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豊댐 만든 구보다 유타카 生前 인터뷰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2)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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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豊 댐 건설자가 얼굴 마담
  
  조선총독부 高官 출신들이 중심인 중앙日韓협회의 명예회장은 관리출신이 아니었다. 구보다 유타카씨. 엔지니어링 컨설턴트 회사인 일본工營의 회장이다. 그는 제국주의의 첨병들이 만든 모임의「얼굴 마담」으로서 이 모임의 미묘한 성격을 둥글둥글하게 감싸줄 수 있는 최적격자다. 구보다 유타카, 그는 누구인가? 그가 바로 압록강 水豊 댐을 만든 사람이다. 국민학생 시절 사회 시간에 水豊이 세계 제2위의 발전소라고 배우면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었던 그 시절 그래도 자부심 비슷한 걸 느꼈던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도쿄 요츠야 역 앞에 있는 일본共營 빌딩 9층으로 구보다씨를 찾아갔다. 나이 95세. 그래도 매일 출근한다. 꼿꼿하게 않은 채 나를 맞은 구보다씨의 인상에서 나는 표범을 연상했다. 자상한 할아버지의 표정이 지배적이었지만 날카롭게 돋은 광대뼈와 깊게 파인 눈은 아직 꺼지지 않은 野性의 불길을 엿보게 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날 욕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는 자신있게 물었다. 살아서 이미 전설이 돼버린 구보다씨의 일대기는 꿈과 정열, 그것이다. 큐슈 쿠마모토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 대학工大 토목과를 나왔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모두 법과나 정치학과로 몰릴 때였다.
  
   그는 내무성 技士로 취직, 정부直營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同鄕의 국회의원을 위한 선거 사무장 노릇도 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한국에서 사온 5만분의 1 지도였다. 평소부터 水力발전에 관심이 많던 그였다. 지도를 보면서 발전소 適地를 고르다가 점찍은 곳이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부전강과 장진강이었다. 그는 발전소 건설의 아이디어를 사줄 사업가를 찾았다. 여기에 나타난 이가 일본질소비료 사장 노구치(野口)였다.
  
   구보다의 상상력과 노구치의 사업력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었다. 노구치는 2000만 엔(1984년 時價로 약 3억 달러)를 출자, 朝鮮水電(조선수전)을 설립, 1924년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 규모도 前代未聞(전대미문)의 것이었지만 着想(착상)도 기발했다. 해발 1300m의 부전강을 막아 저수지를 만든다. 여기서 27㎞나 되는 터널을 밑으로 뚫어 700m의 人工 낙차를 두고 저수지의 물을 이 터널로 내려보내 발전기를 돌린다는 아이디어였다. 15개의 수직坑을 지하 160m까지 파고 여기서 옆으로 터널을 뚫는 難工事(난공사)가 시작되었다. 5년 뒤 부전강 제1발전소가 완성되었는데 出力은 13만 킬로와트였다. 당시 일본 최대의 발전소는 4만 킬로와트였다.
  
   이어서 제2, 제3 발전소가 완성되고 이 電力(합계 20만 킬로와트)으로 흥남에 세워진 일본질소 계열의 조선질소비료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노구치와 구보다는 이어서 장진강에 32만 킬로와트, 허천강에 36만 킬로와트의 발전소를 세웠다. 때는 우가키 총독 시대였다. 한반도의 農工業을 진흥시켜 대륙 진출의 병참기지로 만들겠다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될 때였다. 노구치와 구보다는 한국 공업의 動力源(동력원)을 값싼 전기로 충당한다는 큰 구상 아래에서 먼저 발전소를 짓고 다음에 공장을 세우는 순서로 사업을 추진했다.
  
  *한반도 산업 자본 36% 지배
  
  
  
   구보다씨의 걸작품은 압록강 本流의 水豊 발전소 건설이었다. 압록강은 한국과 괴뢰 만주국의 國境이므로 조선 총독부와 관동군의 합의가 있어야 했다. 구보다는 우가키 총독과 고이소 쿠니아키 조선군 사령관(뒤에 총독), 관동군의 이다가키 참모장(뒤에 조선군 사령관), 기시 노부스께(岸信介) 만주국 실업부차장(뒤에 총리)·시이나(椎名悅三郞) 광공국장(뒤에 외상) 등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만주국과 한국에 양다리를 걸친 회사를 만들고 水豊에서 발전한 전기는 만주와 한국이 갈라 쓰기로 한 것이다.
  
   이 계획을 뒷받침한 人脈은 조선 식민 통치와 관련이 깊고 뒤에 韓日 회담 때도 관여했다. 한반도에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일본人脈은 바로 대륙경영에 열심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늘 동아시아란 큰 무대 속에서 한국의 역할을 설정하려고 했다. 수풍댐도 만주경영을 본격화하려는 일본군부 主戰論者의 야심과 구보다의 기술가적인 꿈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임을 直視할 필요가 있다. 수풍 댐 공사는 당시로선 세기적인 건설 사업이었다.
  
   『수풍의 풍(豊)자와 내 이름의 풍자가 일치하여 천생연분이란 생각을 했다』고 구보다씨는 즐겁게 회상한다. 댐의 길이 900m, 높이 106m, 댐의 용적 330만㎥(최대의 피라미드보다 크다). 담수면적 345㎢(서울시의 반), 수몰지역 인구 약 10만명, 자재 운반용 철도 180㎞를 긴급 부설, 전용 시멘트 공장(연산 18만t)긴급 건설…. 이 대역사의 진두 지휘자가 구보다씨였다. 1941년 수풍댐이 발전을 시작했을 때 70만 킬로와트의 이 발전소는 그 때엔 세계 최대였다. 공사비는 1984년 가치로 20억 달러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수풍댐 이후 구보다씨는 남쪽으로 눈을 돌렸다. 황하와 주강(珠江·광동.廣東지방)의 전력개발을 추진하다가 일본군이 점령한 해남도(海南島)에서 매장량 5억t의 大鐵山을 발견, 개발에 뛰어들었다. 수마트라가 일본군에 점령되자 아사한 水力발전소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민간인으로서 육군 소장 대우를 받았다.
  
   1943년에 노구치 사장이 죽었다. 당시 노구치의 일본 질소 계열의 8대 회사는 한반도 산업자본의 36%를 지배했다. 수풍댐과 흥남 비료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였다. 노구치의 사망 직전, 구보다씨는 수풍댐을 관할하는 압록강水電(주)의 사장. 조선電業(한국내 다른 발전소와 送電회사의 합병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일본 군부는 그의 천재적인 건설력을 화약공장, 조병창, 어뢰정 기지 건설에까지 동원했다. 그는 말하였다.
  
  『전쟁을 벌인 이상, 이겨야 한다. 여기에 나는 협조했다. 그래서 전쟁 협력자라고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한국에 유산을 남겼다』
  
   그는 서울에서 패전을 맞았다. 그가 사장실로 쓰던 방(조선 빌딩)이 하지 미군 사령관의 집무실로 접수되었다. 미군 진주 며칠 뒤 구보다씨는 인사차 하지 장군을 방문했다. 어제까지 그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하지 장군이 앉아 있었다. 구보다씨는 京城 일본인 세화회의 부회장으로 뽑혀 철수에 따른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한번은 경찰에 불려 갔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昭和학원의 일본인 교사들이 학교 기금을 챙겨 일본으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구보다씨는 이름을 빌어 주었을 뿐으로 학교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저명한 사람에 속했던 그는 조선 건설단 단장 등 수많은 명예직을 갖고 있었다. 자신도 다 기억 못할 정도였다. 45년 11월 말 그는 맨몸, 맨손으로 현해탄을 건넜다. 『배 안에서 나는 자위했어요. 그래도 나의 유산은 조선에 엄연히 남아 있다. 조선 민족을 위해 그 유산은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구보다씨뿐 아니라 산업부문에 종사했던 기술자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졌던 것 같다. 자신들은 한국에 유형적인 유산을 남겼다는 자부심과 자신의 행동이 결코 착취만은 아니었다는 합리화의 논리다. 구보다씨는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데리고 있던 3000여 명의 직원들 처리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협력자로 지명돼 公職 추방 명령을 받은 그는 이들의 취직을 위해서라도 회사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개인 재산을 처분, 일본工營을 발족시켰다.
  
   그 뒤 이 회사는 水力발전과 농업 개발의 타당성 조사, 설계 공사 감리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엔지니어링 컨설턴트 회사로 성장했다. 이 분야에선 세계 최고의 회사란 평이다. 그 동안 일본 공영은 메콩강 개발, 라오스 水力발전 개발, 수마트라 아사한 종합 개발, 아프리카 각국의 수자원 개발에 참여했다.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의 개인 상담역 노릇도 했지요. 수카르도 대통령, 엔크루마 대통령과도 친했어요. 물론 박정희 대통령도 절 알아주더군요. 이 대통령 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나만 살아 있군요』
  구보다씨의 아들도 몇 년 전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 2010-01-05, 18:2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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