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단행본/朴正熙와 김일성의 18년 決鬪史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 김일성은 자기 실패의 受惠者가 되었다. 성공한 것은 '박정희 세습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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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의 自主가, 金日成式 主體를 누르다!
  -朴正熙의 大戰略-‘先경제건설, 後군사건설’의 전개
  
  
   1960년대는 金日成의 전성시대
  
   金日成이 1963년 10월5일에 金日成 군사대학 제7기 졸업식에서 한 연설은 패기 넘치는 51세의 지도자와 뻗어가고 있는 공화국의 자신감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 우리 당의 구호는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입니다.”
   “우리는 5∼6년 전부터 쌀을 사오지 않습니다. 남조선 군대들이 먹는 양식은 다 미국 잉여농산물입니다. 남조선 국방군이 입은 군복도 다 미국제품입니다. 신발도 미국 제품이며 총도 미국에서 대준 총이요 탄약도 다 미국 놈들이 대준 탄약입니다.”
   “남조선에서 박정희가 중농정책을 쓰고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목소리가 울려나오는 것만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자립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돈을 꿔다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식민지로 됩니다.”
   “우리 북반부와 합작을 해야만 자립경제가 됩니다. 남조선 당국이 남북합작을 하자고만 하면 우리는 ‘합작을 하면 우리는 당신네 군대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미국 놈들 반대하고 일본군국주의를 반대하고 오직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그런 조건하에서만 합작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남조선당국은 우리에게 북조선군대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 힘, 경제적 자립이란 중요합니다.”
   朴正熙 소장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1961년의 남북한 공업수준을 비교해 보면 북한의 압도적 우세였다. 석탄생산량은 남한이 590만t, 북한이 1200만t. 發電量은 남한이 약20만kw, 북한이 약 116만kw, 철광석 생산실적은 남한이 약 14만t, 북한은 약116만t이었다. 화학비료생산은 남한이 약3만8000t, 북한이 86만t. 시멘트는 남한이 약51만t, 북한은 207만t이었다. 수산물 생산량조차도 북한이 59만t, 남한이 45만t이었고 곡물생산에서만 남한이 약600만t, 북한이 약220만t으로 우세했을 뿐이었다. 농촌 가구 당 소·돼지 보유수는 북한이 월등하여 農家의 內實이 단단함을 보여주었다.
  
   두 승부사의 대결
  
   44세의 朴正熙 소장이 등장하여 북의 金日成과 18년간 피나는 대결에 들어간 1961년에 남한의 1인당 GNP는 북한의 약 60% 수준이었다. 朴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을 맞고 링에서 퇴장할 때 남한은 1인당 GNP에서 2대 1, 국민총생산(GNP)에서는 4대 1로 북한을 리드하고 있었다. 朴 대통령을 이어 金日成과 대결하게 된 全斗煥·盧泰愚 대통령은 20세나 나이가 더 먹은 노인 金日成을 상대하여 점수 차를 더욱 벌렸다.
   남북한 체제대결은 朴正熙와 金日成이 양측의 대표였던 18년간에 그 승부가 난 셈이다. 두 사람이 모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가진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 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발전을 시켜간 전략에서는 대조적이었다. 金日成은 自力更生의 경제개발을 추진하되 군사제일주의를 추구하였다. 思想무장의 강화로 정신력을 고양시키는 것을 생산성 향상의 수단으로 삼았다.
   朴 대통령은 세계시장을 향하여 문을 연 개방적 경제개발 戰略을 추진하되 군사 優先이 아닌 경제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서 보듯 대결 관계에 있는 나라들의 흥망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면이 강하다. 군사력 우선주의는 단거리 경기에서는 일단 우세하지만 장거리 경주에서는 경제력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군사력 강화를 하는 쪽이 유리해지는 것이다.
   미국 예일 대학의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興亡’이란 책에서 세계 강국들의 성쇠를 그런 모델로 분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남북한이야말로 그런 분석틀을 적용하기가 가장 적합한 경우이다. 朴正熙-金日成의 국가발전 전략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원은 아마도 9년3개월간 朴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金正濂씨일 것이다.
  
   국방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다
  
   1969년 10월부터 1978년12월까지 늘 朴 대통령의 측근에 있었던 金씨는 상공부장관에서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대통령이 이렇게 당부하더라고 했다.
   “잘못하면 金日成이에게 먹힐지 모른다. 70년대를 武力적화통일의 시기로 잡고 자꾸 도발해 오고 있으니 바짝 정신 차려야겠다. 나는 경제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국방과 외교에 전념해야겠다. 임자는 경제 전문가이니 경제를 맡아라. 自作農이 많아지고 농민이 잘 살면 공산화되지 않는다. 도시근로자가 잘 살게 돼 중산층화 되어도 안심이다. 도시근로자의 기능이 높아져 소득이 많아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계곡에서 보이는 산의 모습과 頂上에서 보이는 산이 다르듯 일반 국민의 視野에 잡히는 國政과 대통령의 눈에 들어오는 國政의 모양새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언론을 통해서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대통령의 주된 관심사가 국내정치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朴 대통령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 쓰는 우선순위는 늘 ①남북관계(국방) ②경제 ③국내정치 차례였다.
   金正濂씨는 “박 대통령의 경우, 국방에 50∼60%의 시간을 쓰고 경제에 30∼40%, 국내정치에는 10% 이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경제·정치 등 國政에 대한 발상이 국방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김정렴씨는 1970년대에 朴대통령이 중화학공업투자를 서둔 것은 방위산업의 기반을 조성한다는 데서 출발했으며, 새마을 운동에도 농민이 잘 살아야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고, 카터 미 대통령과의 갈등은 철군문제를 둘러싸고 진행 되었으며, 행정수도를 공주근교로 정한 것도 휴전선을 기준으로 평양과 등거리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朴 대통령은 가끔 “강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는 둑 위에 선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했다. 위로 누구한테 책임을 돌릴 데가 없는 국가 지도자가 되면, 그것도 세계에서 화력(火力)의 밀도가 가장 높은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나라에서는 자동적으로 국가안보가 대통령의 뇌리를 압박하게 되고 이것이 그의 정책 순위 선택에나 정치적 행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얘기다. 그것은 金日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때 박정희에게 기대했던 김일성
  
  
   두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맞수로 서게 된 날은 1961년 5월16일이었다. 5·16주체세력은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國是로 한다”고 천명했으나 金日成은 남로당의 前歷이 있는 朴소장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북한은 5·16쿠데타의 소식만 알릴 뿐 한동안 비난을 삼갔다. 16일 오후 평양방송은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張勉 정권을 타도한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군중시위를 진행하고 있다”고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허위보도를 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朴正熙의 형인 고 朴相熙씨의 친구 黃泰成을 남파시켜 비밀접촉을 시도하였다.
   5·16직후에 朴소장을 의심하였던 미국은 7월15일 결론을 내렸다. 이 날짜로 사무엘 버거 駐韓미국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군사혁명세력의 용공성 검토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박 장군은 공산주의자와 결별하고 전향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희생물 제1호가 될 것이다> 이런 판단에 근거하여 미국당국은 주체세력의 사상적 경향을 ‘민족적이며 반공적’이라고 했다. 이것은 정확한 시각이었다. 朴 소장은 한때 남로당의 군내조직 간부였으나 여순반란 사건 뒤 수사에 협조한 뒤에는 확실하게 돌아섰고, 6·25전쟁이 터지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감으로써 행동으로써 자신의 사상적 좌표를 증명하였다.
   朴正熙는 이념적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 타고난 반골적 기질과 미군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좌익에 속했던 형 朴相熙씨가 대구폭동 때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은 데 대한 반감이 뒤엉켜 그를 남로당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朴甲東씨와 같은 남로당 출신들은 朴憲永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金日成을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로당 출신인 朴正熙도 인간적인 면에서부터 金日成을 증오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휴전 뒤 李承晩과 金日成은 전쟁피해복구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하며 본격적인 대결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4대軍事노선
  
   전쟁피해 復舊 부문에서 40대의 金日成은 70대의 李承晩을 앞서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천리마운동 등 국가총동원체제로써 그때 이미 중공업 부문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1959년에 재무부 이재국장이 된 金正濂씨에 따르면 한국의 자립 가능성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었던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조를 1965년에 가서는 끊는다는 계획표를 짜 두고 있었다고 한다.
   남한은 박정희의 군사정부에 의하여 1962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을, 북한은 61년부터 제1차 7개년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경제개발 경쟁이 벌어진다. 1960년대의 전반기에는 북한이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나 66년부터 남한의 성장률이 앞서기 시작하였다. 국민총생산(GNP)을 기준으로 할 때 총량은 인구가 많은 남한이 늘 우세하였으나 1969년부터는 1인당 국민총생산에서도 남한이 앞서게 됨으로써 경제부분에서는 절대적 우위에 서게 되었다. 북한은 7개년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기간을 3년 연장하였다. 북한 경제의 추진력이 60년대의 후반기에 약화된 최대의 요인은 군사비의 過重한 부담이었다.
   6·25전쟁 뒤 북한은 經濟再建에 注力하여 군사비 지출이 감소되었었다. 북한은 1962년부터 4대 군사노선을 채택, 軍事優先의 ‘경제·군사건설 竝進정책’에 나서게 된다. 북한은 4·19를 전후한 남한의 대혼란기에 군사적 개입을 할 만한 무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점을 크게 후회했었다고 한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사일을 철수시키는 것을 본 金日成은 충격을 받고 自主국방 노선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경제정책면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이념분쟁이 격화돼 이 두 나라로부터 원조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되자 金日成은 自力更生의 노선을 들고 나온다. 1961∼69년 사이 북한이 도입한 차관은 소련으로부터 1억9700만 달러, 중공 1억500만 달러, 동독 3500만 달러 등 3억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남북대결의 분수령, 69년의 선택
  
   5·16군사쿠데타 이후 朴 대통령이 이끄는 강력한 남한정권이 한·일 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을 결정한 것도 金日成으로 하여금 군사력 강화를 재촉하게 하였다. 金日成은 한국·미국·일본의 3각 동맹체제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북한의 국민총생산에 대한 군사비의 지출비율 변화를 보면 1962년을 기준으로 65년에는 3배, 71년에는 4배로 증가하였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1967∼71년 사이 국방비는 5년 연속해서 예산의 30%∼32%(GNP의 20∼25%에 해당)를 유지하였다.
  
   외부적 도전에 당면하여 金日成이 채택한 응전의 방식-자력갱생의 경제발전과 군사제일주의, 이 2대 국가발전노선이야말로 오늘날의 남북한 간 격차를 가져오고 북한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근본적인 요인인 것이다. 오늘날 북한의 모습은 1960년대 초에 결정되었다는 얘기다. 바로 이 시기에 朴 대통령은 金日成과는 정반대로 對外개방에 의한 경제제일주의를 국가발전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경제제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駐韓미군이 한국 측 군사비의 부담을 상당히 덜어준 덕분이다.
   1969년에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1.5%였는데 남한은 그 열 배인 15%였다. 1·21청와대 습격사건과 삼척·울진공비 침투사건의 다음해인 이 1969년은 남북한 대결에 있어서 분수령이 된 해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북한국에서 조선노동당의 동향을 관찰하고 있었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 3년 전부터 노동당 안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데 대하여 한쪽에서는 수정주의적인 개방정책을 주장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인민의 사상과 의지를 강화하면 생산성을 계속 높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북한노동당은 그때만 해도 黨內 민주주의가 보장돼 있어 이런 토론은 격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金日成이 이 논쟁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상무장의 강화로써 생산력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쪽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기존노선의 수정을 거부한 것입니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이 노선은 그 뒤 주체사상의 강화, 金正日의 등장, 세습체제 구축, 혁명소조의 투입 등으로 이어져 우상숭배로 갑니다. 사회주의 경제구조의 한계를 이념적 정신력으로 돌파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쓴 결과가 오늘의 북한입니다. 노동당 관료들은 69년의 선택을 되씹어보고 있을 겁니다.”
  
   金日成, 軍 강경파 제거
  
   金日成은 1950년대의 ‘천리마 작업반 운동’을 발전시켜 19650년에 ‘청산리방식’, 62년에는 평남 강서군 대안전기공장에서 ‘대안의 사업체계’를 발표함으로써 그 이후 경제개발의 관리방식을 확립하였다. 청산리방식은 농장,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기업소의 운영방침이다.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에 의한 운영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공장, 기업소 등 경제단위조직에 黨 위원회를 설치, 최고지도기관으로 삼는다.
   이 黨 위원회는 당 간부·행정간부·공장지배인·노동자 등 광범한 군중의 참여를 유도,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집체적으로토의, 결정,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 각 계층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여 하부의 자발적 熱意를 사상적으로 동원함으로써 自覺的으로 일하도록 하려는 노선이다. 이런 자발적 근로의욕이 유지되려면 당·행정조직의 관료주의가 끊임없이 타파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세계 어디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理想이다.
   金日成은 1970년대초 대학생들로 구성된 3대혁명소조를 공장·농장·학교 등에 파견, 관료주의의 타성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더구나 1970년대의 무조건성·무오류성·절대성의 유일사상체계가 북한사회를 지배함에 따라 문제의식에 기초한 창의성과 자발성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67년 5∼7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15∼1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金日成은 수정주의노선을 강행했다는 이유로 朴金喆(서열 4위·조직담당 부위원장), 李孝淳(대남담당 비서),김도만(선전선동담당 비서) 등 당료파를 거세해버렸다. 당과 행정의 실권을 상당히 휘둘렀던 이들은 경제정책에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던 이들이다.
   귀순자 출신 정치학도인 安燦一씨는 “이들이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공장에서 일과가 끝나면 의무적으로 춤을 배우게 하는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생산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정책을 썼고 사회분위기가 다소 풀려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들을 몰아내고 기반을 강화한 것은 민족보위상 金昌奉, 李孝淳을 대신하여 對南비서가 된 許鳳學 등 군사파였다.
   1962년에 민족보위상이 돼 4대 군사노선을 주도했던 金昌奉은 날로 비대해지는 군부안에서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 개성이 강한 그는 당의 군 통제기구인 정치부장의 역할을 유명무실로 만들었고 개인숭배의 분위기를 조장하였다고 한다. 1969년 金日成은 북한 군사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군사노선을 주도했던 金昌奉 그룹을 숙청하였다. ‘군벌관료주의’가 숙청의 주된 이유였다.
  
   黨에 의한 軍 통제 강화
  
   숙청된 군 수뇌부는 항일빨치산 출신으로서 당 비서겸 정치위원이었던 김광래, 인민군총참모장 崔光, 당비서 겸 사회안전상 石山, 정치위원인 해군제독 李英鎬 등이었다. 1969년 1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린 人民軍黨 제4기4차 전원회의를 마감하는 결론연설에서 金日成은 투박하고도 직설적으로 金昌奉파의 과오를 비판하고 이를 방치한 인민군내의 黨조직을 질타하였다. 이 연설 내용全文은 그해 3월에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인민군 노관봉 중위가 갖고 있었다.
   金日成은 金昌奉 등 군 수뇌부가 현대무기만 좋아하고 한반도의 지형에 맞는 전술 및 무기개발을 등한시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지적했다.
   “전쟁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현대전과 유격전을 배합하는 것이다. 산악이 많기에 곡사포가 많아야 하는데 인민군대는 직사포가 더 많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초음속(비행기)만 가지고는 안 된다. 초음속은 윙하면 확 지나가고 만다. 저공하는 비행기가 더 우월할 수 있다. 이자들은 산악전과 적 중심에서 싸울 경보병 부대를 조직할 데 대한 당의 요구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 적을 코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서 부대가 단결 안 되었지, 당 조직은 마비상태에 들어갔지, 전사들을 막 부려먹고 돌보지 않지, 심지어 전사들이 물 길러 먹으라고 준 바케스마저 다른 용도에 써먹지, 인민들을 때리고 그러니 말을 듣지 않지...”
   “수정주의가 들어왔다. 군벌주의가 들어왔다. 창봉이가 이렇게 된 것은 여편네가 일본군대에서 간호원을 했으니까 부화한 잡지나 소설만 읽으니 썩었다.”
   “우선 당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 당 조직은 사단장이나 연대장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사단, 연대에다가 정치위원제를 둔다. 정치위원의 의무는 군사일꾼들을 일 잘 하게끔 도와주고 정치적으로 잘 안 될 대는 제재하고 또 권고해야 한다. 군사간부 혼자서는 어떤 명령서에도 사인하지 못한다. 정치위원의 사인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한다.”
  
  
  
  
   군사력 강화가 경제문제 야기
  
  
   金日成은 1972년 5월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한 李厚洛 정보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청와대 습격사건(1·21사건)은 맹동분자들이 한 짓인데 책임을 물어 내쫓았다”고 하면서 朴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었다. 金日成은 金昌奉, 許鳳學 등이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사건을 저지른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이는 물론 거짓이다. 金日成 체제 아래서 그런 大事를 金日成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결정할 것인가. 더구나 1·21사태 열 달 뒤에는 또 다시 삼척·울진지역에 무장병력을 침투시키지 않았던가.
   당시 정보부 북한국의 한 간부는 “1·21 청와대 습격과 울진·삼척공비침투는 군사력 강화의 頂点에 도달한 북한이 남한에 시험을 걸어 본 사건이었다”고 해석했다.
   “북한은 시험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특수부대가 단시간에 청와대까지 접근할 수 있었던 점, 100여 명의 게릴라부대가 상륙에 성공하고 두 달간 수십만의 국군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점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고 미국 전자첩보기 EC-121을 격추시킴으로써 미국과의 정면대결 직전까지 갔을 때는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동해안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對空砲를 집결시키는 등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북한이 미국에 도전하기 위하여 일부러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徐大肅 하와이대학교 교수는 ‘북한의 지도자 金日成’이란 책에서 金昌奉 등의 숙청은 이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군사적 모험주의로 나가는 데 대하여 金日成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였다. 어쨌든 이들 군 수뇌부의 숙청은 1960년대의 군사제일주의노선에 제동이 걸린 것을 의미하였다.
   金日成이 金昌奉을 비판한 것을 분석해보면 金이 전면적 현대전에 대비하여 첨단무기를 많은 돈으로 도입한 데 대한 불만이 엿보인다. 유격전과 경보병부대의 효능성을 강조한 것은 군사비투자의 절약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金日成은 남한에 대한 全面戰 전략 대신 유격전과 민중봉기 선동을 배합한 戰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것은 60년대의 군사노선이 경제력의 벽에 부딪쳤다는 신호였다.
  
   駐韓미군 감축의 충격
  
   1970년 11월2일에 열린 조선노동당제5차 대회에서 金日成은 사업총화보고를 통해서 “우리의 국방력은 비싼 대가로 이루어졌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국방에 들어간 부담의 한 부분이라도 털어 경제건설에 돌렸더라면 인민경제는 보다 빨리 발전하고 인민들의 생활은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고 했다. 金은 “우리는 일시적인 안락을 위하여 혁명의 근본이익을 저버릴 수 없었으며 다시는 망국노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도 했다.
   북한측에서 볼 때 1969년은 1인당 국민총생산까지도 남한우세로 逆轉되고 군사력의 상대적 우위가 약해지는 가운데 기존 경제 노선을 고수하기로 결정한 急轉直下의 시작이었다. 이에 반해 남한에 있어서는 이 해가 북한의 군사적 도전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반도에 놓인 힘의 저울이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첫해가 1969년이었다는 얘기다. 1968∼69년 金日成의 군사적 모험주의는 朴대통령을 자극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내몰았다. 1960년대의 북한군사력 강화가 1970년대의 남한측 군사력 증강을 유발하는 것이다. 북으로부터의 잦은 도발, 미군의 일부 철수, 월남의 붕괴 등 1970년대에 朴대통령이 당면하였던 국내외 문제들은 金日成이 1960년대에 부딪쳤던 것과 비슷한 성격이었다. 다른 것은 대응방식이었다.
   김정렴 씨는 “1969∼70년 사이에 朴 대통령이 가장 많은 시간을 쓴 부분은 71년 대통령선거 준비가 아니라 예비군제도의 정착과 미7사단 철수에 따른 대책이었다”고 했다. 애그뉴 미국 부통령이 7사단의 철수방침을 통고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고 朴 대통령은 일상 업무를 제쳐 놓고 약 10일간 청와대 본관2층의 內室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7사단 철수 방침을 포기시키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철수에 따른 보장조치들을 거의 혼자서 다듬어갔다고 한다. 朴 대통령과 애그뉴 부통령의 회담은 1970년 8월25일에 열렸다. 두 시간으로 예정된 회담은 여섯 시간으로 길어졌다. 朴대통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애그뉴를 설득하려고 했다.
   애그뉴는 “2만 명 이상은 감군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애그뉴는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 미국기자들에게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아마도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히 철수할 것이다”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金 실장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더니 한참 침묵하다가 “일희일비해서는 안돼. 국방을 언제까지나 미군에 의존할 수는 없어. 이제는 자주국방이야. 미국도 피를 덜 흘리는 해·공군으로는 계속 지원 할 테니 地上전투만은 우리가 맡도록 해야 돼. 그러려면 경제가 잘돼야 해”라는 반응이었다. 김정렴씨는 “7사단 철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방위산업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의 방위산업은 질·양·경제성 면에서 북한보다 월등하다. 그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방위산업체는 軍需專用이 아니라 평시에는 民需 80∼90%, 軍需 10∼20%, 戰時에는 100% 軍需로 전환되는 시스템으로 돼 있다. 북한은 다른 산업과는 완전히 분리된 軍需廠(군수창) 제도이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중화학 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그 안에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움직이므로 시설과 기술의 상호이전이 잘 되고 가동률이나 생산성도 뛰어나다. 북한의 경우에는 군수산업이 인민 경제로부터 고립돼 있어 여기에 투자되는 자본·기술·시설은 경제적으로 큰 낭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정렴씨는 “한국의 防産체제는 아마도 세계적으로 가장 독특하고 경제적일 것이다”고 했다. 이런 발상을 맨 처음 한 것은 吳源哲 당시 상공부 차관보였다고 한다. 朴 대통령이 金鶴烈 경제기획원장관에게 병기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한 것은 1970년 7월이었다. 朴 대통령은 일본 차관으로 外資를 충당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병기공장이라고 하지 않고 특수강 공장 등 중공업 공장이라고 위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 미국·유럽으로부터도 차관을 얻지 못하였다.
  
   兵器생산 위해 중화학 육성
  
   이때 「한국적 방위산업 모델」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 吳 차관보였다. 吳 차관보는,
   ①무기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軍工廠(군공창)을 만들면 평시에는 시설을 놀려야 하므로 낭비가 심하다
   ②민영군수공장도 마찬가지로 비경제적이다
   ③따라서 병기공장의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고 “모든 병기는 분해하면 부품이다”는 원칙에 따라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有關공장에 제조를 분담시켜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키자고 했다.
  
   朴 대통령은 이 착상을 받아들이고 吳씨를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담당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였다. 60만 대군의 무장을 지원할 수 있는 방대한 병기산업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병기의 기본소재인 철, 특수강, 銅, 아연의 생산을 위한 철강 및 비철금속공업이, 정밀 加工을 위해서는 기계공업이, 전자무기 부품생산을 위해서는 전자공업이 먼저 육성돼야 한다는 방향으로 계획이 발전되었다. 1973년 1월12일 朴대통령은 연두기자 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했다. 철강·조선·비철금속·전자·화학·기계 등을 6대 중화학공업으로 선정, 온산(비철금속)·울산과 여천(석유화학 및 조선)·창원(기계)·구미(전자) 등에 공단을 짓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무기의 주요 부분별로 생산업체를 지정, 평상시 작업량을 민수용 80%, 防産用 20%로 하도록 하였다. 兵器생산에만 사용되고 民需용도는 전혀 없는 기계는 국방부가 구입해서 防産공장에 대여해 줌으로써 경영압박을 덜어주는 제도도 만들었다. 지상군의 기본 장비는 창원 기계공단에서 제조할 수 있도록 37개 특수 유치 업종을 선정하고 방위산업도 수출산업화 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朴 대통령은 2∼3년 내 防産체제를 완비하도록 재촉하였는데 김정렴, 오원철 씨가 4∼5년이 소요된다고 했더니 어쨌든 빨리하라고 독촉했다고 한다.
   북쪽의 金日成을 마주보고 있던 朴 대통령 입장에서는 쫓기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대치상황에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발전과 군비증강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 하는 선택이 국가 운명을 결정한다. 朴대통령이 선택한 한국형 방위산업은 막대한 군사비 투자가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지 않도록 이를 중화학공업육성·기술개발 등 민간경제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이었다. 이런 결합방식의 對北우월성은 그 뒤 힘의 균형을 남쪽으로 돌려놓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고슴도치 이론
  
   金日成은 1963년 군사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군사대학에서는 갱도학을 배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르는 곳마다 굴을 파 놓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金日成은 이어서 고슴도치이론을 들고 나왔다.
   “고슴도치란 놈은 머리를 쑥 들여 밀고 몸을 슬쩍 구부리면 온몸이 가시로 덮입니다. 어떤 짐승도 달려들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전체 인민을 무장시키고 전국을 요새화해 놓으면 미국 놈도 접어들지 못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朴 대통령도 1970년대에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한 군사전략을 고슴도치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했다는 점이다.
  
   고슴도치는 공격적 동물은 아니나 남북한처럼 두 마리가 붙어 있으면 찌르고 찔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공존 하에서 善意의 체제 대결을 하자”는 1970년 8월15일의 선언은 경제발전에 자신감을 가진 朴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최초의 제의였다. 金日成은 그 동안 숱한 對南 제의를 던졌으나 朴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朴正熙는 “남쪽이 더 잘살게 되기까지는 북한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1971년의 남북적십자회담과 이듬해의 7·4성명이 성사된 배경에 대하여 김정렴 씨는 朴 대통령의 전략을 이렇게 풀이했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 일본과 중공이 가까워지는 세계적인 데탕트 무드를 타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 기관에 연구를 시켰는데 정보부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수립해서 올린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남북대화를 통해서 전쟁을 막아보자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통일에 대하여는 대통령께서 확고한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통일은 안 된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면 북쪽에서 자연히 끌려 올 것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른바 독일식 통일방안이지요. 그분은 전쟁이 없으면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정보부 북한국의 한 간부는 “박 대통령은 김일성의 수를 훤히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상적인 판단을 일체 배제하고 힘의 관계 속에서 남북관계를 계산했으며 특히 실무자의 견해에 귀를 기우렸다”고 말했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 대통령은 정보부장을 북한으로 보내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었다고 한다. 남북한 비밀 사전접촉과정을 주한 미국 CIA 거점장에게 자세히 알려서 신변안전상의 협조를 받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7·4성명을 전후한 접촉을 통해서 金日成도 얻은 것이 있다고 鄭洪鎭 당시 남북조절위 간사는 말한다. 남한이 北侵의도가 없다는 것을 金日成은 확신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건물 상태이던 평양을 본격적으로 건설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金日成은 1974년부터 ‘사회주의 대건설’이란 구호를 내걸고 큰 건물과 고층아파트 등을 짓기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74년부터 戰力증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60년대와는 거꾸로 1970년대에는 북한이 경제에, 남한은 軍備에 큰 관심을 쏟았다.
  
   군사비 지출도 逆轉
  
   북한은 1971년부터 신6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면서 서방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자본도입을 시도하였다. 북한은 1970년에 서방으로부터 30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72년부터는 서방 선진국 차관이 공산권을 앞지르게 되었다. 1973년의 경우 서방차관이 3억7500만 달러, 소련차관이 1억900만 달러였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확대도 꾀하였으나 수입증가로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늘어나면서 1975년부터는 外債상환이 늦어지게 되었고 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거의 끌어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북한 최초의 대외 개방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경제개발 마라톤에서 격차는 더욱 커져 갔다. 1966∼70년 사이 남한은 10.4%, 북한은 5.8%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1971∼75년 사이엔 남한이 연평균 9.7%, 북한은 2.3%에 그쳤다.
   북한의 1970년대식 對外개방시도가 실패한 것은 외국기술과 자본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내부체질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에 金日成은 金正日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여러 가지 무리를 범했다. 金日成은 金正日을 위하여 당과 군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金正日은 金日成을 위한 神格化 작업을 지휘함으로써 父子 간에 북한체제를 경직화시키는 相乘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주체사상의 교조화, 유일체계의 확립, 중국의 홍위병을 본 딴 金正日 직속의 3대혁명소조 활동 등등 체제의 창의성과 자율성, 그리고 신축성을 말살하는 조치가 잇따랐다. 국가발전 단계상 대중의 창의와 자율을 촉진하고 국제교류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서 金日成은 주체사상과 세습체제로써 북한의 역사적 진행방향을 거꾸로 돌려놓고 말았다. 역사발전의 흐름을 탄 남한과의 격차는 1970년대에 결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興亡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방식의 결정에 지도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김정렴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박 대통령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색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再任時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도전을 깊은 사색에서부터 나오는 면밀한 계획과 무서운 추진력으로 하나하나 헤쳐가면서 나라를 이끌고 갔습니다.”
  
   1970년대에 남한은 발전했지만 朴 대통령의 고민은 더 깊어졌고, 북한은 침체했지만 金日成은 우상화운동에 의해 더 즐거워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비틀거리는 경제가 군사력 증강을 계속 뒷받침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미국 랜드 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973년, 75, 79년에는 북한의 군사비지출이 전년도보다 감소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의 10년간 북한의 군사비지출은 1.5배가 늘었는데 남한은 2.4배나 늘었다. 1976년부터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1인당 GNP가 북한을 앞선 지 7년 뒤의 일이었다. 북한은 1974년부터 인민군에 대한 白米지급의 관습을 수정해 옥수수를 섞어 주기 시작하였다. 건설공사장에 現役군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경제 성장의 둔화는 서서히 북한의 군사력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적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 행정수도 건설계획
  
   1975년 4월 월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朴 대통령은 1968∼7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金日成은 월남이 붕괴돼 가고 있던 4월18일 중공과 東歐 각국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을 떠났다. 朴 대통령은 남침에 대한 준비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金正濂씨는 “박 대통령은 거의 매일 국방관계자들과 회의를 거듭하면서 하루에도 담배를 몇 갑이나 태웠다. 월남이 패망하기 하루 전에 서울死守 선언을 한 것이 이때의 위기감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 측의 방어개념은 全面남침 때 세가 불리하면 주력이 漢江 이남으로 물러나 한강을 주방어선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1974년 12월에 朴대통령이 韓美 제1군단을 방문했을 때 홀링스워드 1군단장은 새로운 수도권 방어 작전계획을 보고하여 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全面남침이 시작되면 4∼5일간은 공중에서 집중적으로 화력을 퍼부어 적을 제압한 뒤 3∼4일 동안 지상군으로 하여금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내용으로서 서울 철수를 배제한 계획이었다.
   朴 대통령은 월남군의 붕괴가 가속화된 것은 후퇴하는 군중들과 군인들이 뒤섞여버려 작전에 크나큰 장애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고는 서울死守의 타당성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월남패망에 따른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朴대통령은 서울死守 선언을 한 데 이어 5월13일에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改憲논의를 금지시켰다.
   5월21일에는 金泳三 신민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대, 與野 영수회담을 가졌다. 朴 대통령은 金日成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상세히 설명하여 金 총재로부터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여야가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동의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증대되는 군비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방위세가 신설되었다. 행정수도 계획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김정렴 씨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이해 7월 진해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행정수도의 구상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평양과 등거리에 행정 수도를 건설하고 평양까지 도달할 수 있는 地對地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기자들에게는 행정수도의 건설 이유를 주로 인구 분산책으로 설명하였으나 진짜 이유는 북한의 地對地 미사일의 射程圈 안에 서울이 들어 있다는 데 대한 강박감이었던 것이다.
  
   개성 점령계획
  
   김정렴씨는 “박 대통령은 전쟁이 터지면 자신은 행정수도에서 서울의 전방지휘소로 올라와 전쟁을 지휘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기업은 모험을 할 수 있지만 국가는 안보에서 모험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이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국방에 관한 완벽주의적 대비로 나타났다. 朴 대통령은 북한이 오산까지를 사정권 안에 두는 소련제 프로그 미사일을 배치하자 평양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은 응하지 않았다.
   朴 대통령은 자체개발을 지시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미국회사로부터 기술도입을 시도했으나 미 국방당국의 방해로 성사되지 않았다. 프랑스 회사와 교섭하여 미사일 추진제 개발 부문의 기술도입이 가능해졌다. 나머지는 우리가 자체 개발하여 1978년 9월26일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였다. 김정렴씨는 “내가 대통령을 모시는 9년여 동안 이때처럼 기뻐하시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주한미군에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할테니 한국 측의 자체 생산을 보류해 달라」고 요구했다. 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1·21사건, 푸에블로호 피납, 울진·삼척 공비침투사건, EC-121기격추 1974년 8·15저격사건 등으로 金日成에게 당하기만 해왔다고 생각했던 朴 대통령이 절호의 보복 기회를 잡은 것은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 때였다. 8월18일 판문점에서 미군장교 두 명이 미루나무를 자르다가 북한군인들이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었다. 이 사건은 미국을 자극하였다. 朴 대통령은 1·21사건 등에 있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너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데 대해 불만이 많았었다. 미루나무 사건은 미국을 격분시킴으로써 한미간에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보복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8월20일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 대장은 청와대를 방문, 朴 대통령에게 미루나무 절단 재개 작전의 요지를 보고하였다. 스틸웰 대장은 미 합참을 거쳐 포드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것은 局地戰이었다. 즉, 미루나무를 다시 자르는데 이 작업을 북한군이 武力으로 방해할 때는 개성으로 진격, 이를 점령한 뒤 황해도 연백평야 깊숙이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 계획은 그 전부터 韓美軍의 전략부서에서 공동으로 발전시켜 온 반격작전이었다. 우리가 공격을 당하면 一面 방어, 一面 반격으로 나와 북한지역에 戰場을 연다는 취지였다. 이 국지전의 목표는 서울에 대한 근접 위협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이날 늦게 朴 대통령은 徐鐘喆 국방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李世鎬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북한으로 진격할 경우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전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
  
   김정렴씨는 “그날 밤 나는 다음날에는 전쟁이 터진다는 확신을 갖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21일 韓美양국군은 6·25 전쟁 후 처음으로 데프콘 2(전쟁돌입상태)를 발령하고 開戰준비에 들어갔다. 휴전선 부근 상공에는 저공으로부터 무장헬기, F-4팬덤 전폭기, F-111전폭기, 괌도에서 날아온 B-52중폭격기가 4중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한국 海域에서 함재기를 띄워 보내고 있었다. 해병부대도 상륙작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군 제3사단의 기관총 射手로서 개성지역에 배치돼 있었던 安燦一 상사(탈북한 뒤 박사 학위 받음)는 “푸에블로호 사건 때와 EC-121격추 때도 전쟁이 임박했다는 느낌이었으나 도끼사건 때는 전쟁에 돌입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군장을 갖추고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坑道에 들어가 대기하였고 火器사수들은 정 위치에서 발사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이 태풍 3호였다”고 기억한다.
   겁을 먹은 북한군은 공수 1여단의 병력이 미루나무를 자르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평양-원산선 이남에서는 이날 단 한 대의 북한 전투기도 뜨지 않았다. 金日成은 개선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루나무 절단 작업이 끝난 그날 오후 金日成은 인민군사령관 자격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의 사과성 메시지를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앞으로 보냈다. 당시 정보부의 북한 담당 간부는 “우리가 북으로 진격했더라면 목표는 달성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군이 적극적인 開戰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랬었다면 金日成의 기를 결정적으로 꺾어 놓을 수 있었고 수도권의 방어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라면서 지금껏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다.
   鄭洪鎭 전 남북조절위 간사는 金日成이 그때 전면전을 할 배짱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분석했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된 북녘 땅에 그 정도의 건설을 했는데 또 다시 잿더미가 될 모험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정보부 북한담당관은 “김일성은 박 대통령을 아주 호전적 인물로 보았던 것 같다. 경제개발과 韓美日 동맹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북한에 도발해 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好戰狂 북괴’
  
   김정렴씨는 “박 대통령은 김대중씨나 김영삼씨를 라이벌로 생각했다기보다는 김일성을 늘 염두에 두고 집무를 했던 것 같다”고 했다. 확인 가능한 것만 해도 金日成은 네 차례나 박대통령의 살해를 기도하였다. 1965년 봄에 朴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어 남파했던 무장간첩 3명이 송추에서 발각돼 2명이 붙들리고 1명은 달아났다. 1·21사태와 文世光사건처럼 유명해지지는 않았지만 1970년 6월22일 새벽 국립묘지 현충문에서 일어난 폭파사건도 朴 대통령의 생명을 노린 것이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의 무장특공요원 3명은 밤중에 현충문 지붕 위에 올라가 원격조종으로 터지는 폭탄을 장치하려다가 실수로 폭발하는 바람에 한 명은 잔디밭에 떨어져 죽고 두 명은 국군과 경찰·예비군의 추격을 받다가 사살되었다. 6·25기념식 때 정례적으로 참석하는 朴 대통령과 정부요인들의 爆殺을 목적한 사건이었다. 폭발은 200∼300m 떨어진 곳에서 원격조종으로 할 계획이었다. 그 13년 뒤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있었던 全斗煥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이런 암살 기도는 金日成의 성격적 특성과도 연관되는 행태이다. 전면남침에 의한 남한의 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金은 차선책으로 유격전과 국가원수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런 암살 작전은 역효과를 불렀다. 1968년의 1ˑ21 청와대 습격 사건은 朴 대통령이 예비군 창설과 중화학 공업 건설에 의한 자주 국방력 강화로 대응하도록 하였다. 1974년 8월15일 文世光 저격 사건으로 부인을 잃은 그는 정보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본 내 북한 공작거점인 조총련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총련 母國방문 사업’을 허가하였다. 박정희를 죽이려 하였던 김일성은 결국 그 代價를 비싸게 치렀다.
   김정렴씨는 “박 대통령이 김일성에 대해 특별히 감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른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화중에 金日成이란 말이 나오면 朴 대통령은 조건반사적인 투지나 증오의 반응을 가끔 보였다고 한다. 朴 대통령의 청와대 日記에는 북한에 대한 원색적인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朴 대통령의 뇌리에 金日成이 얼마나 큰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일기를 관류하고 있는 위기의식과 적개심이 말해주고 있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도 포악할까. 인류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꼭 같은 살인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적 조국통일이니 하고 狂的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하고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1976년4월24일)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렵혀져서는 결코 안 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결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1975년4월30일).
   <지하 땅굴 또 다시 발견. 오 신이 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전쟁광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1975년3월20일).
   1976년 4월29일자 일기에서는 ‘好戰狂 북괴’라는 표현을 썼다. 朴 대통령의 일기는 그 우국충정의 분위기가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비슷하다. 충무공에 있어서의 ‘왜적’이 박정희에게서는 ‘金日成의 북한’인 것이 다를 뿐이다.
  
   태양공포증
  
   정신분석학자 白尙昌씨는 金日成·金正日의 성격을 분석해 오고 있는 이로 유명한데 金日成의 성격기반을 큰 인물 콤플렉스·살아남기 콤플렉스·태양공포증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金日成의 어릴 때 이름은 장손(長孫)·종손(宗孫)·회손(曾孫)이었고 별명은 장군, 육조판서 등이었다.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는 얘기다. 자라서 큰 인물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그가 만주에서 보낸 16년간의 抗日빨치산 생활은 살아남기 콤플렉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白尙昌시는 金日成이 마적과 비적, 빨치산과 日帝토벌대,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소련군 사이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두 가지 성격상 특성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태양공포증. 해가 뜨면 동굴 같은 깊숙한 은둔지로 숨고 밤에는 치고 빠지는 생활이 습성이 돼 먼동이 트면 불안해지는 태양공포증(Sunphobis Syndrome)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金日成·金正日이 심야회의를 즐겨 하는 등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군사시설의 지하화·땅굴파기·政敵이나 남한에 대한 기습적 공격·朴 대통령 암살기도·비행 공포증 등이 태양공포증의 표현방식이란 얘기다.
  
   또 하나의 특성은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최강자와 늘 父子관계를 맺어 생존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金日成은 ‘다섯 아버지를 가진 어린이’처럼 복잡하고 다중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多父的 동일시’라고 하는데 金日成의 경우에는 살아남기 위하여 속으로는 미워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으려고 하는 ‘敵對的 동일시’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다.
   깡패가 제거당하지 않으려고 두목에게 충성을 바치는 행위가 대표적인 敵對的 동일시의 예이다. 이런 적대적 동일시를 경험한 金日成은 권력을 잡자 多父의 상징적 집단인 국내 공산파, 연안파, 소련파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리는 한풀이를 했다는 것이다. 白씨는 북한의 역사는 金日成개인의 한풀이 역사라고 주장한다. 큰 인물 콤플렉스에서 나온 우상화와 세습체제, 태양공포증과 多父的 동일시 심리에서 나온 政敵의 숙청. 金日成은 “개인적 한을 풀기 위하여 북한 인민들을 도구로 써 먹었다”는 풀이다. 朴正熙가 개인의 恨을 민족의 恨으로 승화시켜 가난과 굴종의 사슬을 끊은 것과 대조적이다. 白씨는 金의 정치행태를 ‘무한기만의 원칙, 무한억압의 원칙, 무한연극성의 원칙’이라고 定義하기도 했다.
  
  
  
   金日成은 이런 술회를 한 적이 있다
   “만주에 있을 때 동지들이 나에게 저 하나의 별이 되라고 一星이라 이름 지어주더니 나중에는 하늘의 태양이 되라고 日成이라 고쳤다.”
   正日은 ‘확실한 태양’이란 뜻이다. 즉 金日成이 ‘민족의 태양’이 되면 金正日은 代를 이어 태양의 자리를 굳힌다는 세습체제에의 무의식적 욕망이 아들의 作名에 숨어 있었다는 해석이다.
  
   한 사람은 神이 되고
  
   白尙昌씨는 金日成 치하의 북한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을 면접, 심층심리 분석을 해보았더니 반동형성심리(Reaction Formation)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동형성심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증오의 표현을 하면 낭패하므로 정반대의 다정스런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방어심리라고 한다. 이런 심리의 특징은 친절과 경탄의 과장된 표현과 이의 반복이라고 한다.
   金日成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지만 그 金日成 앞에서는 울부짖고 경배하는 북한사람들의 과장된 몸짓이 이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북한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金日成에 대한 복종과 경배의 자유, 다른 하나는 남한에 대한 증오 표현의 자유. 폐쇄된 북한사회에서 쌓이는 주민 불만을 이 두 가지 배설구를 통하여 토해내도록 한다. 白씨는 “金日成의 50년에 걸친 정신 병리적 통치에 대한 뒷 처리를 우리가 맡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라고 했다.
   朴 대통령의 주된 콤플렉스는 가난이었다는 것이 白씨의 주장이다. 朴 대통령의 근대화도 개인적 한풀이가 동력원이 된 것이다. 金日成과 다른 것은 朴 대통령은 자신뿐 아니라 한국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던 가난의 한을 함께 풀 수 있도록 유도하여 집단적 한풀이를 민족의 발전 에너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1970년 말에 金日成과 朴正熙의 관계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한 사람은 神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영웅적인 삶을 살다가 “난 괜찮아”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는 점이다. 金日成은 북한을 거대한 우상숭배의 神政체제로 변모시킴으로써 어떤 비판으로부터도 벗어나 버렸다.
   朴 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따른 국내외의 비판과 도전을 받고 괴로워하였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푸념하는가 하면 “내가 목표를 달성하면 그만둘 텐데 국민들이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나” 하면서 섭섭해 하기도 했다. 남이 면전에서 칭찬해주면 계면쩍어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그에겐 개인숭배가 체질상 맞지 않았다.
  
   둘 다 核 개발 시도
  
   1970년대에 金正日이 일종의 惡役인 國政의 실무에 개입하면서 金日成은 선심만 베푸는 「인자한 할아버지」로 상징조작 되었다. 북한사람들은 金日成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으로 알고 있다. 모든 과오와 나쁜 짓은 자비로운 수령의 뜻을 밑에서 잘못 받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끔 金日成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없애버렸다. 金日成이 신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부하에게 순교를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애하는 수령’ 金日成은 KAL 858편 폭파범 金賢姬·다대포침투 무장간첩 全忠男 같은 테러리스트에게, 발각되면 자살하라고 교육하는 유일한 정치지도자이다. 북한의 간첩선은 자폭용 폭약을 싣고 다니고 자폭할 때 ‘김일성 수령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최후의 전보를 치는 훈련을 받고 있다. 1979년 7월 삼천포 근해 미조도에서 10여명의 무장간첩이 自爆하면서 그런 電文을 실제로 보냈다고 한다. 金正日은 공작원들에게 “너절하게 사는 것보다는 영광되게 죽어 정치적 생명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 낫다”고 교육까지 하고 있다.
   金日成이 영변원자력 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朴 대통령에 의한 핵개발이 남한에서 시작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좌절한 무렵이다. 해가 갈수록 불리해지는 재래식 군사비 투자 경쟁에서 버티기 위하여 金日成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위협과 남한 내의 미군 핵무기 철수를 요구할 수 있는 수단을 核개발에서 구하려 했던 것 같다.
   金日成의 정치적 행태의 한 특징은 인질작전이었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돌아온 조총련 동포를 인질로 삼아 在日조총련을 조종하고, 在北친척을 미끼로 삼아 訪北 언론인·종교인·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하며, 남북 고위급 회담 때는 姜英勳총리의 누이동생을 억지로 만나게 하였다. 핵개발은 세계적인 개방물결과 공산주의의 붕괴, 그리고 對南 열세에 직면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의 협박수단, 하나의 인질효과, 하나의 위안거리를 선물하게 되었다.
  
   카터 때문에 속병 앓기도
  
   한국군이 본격적인 戰力증강 노선을 결정한 것은 1974년으로서 북한이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한 것보다 12년이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경제규모의 뒷받침을 받아 76년에 벌써 군사비 지출이 36.9억 달러 對 31.6억 달러로서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1990년의 남한 군사비는 약100억 달러로서 GNP대비 4.5%인데도 GNP 대비 약22%인 북한(54억 달러)의 두 배였다. 우리 국방부는 군사비를 운영비와 군사력 건설 투자비로 나누고 있는데 남한은 인건비가 많이 먹혀 군사력 건설비의 비중이 적다. 북한은 군사비의 48%를 군사력 건설에, 남한은 38%를 군사력 건설에 투자하고 있는데 이런 추세로 나가면 1990년대 중반에 투자비 누계도 남한이 앞서게 된다는 통계가 있었다. 朴 대통령의 先경제, 後군사력 강화 전략이 金日成의 군사 우선 전략을 결국은 압도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1991년 현재 236회에 걸쳐 軍縮 제안을 해 왔다. 남한은 29회였다. 북한 제안은 거의가 주한미군의 철수·한반도의 비핵지대화, 그리고 減軍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이 선전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더라도 허약한 경제체질에 무거운 군사비의 짐을 진 북한의 다급함과 남한의 여유를 엿보게 하였다.
   김정렴 실장은 “말년에 박 대통령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카터 대통령이 공약한 미 지상군의 완전철수 계획이었다”고 했다.
   “곁에서 보기에 안쓰러웠습니다. 7사단 철수 때 그 대책에 부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고민했습니다. 이때 신경을 너무 써 십이지장궤양에 걸렸어요. 주치의를 불러 내시경으로 진단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김 실장은 카터 대통령의 회고록이 나왔을 때 얼른 사서 朴 대통령을 그토록 괴롭혔던 그의 책에 인권외교와 撤軍문제가 어떻게 언급돼 있는지를 찾았으나 한국에 관하여 기술한 것은 940면(일본어 번역판) 가운데 네 줄 반이었다고 한다. 그 네 줄 반은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와 나눈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 대화에는 金大中, 全斗煥, 朴正熙의 이름이 나오는데, 레이건 당선자는 “학원이 술렁이고 있을 때 대학을 봉쇄하고 데모 주동 학생들을 군대에 보내는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이 부럽다”고 열심히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김정렴씨는 “철군에 대비하기 위하여 또는 인권문제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렇게도 고생하던 박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대통령이 너무나도 애절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79년 6월 朴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이 회담후 측근들에게 신경질을 내게 할 정도로 미군철수 반대론을 집요하게 개진하였다. 朴 대통령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지휘 통제하에 있는 세계최강의 60만 현역과 300만의 잘 훈련된 예비군이 西歐의 나토군과 더불어 소련을 견제하는 2대 支柱임을 세계전략 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리는 朴대통령이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철군정책을 포기하게 된 것은 미 군부의 완강한 반대와 朴 대통령의 논리적 설득 때문이었다는 것이 김정렴씨의 주장이다. 朴 대통령이 죽기 직전에 한 일 중의 하나는 朴鐘圭 대한체육회장이 기안해서 올린 서울올림픽 유치계획을 승인, 죽기 20여일 전에 서울시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남북한은 서울올림픽의 개최를 둘러싸고 격돌하여 KAL 858편의 승객·승무원 115명의 목숨을 祭物로 바치기도 했지만, 국제사회에서 남한의 경제적, 외교적, 도덕적 우월성이 공인받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북한정권이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유치한 세계청년축전(1989년)은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유발, 경제를 다시 한번 멍들게 하였다.
  
   성공한 것은 ‘朴正熙 세습체제’
  
   金日成은 말년에 남한에서 올라간 姜英勳 총리 등 손님들에게 “나는 낙천적이기 때문에 건강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썼다. 북한 전문가들은 그의 ‘낙천적’이란 말을 ‘혁명적 낙관주의’로 해석하였다.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나 적화통일이 언젠가는 가능하다는 낙관을 갖고 살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申相玉씨는 “그는 꼭 말년의 李承晩 대통령과 같았다. 귀가 어둡고 정보가 잘 올라오지 않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보폐쇄는 북한의 言路를 틀어막아 결국 金日成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는 뒤늦게 김정일에게 맡겨놓은 북한의 實相을 알고는 남북 수뇌 회담을 통하여 活路를 찾으려 하였으나 역사의 神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북한에서 즐겨 쓰는 이른바 ‘정치적 생명’이 영원하게 될 쪽은 朴正熙일 것이다. 김일성이 죽기 전부터, 중국·소련·東歐 공산국가들은 朴 대통령의 개발모델을 연구하고 있었고, 외국에 나온 북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 朴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그의 심복이었던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성공한 것은 朴正熙식 세습체제였다.
   朴正熙의 행복은 죽음의 타이밍일 것이다. 자신이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어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의 적응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 他力에 의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나라의 짐을 덜어주었다.
   金日成과 북한주민의 불행은 그의 長壽였다. 민주사회의 장점은 정치지도자의 퇴장시기를 국민이 정해주는 것이고 전체사회의 단점은 시간과 독재자가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김일성 父子는 자기 실패의 受惠者,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로 평가될 것이다. 김일성이 하나 성공한 것이 있다면 한국에 거대한 從北세력을 양성,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호화별장과 벽돌 한 장의 차이
  
   1987년 3월에 남한으로 탈출했던 김동춘씨는 金日成·金正日의 별장관리인으로 10년간 근무한 경력으로 해서 공개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2년 뒤 이북 5도청 3층 소강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金 부자 별장은 전국 명승지, 산 좋고 물 좋고 온천 좋은 곳이면 없는 곳이 없어요. 숫자상으로 80개나 됩니다. 이 별장을 지을 때 국내에서 만든 자재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 시멘트, 벽돌만 북한 것을 사용했어요. 기타 모든 것은 외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은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서 수입해온 것이지요. 일본의 히다치 제품이 제일 많았습니다. 별장은 하나 당 수십만 평을 차지하고 있어요. 한 개의 별장규모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경비하기 위해 2개 내지 3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별장 밖에서는 이들이 경비를 맡고 있고 별장 안엔, 아가씨들이 배치되어 있어요. 큰 별장 같은 경우엔 40명, 작은 별장엔 30명 정도의 아가씨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요. 이 아가씨들은 전국에서 뽑혀온 처녀들입니다. 나이가 18세에서 25세까지이지요. 25세가 되면 이곳에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어요. 25세가 되면 제대를 시키는데 사회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가씨들을 자신의 경호원하고 결혼을 시킵니다. 25세 된 아가씨들의 사진을 10개 정도 탁자 위에 쭈욱 엎어 놉니다. 경호원 중 나이순으로 총각을 뽑아 이 엎어놓은 사진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요.
   그걸로 일생의 배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러한 배우자 선택을 경호원들은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수령님과 지도자께서 중매해 주는 이런 영광이 어디 있느냐’는 식이죠. 이 여자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일성, 김정일을 곁에서 모신다고 해서,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다’는 정도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취미는, 이 아가씨들과의 사랑 놀음 이외에도 사냥과 낚시를 즐겨합니다.
   별장 터의 면적을 수십만 평씩 잡은 것도 사냥을 위해서입니다. 사냥터에 나가면 꿩이 수 만 마리에요. 별장 주위의 넓은 빈터에 콩을 몇 정보씩 심어 놓았다가 가을이 되어도 수확을 하지 않아요. 콩이 마를 대로 말라 떨어지면 꿩들이 먹이를 먹기 위해 다른 곳에 가지를 않습니다. 그 다음에 金父子는 자동차를 타고 엽총으로 꿩을 사냥하는 것이지요. 노루, 사슴 등도 몇 십 마리씩 가두어 놓았다가 두 사람이 사냥을 나갈 때면 풀어 놓죠.”
   朴 대통령이 피살된 뒤 청와대집무실과 2층 침실을 정리하던 직원들은 집무실에 붙은 화장실의 변기 물통 안에서 벽돌 한 장, 침실의 변기 물통 안에서 벽돌 한 장씩을 발견했다. 이 벽돌은 물을 절약하기 위하여 그가 직접 넣어둔 것이었다. 집무실 변기에 그렇게 한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가 있겠지만 아무도 안 보는 침실의 변기물통에도 벽돌을 넣어둔 것은 朴 대통령의 자신에 대한 엄격성을 보여주었다.
   인간 朴正熙와 인간 金日成의 이런 차이는 그대로 오늘날 남북한 주민들의 삶 속에 선명한 明暗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 2009-11-29, 11:0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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