 同意하는 주변국가는 현재로는 미국밖에 없다. 韓美동맹은 우리의 생명줄이자,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에 필수조건이다.

  한반도의 再통일은 韓民族의 단결과 민족自決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뤄질 때 어떤 外勢도 이를 막을 수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북한주민들의 선택이 중요하다. 북한주민들이 남한의 同族과 합치겠다고 결단하도록 지금부터 그들의 마음을 잡아가야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人權문제 등을 꾸준히 제기하여 북한노동당 정권을 압박, 북한주민들에 대한 탄압을 약화시키는 것. 그리고 북한주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의 방도를 모색하고 확대함으로써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돈, 자유, 人權, 진실을 들여보내 그들을 각성시키고 그들의 힘으로 북한노동당 정권을 몰아내도록 하는 것이다. 對北풍선보내기나 對北방송은 북한동포직접돕기의 좋은 예이고, 개성공단 사업이 상호주의적으로 진행될 때는 접촉면을 넓히는 데 좋다.

 

 法治와 교양

 

  북한의 자유화는 민주주의의 基地인 남한이 法治주의를 성숙시켜야 가능하다. 한국인들은 지난 61년간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국민국가 건설과정을 지나왔다. 남은 과제는 민주주의를 성숙시켜 그 힘으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法治의 생활화를 뜻한다.

  法治주의를 정착시키려면 정부, 정당, 언론, 대학 등 이 사회의 지도층부터가 憲法정신을 행동윤리로 신념화해야 한다. 反헌법적-反국가적 세력을 응징, 순화하여 약화시키고, 6·15 선언과 같은 反헌법적 정책을 폐기하여야 한다. 惡黨과 깽판세력을 응징할 수 없는 나라로 계속 간다면 통일도 一流도 안 된다. 惡을 응징하려면 국가엘리트의 自淨-自强 노력이 先決되어야 한다.

  동시에 卑俗語(비속어) 및 암호로 전락하고 있는 韓國語를 교양어로 가꾸어 나아가야 한다. 언어가 思想을, 思想이 행동을 지배한다. 한국어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으면 나라도 정상적일 수 없다. 한국어의 2大 표기 수단인 漢字와 한글 중 漢字를 포기함으로써 반신불수가 된 한국어를 復元하는 길이 바로 선진화의 길이다. 한국은 인터넷 사용률은 세계 1등이지만 文盲率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漢字)문맹률 70%인 나라의 정신은 아무리 잘 살아도 3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50大 사건으로 본 한국 現代史의 핵심과 흐름

  

대한민국은 嫡子로 태어났다

 

 1. 미국은 해방자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켰으므로 光復이 왔다.

 2. 남북분단의 책임자는 소련과 김일성이다. 38선은 군사주둔지의 경계선이었지 分斷線이 아니었다. 자유왕래를 금지시켜 이를 分斷線으로 만든 것은 소련과 김일성 집단이었다.

 3. 스탈린은 북한을 점령한 직후인 1945년 가을에 북한지역을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어 소련의 衛星國化한다는 방침을 확정, 정권 수립에 착수하였다. 李承晩이 남한지역에서라도 우선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 1년 뒤였다.

 4. 공산당 路線은 민족반역이었다. 李承晩-金九가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반대한 것은 민족자결 선언이자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꼭두각시임을 폭로한 결단이었다. 이로써 反共자유 노선과 反민족-事大 노선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5. 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하여 탄생하여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총선, 국회구성, 헌법제정, 정부 구성의 절차에 대하여 구성원의 同意가 있었으므로 정통성과 합법성을 갖게 되었다. 선거를 감시한 유엔의 公認도 받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이념으로 선택하였다.

 

농지개혁으로 인구의 반 이상을 自由民으로 만들다

 

 6. 李承晩 초대 내각은 독립투사 내각이고 김일성 초대 내각은 非命橫死 내각이다. 李承晩은 左右합작을 추진하는 미 軍政과 맞서 나라를 세웠고, 김일성은 스탈린한테 불려가 시험을 쳐서 합격됨으로써 지도자로 지명되었다.

 7. 李承晩 정부는 反民특위를 통하여 親日派를 斷罪하였으나 북한정권은 정권편의 친일파는 보호하고 반대하는 친일파만 처단하였다.

 8. 李承晩 정부는 농지개혁으로 인구의 반 이상을 自由民으로 만들었다. 북한은 농지개혁으로 압수한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國有化함으로써 농민들을 노예상태로 만들었다. 북한은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농지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세습 봉건체제이다.

 9. 李承晩 정부는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시설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며 戰時에도 대학생을 징집대상에서 면제시켜주었다.

 10. 1949년 6월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하였다. 이것이 6·25 남침의 초대장이 되었다.

  

미군 150만 명을 한국으로 보낸 트루먼의 결단

 

 11. 6·25 남침은 민족반역의 전쟁범죄 행위였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락과 지원, 모택동의 保證下에 同族을 치는 전쟁을 일으켰다.

 12.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參戰 결정은 군부의 판단과는 관계없는 개인적 결단이었다.

 13. 미국의 젊은이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의 부름에 응하였다. 미군 150만 명이 參戰, 10%인 15만 명이 죽고 다쳤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던 8군 사령관도, 후임 8군 사령관의 아들도 戰死하였다.

 14. 유엔군의 기치 하에 16개국이 實兵을 보냈고 5개국이 의료 등의 지원을 하였다.

 15. 김일성은 북으로 도주하면서 모택동의 중공군을 끌어들여 민족통일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國際戰場으로 만들었다. 이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말한 이가 노무현이었다. 총퇴각하는 유엔군에 대하여 한국 死守를 명령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한국을 두 번 구한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소수이다.

 

反共포로 석방으로 韓美동맹 쟁취

 

 16. 李承晩 정부는 戰時中에도 국회 문을 열고, 선거를 하였고,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통화개혁을 할 때도 개인의 예금 동결에 반대하였다. 이런 사람을 독재자로 매도할 수 있는가?

 17. 미국은 휴전협상 때 敵軍 포로의 人權(거주지 선택의 자유)을 지켜주기 위하여 자유의사 확인 후의 송환 원칙을 견지하였다. 회담은 2년을 끌었다. 이 기간에 수십 만 명이 戰死하였다.

 18.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휴전하게 해달라고 애걸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 李承晩의 反共포로 석방(1953년 6월18일)이 아이젠하워 정부를 압박, 韓美동맹을 만들어냈다.

 20. 李承晩은 休戰에 동의해주는 代價로 한국군 20개 사단의 현대화, 대규모 경제원조, 미군 주둔 등의 약속을 얻어냈다.

 

國軍이 最强의 先進조직으로 등장

 

 21. 6·25 전쟁으로 70만 국군이 最强의 先進조직으로 등장하였다.

 22. 李承晩은 전쟁 중에도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 獨島를 지켜내고 어업자원을 보호하였다.

 23. 李承晩은 戰後 복구를 추진하면서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 원자력원을 설립하고 대학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는 등 장기적 안목의 人才양성을 꾀하였다.

 24. 이승만의 老齡化와 자유당의 부패가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하였다.

 25. 1960년 4·19 학생의거 때도 주된 구호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였지 李대통령 퇴진이 아니었다. 李대통령은 시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스스로 사임하였다.

 

 朴正熙, 개방적 근대화 노선 선택

 

 26. 李承晩 하야 후 야당이던 민주당은 내각제로 改憲하고 집권하였으나 내부 분열로 사회 혼란을 불렀다. 좌익세력이 행동을 개시하여 군인들과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27. 1961년 5·16 군사혁명에 대하여 서울시민 약 60%가 찬성, 20%가 반대하였다(미군의 가두 여론조사).

 28. 주체세력인 장교단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교육된 先進집단이었다. 10%는 미국 유학 경험자였다. 군사혁명의 지휘자인 朴正熙-金鍾泌 콤비는 知的, 인격적, 실천력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29. 박정희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직수입을 거부하였으나 폐쇄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누르고 對外개방적인 근대화 전략과 수출입국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독창적인 방식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30. 한국인들은 1963년 10월 선거에서 16만 표차로 朴正熙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강력한 근대화 노선을 선택하였으나 야당과 언론 및 학생세력을 민주적 견제장치로 부렸다.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운다

 

 31. 1960년대 한국은 경공업을 발전시키고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면서 해외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수출진흥, 韓日국교 정상화, 월남파병으로 한국인의 활동 무대가 넓어졌다.

 32. 4대 군사노선을 걷고 있던 북한은 1967~1969년 사이 특공대와 게릴라들을 서울과 후방에 침투시켜 사회교란을 획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3. 朴正熙는 이에 應戰하여 예비군 창설, 自主국방력 건설에 착수하였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시대였다.

 34. 1963~1972년 유신선포까지 박정희 정권은 선거의 자유, 야당활동의 자유, 언론의 자유, 私有재산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보장하였다. 이 기간을 독재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35. 1970년을 계기로 朴正熙 정부는 굶주림의 문제를 대충 해결하여 人權 향상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36. 여성 및 농촌 人力이 도시와 공장으로 몰리고 軍人들의 뒷받침을 받는 기업인들과 공무원들 및 과학기술자들이 언론인, 교수, 정치인들을 누르고 한국 사회의 主力세력으로 浮上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분 혁명적 시대상을 반영하여 서울대학교에서 화공과와 경제학과의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다.

 37.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90만 표차로 이긴 朴正熙는 과도한 정치비용이 근대화에 장애가 된다고 확신, 이듬해 유신선포를 斷行하여 정치적 자유를 축소하고 행정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장기집권 체제로 국가구조를 변경하였다.

 38. ‘國力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실천하기 시작한 維新체제는 제1차 석유파동을 잘 극복하고 중동건설 시장 진출, 새마을 운동,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하였다. 한국은 드디어 종합국력면에서 북한을 능가하기 시작하였고 중산층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갔으며 마이카(my car)와 아파트가 상징물로 등장하였다. 유신체제는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였으나, 세계가 석유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위기 때 한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國格을 드높였다.

 39. 1977년 의료보험 도입으로 병원에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사라졌다.

 40. 李厚洛 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은 1974년의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으로 이어지고, 민주화 운동의 격화는 권력층 내부의 분열과 韓美동맹의 균열을 초래하였다.

  

경제안정이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

 

 41.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과 物價高, 김영삼 총재의 등장, 민주화 세력의 강경투쟁과 정권측의 강경대응, 그리고 중산층의 離反과 釜馬사태가 10·26 사건을 불렀다.

 42. 1979년의 10·26 사건은 18년간의 박정희 정권을 종식시키고 13년간의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열었다. 30년간의 現代史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43. 全斗煥의 신군부는 流血사태로 집권하였으나 경제관리에 성공하여 안정 속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물가도 잡고 무역흑자도 이뤘다. 1980년대 한국은 연평균 10.1%의 경제성장으로 세계 1위였다. 중산층이 70%에 이르고 이들이 민주화의 지지세력으로 변하였다.

 44. 1987년 전두환-노태우 합작의 6·29 선언으로 한국은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민주화의 길을 선택하였다. 북한은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로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서울올림픽을 좌절시키려 하였으나 스스로 고립의 함정을 팠다.

 45. 김대중, 김영삼의 同時 출마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軍人출신 대통령이 민주주의 실천 시대를 열고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사회적 욕구를 민주적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經濟戰에선 이겼으나 思想戰에선 밀리는 한국 

 

 46. 노태우 정부는 세계사적 전환기에서 민주화와 북방정책이란 國家大戰略으로 민족의 活路를 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딛고 중국, 소련, 東歐와 수교하여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하였다. 유리한 국제정세를 활용, 남북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잡았다.

 47. 노태우는, 與小野大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3당 합당으로 보수연합 구도를 만들고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48. 김영삼은 취임 직후부터 좌파 참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한국 현대사를 부정하고 불법화하였던 전교조의 해직 교사들을 복직시키는 등 사실상 左派宿主가 되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북한정권에 대하여 미국이 강경책을 쓰려 하자 이를 말린 것도 김영삼 정부였다.

 49. 김영삼 대통령의 反보수적 정책은, 金鍾泌 세력의 탈당과 자민련 창당, 대구 경북세력의 離反 등 보수분열을 불렀다. 외환위기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국가不渡 위기로 몰리면서 결과적으로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50. 이후 계속된 2期에 걸친 좌파정권은 학살자 김정일에 굴종하여 100억 달러의 金品을 건네고 핵무장을 도왔으며 반역적 6·15-10·4 선언으로 從北세력의 득세를 뒷받침하였다. 이에 반발한 보수층이 2007년 대통령 선거, 2008년 총선을 통하여 좌파진영을 참패시키고 李明博 대통령과 한나라당 정권을 만들어냈으나, 李대통령은 취임사에서부터 이념포기를 선언, 좌파와 동거상태에 들어갔다.

 *한국은 경제, 군사, 과학기술력에선 세계 10大 강국이 되었으나 정치와 언론 및 교육 부문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經濟戰에선 북한에 이겼으나 思想戰에서 밀리고 있다.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엔 성공하였으나 法治확립-자유통일-一流국가 건설이란 과제를 주도할 국가엘리트층이 붕괴되었고 국민교양 또한 무너지고 있다. 한국은 아직도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 나라이다.



3. 자유와 번영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한국인의 행동윤리: 狂信집단과 싸워 이기는 데는 合理와 과학과 민주주의만으론 안 된다. 또 다른 종교적 신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기적과 逆轉의 드라마였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았으나 그때마다 네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위기를 好機로 바꾸고 逆轉勝을 거듭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민국가 건설 61년 만에 富國强兵하는 민주국가를 만들어 민족사 최고의 번영을 謳歌(구가)하고 있다.

  네 가지 성공요인은 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 李承晩-朴正熙-李秉喆로 대표되는 自主-실용적인 지도세력(기업인, 장교단, 과학기술자 포함)의 성장, 그리고 근면 성실한 국민들이다. 한국은 이런 성공조건들을 만들고 수많은 도전을 극복해가면서 헌법상 가치인 진실, 正義, 자유를 확장하고 지켜내었다.

  세계가 公認한 한국의 성공은 그러나 미완성이다. 네 가지 성공조건을 위협하는 네 가지 실패조건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와 전통에 內在된 뿌리 깊은 봉건적 殘滓, 北韓發 좌경이념의 침투, 여기에 노출되고 寄生하는 僞善的 지식인과 정치인 및 守舊的 관료층의 존재, 그리고 한글전용과 좌익선동에 넘어가 교양의 바탕과 분별력을 잃어버린 국민, 특히 彼我識別 기능이 마비된 젊은 세대의 존재가 그것이다.

  한국은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네 단계를 거쳐 法治확립-자유통일-一流국가 건설의 세 단계를 과제로 남겨놓고 있다. 역사의 발전을 거스르는 북한정권과 남한의 從北세력은 그 속성이 봉건적 守舊 반동 세력으로서 조국의 先進化를 방해하는 主敵이다. 조국 근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던 네 가지 성공 조건-자유민주 체제, 韓美동맹, 自主-실용적인 지도세력의 성장, 그리고 근면 성실한 국민들의 존재를 보장하여야 조국 선진화를 성공시킬 수 있다.

  한국은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나라이다. 對北경제전에서 이긴 한국은 핵무기와 광신적 이념으로 무장한 북한정권 및 從北세력을 상대로 한 思想戰에서도 승리하여야 아직 끝나지 않은 한반도의 60년 전쟁을 자유세력의 최종승리로 마감할 수 있다.

  넘어야 할 절벽과 건너야 할 강이 있다. 좌경선동에 넘어가지 않는 국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국가와 사회가 惡黨을 응징할 수 있는 힘이 있는가? 국가를 지키기 위한 희생이 최고의 德目으로 존중되는가? 지도층이 대한민국의 걸어온 길에 대한 ‘정당성의 확신’을 共有하는가? 韓美동맹을 자유통일 이후까지 우리의 생명줄로 지켜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직도 남북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樣式과 善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狂信집단과 싸워 이기는 데는 合理와 과학과 민주주의만으론 안 된다. 또 다른 종교적 신념체계가 있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만으로는 안 된다.

 

  1. 反共자유민주주의라야 한다.

  2. 대한민국만이 민족사의 유일한 正統국가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라는 국가 정체성의 근본을 절대로 포기하여선 안 된다.

  3. 한반도의 미래가 ‘번영하고 통일되고 강력하고 자유로운 나라여야 한다’는 데 同意하는 美國은 '영원한 친구'이다.

 

  헌법 1, 3, 4조는 '북한노동당 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하고 자유통일하라'는 명령을 국가와 국민들에게 내리고 있다. 대통령부터 어린이까지 이를 국가意志와 國家목표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경쟁과 투쟁을 자신의 행동윤리로 기꺼이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의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룰 힘이 있는 민족은 행복하다. 문제는 용기이다. 행동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이고 좋은 세상을 만든다.

[ 2009-11-24, 13:4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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