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크의 등을 향하여,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인터넷단행본/李承晩과 미국, 그 愛憎(애증)의 드라마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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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李承晩과 미국의 3차 大戰
  
   국제 공산주의의 야욕을 미국보다 먼저 꿰뚫어봤던 그는 미 군정 당국과 싸워서 建國하고, 미 국무부와 死鬪하여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고, 단독 北進論으로 韓美동맹을 쟁취하고, 퇴장하는 아이젠하워를 향해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 李承晩을 닉슨은 “공산주의자와 대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賢人”이라고 평했으나 李明博 대통령은 건국 60주년 경축사에서 무시했다.
  
  
   소련군이 데리고 들어온 金日成과 미국이 귀국을 막은 李承晩
  
  
   태평양 전쟁이 原爆 투하로 끝나기 전 미국 정부는 소련군이 참전하기를 바랐다. 그 代價로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하고 지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이 항복할 뜻을 미국측에 통보하자 딘 러스크와 본스틸 대령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반도 지도를 참고로 하여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점령지 분계선으로 하자고 소련측에 제안했다. 스탈린이 이 제안을 거절하고 “부산까지 소련군이 점령 관리하겠다”고 해도 미국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때 소련군은 만주를 장악한 데 이어 북한지역으로 넘어오고 있었으나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美蘇 분할점령을 생각하고 있던 터라 덜 중요한 한반도에선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남한이 공산화되지 않았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소련군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중국공산당 산하 抗日 빨치산 출신 장교 金日成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발탁하여 1945년 9월 북한에 데리고 들어왔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조선독립을 위해 싸운 적은 없다. ‘朝鮮戰爭’이란 책을 쓴 일본공산당원 출신 기자 하기와라 료씨는 “이때 김일성은 조선인의 의식을 갖지 않은 일종의 이방인이었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시기 李承晩은 34년째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데리고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미래의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李承晩은 1945년 초 흑해연안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주기로 스탈린에게 약속했다는 폭로를 한 적이 있다. 그 전부터 李承晩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태프트-가츠라 밀약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묵인했듯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지배를 인정하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여 親蘇的이고 좌경적인 인물들이 박혀 있었던 미 국무부를 화 나게 했었다.
  
  
   누가 李承晩을 불러들였나?
  
  
   李承晩이 주장한 얄타밀약설은 한참 뒤 회담록이 공개됨으로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1945년 당시엔 미국측이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李承晩이 여행증명서를 받아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인 8월 하순부터 국무부와 합참은 여러 가지 트집을 잡고 이유를 달아 ‘反美的 인사’로 낙인찍힌 李承晩의 귀국길을 막았다. 미국 정부의 비협조로 李承晩은 서울까지 가는 교통편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10월1일자 메모에서 李承晩은 한국을 소련의 영향권안에 두기로 한 국무부내의 親共 분자들이 자신의 귀국을 방해한다고 썼다. 李承晩 연구가이기도 한 李庭植 교수(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명예교수)는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증오와 절망감에 쌓인 채 당황하던 이승만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면식도 없는 육군장교가 느닷없이 나타나 그의 귀국을 재촉했고 그를 서울로 보내준 것이다. 이승만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16일이었다>
   李 교수는 李承晩 귀국의 미스터리를 추적했다. 미 합참본부가 육군성 군사정보처 워싱턴 출장소장 앞으로 전보를 보냈다. <워싱턴에 살고 있는 이승만이란 한국인을 찾아 빨리 서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부소장인 윌리엄 킨트너 대령은 부하 장교를 시켜서 수소문한 끝에 매사추세츠街의 사무실에 있던 李承晩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귀국시켜달라고 요청했던 이는 남한 점령 미군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장군이었다. 하지는 李承晩과 상해 臨政 사람들이 귀국해야 한국의 혼돈상황이 정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45년 9월13일자 하지 사령부 일일보고서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승만을 한국의 孫中山(孫文)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다. 李承晩은 남한의 좌우익 사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 중장은 인천에 상륙한 9월8일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말을 잘 하는 해군중령 윌리엄즈를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을 돌아다니면서 민심동향을 파악했다.
   한국의 서민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는데 왜 모셔오지 않는가?”
   李庭植 교수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들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했고, 미군과 공산세력과의 갈등이 표면화하기 전이라 좌익도, 우익도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9월14일 좌익들이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에 李承晩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해방되고 독립한 나라의 대통령이 李承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李承晩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많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傳說的 이미지의 뿌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런 民心보고를 받은 하지 중장이 본국에 李承晩을 귀국시켜달라고 건의했던 것이다. 나중에 李承晩을 싫어하게 되는 하지와 좌익이 그의 귀국을 도운 셈이지만, 근본적으론 李 박사에 대한 한국 민중의 존경과 지지가 그를 불러들인 원동력이었다. 無名의 金日成을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와 전설적 김일성 장군으로 조작하여 꼭두각시로 부린 것이 소련군인 데 반해 미 국무부는 李承晩의 귀국을 막고 있었다. 그런 이승만을 조국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에 대한 민중의 압도적 지지였다. 이런 출발의 차이가 그 뒤 남북한의 차이로 발전한다.
  
  
   미국의 노선에 맞서 建國 주도
  
  
   李承晩 대통령은 1호 기록이 많다. 1호 대통령, 1호 박사, 그리고 공산주의를 비판한 1호 한국인이다. 그는, 공산주의가 진보적 이념으로 평가되어 세계를 휩쓸고 있던 1920년대 초에 이미 '국가와 기업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독립국가를 만들어 富强하려는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 이념이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1939년 이승만은 상해임정의 金九가 공산주의자 김원봉과 손을 잡으면 손을 끊겠다고 통보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 핵심은 이러했다.
  
   1. 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소련의 조종을 받는 도구이다.
   2. 공산당의 목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잡는 일이므로 그들과 협력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3. 공산당과 합작하라는 것은 소수분자들에게 거부권을 주라는 것과 같다.
  
   그는 해방 뒤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권하는 대로 공산당과 합작하면, 공산당을 만족시켜야 하는데, 공산당은 자기들이 정권을 잡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공산당에 우익이 항복하기 전에는 미국을 만족시킬 수 없다.'
   “공산당은 호열자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같이 살 수 없다.”
   李承晩은 1942년 무렵부터 소련이 한반도를 장악하려 한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3월에 戰後 처리의 방안으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채택한다. 李 박사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는데 '소련이 소비에트 조선공화국을 세우려 한다는 정보가 있다'고 아주 예언적인 주장을 했다. 1945년 李 박사는 미국인 친구인 올리버 교수에게 원고를 부탁했는데 제목이 '미국은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지 말라'였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李 박사의 이해는 소련의 위협과 야심에 대한 정확한 시각으로 발전했다. 당시 미국은 나치 독일 및 일본帝國과 싸우는 입장에서 소련을 동맹국으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런 李 박사의 소련 경계론에 동정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는 1945년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유엔이 한국을 하나의 억압자로부터 다른 억압자에게 밀어보낸다면...나는 더 이상 쓰면 안 되겠다. 나는 이런 不義와 모욕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 자신을 자제할 수가 없다. 나는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反共-反美노선
  
  
   1945년 10월21일 서울에서 열린 미 점령군 환영대회에서 하지는 그 자리에 참석한 李承晩을 ‘위대한 독립투사’라고 극찬했으나 李 박사는 답사에서 소련의 야욕을 맹렬히 비판했다. 영어와 한국어로 한 연설에서 그는 미 국무부와 군정당국에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하지 장군이 말한대로 미군이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분단되고 그 한 쪽은 또 다른 주인 아래서 노예 신세가 될 것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국무부는 李 박사의 反蘇的 발언에 대해서 주의를 주라고 도쿄의 연합군 사령부로 전보를 쳤다. 그는 미국인 고문 올리바에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음으로 말 조심이 안 된다”고 실토한 사람이다. 건국 시기에 李承晩은 진실과 예견력에 기초한 선동으로 좌익들의 거짓선동을 무력화시켰다. 선동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정치적 무기였다. 李承晩이 광복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연합군의 한 축이었던 소련의 야욕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과격한 발언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의 역사가들은 그의 지적이 정확했다고 평가한다.
   스탈린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 지역에 '민주정권', 즉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한 것은 1945년 9월20일이었다. 스탈린은 그해 8월 초순 런던에서 열린 외상회담에서 미국이 反蘇的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미국과의 대결을 결심한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북한에서 공산정권을 공고화한다는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소련과 협력하여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시킨다는 방침을 순진하게 밀고 나갔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美英蘇 외무장관 회의는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 방침을 발표했다. 李承晩은 “託治(탁치)가 강요된다면 우리는 열국의 종속민족으로 전락하고 生殺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놓는 격이 될 것”이며 공산주의자들의 讚託論(찬탁론)은 “영원히 우리 반도와 국민을 팔아먹으려는 가증스러운 행동”이라고 규탄했다.
   李承晩, 金九의 右翼진영은 反託, 남북한의 좌익진영이 소련의 지시에 따라 讚託으로 돌았다. 이는 좌익의 치명적 실수였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음에도 좌익들은 소련의 지시를 받아 反민족적 노선을 선택했다. 李承晩이 좌익세력을 ‘소련에 조국을 팔아넘기려는 매국세력’으로 규정한 것을 뒷받침한 셈이었다.
   李承晩은 反託노선은 反共-反美 노선이었다.
   신탁통치안을 논의하기 위하여 1946년 3~5월 서울에서 열리 美蘇 공동위원회는 소련이 李承晩 등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려 하고 미국은 이에 반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그 직후인 6월3일 정읍에서 李承晩은 “통일정부 수립이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우선 남한에서라도 정부를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군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자”고 연설했다. 좌익들은 이 발언을 트집 잡아 李承晩이 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공격하지만, 李承晩이 소련의 계획을 간파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내어놓은 것이다.
   소련군은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을 세우려고 38선의 통제를 강화하여 군사주둔의 경계선을 일종의 국경선으로 바꿨다.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이미 南北분단을 현실화한 소련과 김일성이 分斷의 책임자인 것이다. 소련은 1946년 말에는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그 이듬해엔 군대를 만들고, 헌법제정에 착수한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북한에선 정부형태의 조직이 작동하고 있었다.
  
   미군사령관에게 선전포고
  
   李承晩의 정부수립론을 반박한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하지 미군 사령관은 올리버에게 “이승만은 미국이 후원하여 설립될 정부에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러치 군정장관은 출입기자들에게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는 소련과 타협할 수 있는 남한 정치세력의 중심을 만들기 위하여 극우(이승만)와 극좌(공산세력)를 배제한 온건 좌우파 합작을 추진했다. 金奎植-呂運亨이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다. 李承晩은 하지의 노선을 공격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다.
   1946년 12월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그는 하지를 만났다. 하지 사령관은 李 박사에게 “귀하의 집권을 허용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이야기했고, 李 박사도 “앞으론 하지 장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겠다”고 응수했다. 李承晩이 미군사령관에게 정치적 선전포고를 한 이 무렵 북한에선 김일성 일파가 소련군 사령부가 써준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탈린은 金日成과 朴憲永(남로당 당수)을 모스크바로 불러 시험문제를 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을 써서 스탈린에게 제출했다. 金日成은 생전에 黃長燁 선생에게 “내가 답안지를 잘 써 스탈린으로부터 지도자로 발탁되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한 李承晩은 언론과 미 정부를 상대로 정부 수립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하지 중장의 공산당 옹호 노선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李承晩은 미국에서 미군사령관 축출운동을 벌인 셈이다. 하지 사령관도 이 무렵 본국정부의 소환을 받고 5년만에 워싱턴에 왔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한국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는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비공개회의에 참석하여 어두운 전망을 내어놓았다.
   “미국이 남한에서 철수하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이 남한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한국문제는 계속적인 점령정책이 아니라 美蘇의 협상을 통하여 해결되어야 한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은 미 의회에서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리스와 터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저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소련과 대결자세를 선언한 셈이다. 이때부터 동서냉전이 본격화된다. 李承晩이 몇 년 전부터 경고해왔던 소련의 야욕에 대해서 미국도 비로소 동의한 셈이었다. 하지만 미국 군부는 한국을 그리스나 터키처럼 지킬 필요는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다.
  
   犬猿의 동반자: 하지와 李承晩
  
   트루먼 대통령의 적극적인 反蘇的 개입 원칙이 한반도에선 적용되지 않았다. 미국 육군성은 가능한 빨리 한반도로부터 철군할 것을 주장했다. 미군철수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것은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인 합참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철군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아이젠하워는 나중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와 “트루먼 대통령의 실책이 북한의 남침을 초대했다”고 비난했다. 자신이 추진했던 주한미군 철수가 그런 초대장이었음을 무시한 이 배신적 발언을 듣고 분노한 미 국무부 고관 폴 니츠는 黨籍을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바꿨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1947년 7월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양하기로 했다. 그들은 소련과 합의하여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미군을 남한에 계속 주둔시킬 필요도 없으므로 李承晩이 요구해온 정부수립을 허용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李承晩은 미국과 소련, 그리고 국내 공산세력과 대결하여 反共자유민주체제하의 建國노선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주한미군을 붙들어둘 순 없었다.
   하지 사령관은 李承晩과 대결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도 신탁통치는 불가능하고 李承晩이 한국의 공산화를 막을 유일한 인물임을 잘 알았으나 워싱턴으로부터 내려오는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는 한때 李承晩을 정치자금 조성과 터러 모의 등의 혐의로 체포할 결심을 여러 차례 했지만 번번이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다고 한다. 李承晩 이외엔 代案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측으로선 ‘李承晩의 代案이 없다’는 점이 그와 대결하는 데서 항상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충남대 사학과 차상철 교수는 ‘이승만과 하지’란 논문에서 두 사람을 ‘犬猿(견원)의 동반자’라고 평했다.
   <이승만은 하지가 군정의 최고 책임자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하지 또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막강한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이승만의 정치적 위상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상대가 정치적으로 제거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그들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불가피한 동반자임을 서로 인정해야만 했다>
   유엔의 임시한국위원단은 하지와 협의한 후 남한만의 총선거를 1948년 5월10일에 실시하기로 한다. 공산당의 방해와 金九 세력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90%의 투표율을 기록한 총선거는 대한민국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일본의 法政大 교수 시모도마이 노부오(下斗米伸夫)가 쓴 '아시아 冷戰史'에 따르면 1948년 4월24일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스탈린은 몰로토프와 주다노프 등 소련공산당 간부들과 만나 북한 헌법 제정 등의 절차를 결정했다.
  <헌법은 1947년부터 소련헌법을 기초로 하여 준비되었으나, 일부는 스탈린 자신이 집필했고, 또 당초 있었던 임시헌법에서 임시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도 스탈린이었다. 이 회의에는 북한 지도자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소련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이 4월 회의의 결정에 따라 8월에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이뤄지고 9월2일에 제1회 회의를 소집했으며, 8일엔 헌법을 채택, 9일엔 인민공화국 창설이 선언되었다. 國名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러시아語로부터 直譯한 것이다>
  
  
   절망적 상황에 돌파구가 된 南侵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의 남침이 있기 직전 李承晩의 한국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미군은 1949년 6월25일 철수하고 약500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겨놓았다. 이해 10월 毛澤東 군대가 蔣介石 군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공산 통일했다.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을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毛澤東은 중공군에 있던 조선인 병력 3만 이상을 북한으로 귀환시켜 북한군에 편입되도록 했다. 1950년 초 드디어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했다. 毛澤東은 미군이 반격하면 중공군을 보내 돕겠다고 보증했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연초에 기자회견을 통하여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미국 군부의 확고한 방침을 인용한 것이었으나 스탈린과 김일성의 결심에 영향을 주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국내외의 도전에 직면했다. 주한미군 철수 결의안을 낸 바 있었던 일부 국회의원들은 잔류한 미 군사고문단 500명도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農地개혁 계획은 한민당 세력의 반대에 부딪쳤다. 국군의 增强계획은 미국의 냉담한 자세를 넘지 못했다. 한국은 버린 땅이었다.
   1950년 6월24일 토요일 밤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의 자택에서 애치슨 국무장관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전면 남침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생각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인의 운명이 한 외국인의 결심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당시 미국이 한국을 위해 파병할 이유는 없었다. 파병하지 않을 이유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미국 군부가 한국을 미군의 피로써 지켜낼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트루먼은 미군 파병에 의한 참전을 결심했다. 이 결심으로 약5만 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죽었고 10만 명 이상이 다쳤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고, 퇴임시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였다.
   李承晩 대통령은 6.25 동란중 전쟁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대통령이 시민들보다 먼저 비밀리에 서울을 탈출하고 한강다리를 너무 일찍 끊어 수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한강 북쪽에 버려졌다. 미군이 유엔군의 기치하에서 전쟁을 주도했다. 李 대통령은 국군을 유엔군 사령관의 관할 아래 두도록 했으므로 實兵 지휘도 제한적이었다. 1950년 9월15일의 인천상륙작전과 北進으로 통일의 희망에 부풀었을 때도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미국이 수복한 북한지역 관할권을 李承晩 정부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李承晩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과 함께 중공군이 개입할 경우 원자폭탄을 써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공군이 대병력으로 반격에 나서고 유엔군은 후퇴를 계속하더니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영국의 압력을 받아 원자폭탄 사용과 중공본토로의 擴戰을 포기해야 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을 포기할 뜻을 비쳤다. 이때 트루먼은 “미국은 곤경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고 선언, 한국을 두 번째로 구했다.
   릿지웨이 8군 사령관의 반격으로 전선은 38선 부근까지 올라가 교착되었다. 1951년 봄 트루먼 행정부의 制限戰 개념에 반발하던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되었다. 소련이 휴전협상을 제의하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李承晩 대통령의 열망이던 北進통일은 멀어졌다.
  
   再選 불가능
  
   1952년 5월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23일에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 무렵의 국내외 정세는 李承晩의 再選 가능성을 어둡게 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이 터지고 언론이 정부 비판을 마음대로 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戰時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수많은 동료 의원들이 ‘서울死守’란 거짓 방송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납북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鮮于宗源씨는 張勉 총리 비서실장이었는데, 李承晩 반대노선에 서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승만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에 남아 있었던 나의 아버지는 빨갱이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내가 구속시켰던 언더우드 부인 살해범들이 보복을 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승만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도 휴전을 반대하는 李承晩은 점점 극동 전략의 장애 요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51년 후반기부터 국무부나 주한 미군 대사관측은 李承晩 대통령을 대체할 인물로 張勉, 張澤相, 金性洙, 趙炳玉 등 친미 인사들을 리스트에 올리고 암시들을 계속 던지기 시작했다.
   재선에 불안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51년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183 대 19로 부결돼버렸다. 국회가 이런 분위기라면 재선은 불가능하다고 대통령은 판단했다. 이 무렵 두 개의 新黨이 탄생했다. 오위영·정헌주·김영선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원내 자유당과 이범석 등 族靑세력을 뼈대로 한 원외 자유당이 그것이었다. 원내 자유당은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상징적 대통령에 李承晩, 실권 있는 국무총리에 張勉씨를 추대할 계획이었고 원외 자유당은 처음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했다.
   원내 자유당·민국당·민우회 등 야당연합 세력은 1952년 4월에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발의시켰다. 꼭 개헌정족수인 123명이 서명했다. 한 사람의 이탈자가 생겨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세력 분포였다. 정부와 원외 자유당측은 두 번째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이에 맞섰다. 이 팽팽한 무대에 등장한 것이 張勉의 후임 총리 張澤相이었다. 그는 먼저 20여 명의 영남 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라회를 조직, 국회에 발판을 만들고 혼미한 정국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계엄령 선포, 미국에 도전
  
   李承晩 대통령은 국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1952년 5월25일 0시를 기해 부산을 비롯한 전남북, 경남의 23개 시군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26일 부산의 계엄군은 임시 의사당으로 출근하는 국회의원 통근차가 검문에 불응한다고 47명의 의원이 탄 차를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들 중 서범석 의원 등 5명은 국제 공산당 사건 혐의로 즉각 구속되었다. 2일엔 곽상훈 의원 등 6명이 같은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날 오후 4시 대구 육본 회의실에서 열린 참모회의 분위기는 怒氣등등했다.
   故 李鍾贊 육군참모 총장의 생전 회고담은 이렇다.
  『각 참모들이 브리핑을 하는데 김종면 정보국장이, 부산에서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공병대 크레인이 끌고 갔는데 쿠데타가 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군이 정치에 이용되어선 안 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참모들은 자기들끼리 좀더 구체적인 회의를 한 뒤 보고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니 각 부대에 보낼 훈령을 만들어 놓았다고 보고해서 상황실에 가 보니 칠판에다가 「군대는 동요치 말고 본연의 자세로 국토 방위의 신성한 임무만 다하라」는 요지의 훈령이 씌어져 있었다』
   朴正熙 작전국 차장이 쓴 훈령 「육군 장병에게 고함」이 예하 부대로 내려간 5월27일 오후 정례 참모회의를 하고 있는 李鍾贊 총장에게 李承晩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 장군, 할 이야기가 있으니 부산으로 내려오게』
   격한 어조였다. 李 총장은 다음날 밴 플리트 8군 사령관과 같이 임시 경무대에 들어가게 됐다. 李 대통령의 두 눈은 충혈 돼 있었고 顔面 근육은 씰룩거렸다. 李 총장에게 대통령은 『왜 나라에 반역하느냐?』고 추궁했다. 李 총장이 부산지역 계엄군으로 쓸 병력을 배치해주지 않는 데 대한 지적이었다.
   李 총장은 『각하! 작전권을 가진 유엔군 사령관의 동의 없이는 군대를 이동할 수 없다는 것,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자네가 날 훈계하나?』고 화를 냈는데 이쯤 해서 밴 플리트 장군이 말려 老대통령은 다소 누그러졌다. 李鍾贊은 미리 써 간 사표를 냈다.
   대통령은 『아직 자네만 믿네』라면서 사표를 돌려 주었다.
   부산정치파동으로 알려진 이 위기의 본질을 李承晩은 다르게 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의 홍보담당 고문인 로버트 T 올리버가 쓴 ‘建國의 內幕’에 따르면 李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38도선을 없애기 위해 투쟁할 사람은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 미 국무부의 意中의 인물인 張勉과 趙炳玉은 다시 분단을 고착시키려는 유엔군의 휴전계획에 대하여 틀림없이 협력하게 될 것이다>
   李承晩은 미국의 지원하에 야당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목적은, 李 대통령이 미국의 전쟁수행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휴전회담 자체에 반대하고 있어 장래의 골칫꺼리를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방법이 있다”고 나선 것이 77세의 鬪士였다. 그는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親與대중조직을 동원, 가두시위로 국회를 압박하고, 드디어 계엄령을 선포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국회가 열려 내각제 개헌을 하거나 후임 대통령을 뽑는 일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야당 뒤에 있는 미국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미국 대리 대사의 증언: “육군참모총장이 이승만 연금 제안”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이때 여러 가지 대책을 검토하는데 가장 극단적인 방안은 국군이나 유엔군을 동원하여 李承晩을 감금하고 국회로 하여금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李 대통령으로선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었다. 국군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는 李 대통령에 비판적인 李鍾贊 총장, 李龍文 작전국장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평양출신인 李龍文 준장은 張勉 총리의 비서실장인 鮮于宗源을 찾아가서 “군과 손을 잡고 이승만을 몰아내자”는 제안까지 했다.
   부산정치파동 때 있었던 李鍾贊-李龍文-朴正熙(당시 작전국 차장) 라인의 李承晩 제거계획에 대해선 필자가 1984년 6월호 月刊朝鮮에 처음으로 소개한 이후 여러 편의 논문과 단행본이 발표되었다. 여기선 당시 대리대사 라이트너의 ‘역사 기록을 위한 證言’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소개한다. 그때 미국대사 무초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 가 있었고, 대리대사 라이트너가 李承晩을 상대했다. E. 알란 라이트너 2세는 1973년 10월26일 워싱턴에서 한 증언에서 李鍾贊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을 찾아와 중대한 제안을 했었다고 말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李承晩 대통령에게 憲政질서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親書를 보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李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그도, 우리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게 우리의 약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지프차를 타고 내가 살고 있던 官舍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참모총장들의 의견도 종합하여 말한다고 했다. 그는 국군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후방이 이렇게 혼란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했다. 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수의 군인들과 해병대를 동원하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자택 연금할 수 있다고 말했다. 流血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구속된 40~50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숨어 있는 의원들을 나오게 하여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대가 정권을 장악할 생각은 없고,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군대를 즉각 물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한국의 육군은 유엔군의 지휘를 받고 있으므로 행동하기 전에 미국 정부의 승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미국 정부는 못 본 척하겠다는 말을 나로부터 듣는 것이었다. 미국의 개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즉각 워싱턴에 전보를 쳐 이 제안을 수락해줄 것을 권고했다. 한국에 있던 유엔위원회에도 이를 알렸다. 그들은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유엔위원회의 호주 대표 프림솔 경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다른 대표들과 상의했을 것이다. 나의 참모들도 이것은 좋은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
  
   미군 지휘관들, 李承晩 제거 반대
  
   라이트너 당시 대리대사는 자신이 보낸 電文이 이런 내용이었다고 증언했다.
   <이승만을 제거할 千載一遇의 기회이다. 그는 우리와 한국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국회도 누구를 뽑을지 알 수 없다. 4, 5명의 후보들이 그럴 듯하게 거론된다>
   라이트너는 워싱턴의 국무부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李承晩을 오랫동안 껴안고 가야 할 것이고 결국은 군사 독재정권을 맞이할 것이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라이트너는 “국무부가 이 문제로 국방부를 상대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란 점을 이해하였다”고 증언했다. 국방부는 일반적으로 전선의 지휘관 의견을 존중한다. 그는 도쿄의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한국의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이 한국의 지도자를 바꾸는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특히, 밴 플리트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부임 직후 李承晩 대통령을 만났다. 배석했던 라이트너는 클라크 장군이 李 대통령에게 “전쟁 수행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유엔군은 국내정치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부산항을 통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李承晩 대통령이 동원한 시위대가 거리에서 보급차량을 방해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경고였다. 요컨대 클라크 장군은 李承晩 정부가, 거리 시위를 조직하지 않고, 일선에서 군대를 빼내는 일만 하지 않으면 묵인하겠다는 자세였다.
   라이트너로부터 한국군 육군 총장의 대통령 연금 제의를 보고 받은 미 국무부는 귀국해 있던 무초 대사를 불러와서 대책회의를 가졌다. 결론은 “미국이 이승만 제거계획에 개입해선 안 된다”였다. 무초 대사는 나중에 털어놓았다고 한다. 한국군이 李承晩을 연금시키면 국회가 누구를 후임으로 선출할 것인가 알지 못한다는 점이 이 계획의 결정적인 허점이었다고.
   라이트너는, 미 국무부가 한국 육군참모총장을 지원하지 않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국방부와 싸우기 싫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밴 플리트와 클라크의 이승만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국무부에 보고했으므로 국무부는 더욱 국방부를 설득할 각오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이트너는 사안의 중대상을 감안할 때 국무부가 국방부와 담판을 짓고 안 되면 트루먼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야 했었다고 회고했다.
   라이트너는 이렇게 증언을 이어갔다.
   <나는 7월4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참석한 국회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미국 정부는 국회를 지지할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 직후 국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李承晩이 당선되었다. 李承晩은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을 연금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총장은 군에서 추방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무초 가족과 나의 가족이 워싱턴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그때 현명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저 늙은이를 정리할 수가 있었는데...”하고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李鍾贊의 거취
  
  
   라이트너의 음모와는 별도로 1952년 6월25일 미국 합참은 李承晩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유엔군이 취할 조치를 작전계획으로 만들어두라고 도쿄의 유엔군 사령관에게 지시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 지시에 따라 이승만 제거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 육군 참모총장에게 육군과 경찰 및 유사 군사 집단의 모든 병력을 장악하도록 명령한 뒤 부산 지역에 직접 계엄령을 선포, 그 업무에 당하도록 지시하라. 정책상 한국군만 동원하도록 할 것. 이상과 같은 사항과 관련하여 한국육군 참모총장의 신뢰도를 평가하여 보고하라.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예방 조치로 50년 7월14일에 유엔군에게 이양한 작전권을 다시 가져 갈 경우를 가상하라>
   육군 李鍾贊 참모총장의 신뢰도를 평가하도록 지시한 것은 흥미롭다. 신뢰도 평가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1981년에 조셉 굴든이 쓴 「韓國戰 秘史」에 따르면 『워싱턴-서울 사이에 오고간 여러 전문들은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미국과 이승만 사이의 어떤 대결에서도 미국 편을 들 것임을 시사했다』고 썼다.
   부산정치파동이 李承晩의 승리로 귀결된 후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바꿨다. 李鍾贊은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가고, 후임 총장엔 白善燁 장군이 임명되었다.
   李鍾贊은 참모 학교 유학에서 돌아와 진해 육군 대학 총장으로 가서 약 7년간 있었다. 4·19 뒤 그는 許政 과도 정권에서 국방장관이 됐다. 李鍾贊 장군이 李承晩에 대한 抗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군복을 벗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군측의 강력한 후원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5·16 군사혁명 뒤 주체 세력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았다. 李鍾贊은 그가 일찍이 「육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간파했던 朴正熙 대통령 밑에서 여러 나라의 대사를 지냈다. 그러다가 제2기 유정회 의원으로 지명됐다. 부하였던 金載圭 중앙 정보부장의 끈질긴 설득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李鍾贊은 죽을 때까지 유정회 의원 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多辯家였으나 부산정치파동 때의 역할에 대하여선 침묵했다.
  
   단독 北進論으로 韓美동맹 만들다
  
  
   미국과 李承晩의 숙명적인 대결과정의 클라이맥스는 1953년 7월27일 휴전 前後였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국제전쟁의 구경꾼으로 비껴 나 있던 李 대통령은 휴전기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여 주도권을 잡고 미국정부를 뒤흔들었다. 그 1년 전에 있었던 부산정치파동 때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을 연금하여 실각시키고 張勉, 趙炳玉 같은 사람이 후임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李 대통령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李 대통령처럼 미국을 다루지 못했더라면 韓美동맹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부산정치파동을 가지고 李承晩을 독재라고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의 國益이 존재했던 것이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중공군 및 북한군과 합의한 휴전협상안이 통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발, 국군의 단독 北進도 不辭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전해 대통령 선거에서 약속했던 휴전을 불가능하게 만들 사태였다. 李 대통령은 자신의 단독 북진 선언이 공갈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유엔군이 관할하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석방시켰다. 반공포로의 처리 문제는 휴전협상의 핵심이었다. 李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다 된 휴전협상을 깰 수 있었으나 휴전이 더 아쉬운 것은 중공과 북한 편이었으므로 파국으로 치닫진 않았다.
   놀란 아이젠하워는 한때 李承晩 제거계획을 다시 세워보기도 하나 설득 쪽으로 방향을 튼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휴전만 하면 즉시 한국에서 撤軍하여 공산군의 재침 위협 앞에 한국을 내버릴 것을 우려하였다. 미국은 휴전을 거부하는 李 대통령을 달래기 위하여 韓美상호방위 조약, 미군 주둔, 한국군 20개 사단의 현대화, 戰後 복구사업 지원을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韓美상호방위 조약에 의한 韓美동맹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이 韓美동맹은 그 뒤 북한군의 재남침을 막아내고 한국의 자유와 번영을 지켜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한국의 생명줄이 된 것이다.
  
  
   “인도지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승만”
  
  
   1953년 10월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은 한 달간의 旅程(여정)으로 아시아 巡訪(순방) 길에 나섰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닉슨에게 특별히 부탁한 여행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유럽은 잘 알지만 아시아에 대해선 잘 몰랐다. 이곳 지도자들을 만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는 닉슨에게 아시아 지도자들을 만나 미국의 정책을 설명하고 현지 상황을 직접 관찰하여 보고해달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닉슨은 현지 미국 대사관에 電文을 보내 “가능한 한 많은 사람, 그것도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해줄 것”과 “외교적 행사는 최소한으로 줄여줄 것”을 요청했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뉴질랜드와 호주였다. 그는 호주 수상 로버트 멘지스를 만나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 사람이 영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윈스턴 처칠과 같은 큰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다음 방문지는 인도네시아였다. 대통령 수카르노를 만났다. 닉슨은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을 통하여 그를 혹평했다. <국민들이 가난한 만큼 수카르노는 부자였다>는 것이다. 자카르타는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연상시킬 정도로 貧民街였다. 도심지 한 복판으로 汚物 처리장 같은 下水가 흐르고 있었다.
   수카르노의 궁전은 이런 가운데서도 별천지였다. <주민들의 가난함과 대통령의 호사함이 이처럼 대조적인 곳은 달리 없었다>고 닉슨은 회고록에서 썼다. 수백 에이크를 점유한 궁전엔 환상적인 정원이 있었고, 金食器에 담겨 나온 요리를 먹는 동안 호수엔 촛불을 실은 배가 떠 있었다. 樂士들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 궁전엔 아름다운 여인들도 많았다. 수카르노는 자신의 精力을 자랑했다.
   닉슨은 <수카르노는 위대한 독립투사였으나 국가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이집트의 낫셀, 가나의 엔크루마도 그러했지만 수카르노 같은 지도자는 舊체제를 때려 부수는 데는 유능해도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는 맞지 않았다.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는 거의가 이런 類型(유형)임을 닉슨은 알게 되었다.
   닉슨은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산게릴라들이 정글에서 반란을 일으켜 영국군이 진압작전을 펴고 있었다. 영국은 공산게릴라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 미국이 나중에 월남전에서 했던 실수를 범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얻은 바탕에서 반란군과 싸우고 있었다. 콸라룸푸르에서 닉슨이 만난 사람은 영국총독인 제랄드 템플러 元帥였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나는 말레이시아의 지도자들과 군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전쟁이다. 당신들은 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당신들이 공산게릴라들을 무찌른 후에는 독립할 것이고 영연방에 머물 것인지 말 것인지도 당신들이 결정할 것이다.”
   템플러와 부인은 말레이시아 현지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을 아주 존중해주었다. 닉슨은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월남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현지인을 멸시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닉슨 부통령과 템플러 총독은 인도지나 情勢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템플러는 머리를 흔들면서 비관적으로 말했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습니다만, 왜냐 하면 그는 SOB(Son of a Bitch)이니까요. 그럼에도 인도차이나가 정말 필요로 하는 인물은 바로 그 이승만입니다.”
   닉슨은 회고록에서 <그 뒤의 사태 전개는 그가 맞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강력한 지도자가 없으면 공산당과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李承晩, 아이크의 親書를 읽다
  
   1953년 가을 닉슨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親書를 갖고 있었다. 닉슨을 만난 駐韓 미국 대사 엘리스 브릭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전에 반대해온 李承晩 대통령이 북한군을 공격하여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李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공격을 해놓으면 미국은 한국을 돕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誤判하고 있을지 모른다. 닉슨은 브릭스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대사관에서 만났다. 특별 협상팀을 이끌고 있던 아서 딘은 닉슨이 이승만에게 전달할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것을 알고 말했다. 그는 李承晩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李 대통령의 이빨을 뽑고 그로부터 무기를 빼앗아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황이 좋을 때만 친구인 척하는 데 반해 李 대통령은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입니다.”
   다음날 닉슨은 경무대로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했다. 닉슨이 관찰한 李 대통령은 날씬한 몸매에 걸음이 활달하고 악수할 때의 힘도 세었다. 78세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곤색 양복에 곤색 넥타이를 맸다. 李 대통령은 닉슨 부통령이 “개인적으로 논의할 사안이 있다”고 하니 배석자를 물렸다.
   닉슨은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대변할 뿐 아니라 한국의 친구로서 활동한 오랜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고 말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는 닉슨을 凝視(응시)하였다.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李 대통령은 그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는 천천히, 계산된 행동을 하듯이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대통령은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위엄 있고 정확한 발음이었다. 이 親書에서 아이젠하워는 한국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한 뒤 李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李 박사는 편지를 무릎 위에 놓고 한 참 내려다보았다. 그가 얼굴을 들었을 때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아주 좋은 편지입니다”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서 내용과는 다른 話題로 옮겨갔다. 일본문제, 아시아-태평양 정세의 미래를 이야기하더니 미국정부가 對韓원조를 해주는 방식을 비판했다. 닉슨은 話題를 다시 親書쪽으로 돌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씀 드린다”고 했다.
   “나도 귀하에게 솔직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해서 나는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나로선 미국의 정책과 맞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나는 노예상태의 북한동포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그러나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한국인의 지도자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환영 공연 무대가 무너지다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분단된 채로 남겨놓은 상태의 평화는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평화에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李 대통령은 닉슨을 향하여 몸을 숙이더니 말했다.
   “내가 일방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미리 알려드릴 것임을 약속합니다.”
   닉슨 부통령은 이 정도의 약속으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상호합의하지 않고선 어떤 (도발적) 행동도 한국이 단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헤어졌다. 미국 대사관에 돌아온 닉슨은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닉슨은 자신의 침묵이나 무능으로 하여 李承晩 대통령이 오해를 하도록 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미국 정부가 어떤 경우에도 李 대통령이 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이해시켜야만 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닉슨을 만난 뒤 기자들에게 “닉슨 부통령을 통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설득,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끝장내게 할 수 있을 것이다”는 말을 했다. 이것도 닉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에 닉슨 부통령 부처는 한국 무용과 음악 공연에 초대되었다. 어린이 합창단이 출연했다. 공연도중 무대가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어린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휘자는 貴賓(귀빈) 앞에서 이 무슨 창피냐는 듯이 화를 내곤 퇴장해버렸다. 닉슨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동양에서 손님 대접에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잘 아는 그는 이 난처한 처지를 수습하고 싶었다.
   닉슨 부통령 夫妻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씩 나중에는 관중들이 전부 다 일어나 함께 박수를 쳤다. 어린이 합창단도 웃기 시작했다. 지휘자도 무대로 돌아와 공연을 계속할 수 있었다.
   다음날 닉슨은 李承晩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李 대통령은 지난 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듯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대통령은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꺼내서 펼쳤다.
  
   닉슨, “현명한 노인의 지혜에 감동”
  
   그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내가 직접 타이프를 쳤다”고 말했다. 李 대통령이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은 이승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貴國은 가장 중요한 협상력 하나를 잃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희망을 잃는 것이 됩니다.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솔직 합시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이 평화를 갈망하므로 그 평화를 얻기 위하여서는 어떤 양보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들 공산주의자들은 나는 미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그런 불안감을 없애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귀하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인 내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그 편지를 읽어보고 파기해주셨으면 합니다.”
   李承晩 대통령은 메모한 두 페이지짜리 종이를 닉슨에게 건네면서 “보고용으로 이를 이용해도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 메모엔 대통령이 필기한 한 구절이 첨가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신문들이 이승만이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한다. 그런 인상을 주는 것은 우리의 선전방침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경무대에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李 대통령은 이때 이렇게 말했다고 닉슨 회고록은 기록하고 있다.
   “내가 한국은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미국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닉슨은 퇴임후에 쓴 회고록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李承晩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李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닉슨은 冷戰을 서방세계의 승리로 이끈 3大 전략가중 한 사람이다. 냉전 승리의 틀을 만든 트루먼, 소련을 압박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내부로부터 무너지게 만든 레이건, 그리고 중국과 화해하여 세계 列强의 질서를 재편했던 닉슨.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 후 물러난 뒤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함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강조했다. 이 깨달음은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배운 ‘불가측성의 중요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어쨌든 최고의 反共전략가인 닉슨이 李承晩 대통령을 극찬한 것은 요사이 조국에서 잊혀진 존재가 된 이 위대한 先覺者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아이크 향해서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1954년 7월 李承晩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어중간한 對공산권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방문국의 대통령을 그 나라 국회에서 비판한 이 연설에 대해서 李承晩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7월30일 백악관에서 2차 頂上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묵고 있던 李 대통령에게 미 국무성 副의전장이 정상회담 후 발표할 공동성명서 초안을 들고 왔다. 이 초안에는 李 대통령이 싫어하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으로 운운'하는 대목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군 작전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하려고 했다. 여기에 李承晩 대통령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李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싫었고, 한국의 國力이 약하므로 일본과 수교하는 데는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李 대통령은 즉각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백두진, 양유찬, 김정렬씨 등이었다.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지.'
   제2차 韓美 장상회담 시간은 오전 10시부터인데 李承晩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전화가 걸려왔다. 측근들이 '그래도 회담은 하셔야 합니다'라고 설득하여 李 대통령은 10분쯤 늦게 백악관내 회담장에 도착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韓日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있는 한 일본 하고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해버렸다. 아이젠하워(愛稱이 아이크)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李 대통령은 이때 아이크의 등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물론 이 말은 통역되지 않았다. 아이크는 가까스로 화를 식히고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이승만 대통령이 일어났다.
   '외신 기자 클럽에서 연설하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먼저 갑니다'
   李 대통령에 이어 아이크도 나가버렸다. 양유찬 駐美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하여 실무자들끼리 회담을 계속했다. 그래도 미국은 군사원조 4억2000만 달러, 경제원조 2억8000만 달러, 도합 7억 달러의 對韓원조를 약속했다(한표욱 지음, '이승만과 한미외교' 참고. 중앙일보사 발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선의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노르만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독특한 웃음이 그의 매력이었다. 1952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와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이때 선거구호는 'I Like Ike'(나는 아이크를 좋아한다)였다. 아이크는 당선자 시절 한국전선을 방문했었다. 이때부터 李承晩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1875년생인 李承晩은 정상회담 당시 79세로서 아이크보다 15세가 더 많았다.
  
  
   “부탁을 해도 당당하게 해”
  
  
   1958년 9월 宋仁相 부흥부장관은 金泰東 조정국장과 재무부의 李漢彬 예산국장을 데리고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의 對韓원조를 많이 얻어내고 이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경무대로 李承晩 대통령을 예방했다. 李 대통령은 '송 장관이 간다니 잘 해가지고 올 것으로 알아. 그러나 한 마디 꼭 해두고싶은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
   '원래 우리 한국인은 남에게 돈 달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해.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그러지 않나.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억울한 이야기를 미국의 朝野에 널리 알리게. 38선 얘기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제 나라에서 치러야 했을 전쟁을 우리 땅에서 했으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지 않나. 원조를 좀더 많이 달라고 해봐. 그리고 '조그만 일에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게.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잘게 굴면 위신이 서지 않아. 하물며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위신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네. 정정당당히 조리 있게 이야기해봐. 큰 성공이 있기를 바라네.'
   李대통령은 외교하는 데 보태 쓰라고 흰 봉투를 하나 주었다. 미화 1000 달러가 들어 있었다. 100 달러 사용도 주저하는 李대통령으로서는 큰 돈이었다. 애국이란 무엇인가? 태평양을 날아가는 노스웨스트 항공기 속에서 宋장관 일행 세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한 잠도 못 잤다고 한다(宋仁相 회고록 '復興과 成長').
   6.25 동란기에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는 퇴임후 역사기록을 위한 증언을 하는 가운데 李承晩 대통령을 '국제정세에 관해서 최고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격찬했다. 무초는 또 李 대통령이 제퍼슨 민주주의자(Jeffersonian democrats)임을 자처했다고 말했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고, 3代 대통령을 지냈으며 루이지애나 매입(2300만 달러를 주고 프랑스로부터 한반도의 10배나 되는 지역을 사들임)을 통하여 당시의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넓혔다. 미국 독립정신의 핵심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을 Jeffersonian democrats라고 부른다. 우리의 建國 대통령이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인물이었다면 그 흔적이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다.
   제퍼슨은 민주주의의 약점과 대중의 우매함을 잘 안 사람이었다. 그는 性善說의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민들의 분별력이 약하여 민주주의를 운영할 자질이 부족할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제퍼슨은 그런 국민들로부터 主權을 회수하여 독재정치를 펼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을 교육할 것인가 自問했다. 결론은 後者였다.
  
  
   제퍼슨 민주주의자
  
  
   제퍼슨 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작은 정부와 代義 민주주의 존중: 미국 헌법 조문의 엄격한 해석으로 정부의 권력남용을 막는다.
   2.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의무이다.
   3. 국민의 알 권리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존중한다.
   4. 정부는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5. 교육을 중시한다.
   6. 미국이 자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7.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종교의 자유 보호책이다. 종교는 정치부패로부터 자유로와지며, 정치는 종교갈등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李承晩 대통령이 新生 대한민국에서 제퍼슨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구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엔 제퍼슨식 민주주의와 유사한 면이 많다.
  
   1. 政敎분리: 李承晩 대통령은 기독교 신도였으나 정치에 기독교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기독교적 민주주의만이 공산주의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믿었으나 기독교 국가를 만들거나 기독교를 우대하진 않았다.
   2. 교육重視: 李 대통령은 언론과 학교를 통하여 한국인을 깨우치면 一流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 私有재산권의 신성시: 李 대통령은 농지개혁 때도 地主들에게 보상을 하도록 했고, 화폐개혁 때도 일정 액수 이상의 예금동결 계획에 반대했다.
   4. 代義민주주의 존중: 李 대통령은 국회와 많이 갈등했으나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戰時에도 국회는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고, 대통령을 퇴진시키려 했다. 戰時에도 대통령 선거는 이뤄졌고, 특히 시, 읍, 면의회,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선거 투표율은 90%나 되었다. 이때 선거로 뽑힌 의원들은 1만 명을 넘었다.
   5. 언론자유의 존중: 李 대통령은 정부 비판을 많이 하는 언론에 불만이 많았으나 조직적인 탄압을 거의 하지 않았다. 戰時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다.
  
   제퍼슨이 195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李承晩보다 더 민주적으로 할 순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국의 모세
  
  
   지난 8월15일 오전 옛 중앙청 광장(경복궁 앞뜰)에서 열렸던 '제63주년 광복절 및 대한민국 건국 60년 중앙경축식' 행사에 참석했다. 李明博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강조했다.
   李 대통령은 '기적의 역사는 국민 여러분이 모두 함께 써내려간 것'이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이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던진 순국열사, 6.25 전쟁에서 산화한 무명용사, 이역만리에서 고생한 간호사와 광부들,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운 학생과 시민' 등이 없었다면 자유 대한민국, 한강의 기적, 민주화의 길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李 대통령은 '건국 6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끝내 건국의 주인공인 李承晩 대통령과 건국세대를 언급하지 않았다. '태안바닷가에 내 일처럼 뛰어나온 자원봉사자들'에겐 감사하면서 좌익 및 미군정 당국과 싸워서 자유민주 국가를 건설한 주인공들에겐 감사하지 않았다. 중립적으로 쓰였다는 한 高校 교과서가 건국을 다루면서 ‘이승만’이라는 낱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마치 미국이 대한민국을 만들어준 것처럼 기술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날 경축사에선 日帝를 쳐 한민족을 해방시켰고, 건국-호국-산업화-민주화의 든든한 동반자였던 미국에 대한 감사가 없었던 것도 충격적이었다.
   경축식을 끝내고 청계광장에서 예정된 '이승만建國대통령에 대한 국민감사 한마당' 행사장으로 걸어가면서 한 애국운동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국민들은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대통령은 감정과 소신이 실리지 않은 연설로 찬물을 끼얹었다는 평이었다. '이승만 建國대통령에 대한 국민감사 한마당' 행사에서 필자는 이런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이 된 것은 한민족의 축복이었습니다. 광복당시 3000만 한국인중 가장 학력이 좋은 사람,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 가장 식견이 높은 사람, 가장 배짱이 좋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인들에게 생명만큼 귀중한 것, 즉 자유를 선물한 분입니다. 한국인들은 이 자유를 피땀으로 지켜내고, 이 자유를 천금처럼 사용하여 오늘의 근사한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자유를 얻었기에 백성이 국민이 되고, 노예근성을 버리고 주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자유투사, 위대한 프리덤 파이터였습니다. 적화된 유라시아 대륙의 마지막 교두보인 대한민국을 홀로 지켜내고 이 땅을 자유의 기지, 번영의 쇼윈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20세기의 세 악당,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을 1 대 3으로 상대하여 이겼습니다.
   노무현이 아니라 이승만이 독도를 지켜냈습니다. 노무현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불렀지만 이승만은 6.25 전쟁중에 평화선을 그어 독도를 확보하였습니다.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배를 380척, 선원을 3900명이나 나포했던 이승만이었습니다. 이런 이승만을 고마워하지 않는 심보론 독도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던 모세와 같은 분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도 조국에서 잠들 수 없었던 분, 역사의 십자가를 진 어린 양과 같은 분이십니다. 이승만 박사는 말년에 하와이의 病床에 누워서도 養子 이인수씨한테 '지금 누가 통일을 준비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자유통일은 이승만 대통령이 후세에 남긴 유언이고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분이 선물한 자유의 힘으로써 북한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자리에서 김정일 일당을 처단하고, 2300만 동포를 해방하고 일류국가를 건설하여 행복하고 멋지게, 당당하게 살아봅시다!>
  
   가장 변하지 않은 조선인
  
   李承晩은 미국과 미국인을 대함에 있어서 열등감이나 대책 없는 반항심을 일체 보이지 않고 당당하되 늘 감사했다. 나이 스물아홉 살에 쓴 ‘독립정신’에서 그는 <우리는 세계에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동시에 <외국인의 횡포에 대해선 생명을 바쳐서라도 시비를 가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외국 국적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괴로움을 피하여 몇 만 리 떨어진 남의 나라로 가서 그 나라 국민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면 어찌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인가?>
   그는 배재학당을 다닐 무렵 徐載弼이 “미국에선 좋은 강연을 들으면 이렇게 박수를 친다”고 가르쳐주었을 때 “뭐, 조선인이 박수까지 따라할 필요가 있나”라고 거부감을 느꼈다고 傳記를 쓴 徐廷柱 시인에게 털어놓았다.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등 미국의 名門 대학만 나오고 30대 초반에 이미 미국의 두 대통령(우드로 윌슨, 시어도어 루스벨트)을 만나고 親交했던 그였지만 徐廷柱에겐 ‘가장 변하지 않은 조선인’으로 33년만에 돌아온 사람이 李承晩이었다.
   李承晩은 취재차 매주 찾아오는 徐廷柱에게 가끔 漢詩를 읊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자네는 시인이라면서?』라고 하더니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빛 좋은 사과를 한 개 건네주면서 『이거나 하나 먹어보게』라고 권한 뒤 미국 망명 시절에 쓴 漢詩를 들려주더라고 한다.
  
   일신범범수천간(一身泛泛水天間)
   만리태양기왕환(萬里太洋幾往還)
   도처심상형승지(到處尋常形勝地)
   몽혼장재한남산(夢魂長在漢南山)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대만/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李承晩의 시낭송을 듣던 徐廷柱 시인은 순간, <내 가슴 속이 문득 복받쳐 오르며, 저절로 두 눈에선 눈물방울이 맺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기 누워계신 이 영감님이 쇠약해져 들어가던 李朝 말기부터 이 나라 자주독립운동의 대표자로서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맨 처음 대통령이시다. 그 뒤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귀국하시도록까지 오직 이 민족의 해방만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다니시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가슴속에 못 박아 가지고 다녔던 그 한남산! 그 한남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徐廷柱씨의 속에서도 어느 사이인지 그를 한 민족의 아버지로서 확인하는 『아버지!』하는 감동이 안 솟아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李 대통령은 徐廷柱가 쓴 傳記가 출판되자 자신의 아버지 이름 뒤에 敬稱을 생략했다고 판매를 금지시켜버렸다. 李承晩의 거대한 생애는, 조선인이 조선인의 魂을 잃지 않을 때 세계적인 큰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 2009-12-04, 08:3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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