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단행본/일본에서 일어나는 ‘한반도自由統一지원론’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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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정권의 납치 범죄에 韓日 국민들이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긴 귀중한 自覺이다. 신라가 對唐결전을 할 때 일본은 ‘우호적 중립’을 지켜 삼국통일을 지원하였다! 白村江 해전에서 흘린 百濟와 倭의 피가 저주가 되어 韓日관계를 近親증오로 몰고 갔다. 이 呪術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은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을 지원, 東北亞에 항구적인 평화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격차가 더 커지는 서울과 도쿄
  
   도쿄에서 일주일간 머물다가 김포공항에 도착, 서울시내로 들어왔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다. 서울과 도쿄의 隔差(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격차감은 서울에서 하룻밤만 자고 나면 무디어진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도쿄의 시각으로 비교하게 되지만 곧 서울의 시각, 즉 비교대상이 없는 內在的(내재적) 시각으로 돌아간다.
   우선, 서울의 거의 모든 건물들이 도쿄에 비하여 작고, 허술하고, 美的인 면에서 떨어진다. 도쿄에선 지난 10년간 都心(도심) 재개발과 대규모 건축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로퐁기 힐, 미드 타운 등 세계적인 高層복합건물들이 수십 개 들어섰다. 로퐁기 힐은 54층의 主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부속 건물 안팎에, 쇼핑센터, 공원, 호텔, 아파트, 방송국, 미술관, 전망대 등을 모아 하나의 도시를 이루었다. 아마도 常駐(상주) 인원이 수만 명일 것이다. 신도시 하나를 수직으로 올린 개념이다. 신주쿠에 세워진 도교都廳舍도 40층이 넘는 어마어마한 건물이다.
   이런 개념의 도심 재개발이 성공하는 바람에 舊式(우리나라식이기도 하다)의 신도시 개발은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방송국이 都心(도심) 재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특징이다. 로퐁기 힐에는 아사히 TV, 오다이바에는 후지 TV, 아카사카에는 TBS 등등.
  
  
   都心복합건물의 매력
  
   도쿄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것은 역시 돈의 힘이다. 일본이 2008년 말 현재 해외에서 보유하고 있는 資産은 610조 엔이다. 약6조 달러라는 이야기이다. 일본의 對外 채무는 약330조엔, 약3.3조 달러이다. 對外 채권액에서 對外 채무를 뺀 순 對外채권은 2조 달러를 넘어 3조 달러에 육박한다. 2등인 중국의 약 배이다. 이는 한국 한 해 총생산의 배 이상 되는 액수이다.
   일본은 16년째 세계 최대의 對外 채권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구촌에서 일본은 가장 큰 채권국이고 미국은 가장 큰 채무국이다. 美日동맹은 최대 채권국과 최대 채무국 사이의 짝짓기이다.
   2006년의 경우 일본은 對外투자에 의한 이자소득으로 약1300억 달러를 벌었다. 이는 상품과 용역수출로 얻은 무역흑자 730억 달러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은 제조업 국가로 알려져 있으나 상품을 팔아서 본 이득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對外투자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怪力이다.
   이런 일본의 財力이 불황기에 도시 재개발에 투입되었다. 돈의 실력에다가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과 철저함과 청결함, 그리고 디자인 실력이 가세하니 도쿄가 ‘크고도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도쿠가와 幕府(막부) 시절에 이미 인구 100만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컸던 도시가 도쿄이다. 2차 대전이 났을 때는 런던, 도쿄, 뉴욕이 세계 3대 도시였다. 지금 도쿄都는 인구가 1300만 명이지만, 인근 요코하마, 가와사키 지역까지 포함한 도쿄권에는 3500만 명이 산다. 인구 및 생산력에서 세계 최대의 도시권이다.
   한국도 수평적인 신도시 개발을 再考(재고)하고 도쿄식의 都心복합고층건물에 의한 수직적 재개발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고층복합건물을 하나의 신도시로 보는 개념을 도입하여 개발할 경우, 교통량, 오염물질 배출량이 줄어든다. 수평적으로 개발하여 자연에 넓은 영향을 주는 것보다는 고층화가 오히려 親환경적이라고 한다.
   도쿄의 고층복합건물들은 모두가 아름답다. 이런 건물이 凶物(흉물)이 되면 도시의 재앙인데, 디자인에 총력을 다하니 건물을 보고 이용하는 것이 큰 도시에 사는 즐거움이 된다. 롯데 그룹이 잠실에 지으려는 건물의 成敗(성패)도 디자인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城南(성남)공항의 軍用(군용) 활주로를 3도 틀어주면서까지 허가를 해주었는데 못난 건물을 지었다고 욕을 먹지 않아야 할 것이다.
   로퐁기 힐과 가까운 곳에 세워진 미드타운은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씨가 설계하였다. 그는 시고쿠 연안의 작은 섬 나오시마에 地中 미술관을 지은 사람이다. 이 미술관에 가보면 일본인보다 한국인들이 더 많을 때가 있다. 디자인이 경쟁력이다.
   서울의 도로는 도쿄에 비하여 울퉁불퉁하다. 특히 步道(보도)가 심하다. 도쿄의 步道는 서울 신문로 세안빌딩 앞길과 같다. 세안빌딩은 재일교포 기업인이 일본식 기준으로 지은, 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단단한 건물일 것이다. 여자들의 하이힐이 凹凸(요철)이 심한 步道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나는 도시에서 내세우는 ‘디자인 서울’은 공허하다.
  
   步道도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가 일본을 우습게 본다
  
   서울은 더럽다. 특히 週末(주말)에는 청소부가 쉬는지 더 더러워진다. 한국에서 가장 깨끗한 건물은 새로 지은 건물이다. 시간이 지나면 더러워진다. 도쿄에선 오래 된 건물일수록 빛이 난다. 하도 닦고 갈아서이다.
   종로의 步道는 노점상 차지이다. 세금 내는 행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 노점상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할 판이다. 일본에선 도로상의 불법주차가 없다. 거리는 하나의 교육장이다. 무질서와 불법을 일상적으로 보고 자란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킬 리 없다. 도쿄는 계속하여 자신을 개혁함으로써 세계 1등 도시의 위치를 유지해 가는데 서울은 방콕을 닮아간다.
   도쿄와 서울의 격차가 좁혀져도 따라잡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데 더 커지고 있으니 문제이다. 서울이 도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一流국가를 만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최근 영국의 BBC가 조사한 국가好感度(호감도) 랭킹에 따르면 독일이 1등, 일본이 2등을 차지했다. 몇 달 전 미국의 타임誌는 일본의 높아가는 인기를 다룬 기사를 표지 기사로 올렸다. 일본의 국제적 인기는 평화를 추구하고, 對外원조를 많이 하고, 서구식 발전을 하면서도 자신의 전통과 도덕을 유지하는 점에 있다고 이 기사는 전했다. 60여 년 전만 해도 두 나라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戰犯(전범)국가로서 惡의 소굴로 여겨졌었다. 흉악한 정치세력이 전쟁으로 제거되고 민주화되니 두 나라 국민들의 우수한 자질이 드러나 인기 높은 나라를 만든 것이리라.
   이런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이 一流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인의 都心 시위 목격기
  
   2009년 5월3일은 일본의 헌법 기념일이었다. 자민당 등 우파는 헌법개정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공산당과 노조를 비롯한 좌파는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대중집회를 가진 좌파가 긴자(銀座)부근에서 가두시위를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일본 공산당, 노조, 기독교 단체, 평화운동 단체, 환경단체, 사회당 등이 참여한 시위는 시종일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행인과 차량에 전혀 폐를 끼치지 않는 도심 시위였다.
   경찰은 이들 시위대에 人道와 한 車線을 내어주었다. 시위대는 가로로 두 세 명이 서서 행진하였다. 배치된 경찰관은 시위대 100m 당 한두 명이었다. 긴 곤봉을 찬 진압경찰이 드문드문 보였다. 시위대의 중간 중간에서 마이크를 장치한 차량이 구호를 선도하였다. 시위대는 男女老少(남녀노소)가 고루고루 섞여 있었다.
   '헌법을 지키자' '힘을 버리고 사랑으로 평화를' '헌법 9조 개정 반대'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걸어가는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으나 살벌하지도 추잡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헌법 9조는 '國權(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武力에 의한 위협 혹은 武力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선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고 되어 있어 自衛權(자위권)도 없다는 해석이 강하다. 여당과 우파는 이 조항을 고쳐 자위권을 명시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시위대의 표정도 놀러 나온 사람들처럼 밝고 여유가 있었다. 한국의 親北좌익이 보여주는 증오와 원한 서린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이크를 잡고 구호를 선창하는 사람은 전부가 여성이었다. 앙칼진 목소리가 아니고 교양 있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을 격앙시키기보다는 호소하는 스타일이었다. 경찰은 골목에서 마이크를 들고 선동하는 두 사나이를 에워싸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두 사람은 연신 경찰관들에게 절을 하면서 구호를 외치곤 하였다.
   시위대를 구경하는 行人은 많지 않았다. 서양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정도이고, 신문과 방송도 이 도심시위를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런 일본이지만 1960, 70년대의 시위는 지금의 한국만큼 과격하였다. 월남전 반대를 명분으로 내걸고 극좌파들이 폭력시위를 하고 나중에는 기업체 빌딩을 폭파시켰으며 내부 투쟁으로 참혹한 殺戮劇(살륙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도쿄대학은 극좌파의 시위로 학교 기능이 마비되어 1년간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였다.
   과격하던 시위가 온순하게 된 데는 언론과 여론의 외면과 엄격한 처벌, 그리고 공산권의 몰락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본 시위대가 한국에서처럼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관을 때렸다가 구속 기소되면 판사들은 징역 3~5년을 예사로 선고한다. 한국의 촛불난동 재판 담당 판사들은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된 폭력시위자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경우가 많다.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하자”
  
  
   나는 2009년 5월6일 도쿄의 히비야 공원內(내) 공회당에서 열린 ‘납치피해자의 조기 구출을 요구하는 국민대집회’에 한국측 演士로 참여하였다. 납치 가족회, 구출회,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의원연맹이 공동주최한 年例행사였다. 2009년 3월11일 부산에서 KAL기 폭파범 金賢姬씨를 만났던 다구치 야에코씨(납북된 일본 여성-이은혜)의 아들과 오빠도 참석하였다. 가와무라 관방장관, 히라누마 의원연맹회장, 나카가와 전 재무장관 등 정치인들도 많이 나왔고 한국에서도 6․25전쟁납북자 및 戰後 납북자 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일본 정부는 납치문제대책본부를 설치, 수상이 본부장을 맡고 관방장관이 副본부장이다. 일본 정부와 與野 정당이 합세하여, 한국에 비교하면 숫자가 많지 않은 납북자들의 귀환을 위하여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특히 부러워하는 이들은 한국인 납북자 단체의 인사들이다.
   나는 이런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2년 전 선거를 통하여, 북한정권의 反인류적 범죄행위를 묵인해온 좌익정권을 퇴장시키고 李明博 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전통적인 韓美日 동맹관계도 복원되고 있습니다. 좌파정권 시절 북한정권 손에 들어갔던 연평균 10억 달러어치의 돈과 물건도 이젠 끊겼습니다. 李明博판 對北경제제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북한인권문제해결을 위한 국제공조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 미국과 일본의 동맹은 형식상 군사동맹이나 그 핵심가치는 인권입니다. 군사동맹이자 인권동맹인 것입니다.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씨와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 가족의 만남도 한국의 정권교체가 준 선물입니다. 지난 주에는 두 나라 정부의 당무자와 金賢姬씨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두 나라 민간인끼리의 협력과 두 나라 정부 사이의 협력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북한정권에 가해지는 힘이 커질 것입니다.
   10여년 만에 다시 입을 열기 시작한 金賢姬씨는 金正日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가 될 것입니다. 그녀는 인터뷰 등을 통하여 세 가지 중요한 증언을 하였습니다. 첫째, 동료 공작원 김숙희가 납치되어 온 요코다 메구미양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둘째, 사망하였다고 발표된 다구치 야에코씨는 살아 있다고 확신한다, 셋째 자신에게 중국어를 가르친 사람은, 일본의 납치자 구출회가 3년 전에 마카오에서 납치되었음을 확인한 바 있는 미스 孔이란 여성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구출회가 구한 미스 孔의 납치 전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金賢姬씨는 “바로 이 여성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웠다”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마카오는 중국령이므로 중국도 납치 피해국이란 뜻입니다. 중국도 더 이상 김정일 독재정권을 감싸지 말고 북한인권 문제 해결에 동참해야 합니다.
   김정일 자신이 대량살상무기, 즉 Weapon of Mass Destruction(WMD), 그 자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김정일 개인을 압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전략이 되어야 합니다. 김정일이 다이어트를 하도록 해야 북한주민들이 배 불리 먹게 될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김정일이 정신적, 육체적 위협을 느낄 때만이 납치자 문제도 해결될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과 미국의 정의로운 사람들이 힘을 합쳐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하여 체포명령이 떨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수십만 명을 人種청소하였다고 수단의 현직 대통령을 反인륜범죄자로 규정하여 체포에 나선 국제형사재판소라면 수백 만 명의 人命 손실에 책임을 져야 할 김정일을 그냥 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법과 논리가 아니라 용기와 결단입니다.
   김정일을 단죄하는 것 이상의 正義는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과 미국, 그리고 인류의 이름으로 그를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하여 법정에 세우는 운동을 전개합시다. 함께 싸워서 함께 승리합시다! 감사합니다>
  
   “일본이 한반도의 자유통일 지원하자”
  
   이날도 요코다 메구미씨의 어머니 요코다 사키에씨가 연설했다. 납치자 송환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요코다 사키에씨는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딸이 중학생 때 납치되었는데, 김현희씨의 증언에 의하면 동료 공작원 김숙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나는 그 아이를 기를 때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 아이가 공작원을 양성하는, 무서운 일에 참여하고 있다니, 정말 원통합니다.'
   메구미 양은 어릴 때 언덕길을 올라가는 할아버지의 짐을 들어주고 받은 사과를 가져와선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하고 얼굴이 발개졌었다고 한다.
   賢母良妻(현모양처)의 표상 같은 70대 할머니의 호소에 場內(장내)가 숙연해졌다. 이 대회 참석자들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 김정일 정권은 모든 납치피해자를 보내라!
   2. 일본정부는, 납치문제를 이유로 추가 제재를 발동하여, 사람, 돈, 물건의 흐름을 저지하라!
   3. 미국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고, 금융제재를 재발동하라. 한국정부는, 납치문제 해결에 진지하게 임하고, 납치해결 때까지 對北지원을 중지하고 제재를 가하라!
  
   필자는 이번 도쿄 방문중 李明博 정부가, 金賢姬-다구치 야에코 가족 만남을 허용한 것이 韓日 관계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계기로 일본의 世論과 정부 및 국회가 反북한정권으로 돌았으나, 한국의 좌파정권이 북한인권 문제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는 親한국적으로 가진 않았다. 작년에 李明博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부터 일본 보수층의 視覺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일본이 한국 주도에 의한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지지하여야 한다”는 말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납치자 구출회 회장대행으로 있는 니시오카 츠도무씨는 대표적인 자유통일 지원론자이다. 그는 일본인 납치자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북한정권의 붕괴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길은 한국의 자유통일 정책을 일본이 지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자유통일의 의지를 확실히 하지 않으므로 일본이 지원하고 싶어도 창구가 없다는 점이다.
  
   韓美日 對 中北
  
   일본 보수층에서 대두되는 자유통일 지원론은 反김정일 감정과 함께 중국 경계론의 연장선상이다. 중국이 북한 편을 드는 한 核과 미사일 문제, 아마도 북한인권 문제도 해결될 수 없고, 6者 회담은 실패할 것이라는 인식이 한국과 일본 보수층에서 퍼지고 있다. 중국의 협조 없이는 북한정권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압박이 효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을 緩衝지역으로 본다. 韓美日의 영향력이 중국으로 北上하는 것을 막아준다. 冷戰시대 한국이 미국과 일본에 있어선 소련과 중국의 南進을 막아준 완충지역이었던 것과 같다.
   李明博 정부는 대화를 거부하는 북한에 대하여 식량 및 비료 지원을 중단하고 남한 관광객 피살 사건이 나자마자 금강산 관광도 중단시켰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엔 한국 쪽에서 年間 약10억 달러어치의 金品이 북한으로 들어갔었다. 韓美日로부터의 원조가 줄어든 만큼 북한은 중국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은 延命( 정도의 물자 지원만 하여 김정일 정권을 조종하려 한다.
   중국 정부는 북한의 核 및 장거리 미사일 기술이 아직 實戰用으로 배치될 수 없는 낮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폭탄을 500kg 정도로 小型化(소형화)하여 미사일에 싣고 그 미사일이 誤差 없이 목표물에 도달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든지 수십 년의 세월과 여러 번의 추가적 핵실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韓美日의 과잉대응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탈북하여 한국에 온 한 고위급 북한 과학자도 '북한측이 국제적 봉쇄로 기술과 부품을 수입하기가 힘들어 核과 미사일 개발에서 넘기 어려운 장벽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고 말하였다.
   12년 전에 한국에 온 黃長燁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중국은 미군이 북한지역에 전개될 때만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영토적 야심은 없지만 당장 한국 중심으로 통일되고 자유의 바람이 뒷문으로 들어와 중국대륙의 안정이 위협받는 것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김정일을, 중국의 뒷문을 지키는 '미친 개'라고 비유하는 한국인도 있다.
   黃씨는 최선의 對北정책은 북한이 중국식 개방 개혁의 길을 걷도록 하여 내부적으로 체제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북한정권의 親美化는 막을 수 있겠지만 북한체제의 총체적 붕괴를 막을 순 없을 것이다. 최근 발표된 북한 국방위원회의 간부 명단을 훑어보면 軍과 保安 경찰기구의 대표들이 많이 배치되어 마치 戒嚴(계엄)사령부를 연상시킨다. 김정일이 말하는 先軍정치란 군대를 앞세운 계엄통치를 뜻한다. 계엄통치를 해야 할 만큼 밑으로부터의 변화욕구가 크다. 핵과 미사일 실험은 對外的 위협을 통하여 긴장을 조성, 흔들리는 체제의 통제를 강화한다는 對內的 목적에 더 무거운 비중을 두고 있다. 하나 이상한 것은 金正日이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정보기관에선 김정일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길어도 5년 정도로 본다. 그 기간에 후계구도를 굳히지 못한다면 김정일의 死後에 혼란이 생길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운 일본
  
  
   요사이 東北亞(동북아)는 7세기말 新羅가 한반도를 통일할 때의 정세와 비슷하다. 신라는 唐(당)과 연합하여 百濟(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倭(왜)의 백제부흥군 지원을 白村江(백촌강) 해전에서 좌절시키는 과정에서 唐의 목표가 한반도 전체의 屬國化(속국화)임을 간파하고 對唐(대당)결전을 준비한다. 신라는 한때 敵對國(적대국)이었던 일본이 唐을 편들어 新羅의 배후를 공격하지 않도록 對日외교공세도 폈다. 서기 670년부터 6년간 신라가 唐과 싸울 때 天武天皇(천무천황)의 日本은 신라에 대하여 우호적 中立을 견지하였다. 日本은 그때 唐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北규슈 등 여러 곳에 방어시설을 만들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신라가 이기는 것은 이런 唐의 對日침략을 근원적으로 막아주는 방파제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新羅와 일본의 對中 전략판단이 일치하였던 시기 약50년 간 두 나라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
   헌법 등에 명시된 한국의 국가목표는 '통일되고, 강력하며, 자유롭고, 번영하는 나라 건설'이다. 한국인들은 주변국가들 중 미국만이 이에 동의하고 일본과 중국은 반대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한국의 국가목표인 한반도 자유통일에 동의한다면 韓美日 관계는 ‘전략적 자유동맹’으로 격상되어 중국과 북한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加重(가중)시킬 것이다. 세 나라는 이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정치이념을 共有하고 있으므로 전략적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기도 쉽다.
   新羅가 對唐결전을 할 때 지금 티벳 지역에 있던 吐蕃(토번)이 반란을 일으켜 長安(장안)을 위협하니 唐은 兩面(양면)작전을 펼 수 없어 한반도를 포기한다. 그 수십 년 뒤 唐과 신라는 다시 國交(국교)를 회복하고 동북아의 세 나라는 약200년 간 공존공영하면서 고대사의 황금기를 만든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주변 국가들도 평화를 누리고 분열되거나 약화되면 주변국들도 불편해진다는 공식이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평가의 틀이 성립되었다. 唐은 자주성과 자존심이 강한 신라를 군사적으로 지배하여 屬國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한반도를 한민족의 領域(영역)으로 인정하였다. 신라도 당의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하고 朝貢(조공)을 통한 사대적 외교에 동의하였다. 당, 즉 중국은 한반도, 특히 그 북반부에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1950년 10월 毛澤東(모택동)이 大軍을 보내 한국의 北進통일을 저지한 것도 이런 전략적 판단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본은 신라가 한반도를 차지하여 중국의 일본열도 침략을 저지하는 방파제가 되는 것을 환영하였다. 동시에 한반도, 특히 남반부에 일본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권이 서는 것은 안보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라고 판단하였다. 한반도를 일본열도의 가슴을 겨누는 匕首라고 생각해온 일본은 20세기 초 만주와 한반도를 영향권에 두려는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이기고 대한제국을 병합하였다. 한국의 자유통일을 지지하는 일본의 보수 논객들도 “독도를 한국이 점유하고 있는 한 문제 삼을 필요가 없으나, 한국이 赤化 되었을 때는 독도를 일본이 점령하여야 한다”는 말을 한다.
  
   신라의 현란한 통일외교
  
  
   최근에 나온, 서울대학교 國史學科 盧泰敦(노태돈) 교수가 쓴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학교 출판부)는 과거를 통하여 미래를 내다 보게 만든다. 다만, 거의 한글專用(전용)으로 쓰여져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國史 관련 책을 한글전용으로 쓰면 정확한 의미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하였다. 한글專用으로 된 역사관련 책들을 읽다가 보면 머리가 아파오는 경우가 많다. 암호화된 용어들을 일일이 풀이해야 하니까. 고급, 전문도서의 한글전용은 장기적으로 독자들을 그런 책들로부터 멀리 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는 교양의 弱化로 이어지고 무례한 국민들을 만든다.
   이 책은, 한국이 자유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영악한 외교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新羅는 백제, 고구려, 倭, 唐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4각 외교 및 군사작전을 벌인다. 백제, 고구려를 칠 때는 唐의 힘을 빌리고, 唐과 싸울 땐 배후의 倭를 중립화시키고 고구려의 遺民(유민)들을 이용하였다. 三國중 가장 작은 나라가 세계최강국인 唐을 갖고 노는 외교를 한 것이다. 민족사 2000년 가운데 국가 지도부가 이 정도의 용기와 지혜와 경륜을 갖추었던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신력이 최초의 민족통일 국가를 만들어냈고, 한반도를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확보하게 하였다. 이 정신력의 源泉(원천)을 규명하는 일이 남아 있다.
   신라 지배층은 백제, 고구려에 비하여 自我의식과 주체성이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6세기 초까지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草原의 길을 활용하여 북방유목 제국, 더 나아가선 로마 문명과 교류하였던 자신감이 그런 주체성으로 昇華(승화)되었다고 본다.
   신라와 唐의 연합군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곧 백제 부흥운동에 직면한다. 倭는 663년에 약3만의 大軍을 한반도로 파견, 百濟 부흥군을 도우려 한다. 白村江의 해전으로 알려진 유명한 決戰에서 倭의 해군은 唐과 신라군에 의하여 전멸한다. 백제부흥운동은 좌절되고 倭는 한반도에 대한 野慾(야욕)을 포기한다. 이후의 사정에 대한 盧泰敦 교수의 분석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百濟人의 피의 저주
  
  
   <백강구(백촌강) 전투 이후 많은 수의 백제인이 倭로 망명하였다. 백제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민중도 상당수 바다를 건너갔다. 상당수는 그들의 재능을 활용하려는 倭 조정에 등용되었다. 백강구 전투 이후 망명한 그들의 일본에서의 삶은 비록 전문인으로서 능력에 대한 높은 평가가 큰 힘이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일본 조정의 배려에 의지하여 이루어졌다. 일본 황실에 寄生(기생)하여 내일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이 지닌 숙명이었다. 그들은 백제 부흥과 故國(고국) 복귀를 바랐지만, 自力으로 구체화할 역량은 없었다. 그들이 이를 열망할수록 실현 가능성을 일본세력의 한반도 개입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 朝廷(조정)이 한반도에 관심을 유지하게 깊은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한반도가 이른 시기부터 일본 천황가에 종속되었다는 歷史像 구축에 적극 나섰다. 그들이 돌이켜 백제 존립 당시의 백제와 倭, 그리고 왜와 가야나 신라와의 관계사를 정리 기술할 때 취하였을 입장의 큰 틀은 짐작할 수 있다. 이른바 百濟三書(백제삼서)는 이들의 저술이거나 그들의 손을 거쳐 수정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런 저술은 ‘日本書紀(일본서기)’의 내용 구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또한 ‘日本書紀’는 그 뒤 일본인들의 對外의식, 특히 對한국 인식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백강구 전투에서 흘린 백제인과 倭人의 피의 저주는 천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작용하여 韓日 양국인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제 그 呪術(주술)에서 벗어나야겠다>(인용문중의 漢字표기는 필자가 한 것이다).
   요컨대 盧泰敦 교수는 亡國의 恨을 품고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들이 일본의 正史인 日本書紀를 쓰는 데 직간접으로 관계하여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관을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심었고, 이것이 지금의 韓日 갈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취지의 기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글을 써 왔다. 오늘의 韓日 갈등, 그 深層(심층)에는 신라와 백제의 갈등이 깔려 있다는 의미였다. 日本書紀는 8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 최초 正史(일본 정권이 편찬한 공식 역사서)인데, 正史이므로 이 책에서 기술한 부정적인 新羅觀은 그대로 일본에서 국가적, 국민적, 공식적 對신라관-對한국인관으로 굳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한국의 자유통일을 지원한다는 의미는 이런 부정적 한반도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라와 백제의 近親증오가 韓日간의 증오로 변질
  
  
   日本書紀와 이 책에 쓰여진 역사관을 배우고 자란 일본인들은 백제에 대하여는 좋은 감정을, 신라(한국)에 대하여 惡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사 출신의 외교 평론가인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씨는 1970년대 한국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웃나라에서 생각한 것’이란 책을 썼는데, 한국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 올해 79세인 오카자키 히사히코씨는 지금도 전략적 助言(조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노태돈 교수가 쓴 ‘呪術’과 비슷한 의미로서 ‘백제의 亡靈(망령)’이란 표현을 했다.
   <일본과 신라 사이의 안티파시(antipathy․뿌리 깊은 증오심) 속에는 신라와 백제의 近親증오적인 안티파시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다. 즉, 신라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 속엔 백제에 대한 경계심이 섞여 있고, 일본의 신라에 대한 감정적 혐오 속에는 백제계 遺民(유민)의 영향이 짙은 일본 조정의 新羅혐오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고대사를 읽으면 일본과 백제의 近親관계는 뭔가 이상할 정도로서 역사의 뒤편에 감춰진 사실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戰前에 소학교 때 배운 상식도 그러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문자와 불교를 전해준 좋은 나라이고, 신라는 熊襲(웅습․규슈 남부의 미개 부족)의 오야붕(두목) 같은 나라로서, 일본이 공격하면 즉시 항복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로 묘사되어 있었다. 사람에 따라선 일본 조정의 書記(서기) 등은 모두 백제계 인물이므로, 역사 등도 백제에 유리하도록, 신라는 나쁜 것으로 기록하여, 일본인의 조선인 멸시는 이 백제계 사람들의 신라멸시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日本書紀에는 百濟記(백제기), 百濟新撰(백제신찬), 百濟本記(백제본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은 百濟의 古記(고기)를 여러 군데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들도 文體(문체)를 보면 백제 사람들이 야마토 조정에 제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란 說이 최근에 유력해졌다>
  
  
   신라에 대한 저주를 위해 쓰여진 日本書紀
  
  
   신화와 사실이 뒤섞여 있고, 왜곡과 조작이 심한 日本書紀(720년 발간)를 읽어보면 반 이상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 책의 집필진은 가야 백제를 자신들의 편으로, 신라를 主敵 내지 屬國으로 간주하는 서술방법을 택하고 있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는 이런 적대감과 경멸감이 한민족에 대한 감정으로 바뀌어 오늘날 韓日민족감정의 한 축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본 고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왜 일본 정권이 신라를 그토록 미워하게 되었는가이다.
   日本書紀 欽明천황 23년7월 기사에는 任那(임나: 가야지방에 있었다는 일본의 기지)를 도와 신라를 치려고 파견되었다가 신라군에게 포로가 된 調吉士(귀화 백제인氏族)란 사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억지로 바지를 벗겨 궁둥이를 내놓고 일본을 향하게 하고 큰 소리로 '일본 대장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는 그런데 큰 소리로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전과 같이 부르짖었다. 이 때문에 죽었다. 그 아들도 아비의 시신을 안고 죽었다. 그의 처 大葉子 또한 잡힌 몸이 되었다. 슬퍼하여 노래를 불렀다. '한국의 城上에 서서 大葉子가 領巾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難波(나니와)를 향해서'>
   倭人으로 귀화한 백제인이 倭를 위해 싸우다가 신라군에게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도 생명을 던져 倭에 충성을 바치고, 신라군의 포로가 된 그의 아내는 천황이 있는 難波를 향해서 충성의 깃발을 흔든다.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이 조국을 신라에게 빼앗겨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백제系 일본인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서기 562년 신라가 大伽倻(대가야), 지금의 高靈(고령)을 점령하여 가야국이 최종적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의 欽明천황은 이런 한탄을 한다. 日本書紀에 적혀 있는 대목을 옮긴다.
   <신라는 서쪽 보잘 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皇家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天運(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가야 지방)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屍身(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欽明천황은 '그들(신라)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고 말했다. 大伽倻(대가야) 지역의 사람들을 倭의 천황이 '친척'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대 일본을 세운 主力 세력이 伽倻에서 규슈를 거쳐 近畿지방(나라, 교토)으로 건너간 伽倻人들임을 암시한다. 동시에 일본의 天皇家가 가야계통 사람들임을 추정하게 한다.
  
   전쟁과 천재지변이 가장 많았던 신라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영국과 유럽대륙의 관계와 비슷하다. 오늘의 영국은 원주민에다가 독일에서 건너간 앵글로와 색슨족, 덴마크에서 건너간 바이킹족, 그리고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서 건너간 노르만족이 섞여서 만들어낸 나라이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구려족, 신라족, 가야족, 백제족이 각축하고 협력하여 만든 나라이다.
   지금 경남지방에 있었던 가야족은 일찍부터 현해탄을 건너 北규슈에 근거지를 만들어 한때는 韓日 양국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일본 동해안의 시마네 지방으로 많이 건너갔다. 북규슈에서 힘을 기른 가야족은 세토나이카이라는 內海와 沿岸(연안)지방을 경유하여 나라, 교토 지방으로 진출, 여기에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大和)를 세운다. 이 가야세력은 天皇家(천황가)를 이루는데, 한반도의 本家(본가), 즉 가야 잔존세력을 계속 유지하려 하다가 보니 가야에 위협적인 신라에 대항하여 백제와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의 지식인들이 우호국인 倭로 많이 몰려가 가야계 天皇家(천황가)를 떠받치는 관료집단을 형성하고 문자와 불교를 전하여 倭의 발전에 기여한다.
   자연히 왜-가야-백제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신라를 압박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대항하다가 강성해지자 고구려에서 독립, 6세기 중반 진흥왕 때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 결전에서 ‘가야+왜+백제 연합군’을 섬멸하여 100년 뒤의 삼국통일의 길을 연다.
   한국 역사학계의 원로학자인 申炯植(신형식) 교수가 쓴 '新羅通史'(주류성 출판사)에는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 삼국시대의 전쟁통계이다.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신라로서 총174회이다. 다음이 고구려로서 145회, 백제는 141회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 倭와 싸웠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 가장 많이 싸웠고 백제와는 다음으로 많이 싸웠다. 백제는 신라와 가장 자주 싸웠다.
   신라는 지진, 가뭄,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서도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보았다. 申교수가 三國史記를 분석하여 통계를 냈다. 삼국시대에 한정해보면 신라는 322회의 천재지변을 겪었다. 백제는 191회, 고구려는 153회였다. 申교수는 천재지변이 가장 많다는 것이 오히려 신라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국사기의 記事 내용을 분석해보면 신라는 정치에 관한 기사가 가장 많다고 한다. 정치란 권력승계를 평화적으로 하는 기술이고 지배층 내부 및 백성들과 지배층 사이의 단합을 도모하는 예술이다. 신라는 왕위 계승이 가장 안정적으로 된 나라이다. 지배층과 백성 사이의 단합도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군사적 승리 이전에 정치와 외교의 승리이다.
   申교수는 신라가 수행한 수많은 전쟁의 긍정적 면을 이렇게 분석했다.
  <전쟁은 제도개혁이나 정치반성의 계기를 제공했고, 이것이 사회발전의 轉機(전기)를 가져왔다. 특히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장시켰으며, 對唐(대당)전쟁을 통해서 백제 고구려의 殘民(잔민)을 하나의 민족대열에 융합했다. 신라는 對外(대외)전쟁을 민족적 自覺(자각)과 융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전쟁과 천재지변은 국가가 당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이 난관을 성공적으로 돌파한 나라나 인간은 강건한 체질을 터득하게 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逆境(역경)을 극복한 결과였다.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국가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통일인데 남북통일이 요행수나 공짜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미신이다.
  
   親신라 정권 天武천황
  
   서기 645년 일본 천황가에 쿠데타가 발생한다. 주모자 中大兄(나카노오오에)皇子는 皇極(황극)천황을 폐위시키고 孝德(효덕)천황을 등극시킨 뒤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이 政變(정변)에서 그를 결정적으로 도운 동지가 있었으니 백제 王族으로 추정되는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였다.
   정권을 잡은 나카노오오에는 ‘大化의 改新’이라 불리는 일대 개혁을 단행한다. 황족 및 지방의 귀족과 호족들이 갖고 있던 토지 및 백성들의 소유권을 천황의 公地(공지)와 公民(공민)으로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이들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집권적 행정기구, 전국에 통용되는 획일적인 세금제도를 만들었다. 나카노오오에는 大化라는 年號(연호)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쓰게 하였다.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천황의 지배력이 일본 全土(전토)에 처음으로 미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大化改新의 주도세력은 親百濟(친백제) 정책을 썼다. 서기 660년에 백제가 唐과 신라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당시의 천황(齊明)은 직접 사령관이 되어 백제 부흥운동파를 돕기 위한 구원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천황은 중도에 사망하는데 실권자 나카노오오에는 바톤을 이어받아 약3만 명의 병정과 수백 척의 군함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금강 하류의 서해연안으로 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白村江의 해전으로 유명한 이 싸움에서 신라-당 연합군은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서기 663년의 일이다.
   나카노오오에는 羅唐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수도를 오오츠(大津)로 옮기고, 대마도, 규슈 등 곳곳에 성을 쌓게 하고 스스로 천황(天智)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백제로부터 건너온 지식인, 관료, 귀족들을 우대하여 그들로부터 선진 문화 및 행정술을 배웠고 이를 국내 개혁에 활용했다. 개혁자 나카노오오에, 즉 天智천황은 서기 671년에 죽고 아들이 弘文(홍문)천황으로 등극한다. 이 등극에 불만을 품은 나카노오오에의 동생 오오아마(大海人)皇子가 반란을 일으켰다.
   오오아마측에는 신라에서 건너온 渡來人들이 붙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叛軍(반군)을 지원하였다는 설도 있다. 천황측에는 백제 도래인들이 섰다. 한반도 통일전쟁의 축도판적인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신라 도래인들이 밀던 반군이 이겨 홍문천황을 자살케 한 뒤 오오아마를 天武천황으로 추대했다. 親新羅 정권이 선 것이다. 이 반란을 ‘壬申의 亂’이라 부른다.
   天武천황은 14년간 집권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3년에 한번씩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신라의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배워왔다. 신라도 거의 매년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신라는 對唐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여서 일본이 唐과 손을 잡지 않도록 하는 데 외교의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왜는 唐과 국교를 끊고 신라 하고만 교류함으로써 ‘우호적 중립’을 지켰다. 최근의 한일관계를 제외하면 이때 두 나라 사이가 가장 좋았다.
  
  
  
   本家와 分家의 상호 존중
  
  
   일본 역사학자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 박사는 天武천황이 신라로부터 통일 국가 만들기에 대한 노하우를 열심히 배워 律令(율령)을 정비하고 고대 일본 국가를 완성했다고 평가하였다.
   천무천황은 역사 편찬을 지시하였으나, 日本書紀가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인 서기 720년이었다. 日本書紀를 편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백제 왕족 출신으로 나카노오오에의 쿠데타를 도왔던 나카토미노카마타리(中臣鎌足)의 아들 후지와라후히토(藤原不比等)였다. 후히토는 親신라 정권이던 천무천황 시절엔 숙청을 면하는 데 급급하였으나 그 후 文武(문무)천황 옹립에 성공하여 政界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가 편찬을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日本書紀가 신라를 매도하는 편향적인 기술방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란 점, 親신라적인 천무천황 시절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런 것이다.
   후히토의 아버지 中臣鎌足은 죽기 직전 天智(천지)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란 姓(성)을 받아 후지와라노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된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백제계 후지와라 집안이 일본의 정권을 장악, 反신라 정책과 反신라적 시각을 일본인들의 유전자 속에 심었던 것이다. 이런 反신라 감정은 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면서도 傳承(전승)되어 反韓감정으로 고착된 것이다.
   新羅에 패배한 백제와 倭人이 흘린 피와 원한의 呪術(주술)에서 벗어나려면, 오늘의 일본인들은 古代史(고대사)의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하고,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원하는 것은, 이 주술에 걸린 일본인들이 스스로 이 주술을 깨는 일이다. 일본 보수층을 대표하는 앵커우먼 출신의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는 책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일본인, 한국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이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本家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本家인 한국인들도 分家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주었으면 한다>
  
   한반도 분단과 일본의 책임
  
   韓日 두 나라가 신라의 문무왕, 일본의 천무천황 시절처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한반도가 한국 주도로 통일되어야 하고 그 통일을 일본이 밀어주어야 한다. 지원의 방법은 많다. 韓美日 자유동맹의 정신으로 통일기에 중국이 개입하는 것을 저지하고, 北韓再建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 등이다. 일본이 신라와 당이 싸울 때 취했던 ‘우호적 중립’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 전에 韓美日 세 나라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인권탄압, 납치자-납북자 문제 해결에 공조하는 것은 하나의 豫行(예행)연습이 될 것이다.
   일본이 한반도의 재통일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은 南北 분단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84년 8월호 月刊朝鮮(월간조선)에 '조선 총독부 고관들의 그 뒤'라는 르포 기사를 썼다. 취재차 일본에 가서 도쿄 근방 가와사키역에서 만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를 잊을 수 없다. 당시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 성신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었다. 내가 만났을 때는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日韓우방협회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 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大作이다. 패전 뒤 철수까지의 한국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史料로서 이미 고전이 돼 있다. 그는 이 책을 쓸 때 모은 자료를 세 권의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었다. 아주 얌전한 인상을 주는 모리다씨는, 해방 직후 日人들의 귀환을 책임졌던 京城世話會 (경성세화회) 호즈미 회장의 한 마디 말이 그를 이 필생의 작업에 몰두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모리타군, 장래를 위해서라도 철수관계 자료를 모아 두게.”
   북새통 속의 서울에서 이 말을 듣고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감동이 있었다는 거다. 모리타씨는 그 뒤 19년 동안 1000여명의 증인들을 면담, 이 책을 냈다.
   모리타씨는 군산에서 났다. 합병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배나 된다고 했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할린에 있는 한국인 문제, 한국에 남은 일본 여자들의 문제 등등 결별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御前(어전)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御前회의에서 決死(결사) 항전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적화됐을 것입니다.”
   모리타씨는 그때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고 부탁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8월15일 오후 3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安在鴻 선생(建準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自主, 互讓(호양)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 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 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격앙된 그 순간에도 이런 차분하고, 이성적인 연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 연설 덕분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수난을 면했습니다.”
  
  
   일본이 통일을 방해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識者層(식자층)에선 일본이 남북한을 이간질시켜 통일을 방해할 것이란 주장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요사이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 그런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서 납치자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김정일 정권에 의한 일본인 납치는 일본인의 對北觀(대북관)과 일본 정부의 對北(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일본에서도 인권문제가 외교의 방향을 바꾼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강경한 對北제재를 하고 있으며 북한정권의 일본 내 기지인 조총련도 분노한 여론에 밀려 瀕死(빈사)상태에 빠졌다.
   이런 흐름을 주도한 세력이 일본의 보수적인 민간인들이었다. 이들은 역사문제에선 국가주의적 성향을 보이나 한반도 문제에선 자유민주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또한 친미적이다. 이들이 反北的 입장에서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하는 데는 한국 측의 노력도 있어야 한다. 특히 재일교포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적을 가진 재일교포는 民團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이들은 冷戰 시기 일본에서 조총련을 상대로 치열한 思想戰(사상전)을 벌여 사실상 승리하였다. 2006년에, 親北성향의 노무현 정부는 民團에 압력을 넣어 조총련과 6․15식으로 합작하도록 하였으나, 민단 소속원들이 들고 일어나 집행부를 추방하는 義擧(의거)를 벌였다. 이 의거를 주도하였던 것은 과거 조총련과 싸웠던 민단의 戰士들과 통일일보였다. 이들은 한일우호 관계를 韓日 자유동맹 수준으로 格上(격상)시키는 데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재일교포는 한국인들이 일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입장에 있다.
   한국을 보는 일본인의 視覺이 ‘백제와 倭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일본을 보는 한국인의 시각도 교정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1. 일본인과 한국인은 인종적으로 가장 가깝다.
   2. 일본인과 한국인은 경쟁하면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운명이다.
   3. 일본인과 일본정부를 동일시하여 적대시하면 안 된다.
   4. 오늘의 일본은 日帝시대의 군국주의 일본과는 다르다. 민주화된 일본이므로 군국주의화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5. 韓日문제를 미국, 중국, 북한과의 관계 속에 놓고 생각해야 한다.
   6. 일본의 우파는 과거사에 대한 인식에선 문제가 많지만 북한정권을 제거하고 북한주민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일본의 좌파는 과거사에 대해서는 한국 편이지만 남북관계 속에서는 북한정권 편이다.
   7. 한일 兩國民 모두 정부의 주장을 비판 없이 추종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잘 잘못을 검증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8. 양국간의 물적, 인적 교류가 확대됨으로써 정부간 갈등을 완충시키고 있다.
   9. 통일된 한반도에 강력한 국가가 등장해야 韓日관계가 건강해진다. 허약하고 분열된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의 개입을 불러들인다.
  
   다행히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KAL기 폭파범 金賢姬의 결정적 증언으로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씨의 존재가 알려지고, 安企部가 협조하여 이 정도로 커졌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일본인 납치자 단체들도 한국의 납북자 문제 등 북한인권 문제를 국제무대에서 함께 제기해주고 있다. 이런 韓日협력체제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런 협력관계가 李明博 정부 등장을 계기로 확대, 강화된다면 ‘한반도 자유통일 지원론’도 확산될 것이다.
  
   일본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어야
  
   핵과 미사일 문제를 둘러싸고 노출된 韓美日 對 中北의 갈등은 이념과 가치관의 대결 모양새이다. 韓美日은 미국을 매개로 한 군사동맹관계이지만 핵심은 자유와 인권의 동맹이다. 한국은 미국 및 일본과 맺은 일종의 가치동맹을 통하여 중국을 압박함으로써 중국이 북한의 핵, 미사일, 인권탄압 문제를 계속적으로 감싸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 것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북한체제의 내부 붕괴와 같은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韓美日 동맹은 중국의 개입을 차단하고 한민족이 민족자결의 원칙 하에서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韓美日 자유통일 동맹’이 중국을 적대하는 것으로 비쳐져선 안 될 것이다. 신라통일의 예에서 보듯이 통일된 한국은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한다. 중국을 한국전에 끌어들인 것은 분열된 한반도의 김일성이었다. 신라가 對唐(대당)결전을 통하여 민족통일을 완수하였듯이 한국은 통일과정에서 방해자를 상대로 一戰不辭(일전불사)할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金庾信(김유신)은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唐軍이 신라마저 치려고 한다는 첩보에 접하자 御前 회의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하여 어찌 自救(자구)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라의 決戰태세에 눌려 신라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간 蘇定方(소정방) 장군에게 唐 고종이 “왜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말은 신라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신라는 비록 나라는 작으나 임금은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나라를 충성으로 받들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모시기를 父兄(부형)과 같이 하니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신라는 일본인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한국사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대목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朴正熙(박정희)에 의한 한국 근대화이다. 9세기 초 일본의 승려 圓仁(원인)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唐을 여행한 다음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유명한 기행문을 남겼다. 이 기행문에 등장하는 唐 거주 신라인들은 오늘날의 일본인들처럼 정직, 정확하고 그들이 만든 시스템은 잘 작동한다. 이들이 바로 一流시민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생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가 안정되자 동북아에 평화와 번영이 왔다. 일본 역사학자 今西龍 박사에 따르면, 이 시기 신라의 경주, 일본의 나라, 발해의 上京 중 경주가 문화와 제도 면에서 가장 앞섰다고 한다.
   국가가 존경을 받기 위하여는 自國民 보호라는 국가 본연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한국의 자유통일을 바란다는 일본의 한 우파 지식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 총리가 李明博 대통령을 만나 북한정권에 의한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에 대하여 협조해달라고 요청하면 李 대통령은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李 대통령은 납북된 自國民의 구출에 일본 정부가 협력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는다.”
   한국의 납북자 단체들은 일본 정부 관료들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호소한다. 오늘의 한국이 신라를 닮지 않는 한 일본인의 존경을 받을 수 없고 모처럼 일본에서 조성된 ‘자유통일 지원론’도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이 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步道도 제대로 놓지 못하면서 야구는 잘 하는 한국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교양 있는 국민과 魂이 있는 국가 엘리트가 國格을 높인다. 국가 브랜드 세계 2위인 일본과 영구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한국의 國格이 올라가야 한다. 실력이 비슷해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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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북한 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하여 왕성하게 활동해온 일본의 대표적 보수인사들이 만든 민간연구소이다. 國基硏이 日本에서 新정부가 출범한 것을 계기로 정책제언을 발표했는데, 일본이 한국주도에 의한 한반도 자유통일을 지지하라는 요지이다. 번역·소개한다.
  
  
  일본정부는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지원하라!
  일본의 신정권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하라! 한국에 의한 자유통일 추진을 일본의 戰略 목표로 삼아 중국의 한반도 지배를 막아라!
  
  
  국가기본문제연구소(日本)
  
  
  정책 제언
  
  1. 한국에 의한 자유통일 추진을 일본의 전략목표로 삼고, 북한 急變사태에 대비하라.
  2. 일본정부는 2009년 6월16일 ‘오바마•이명박’이 표명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명기한 자유통일 비전을 조속히 지지하라.
  3.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日•韓•美 3개국의 전략대화를 정부레벨, 軍(자위대)레벨, 민간전문가 레벨에서 충실하게 추진하라.
  4. 전략대화 속에서는, 韓•美 연합군의 北進작전이 개시될 경우, 일본이 어떠한 협력을 할 것인지, 납치피해자의 안전 확보와 구출을 위해 韓•美양국에 어떠한 협력을 요청할지도 충분히 준비해둘 것이 요구된다.
  5. 자유통일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한국이지만, 日•美 양국은 한국 내 자유통일을 추진하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日•韓•美 우호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북한의 독재자 金正日의 의학적 壽命의 한계가 보이게 되었다. 수년 내에 죽거나 重病으로 집무 불능 사태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2009년 들어 후계자 지명 작업에 착수하고, 국방위원회를 강화하는 등 김정일의 초조감의 발로로 보여지는 징후도 나오고 있다.
   독재정권의 변화는 위대한 독재자의 死後에 일어난다. 스탈린 死後의 소련, 모택동 死後의 중국 등이 좋은 예다. 김일성 死後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이미 그 시점에 김정일이 독재권력의 대부분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 死後, 북한에서 내부 통제가 되지 않는 혼란 상태, 즉 북한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경우에 대비하여 韓•美 연합군의 北進, 중국군의 개입 등이 준비되어 있다. 한반도는 지금 현상유지가 아니라 큰 변화의 시기를 맞으려고 하고 있다. 1)
   일본으로서 바람직한 것은, 한반도에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확대이며, 비이성적인 反日정책을 불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반도의 주인공들의 자유의사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신속하게 실현되는 것이 이상적(理想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공산당(이하, 中共)이다. 中共은, 스스로의 전체주의적 통제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여 왔다.
   ‘포스트 김정일’의 북한에 대해서, 中共에 종속된 정권(이하, 從中정권,*친중괴뢰정권) 수립 등, 일본의 國益과 양립될 수 없는 형태로 영향력 확보를 꾀할 것이다. 그러한 戰略 환경을 전제로 하여, 일본의 정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미 韓•美 頂上은 6월16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동 비전을 밝혔다. 韓•美연합군은 북한 혼란 시에 대비한 北進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이 韓•美동맹, 韓•日기본조약, 核확산방지조약을 유지하고 있는 한, 統一韓國은 일본의 國益에 가장 적합하다.
   극단적인 억압체제가 붕괴된 후, 자유화를 요구하는 북한 주민들이, 中共의 간섭을 배제하고, 치안을 확보하면서, 독자적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유감스럽지만 높지 않다.
   ①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②파괴분자를 제압할 치안능력을 가지며, ③한반도 북부를 통치할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는, 한국정부 외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에 의한 자유통일 추진’이 일본의 國益에 맞는 전략목표가 될 것이다. ‘從中政權’ 下에서는, 유사시에 북한의 군사시설을 비롯하여, 항만, 공항, 고속도로 등은 중국군에 의해 이용되게 될 것이다. 북한 急變사태에 대한 일본의 지원은, 한국에 의한 자유통일과 연동하는 취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從中정권’을 용인하는 것과 같은 ‘2단계 통일론’은 일본으로서는 지지할 수 없다.
   이 점을 제대로 확인하고, 최선의 시나리오 실현을 위한 노력을 쌓아가야 할 것이다. 일본이 희생과 부담을 회피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취하면, 日•美동맹의 유대는 약화된다. 그 결과, 미국이 일본을 건너뛰어 중국과 협의하여 ‘從中정권’을 용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日•韓•美가 한반도에서의 자유민주주의 확대를 공동 전략으로 삼아,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할 수 있다면, 中共의 東아시아에 있어서의 패권을 억제할 수 있다. 그야말로, 북한 急變사태에 대한 대응은 日•美동맹의 장래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기본문제연구소]
  
  사쿠라이 요시코(櫻井 요시코, SAKURAI Yoshiko)
  다쿠보 타다에(田久保 忠衛, TAKUBO Tadae)
  우시오 마사또(潮 匡人, USHIO Masato)
  엔도 코이치((遠藤 浩一, ENDO Koichi)
  오이와 유우지로(大岩 雄次郎, OIWA Yujiro)
  시마다 요이치(島田 洋一, SHIMADA Yoichi)
  타까이케 카tM히꼬(高池 勝彦, TAKAIKE Katsuhiko)
  토미야마 야스시(富山 泰, TOMIYAMA Yasushi)
  니시오카 츠도무(西岡 力, NISHIOKA Tsutomu)
  에야 오사무((惠谷 治, EYA Osamu)
  쿠보따 루리코(久保田 루리꼬, KUBOTA Ruriko)
  히라다 류타로(平田 隆太郎, HIRATA Ryutaro)
  
  
   詳述
  
  가까운 장래에, 김정일의 사망을 계기로 올 통제불능의 혼란, 즉 북한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높다. 한•미 양국은 그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韓•美연합군을 북진시키는 작전계획을 가지고 으며, 한국정부는 이에 대응하는 비상계획을 가지고 있다. 中共도 難民의 대규모 유입을 억제한다는 등의 명분으로 ‘인민해방군’을 파병하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양쪽 다 북한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派兵의 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첫번째 포인트는 ‘혼란’을 인정하는 문제가 된다.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정부가 신속하게 미국을 설득하여 작전계획을 발동하면 자유통일이 실현된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中國軍이 단독으로 진주하면 ‘從中政權’(*親中괴뢰정권)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中共이 북한 내부 세력을 동원하여 혼란 없이 정변(政變)에 공하여 親中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 사전에 美•中이 밀약을 맺고, 核미사일 개발계획의 완전 포기를 조건으로 하여, 미국이 북한지역의 분할 점령 및 ‘從中政權’의 수립을 지지하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다.
   혼란 상황이 되었을 때는, 대다수 북한주민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 法의 지배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을 북한에 실현하는 길은 한국에 의한 통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얼마나 共有되어 있을 것인가? 동족인 한국과 異民族인 중국공산당 중 어느 을 믿을 것인가? 급변사태가 발생할 때까지 한국 이 얼마나 북한주민의 지지를 얻고 있을 것인가로 결과는 바뀔 것이다.
  
   우선 韓•美 연합군의 ‘작전계획 5029’부터 살펴보자. 2)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작전계획’으로 승격을 거부했기 때문에, 작전계획이 아닌 ‘개념계획 029’로서 韓•美 양국군이 계속 보완해 왔는데, 이명박 정권이 출범 후 ‘작전계획’으로의 정비가 진전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3)
  
  
   보도에 의하면, 5029가 상정하는 것은, 북한에서의, ①쿠데타(coup d'etat), 주민폭동, 김정일 사망 등으로 內戰이 발생, ②반란군이 핵, 화학 무기등 대량살상무기를 탈취, ③주민의 대량 탈출, ④한국인 인질사건 발생, ⑤ 대규모 자연 재해의 발생으로 되어 있다. 작전계획에는 병력과 장비의 배치•운용까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4)
   한국정부는 5029이 발동될 경우의 행정면에서의 비상계획으로 ‘충무3300’과 ‘충무9000’ 등을 준비해 두고 있다.
   ‘충무 3300’은 북한에서 內戰이나 대량 난민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북한에 있는 한국인을 철수시키고, 한국에 넘어온 난민 20만 명을 체육관이나 학교에 수용하는 계획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직후에, 계획의 골자가 만들어졌다.
   ‘충무 9000’은 일명 ‘응전 자유화(應戰自由化)계획’이라고 불리고 있다. 전면전쟁 상태에 의한, 김정일 체제의 붕괴를 상정한 계획이다. 북한지역을 한국이 통치하기 위해 통일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비상통치기관 ‘자유화행정본부’를 북한 내에 설치한다. 5)
  
   중국 정부는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대응방침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많은 정보가 중국군의 파견계획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미국의 평화연구소(USIP)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은 2008년1월3일, 공동 보고서를 공표했다.6) 중국의 정부당국자 및 연구자와의 논의를 정리한 同 보고서는, 북한 급변사태 시의 중국의 우선과제는, ①국경관리를 강화하여 난민 쇄도를 저지, ②치안 유지, ③核오염 처리 및 핵무기•핵물질의 확보-이며, 이를 위해 중국군 파병을 고려하고 있다, 유엔의 승인이 바람직하나 독자파병도 있을 수 있다, 라고 기술했다.
   2008년1월22일자 요미우리신문은 베이징발 기사에서 “김정일 체제가 붕괴 위기에 처했을 경우, 중국이, 북한의 일반난민뿐만 아니라, 軍이나 치안부대 등의 일부가 무장한 채 난민화하여, 국경지대인 중국 동북부에 유입하는 것을 극히 경계하여, 북한 국내에 軍을 파견하여 치안 회복과 핵 관리 등에 나서는 안이 (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승인이 원칙적으로는 전제가 된다고 하고 있으나, 난민 유입이 일각의 유예도 허용되지 않을 경우는, 중국이 독자 판단으로 파견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중장기목표는 남북한의 분열을 유지하면서, 南•北 양쪽을 衛星國化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당장은, 북한에 ‘從中政權’이 수립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7)
   미국에서는, 북한軍 잔당들이 中•北 국경에서 핵무기 반출을 시도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를 저지하는 미군과, 월경해 오는 중국군 사이에 예측불능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美•中 간에 사전에 조정할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 8)
   한국에서는 북한 급변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둘러싸고,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시대에 각계에 뿌리를 내린 친북좌익세력은, 김정일 정권과의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며 활동하고 있다. 대다수 국민은, 거액의 통일 비용과 전쟁 공포 등으로 자유통일을 기피하며, 문제를 장래로 미루려 하고 있다. 북한 전문가들 중에는,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고, “親中•개혁개방 정권”이 등장 한다면, 남북의 경제격차가 줄어들어 장래의 통일비용이 줄어든다는 등의 주장도 있다.
   북한 붕괴후 곧 바로 흡수통일을 하게 되면 남쪽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상당 기간, 북한지역을 “국제관리” 하에 둔다는 논의가, 한국 보수파 내에도 있다. “국제적 관리”의 내용으로서는, 유엔에 의한 통치 등이 막연하게 상정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유엔 安保理에는, 중국이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는 중대한 결함이 있어, 통치주체로는 될 수 없다.
   ‘국민행동본부’ 등의 보수세력과 기독교 등 가운데서 한국 주도의 자유통일을 강하게 주장하는 그룹이 나타나고 있다. 9)
  
   일본으로서 바람직한 것은, 한반도에서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확대이며, 비이성적인 反日政策을 불식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의 주인공들의 자유의사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신속하게 실현되는 것이 理想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韓•美 頂上은 6월16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공동 비전’을 밝혔다. 현단계에서는 소수파인 한국내 自由統一 추진세력을 지원하고, 그들과의 연계를 강화하는 것이 긴요하다.
   또한, 납치 피해자 전원을 안전하게 구출해내는 일은 양보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일본은 아베(安倍) 정권 이래, 대북 단독제재와 국제적 제휴를 강화하여, 북한 정권이 실질적 교섭에 응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10) 단, 북한 급변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김정일체제에 의한 납치피해자에게 위해가 미칠 위험성이 커진다. 그 경우, 자위대 수송기의 파견 등을 포함하여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피해자 구출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新정권은 이상과 같은 한반도 정세의 긴박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日•韓•美 3개국의 戰略對話를 정부레벨, 軍(자위대)레벨, 민간전문가 레벨에서 조속히 추진하고, 韓•美의 北進작전이 발동될 경우, 일본이 어떠한 협력을 할 것인지, 납치 피해자의 안전 확보와 구출을 위해서 韓•美 양국에 어떠한 협력을 요청할 것인지도 충분히 준비해 둘 것이 요구된다.
   朴正熙 대통령은 “한국은 자유의 방파제가 아니다. 폭정의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자유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전진하는 파도이다. 이 파도는 북경이나 평양까지 휩쓸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11) 이러한 관점에 입각한 日•韓•美 3개국의 전략적 제휴 강화가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 주석
  
  1) 김정일의 병상(病狀), 중공의 비밀파병계획, 김정일 사후의 후계정권의 불안정 요소 등은 본 연구소의 한반도문제연구회가 근간 상세한 분석을 발표할 예정이다.
  2) 개념계획(COPLAN, Concept Plan)은 미국이 부대 운용과 他國 부대와의 연계라는 기본개념을 정리한 계획이며, 작전계획(Operation Plan)은 실전용으로 개념계획을 상세히 구체화한 것이다. 5029라는 네자리 숫자도 미군이 부여한다. 북한 긴급사태에 대응하는 5029 외에, 북한 핵시설 등을 정밀공격하는 5026, 북한군이 남침해올 경우에 반격, 한미연합군이 북진하는 5027이 있으며, 5028은 없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5030은 미군 단독으로 전개하는 대북 심리작전이라고 되어 있다.
   본 연구소의 한반도문제연구회는, 5029계획이 이미 김영삼정권 때 작성되어 있었다는 당시의 한국군 관계자의 증언을 최근 입수했다. 또한, 이 증언을 뒷밭침하는 듯이 이 작전계획과 연동하는 한국정부의 대응책을 수립한 “30日계획”이 1997년7월에 작성 되고 있다. “30日계획”은 김정일의 병사가 아니라, 궁정쿠데타로 김정일이 축출되고, 신 정권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사회통제 기능을 상실하여, 난민이 대량 발생하는 것을 상정한 것이었다. 계획을 발동하여 한국이 북한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고, 북한 전체를 대표하는 지역정부를 독일식으로 흡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명기되어 있다. 실제로 1997년에는 아사자가 연간 100만 명, 수십만 명이 탈북하는 등 북한체제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월간조선 2003년 1월 호가 ‘30일 계획’ 全文을 수록하고 있다.
  3) 2008년 9월11일 李相憙 국방장관이, “만일의 상황에 대응하여 계획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다. 2009년4월22일,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이 “북한급변사태에 대비한 작전계획을 준비하고, 이미 연습도 마쳐서, 우발상황에 즉각 적용할 수 있다”고 서울에서 강연했다. 이 韓•美軍 수뇌의 발언은 5029계획이 개념계획에서 작전계획으로 격상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언론이 이 두 개의 발언을 보도하면서 이를 기정사실로서 보도했다. 단, 한•미 양국정부는 작전계획으로 격상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다.
  4) 요미우리신문 2008년9월13일자 서울발 기사에, 한국언론이 보도한 동 계획 개요가 정리되어 있다.
  5) 2004년10월4일 한국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충무3300’과 ‘충무9000’의 개요가 드러났다. 그러나, 노무현정권 시절에 충무계획을 주관하는 비상계획위원장을 역임했던 김희상 장군은 2008년4월3일, “충무계획은 급변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戰時를 위한 것이며, 5029에 대응하는 행정계획은 별도로 존재한다”고 본 연구회의 한반도정세연구회 멤버에게 증언했다.
  6) BONNIE GLASER, SCOTT SNYDER and JOHN S. PARK. Keeping an Eye on an Unruly NeighborChinese Views of Economic Reform and Stability. USIP Working Paper. January 3, 2008
  http://csis.org/files/medea/csis/pubs/071227_wp_china_northkorea.pdf
  7) 2008년12월12일, 본 연구소 기획위원회가 前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간부였던 張哲賢 씨로부터 “300만명이 아사하는 위기적 상황에서, 98년에 김정일로부터 경제 분야의 권한을 부여받은 金正男은 ‘중국식 개혁개방을 해야한다’고 제언했다. 김정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경제 이전에 먼저 정치를 공부하라’고 국가보위부의 부부장에 임명했다. 김정남은 그무렵부터 해외에 빈번히 나가게 되었다”라는 내부 정보를 얻었다. 혼란 시에 중국이 김정남을 후계로 삼으려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8) Michael E O’Hanlon. North Korea Collapse Scenarios. Brookings Northeast Asia Commentary, Number 30. The Brookings Institution. June 2009
  http://www.brookings.edu/opinions/2009/06_north_korea_ohanlon.aspx
  9) 노무현 정권 시대에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과 비상기획위원장을 역임하여,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한국정부의 정책입안에 참여했었던 金熙相 장군은, 2008년4월3일 본 연구소 한반도정세연구회 멤버의 인터뷰에 응하여, “북한이 대혼란에 빠질 경우, ‘취해야 할 조치’로서는 ① 중공군의 차단, ② 남한에 대한 전쟁을 저지, ③ 북한주민을 정상화 시키는 일, ④ 대량파괴무기의 관리” 라고 말했었다.
  10) 2009년9월3일 동경에서 행해진 ‘납치피해자 구출을 위한 국민집회’에서 아베 前 총리는 “해결방법으로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이 모색되어 왔지만, 압력에 중심을 둔 대화뿐임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북한의 대응을 정확히 분석하면서 대응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재가 효과를 나타내고 있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인내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화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는 순간에 함정에 빠집니다. 북한은 ‘대화해도 좋지만, 납치문제는 이정도로 끝내는 게 어떤가’라고 반드시 말해 올 것입니다. 대화를 바라는 순간에 逆用 당합니다”고 강조했다.
  11) 1966년2월15일, 타이완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혹자는 자유중국과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째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그런 존재란 말입니까! 우리는 전진하고 있습니다. 폭정의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자유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입니다. 이 파도는 멀지 않아 북경이나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 2009-12-01, 09: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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