最後의 인터뷰/매국노 李容九 아들의 기구한 생애
일본 우익에게 이용당하여 한일합병의 심부름꾼이 되었던 一進會 회장은 좌절속에서 숨을 거두고 그의 아들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상태에서 기구한 삶을 이어갔다. 그와 한 마지막 인터뷰.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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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낭인의 무덤 앞에서
  
   도쿄의 교외에 다마레엔(多磨靈園)이란 공원 묘지가 있다. 저명인사들이 많이 묻혀 있다. 1984년 여름, 나는 이 묘지의 14구(區) 1종(種) 9속(屬) 12호를 찾았다.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화장한 뼈가루가 묻혀 있는 묘가 거기에 있었다. 돌난간으로 둘러 처진 약 30평 되는 큰 무덤. 우람한 비석이, 묻힌 인물의 크기를 말하는 듯했다.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누가 참배했음이 분명했다. 나를 안내한 우치다 연구가 다키자와 마코도씨(瀧澤誠 당시 45세·저술가)도 분향, 묵념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일본 우익사상의 뿌리에 터잡고 있는 걸출한 대륙낭인이다. 우치다는 1874년에 「國權주의와 대륙 팽창주의의 요람」인 후꾸오카에서 劍客 집안의 아들로 났다. 그는 숙부 히로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로부터 글과 칼을 함께 배우며 자랐다. 검도, 유도의 달인이 된 우치다는 히로오까가 창립한 國權주의 정치결사인, 일본우익단체의 효시 현양사(玄洋社)에 들어갔다.
  
   우치다가 한국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천우협(天佑俠)의 일원이 되면서부터였다. 천우협은 현양사 사장 히로오카의 재정지원으로 조직된 단원 15명의 유격대式 단체. 일본 우익은 나중에 천우협의 활동을 터무니없이 과장했다. 천우협이 조선민중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 전봉준 진영의 요직을 차지, 동학군과 손잡고 官軍과 싸웠다는 것이다. 한국학자들은 천우협이 일본군의 앞잡이였고 일본군의 보호 아래에서 방화, 폭력을 자행했다고 정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다. 우치다가 반도와 대륙에서 활동무대를 찾게 된 것은 청일전쟁 뒤였다.
  
   일본의 가상 적(敵)으로 등장한 러시아에 대해 일본國論이 「민족주의의 발흥」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우치다는 1895년 블라디보스톡에 유도도장을 차렸다. 이 도장은 대륙낭인과 일군 첩보원들의 정보활동 기지가 되었다. 그는 흑룡강변을 여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아시아의 전 사회를 이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가꾸는 것이 일본의 사명이다.…누가 광활한 황야를 러시아로부터 지킬 것인가. 그 일은 우리 일본이 해야 하며, 그러려면 일본의 국력을 흑룡강까지 뻗게 해야 하고, 그러기에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다」
   뒤에 그가 조직한 우익 단체가 흑룡회란 이름을 딴 것도 만주 벌판에 대한 우치다의 집착을 상징한 것이었다.
  
  
  *伊藤博文이 탄 名馬-우치다
  
   우치다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 러시아를 돌면서 정탐 여행을 했다. 우치다는 스물일곱 살에 黑龍會를 창립했다. 그는 창립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오랫동안 흑룡강변에서 노숙하고 장백산의 바람으로 저녁을 지어먹고 요동 들판의 장막 속에서 밤을 지새우며 그 지역의 풍속과 인정을 시찰하고 東아시아의 추세를 살펴 왔다. 우리가 흑룡회를 일으킨 목적은…이들 자료를 국민에게 전달하여 각성을 촉구하고, 그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國益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흑룡회의 목적은 「대륙에 일본 세력을 심는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흑룡회는 일본 정부와 함께, 또는 정부에 대항하면서, 정부와는 별도로 활동했다. 일부 회원은 러시아로 침투, 첩보활동을 벌이고 일부는 신문·잡지를 통한 선전 활동, 일부는 정계·군벌의 유력자들을 설득하는 막후 로비를 했다. 우치다는 일본이 여론을 대(對)러시아開戰論 쪽으로 몰고 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露日 전쟁 뒤 우치다의 관심은 다시 한반도로 기울었다. 메이지 政界의 막후 거물인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가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말했다.
  『지금 일본에는 비길 데 없는 명마가 한 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부릴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그 말에 재갈을 물리고 한번 부려 봄이 어떻겠습니까?』
  이토는 『그 말에 한번 타고 싶군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우익의 준마 우치다 료헤이는 이토의 개인 참모로 서울에 왔다. 여기서 우치다와 李容九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은 나라를 팔고, 다른 한 사람은 나라를 사는 그런 관계의 만남이었다.
  
  *病席에서 만난 李容九의 아들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친일파는 단연 李容九다. 한국에선 「매국노」란 말과 함께 동시에 떠오르는 이름이 이완용인데, 일본에선 李容九만이 일반적인 지명도(知名度)를 갖고 있다. 李容九에 대한 단행본, 논문, 기사도 숱하다. 학자뿐 아니라 일반의 연구가들도 많다. 나를 안내한 다키자와씨도 그런 연구가다. 그는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우치다 료헤이 평전」을 쓴 사람인데 광고회사 직원이다.
  
   틈만 나면 2박3일, 3박4일 정도의 휴가를 얻어 한국으로 날라온다. 송병준, 이용구의 무덤을 찾아다니고 시천교(侍天敎)의 유적을 답사했으며 앞으로는 천우협의 행적을 추적할 계획이다. 이용구에 대한 일본인의 유별난 관심은 그가 일본인의 美的 감각에 딱 들어맞는 비극적이고 결벽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용구의 아들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는 우치다 료헤이의 무덤에서 십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쿄 교외 기츠조지(吉祥寺)시의 조용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우치다의 무덤보다도 작은 건평 20평 정도의 초라한 일본식 목조 건물. 그 타다미 방 한구석에서 70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는 허리를 못 쓰고 몇 달째 반듯이 누워 지내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듬성듬성한 수염, 갸름한 얼굴 속에서 깊게 파인 두 눈동자만은 범상치 않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60노인의 몸으로 지금도 지압사로 일하며 남편을 부양하고 있는 일본인 부인의 부축을 받고 그는 비스듬히 돌아누웠다.
  
   그는 턱을 괴더니 그냥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두서가 없고 중복이 많은 이야기였다. 옆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이야기는 아까 했는데…』라고 속삭이며 조심스럽게 말리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목소리 좋고 발음 정확한 표준 일본어였다. 감수성 깊은 표현은 절묘했고, 향수와 분노와 절통함에 떠는 그의 손짓도 격렬했다. 나는 연 사흘 동안, 그의 집에 출근(?)하여 총 15시간에 걸쳐 폭포수 같은 이야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이라고 말하며 최단시간 내에 최대량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흘 째 날 밤늦게 헤어질 때 그의 부인은 남편에게 농담을 했다. 『이제 속 시원히 한국 기자에게 털어놓았으니 죽어도 원이 없겠군요』
  
  *속은 자와 속인 자
  
   李容九는 1868년 경북 상주의 兩班가문에서 났다. 12세 때 동학 교주 최시형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의 참모로 참여했다. 공주 전투에서 일본토벌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발에 관통 총상을 입었다. 露日 세력이 각축하자 이용구는 지난날의 적 일본 편으로 기울었다. 반일(反日)의 손병희와 헤어져 송병준과 함께 一進會를 조직했다. 이용구를 친일로 돌리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루이(樽井藤吉)가 쓴 「대동합방론」이었다.
  
   「동양제국은 힘을 하나로 합해 서양에 대항할 아시아 연방을 결성해야 한다」는 대목에 매료되었다. 露日전쟁 때 이용구는 일진회를 동원, 일본군의 보급 활동을 지원했다. 철도 부설, 일군을 위한 첩보 활동 등에 동원된 일진회원은 10여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중조직으로서 一進會만큼 큰 단체는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참모로 한국에 온 우치다가 주목한 것은 일진회의 이런 대중 동원력이었다. 우치다는 李容九와 만났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의 아시아에 대한 신념은 무엇인가?』
  
  『나의 소신은 대동합방론이다』
  
  우치다는 一進會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일진회 운영경비를 대며 이 조직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우치다는 일진회를 이용, 여론을 조작하여 한국 및 일본 정부에 영향을 끼쳤다. 우치다는 合倂을 점진적으로 추진하자는 이토 히로부미 타도 공작을 일본에서 펴기도 했다. 흑룡회와 일진회란 양날개를 달고 합병을 향해 飛翔한 것은 이용구가 아니라 우치다였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직후 李容九는 우리 나라를 일본 천황의 은덕 아래 맡기자는 상주문을 한국 황제, 총리, 통감에게 보냈다. 이와는 별도로 가츠라 일본수상에게는 합방청원서를 보냈다. 일본 정부는 合邦청원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합방이 아닌 「合倂」을 결행했다.
  
   그제야 이용구는 兩國이 동등한 조건으로 연방한다는 자신의 꿈이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병합으로 변해버린 것을 깨달았다. 日帝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도 합병 한달 뒤 해산시켜버렸다. 해산명령이 난 다음날 이용구는 피를 쏟고 한성병원에 입원했다. 서른 아홉 살의 우치다는 이즈음 自作詩를 읊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그림자를 우러러 보리>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이용구는 심한 신경증상과 폐병으로 쇠약해져 갔다. 일본 효고 현의 해안에서 요양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내린 작위도 거부했다. 합병에 따른 특혜를 만끽, 실업가로 변신한 송병준과는 이때부터 처신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용구는 죽기 석달 전 그의 친구인 대륙낭인 타케타 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어릴 때부터 평생 제가 추구한 것은 일신상의 사리(私利)가 아니라 국가의 대리(大利)와 인민구제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제가 잘도 속임을 당하고 잘도 농락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000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으로 빠뜨린 죄도 소생에게 있습니다. 문을 나서면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 받고 욕먹고…당국의 조치를 보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원수 대하듯, 거지 대하듯, 사냥 뒤의 개 대하듯 합니다. 소생을 보고 매국노라고 부르는 사람 있어도, 어찌 입이 있어 변명을 하겠습니까. 지하에 先人의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간들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스기야마, 우치다, 타케타가 속임을 당했는지,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기를 당했는지, 태어날 때부터의 바보인 소생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일본의 유명한 피리 연주가인 요시다(吉田晴風)는 송병준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지금 나의 친구가 중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한 곡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山中의 별장으로 초대받아 갔다. 침실에는 백랍 같은 病者가 누워 있었다. 요시다는 피리를 불었다. 연주 중에 느낌이 이상해 곁눈질해 보았더니, 병자는 상반신을 일으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오열하고 있었다. 비장감, 그리고 귀기(鬼氣)가 서린 듯한 病者를 위해 요시다는 더욱 정성을 다해 피리를 불었다. 이 病者가 李容九였다.
  
   이용구는 죽기 며칠 전 문병 온 우치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는 대답했다.
  『뒷날 반드시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賢者가 될 것입니다』
  
  *땅이 무너지듯 했던 8·15
  
   평생 李容九라는 이름에 짓눌려 살아온 75세(1984년 당시)의 獨子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는 『한국이 두렵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다』고 했다. 그의 딸은 노처녀인데 『한국인과도, 일본인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부모에게 말하곤 한다. 오히가시씨는 그러나 한국과 일본 가운데서 일본을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름에서, 國籍에서, 그리고 사고방식에서….
  
  1945년 8월15일 그는 부산에서 그 선택의 날을 맞았다. 해방 9일 전 오히가시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군부대 공장 등에서 강연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해탄에 기뢰가 떠 다니고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의 뱃길이 끊겨 民心이 술렁일 때였다. 그는 청중들을 앞에 두고 天皇의 전지전능한 힘에 의해 皇軍이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절규했다. 폭탄이 떨어져도 천황이 초능력을 발휘하면 빗나가게 된다면서 그런 힘을 보여주도록 열심히 기도 드리자고도 했다. 일본에서 지금 굉장한 폭탄을 개발중인데 이 폭탄 하나만 떨어뜨리면 전쟁은 하루 아침에 일본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그는 외쳤다.
  
   『내 말에 청중은 요란한 박수를 보냈고 나 자신도 스스로 도취하여 내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1945년 8월14일 부산의 일본인 유지들에게 동래 범어사로 집합하라는 연락이 왔다. 오히가시씨를 포함한 이들 일본인은 비로소 天皇이 하고 비밀 兵器의 사용을 천하에 공표하는 모양이라고 가슴을 설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정오에 나온 천황의 육성 방송은 잡음이 많았다. 오히가시씨는 방송이 끝나도 무슨 뜻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주위의 일본인들이 통곡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오히가시씨는 「천황의 玉音 방송」 내용이 불길한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우리는 졌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때 갑자기 현기증이 났습니다. 몸이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히가시씨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그때의 기분이다. 그가 딛고 있었던 것은 일본帝國이었다. 그 帝國이 무너질 때 그의 존재도 함께 허물어졌다. 여기서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한국이냐, 일본이냐? 주위에선 『여기 남아 있다가 친일파로 몰려 맞아 죽기 전에 어서 떠나라』고 권유했다. 한국에 와 있던 70여 만의 일본인들이 알몸으로 철수하는 물결에 얹혀 그는 1946년 초 일본으로 돌아갔다. 老母와 헤어져 갓난 딸아기를 품에 안고 일본인 아내를 따라 현해탄을 건넌 오히가시 쿠니오씨는 후꾸오카에 우선 자리잡았다.
  
  *외톨이 소년 시절
  
   오히가시씨의 어릴 때 기억은 나고야 山中의 어느 절에서 출발한다. 주지 요시다 부부를 그는 兩親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잠자리에서 오줌 싸는 버릇이 있어 혼이 나곤 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다. 5세 때 그는 갑자기 「양친」과 떼내어져 오이소의 호화스런 별장으로 옮겨졌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해 여름 한 청년이 나타났다. 兄이라고 했다. 소년을 부둥켜안고 兄은 울음을 터뜨렸다. 같이 해수욕을 즐기며 여름을 보냈다. 방학이 끝나자 兄은 소년을 데리고 도쿄 와세다 대학 근방의 하숙방으로 갔다. 兄은 와세다 대학 예과 학생이었다. 하숙생활은 풍족했다. 어디선지 몰라도 큰돈이 매달 부쳐져 왔다.
  
   여덟 살 때 소년은 소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兄은 따라가지 않았다. 어떤 아주머니가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자기 아들과 함께 소년을 데리고 갔다. 입학식 날의 쓸쓸함을 소년은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된다. 기가 죽은 소년은 입학식 날 자신이 「신기한 구경거리」가 된 것을 알았다. 소년은 구두와 양복 차림이었다. 부모가 따라오지도 않았는데 호사스런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소년에게 어린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이석규(李碩圭·오히가시씨의 원래 이름) 석자로서 보통 네 자로 되어 있는 같은 반 아이들의 이름과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조센진」「요보」라는 말도 들려왔다.
  
   남자아이들로부터 소외된 소년은 비교적 편견이 덜한 여자아이들과 같이 놀았다. 이 무렵의 사건 중에 오히가시씨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엿장수가 학교 근처에 왔습니다. 아이들이 우- 몰려갔습니다. 나는 돈이 없어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엿장수가 날 손짓으로 불러요. 아마도 아이들이 엿장수한테 「저 아이는 조센진이다」고 말한 모양이에요. 엿장수가 나에게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데 아마도 姓을 물었을 거예요. 나는 땅바닥에다가 일본글자로 「리」라고 썼어요.
  
   엿장수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저는 하숙집으로 달려가 형 앞으로 온 편지를 갖고 와 거기에 쓰인 이(李)자를 보여 주었어요. 그제야 엿장수는 알았다는 시늉을 하더니 엿을 길쭉하게 늘어뜨려요. 가위로 싹둑 잘라 저한테 주고는 가버렸어요. 물론 그는 조선인이었죠. 지금도 그 엿장수의 눈빛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 옵니다』
  
  *송병준의 볼모로 일본 생활
  
   소학교 3학년 때 이석규 소년은 서울로 갔다. 兄 이현규는 석규의 친형이 아니고 어릴 때 李容九의 양자로 들어 온 친척이었는데, 와세다 대학을 졸업, 동생을 돌볼 수 없었기에 서울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서울에서 석규 소년은 어머니 이화사(李華師)를 대면했다. 어머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산의 남산 기슭에 큰 집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본어를 몰랐고, 소년은 한국어를 몰랐다. 兄이 통역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화사는 이용구의 後妻였다. 本妻 권씨는 딸 봉자를 낳고는 죽었다. 동학 포교를 하다가 여러 번 옥살이와 고문을 당해 병을 얻었던 것이다.
  
   이석규는 1909년에 났다. 一進會 회원들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으나 그 기억은 없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소년은 잠을 깼다. 어머니가 소년의 몸을 쓰다듬으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소년은 자는 척했으나 괜히 눈물이 났다. 서울에서 1년 남짓 있다가 소년은 형과 함께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와서 석규 소년은 서너 군데의 하숙집을 옮겨 다녀야 했다. 도고(東鄕)라는 형사 출신의 일본인이 그를 이곳저곳으로 옮겨다주었다. 이 무렵에 가서야 석규 소년은 어렴풋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히로오카라는 개화된 여성의 집에 하숙하고 있을 때였다. 히로오카 여사는 중국 여행 길에 서울에서 석규 소년의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와 소년에게 말했다.
  
   『너의 죽은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다. 그런데 송병준 자작이란 나쁜 사람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채고 너를 어머니로부터 빼앗아 일본으로 데리고 온 것이란다. 인질처럼 말이다. 우리집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뒤를 따르도록 해라』
  
   소년은 소학교 作文 시간에 이 이야기를 썼다. 교장을 통해 이 사실이 일본에 있던 宋 자작에게 보고됐다. 며칠 뒤 소년은 송병준의 개인 비서격인 도고에 이끌려 시부야의 사카이 여사 집으로 다시 옮겨졌다. 다섯 번째의 이사요 轉學이었다. 사카이는 교양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구연수(具然壽)의 내연의 처였다. 구연수는 구한말 훈련대장으로서 민비 시해 사건 때 일본측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 사카이와 잠시 동거했으나 소생은 없었다.
  
  *매국노의 아들들끼리 하숙생활
  
   구연수는 한일합병 뒤 귀국, 총독부에서 경찰고위간부로 일했다. 그는 本妻에서 난 아들 구용서를 사카이에게 보내 일본에서 공부시키게 했다. 얼마 뒤 송병준도 손녀인 노다 미에코(野田見榮子·송병준의 일본 姓이 노다)를 사카이에게 맡겼다. 이웃에 살고 있었던 사카이의 여동생 사카이 나카는 우범선(禹範善)과 결혼했던 것이다. 우범선도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서 閔妃 시해 사건 때 일본 미우라 공사와 손잡았던 사람. 우범선 부대는 거사 당일 대원군의 가마를 호위, 입궐했었다. 親露派의 반격으로 집권에 실패하자 그는 일본으로 달아났다. 여기서 사카이 나카와 결혼했다. 우범선은 1902년 11월 독립협회 사람 고영근에 의해 암살됐다.
  
   사카이 나카는 우범선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형은 禹씨 성을 갖고 한국인으로, 동생은 후지노란 성으로 일본인 행세를 했다. 이용구, 송병준, 구연수, 우범선-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들들은 사카이 자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자랐다. 구용서는 나중에 노다 미에코와 결혼, 귀국한 뒤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그는 해방 뒤 재무장관까지 역임했고 몇 년 전 죽었다. 사카이 나카의 큰 아들 즉 禹씨 성으로 행세했던 청년은 도쿄 대학교 농대를 졸업, 세계적인 육종학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고 禹長春 박사다. 오히가시씨는 사카이 자매의 집에서 「매국노의 아들들」과 함께 지낼 때가 그의 생애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무렵 이석규 소년은 도쿄 간다의 다이세이(大成) 중학교에 들어갔다. 이름도 구보 이치로로 개명한 구용서를 따라 구보 세키오(久保碩夫)로 고쳤다.
  
  * 2·26사건 주모자와 사귀다
  
   석규 소년이 중학교 2학년 때 형(이현규)이 학교로 면회를 왔다. 초췌한 얼굴이었다. 李容九의 유산을 찾으려고 송병준을 상대로 재판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송병준이 보낸 사람이 한글로 된 문서를 들고 왔다. 석규 소년에게 그걸 베껴 쓰라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한글문서는 재판관 앞으로 동생이 양자인 형의 폐적(廢嫡)을 신청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송병준은 이 문서를 이용하여 재판에서 이겼다.
  
   1925년 송병준이 68세로 急死했다. 송병준의 재산정리 사무소는 3만 엔을 이석규 소년 앞으로 떼내어 예금, 그 이자를 양육비로서 사카이 앞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석규는 입교(立敎)대학예과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이석규는 방탕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둘 데가 없었던 그에겐 『술밖에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3년 뒤 송금이 끊겼다. 서울에 가보았더니 송병준 재산관리사무소가 없어져버린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석규는 일본 우익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대학입학 때 그의 보증인으로 서명한 것은 이용구의 동지였던 우익의 거물 우치다 료헤이와 도야마 미츠루(頭山滿)였다. 전성기를 넘긴 두 사람은 금전적으로 쪼들리고 있었다. 우치다는 돈으로 이석규를 도와주지는 못했으나 우익의 인물들로 하여금 잘 지도하도록 신경을 썼다. 이석규는 대학을 중퇴하고 興亞學塾에 들어갔다.
  
   「국수주의자들이 양산박」으로 통했던 이 학원에서 그는 비로소 「아시아주의」와 접하게 되었다. 오가와(大川周明), 기다잇키(北一輝)와 같은 유명한 이론가들도 만났다. 이 학원엔 외국의 독립투사들도 더러 와 있었다. 인도의 비하리 보스, 월남의 진복안, 아프가니스탄의 프라닷프 등등. 이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은 늘 서양 제국주의 특히 영국을 규탄하고 서양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민족이 대동단결 해야 한다는 쪽으로 진행됐다. 어느 날 이석규는 홧김에 소리쳤다.
  
   『…아시아의 불행은 영국에 있다고 하는데 조선인의 불행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영국의 인도 지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이 학원에서 이석규는 시부카와 젠스케란 청년과 가장 친했다. 육군사관학교 예과 시절 상관과 싸워 퇴학한 정의파 청년이었다. 그는 기다잇키가 쓴 「일본개조법안 大綱」의 초고를 보여 주었다. 이 초고에는 조선의 통치방식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 허무주의적 방황 거듭
  
   이석규가 아시아주의에 눈을 떠가고 있을 때 일본은 1930년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있었다. 20년대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에의 반동으로 30년대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물결이 거세어졌다. 만주침략은 가속화되고 국내적으로는 갖가지 사회모순이 드러났다. 昭和 공황에 이은 농촌의 피폐와 재벌의 발호, 재벌과 군벌의 유착이 사회에 수많은 불만요인들을 심게 되었다. 이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왼쪽에선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층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선 청년장교와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昭和유신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이들 우익의 문제의식은 명치유신 뒤의 일본 근대화가 일본을 서양제국주의의 亞類로 전락시켜버렸다는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천황 중심의 옛날 일본, 동양적인 美德이 지배하는 나라로 일본을 다시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기다잇키를 이론가로 하는 이 思潮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한 점에서 당시 일본 정부의 자세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이들이 조선의 독립에 찬성한 것은 아니고, 조선을 內地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합병정신」을 버리고 「합방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개혁思潮가 극적으로 분출한 것이 1936년 2월26일, 눈 내리는 도쿄에서 일어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었다. 2·26사건으로 유명해진 이 반란은 메이지유신을 본뜬 昭和유신을 요구했으니 천황은 그들을 叛徒로 단정, 진압명령을 내렸다.
  
   이석규의 흥아학숙 친구 시부카와는 기다잇키와 함께 민간인으로 이 반란에 가담했다가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이석규에게는 큰 정신적 타격이었다. 친구를 잃은 그는 또다시 방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좌익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허무주의자들과도 어울려 술을 퍼마시며 유곽을 주름잡고 싸움질을 하며 돌아다니기만 했다. 조선과 일본, 좌익과 우익을 오락가락하며 그는 기댈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붙들 조국도, 의지할 친척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었던 그는 1938년 홀연히 서울로 건너갔다.
  
  *총독부에 이용당해
  
   서울에서 그는 특별한 대우와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이용구의 아들」이란 간판이 그를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진회와 시천교 등 이용구의 세력은 아직 명맥을 잇고 있었다. 이석규는 총독부 입장에서 보면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석규는 『한일합병은 잘못 되었다. 아버지가 바란 것은 합방이었다』고 公言하고 다녀 경찰은 그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석규의 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그의 활동상황은 日帝의 전쟁 노력에 협조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전향한 사람들의 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의 「선도사업」에 협력했고 대동 일진회를 창설, 아버지의 잔당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으며, 황군(皇軍)을 기리는 강연도 열심히 했다. 아버지의 꿈이었던 대동국(大東國)의 남아란 뜻으로 오히가시 쿠니오(大東國男)라고 이름도 바꿨다. 일진회가 露日전쟁 때 만주와 북한에서 日軍을 위해 자원봉사를 한 일을 「北進수송대」란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오히가시씨는 서울에선 총독부 高官들과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유지였다. 미나미 총독한테 시천교의 운영자금 10만 엔을 요구했는데 총독이 거절하자 말다툼을 벌일 정도였고, 그가 잠시 도쿄에 돌아오면 전 총리 하야시 센쥬로 같은 거물들이 환영회를 열어주곤 했다. 오히가시씨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李容九란 이름이 그만큼 먹혀들었기 때문이었다.
  
   오히가시씨의 서울 생활에서 가장 잘 된 일은 아마도 이토 히로꼬(伊藤博子)를 만난 것이리라. 히로코씨의 할아버지는 舊韓末에 조선에 와서 이왕가(李王家)의 건축기사로 일한 사람이었다. 히로코씨는 일본의 名門 실천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 파아란 하늘을 가르는 B-29의 飛行雲이 두 사람의 험난한 앞길을 예언하고 있었다. 히로코씨는 해방 전 3년간 이화여고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했다.
  
  
  *朴烈과 한국쌀 수입 계획
  
   이상이 오히가시씨가 말한 그의 생애, 그 전반부다. 해방 뒤 일본으로 '귀국한' 오히가시씨는 맨바닥에서 맨몸으로 출발해야 했다. 평생 돈을 번 적이 한번도 없는 그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가시씨는 생애의 전반부에선 아버지의 이름으로, 후반부에선 부인의 헌신적 희생으로 生計문제를 해결하였다.
  
   -해방 뒤 한국에서 철수하고서는 다시 한국에 가 본 적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1948년5월 밀항했습니다. 한국에서 다이아찐이란 정제약을 구해서 일본에 가져오면 큰 이문이 남았습니다. 일본에는 결핵 환자가 많았거든요. 약은 모자라고. 이걸 구하려고 갔는데 서울의 어머니 집에서 두 달쯤 머물렀습니다. 제가 일본으로 쫓겨간 이후 어머니는 매일 한강철교를 바라보며 제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셨다고 해요. 어머니는 日帝시대에도 이웃의 人心을 잃지 않은 덕분에 해방 뒤에도 핍박받지 안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습니다. 일본말밖에 모르는 저도 이웃이 잘 감싸주었죠. 一進會 출신 사람들도 만났는데 돈을 좀 얻었지요. 두 달만에 밀항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로는 한국에 간 적이 없군요』
  
   -해방 뒤에도 우익이나 이른바 한국의 친일파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패전 뒤 일본에서는 치안 공백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제3국인이라 불리는 한국인, 중국인들이 폭력단을 만들었고 여기에 대항하여 우익과 야쿠자들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하마구치 수상저격범 사고에와 같은 거물들과 저는 옛날부터 친구였습니다. 이들과 함께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패싸움을 말리느라고 진땀을 뺐습니다. 이 무렵 만난 것이 朴烈이었습니다.』
  
   -「大逆사건」의 朴烈 말입니까?
  
   『패전과 함께 출옥한 朴烈은 아마도 당시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었을 겁니다. 옥중의 박렬을 도와준 사람 가운데 기무라 젠코란 저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기무라와 박렬의 연락책으로 박렬의 활동을 뒤에서 지원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한국 쌀을 수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쌀이 모자랐습니다.
  
   수입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었어요. 문제는 한국 정부를 설득하는 일인데, 박렬과 기무라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어요. 그때 박렬은 민단단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사이가 좋았어요. 李 대통령이 고장난 시계를 朴烈에게 보내 고쳐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음악가이기도 한 기무라는 무용가 최승희를 발굴한 사람이었습니다.
  
   朴烈과 기무라는 밀항선을 탈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일 한국대표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았어요. 1차 시도에선 밀항선이 일본 영해에서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했어요. 두 사람은 곧 석방됐는데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어요. 두 사람은 한국에서 환영을 받은 모양인데 朴烈이 진해 해군 부대에서 연설하는 사진을 기무라가 보내 주었어요. 얼마 뒤 두 사람은 서울에서 한국 관리들을 설득, 쌀 수출 허가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바로 그 며칠 뒤 6·25가 터졌습니다. 두 사람과는 소식이 끊겼습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두 사람은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북쪽으로 끌려갔습니다. 朴烈은 평양방송에 나와 對南방송을 하기도 했지요. 1974년1월19일에 朴烈이 73세로 평양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만. 6·25로 어머니와 兄도 행방불명이 되어 여태까지 生死를 모릅니다』
  
  *친일파 김대우의 아리랑
  
   -김대우 씨와도 일본에서 만났지요?
  
   『김대우는 해방 때 경북지사였습니다. 총독부에서 가장 촉망받던 한국인 관리였습니다. 反民特委에 걸려 재판 받고 징역도 살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저는 그렇게 멋진 인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생김새나, 법정에서의 당당한 태도나, 人品에서 저는 그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김대우는 감옥에서 나와 일본에 온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연락이 왔어요. 만나고 싶다고. 特高경찰 책임자였던 야기 노부오, 나, 김대우, 이렇게 세 명이 모여 회포를 푼 적이 있습니다. 김대우는 곧 맥아더 사령부의 자문역으로 취직하였습니다.
  
   6·25때 유엔군이 38선 북쪽으로 진격했을 땐 평양에까지 갔다 온 것으로 압니다. 김대우는 나와 자주 만나고는 싶었지만 친일파끼리의 만남이라고 욕을 들을까 봐 조심을 했습니다. 가끔 저에게 전화를 걸어 아리랑을 불러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벌써 전에 죽었고 가족은 이민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일간의 불행한 역사가 망쳐버린 큰그릇이었다고 생각합니다』
  
  *韓日회담 촉진 운동에 등장
  
   일본 우익 진영에선 李容九와 아들을 소중하게 모시고 있다. 이용구의 기일(忌日)에는 우익단체들이 정중한 제사를 지내 주기도 한다. 우치다 료헤이 등 일본 右翼의 전설적 인물들과 같이 활동했던 李容九의 유일한 親子가 오히가시씨이므로 그는 우익에겐 문화재적 존재다. 1950년대에 오히가시씨는 일본 우익의 주요 인물이었다. 자민당과 우익은 한일회담 추진 운동에 오히가시씨를 참여시켰다. 그는 일한회담 촉진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56년 3월 도쿄 신바시에서 오히가시씨 등이 마련한 회담촉진 강연회가 열렸다.
  
   사진을 보면 사고에(佐鄕屋留雄) 등 우익 거물과 다나까 다츠오(田中龍夫)의원 등 이른바 親韓派 인사들이 많이 보인다. 이날 강사로 나왔던 다나카 자민당의원은 조슈 군벌의 代父로서 수상까지 지냈던 다나카 기이치의 아들이다. 그는 한일친선연맹 회장으로, 또 한국로비스트로 일했다. 당시 평화선 문제로 일본에선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여론이 거세었다.
  
   이 여론을 다둑거리는 데 「이용구의 아들」이란 간판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한일합방을 위해 나라도, 자신도 버렸던 인물의 후손이 한일회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오히가시씨의 부인은 『또 이용만 당한다』고 남편을 말렸다고 한다. 이용구를 이용했던 우치다의 후예들이 50년대에는 그 아들을 또 이용한 것이 아닐까?
  
   오히가시, 타나카, 사고에, 야기 노부오(조선 총독부 보안과장 출신), 츠카자키(塚崎直義·전 일본변호사회 회장) 등 촉진회 로비는 기시(전 수상)-야쓰기 가즈오(국책연구소 소장)-柳泰夏(주일대표부 공사)로 이어지는 다른 로비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 2년 전에 죽은 야쓰기는 소화시대 일본 政界의 최대 흑막이었다. 특히 기시 수상의 개인사절로 李承晩 대통령을 최초로 방문, 과거를 사죄함으로써 한일회담 재개의 계기를 만든 이후 한일의 막후 파이프라인으로서 1980년대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오히가시씨는 한일회담 추진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야쓰기와 말다툼을 한 적도 있다. 야쓰기는 『오히가시 군! 나는 지금 아무도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던 뜨거운 목욕탕에 겨우 발목을 집어넣어 놓고 있네. 이럴 때 자네가 나타나 훼방을 놓으면 곤란하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계흑막이나 우익에게는 한일회담이나 한국로비가 큼직한 이권 덩어리던 시절이었다.
  
  *「이용구의 생애」까지 이용
  
   오히가시씨가 한일회담 추진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이용구의 생애」란 책을 썼다. 1960년 10월에 시사통신사 출판국에서 펴냈다. 166쪽의 문고판이다. 내용은 아버지의 변호다. 이 책은 오히가시씨가 썼지만 거의 모든 자료는 아내 히로코씨가 발이 닳도록 도서관 등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것이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는 4.19 의거 후 張勉 정권이 출범, 한일회담에 대한 기대가 부풀고 있을 때였다. 이 책은 그런 시대적 상황 덕분에 상당한 반응을 일으켰다.
  
   출판사나 오히가시씨에게 날라 온 독후감들을 보면 흥미로운 관점들이 엿보인다.
  
  <장면 신 총리가 지일(知日)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자 양당은 그를 『현대의 이용구』로 공격하고 있다. 혁명의 지사 이용구는 지하에서 애국자 장면 총리의 고통을 보면서 『역사는 전진해도 우리 민족은 변함이 없구나』하고 고소(苦笑)하고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내정의 부패에 의한 민중의 허무적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이 重病을 치료하기 위한 起死回生 책으로 이용구는 일한합방의 방책을 세워 모든 박해와 싸우며 이를 관철했다. 그러나 합방은 병합으로 바꿔치기 당했고 이용구의 참뜻은 배신당했다>
  
   국내 여론과 맞서며 한일회담(또는 친선)을 추진한 한국 정치인은 張勉 총리이든 朴正熙 대통령이든 일단 「현대의 이용구」로 불리었다. 「현대의 이용구」라고 하면 한국에선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을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세론을 거슬러가면서도 한국을 위해 일본과 손잡으려는 용기 있는 志士」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하는 「현대의 이용구」란 말은 한국인용이 아니라 일본인용의 암시다.
  
   그 암시엔 『한국 정치인을 「이용구의 재판」으로 만들겠다』 또는 『만들 자신이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이 회담에서 결과적으로 이용구의 배역을 할 쪽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니 안심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용구를 동정하는 척하면서 그런 이용구가 한국에서 계속 나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본인의 진짜 이용구觀이다.
  
   「이용구의 생애」는 1962년에 3판이 찍혀 나왔다. 3판의 서문을 쓴 것은 뒤에 수상이 되어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룩했던 사또 에이사쿠 바로 그 사람이었다. 사토는 1500 권을 私費로 구입, 자민당·사회당 의원들, 財界 인사들에게 홍보용으로 나눠주었다. 서문에서 사토는 『일본을 신뢰하여, 일본에 협력하고, 일본과 손을 잡아 아시아의 평화를 확립하려고 했던 한국인 志士의 숨은 행적을 통해 일본은 한국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다』고 했다.
  
   1977년에 일본에서는 송병준의 손자에 해당하는(송병준은 수많은 일본여자들과 관계를 가져 자손이 많다) 노다씨(野田眞弘)가 송병준 전기를 썼다. 그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부처는 사토 에이사꾸씨의 초청을 받아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사토씨는 『내가 어릴 때들은 이야기인데 노다 백작(송병준)은 이토 히로부미, 가츠라, 데라우치 등 조슈번의 원훈들을 멋대로 갖고 논 굉장한 거물 이었다면서요? 그 공적을 한번 공개하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렇게 해보지요』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사토라는 사람은 송병준 같은 구제 불능의(결과나 동기, 그리고 도덕적 면에서도) 인간에게까지도 변호의 기회를 주어 「일본을 신뢰했던 한국인 志士」를 또 한 사람 만들고 싶었던 인도주의자인 것 같다.
  
  * 李容九의 이해는 문학의 영역
  
   1960년대 이후 오히가시씨의 활동은 별 볼 만한 것이 없다. 韓日회담과 같은, 그가 등장할 만한 무대로 사라졌다. 우익도 퇴조했다. 우익과 폭력단의 구별이 곤란할 지경이다. 오히가시씨는 말년을 아버지의 復權운동에 바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남루한 집에는 가끔 이용구를 연구하는 젊은 일본인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워낙 기구한 생애를 보낸 오히가시씨인지라 그의 일생을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사람도 찾아온다. 오히가시씨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한국 안에서의 이용구 관(觀)이다.
  
   일본에서의 이용구觀은 크게 개선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역적이니 매국노로 통하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최근 저서나 기사를 통해 이용구에 대해 객관적인 연구를 한 韓相一 교수(「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나 소설가 李炳注씨에게 그는 특히 감사하고 있었다. 이병주씨는 조선일보에 쓴 「이용구의 아들」이란 기사에서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정치가의 功過는 결과로 따져야 하는데 이 점에서 이용구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이용구를, 그 행동의 동기로 따진다면 동정할 바가 있으나 그것은 문학의 대상이다』
  
   오히가시씨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도 한국에서 나온 것을 퍽 반갑게 여기고 있었다. 오히가시씨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용구에 대한 평가는 이병주씨가 규정한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가시씨는 그의 기복 많은 생애로써 아버지의 비극성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아버지를 속였던 日帝에 부역하고, 아버지를 속였던 우치다의 후예들에 의해 다시 이용되고, 그가 쓴 책마저 일본 정치인의 선전도구가 되고….
  
   오히가시씨의 생애는, 閔妃 시해 사건 가담자를 아버지로 둔 업보로 하여 평생 한국어를 모르는 한국인으로 살다간 禹長春 박사와 대조가 된다. 우장춘은 일본인을 어머니로 하여 났고 일본에서 살았지만 禹씨 성을 지켰다. 해방 뒤에는 귀국하기 위해 오오무라 수용소 행을 자원했다. 1959년에 죽을 때까지 부산 동래에서 원예기술 원장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농학자, 육종학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어느 高官이 한국어를 모른다고 비난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 나까지 입을 열면 더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에 벙어리가 한 사람 늘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禹長春은 아버지를 위해 무언(無言)의 대속(代贖)을 했고 오히가시씨는 유언(有言)의 변명을 했다. 오히가시씨는 작별인사를 하는 나에게 『한국에 돌아가거든 성환의 아버지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꼭 알아봐 달라』고 당부했다.
  
  오히가시씨는 인터뷰 2년 뒤인 1986년에 사망하였다. 44세에 죽은 아버지보다는 33년을 더 살았다.
  
  
  
  
  
  
  
  
  
  
  
  
  
  
  
  
  
  
  
  
  
  
  
[ 2010-01-01, 20: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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