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特高 경찰 수괴 인터뷰
조선총독부, 그 최후의 인터뷰(3)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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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豊댐 폭격 때도 안전 장담
  
   구보다씨는 한국 전쟁 때 水豊 댐이 미군에 의해 폭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防爆 시설을 다 해놓았으니 그 정도로는 끄덕 없을 것이다』고 자신했다고 한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진격하자 미군은 구보다씨에게 부전강·장진강 발전소의 복구를 위한 조사단 파견을 부탁했다. 일본共營의 조사단은 현지 한국인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962년 구보다씨는 일본 경제인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옛날의 구보다는 죽었는 줄 알았는지 나를 구보다 유타카씨의 장남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구보다씨는 朴 대통령과도 두 차례 면담, 한국의 水資源 개발에 관해 장시간 이야기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구보다씨는 한국과의 숙명적 인연을 다시 잇게 되었다. 1984년까지 한국에서 세워진 20여 개의 水力 발전소 가운데 팔당 하나만 제외하고는 전부 일본共營이 타당성 조사, 설계, 공사 감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은 나였다. "지금도 합천 댐 등 다섯 개 사업에 관여하고 있다"고 그는 자랑하였다. 일본共營은 1970년 대 초 한국의 수자원에 대한 가장 상세한 조사를 自社 부담으로 실시, 개발의 마스터 플랜을 우리 정부에 제출한 적도 있다.
  
   한국 담당인 고토(後藤貢) 전무는 『한국 쪽과는 못할 소리가 없을 만큼 터놓고 지내는 사이다』고 했다. 1500 명의 일본공영 기술자 중 늘 240여 명은 외국에 파견돼 있다. 年매출액 약 400억 엔, 작년 순이익 16억 엔. 구보다씨는 6년 전 사장직을 이케다 씨에게 물려 주었다. 67세의 이케다씨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水豊 시절부터 구보다씨 밑에서 일했다. 敗戰 때는 2년간 소련군에 억류돼 水豊발전소의 운영 방법을 북한 사람들에게 다 가르쳐 주고 돌아왔다.
  
   지금도 토, 일요일은 독서로 시간을 보낸다는 구보다씨는 한국과 일본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로써 설명하고 잇는 것 같았다. 해방 뒤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몰수당하고 부산항을 떠났던 구보다씨는 더욱 확실하게 한국에 돌아와 있었다.
  
  
   親韓派로 변신한 特高경찰 수뇌
  
  
   한국인이 상상하는 총독부의 엘리트 관료의 전형―야기 노부오씨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1903년에 명치 유신의 발화점, 가고시마에서 출생, 도쿄 제국대학 정치학과 재학중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1925년 조선 총독부 발령, 이후 道의 警視, 총독부경찰국 사무관, 道 경찰부장, 학무국 학무과장, 경찰국 경무과장, 同보안과장, 황해도 지사. 전라남도 지사 재직 중 패전을 맞았다. 20년의 총독부 생활 가운데 15년은 경찰관으로 보냈다. 그것도 요직만 골라서 했다. 특히 총독부 보안과장은 이른바 特高경찰의 실무 책임자로서 사상범 및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넣는 지휘탑이었다. 도쿄 시부야구 세다가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81세의 노인 야기씨는 벽에 걸린, 全斗煥 대통령과 악수하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불구대천의 원수인 내가 저렇게 韓日친선을 위해 半평생을 보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日韓협회의 회원이면서 日韓문화협회라는 별도의 개인 조직을 갖고 있는 이 노인의 생애는 현대 韓日관계사의 관점에서 냉철하게 분석해 볼 만한 사례 연구의 기막힌 소재다. 그가 나에게 말한 내용과 그가 쓴 두 권의 자서전 등을 종합해 보거나 총독부 시절 그의 밑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관리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야기씨가 비교적 한국인을 이해하려는 관료였음은 확실한 것 같고 한국의 지도층과 상당한 교분을 트고 있었음도 사실인 듯하다.
  
   『나는 야스오카(安岡正篤) 선생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야스오카 선생의 사상에 최린 선생도 감화되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정책에 협조하게 됐다. 내가 황해도 경찰부장 시절 최린 선생의 강연회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崔 선생은 韓日 양민족이 참으로 친선융화,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선 兩者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높은 차원에서 설명해 주셨다』
  
   『나는 총독부 보안 과장 시절 한국인을 道 경찰부장으로 등용할 것을 주장, 관철시켰다. 제1호 경찰부장은 윤종화씨(창씨명 尹坂和夫)였는데 終戰 때 소련군에 끌려 간 뒤 소식을 모른다. 내가 경찰부장으로 철거하지 않았다면 그런 비극이 없었을텐데…가슴이 아프다』
  『보안과장 시절 김두한을 불량청년 조직의 대장으로 임명 선도한 것도 나였다』
  
   『나는 日韓 혼연 일체화 운동의 하나로 정학회(正學會)를 창립했다. 이 회는 韓日 두 나라 학생들을 수용하는 팔굉료(八紘療)를 만들어 寢食을 같이 하면서 양 민족의 혼연일체화를 지향하는 정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 운동엔 이광수, 최린 선생도 협조했다. 『한국인의 內地 渡航 제한 제도를 철폐시킨 것도 나다』
  
   『나는 金性洙, 宋鎭宇 선생과도 입장의 차이를 초월하여 교제하였다. 金 선생으로부터는 추사 김정희의 괘축(掛軸)도 한 폭 받았다』
  『나의 보안과장 시절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은 나의 과장 취임 20일 전에 체포가 있었던 사건이고 나의 재임 기간에는 재판이 진행됐을 뿐이다. 나와는 무관하다』
  
   『한국이 병합된 것은 동정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한국 통치의 목적은 식민지적 지배가 아니라 內地 연장주의로서 궁극적으로는 兩 민족의 혼연일체화였다. 36년간의 한국 통치가 한국인의 民生 향상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일본국 예산에서 조선 총독부로 지출된 보조금이 매년 2000수백만 엔이었고 水利관개, 광공업의 발달 등 舊한국 시대에 비해 커다란 향상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패전 때 전라남도 지사로 있으면서 한국인들과 사이좋게 끝마무리를 하고 물러날 수 있었던 것도 총독부 시절 나의 행동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평가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익의 거두 야스오카의 제자
  
   그의 이런저런 설명이야 어쨌든 야기씨가 20년간 식민지 지배와 탄압의 핵심 요원이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야기씨가 일본으로 귀환한 뒤에는 「日韓친선」의 깃발을 높이 든다. 180도의 방향 전환이었다. 그는 규슈 하카다港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在日한국인들의 원호에 나선다. 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낸 이케다 기요시로부터 20만 엔을 얻어 한국 귀환인들에게 음료, 식량, 의료 공급을 넉 달 동안 했다고 한다.
  『당시 날카로와지기만 하는 양쪽 국민들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라도 조금씩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야기씨는 官界로 진출하라는 권유도 뿌리치고 한국에 대한 속죄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단다. 역시 야스오카 선생의 敎示를 따르기 위한 거였다. 현대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야스오카는 귀환 인사차 방문한 야기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헤어진 韓日 양국은 하루빨리 친선관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일을 하기에는 당신이 적당하니 도쿄에 올라와 나와 같이 일하자』
  
   야스오카는 韓日관계의 뒷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므로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1898년에 태어난 그는 도쿄 제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에서 동양 정치와 陽明學을 연구했다. 그는 1920년대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에 대항, 천황 중심의 전통적 일본주의를 설파, 젊은 황도파(皇道派) 장교들의 관심을 불렀다. 그러나 開戰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꾸(山本五十六)도 나이가 아래인 야스오카를 스승으로 모셨다.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 시절엔 大東亞省 고문이었다. 미군은 전쟁중에도 야스오카를 처벌 대상 戰犯으로 지명, 공표하기도 했다.
  
   천황의 항복 방송원고를 초안한 것도 그였다. 패전 후 그는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공직에서 영구 추방당했다. 그는 1949년 전국師友會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政財界 우익 지도자들의 敎化를 목적으로 했다. 요시다, 기시, 사토 등 역대 일본 수상 가운데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다나카와 미키 수상뿐이었다고 전한다. 「총리대신들의 담임 선생」으로 불렸던 그는 蔣介石과 미시마 유키오(소설가)와도 친했다. 아사히 신문까지도 「戰後 민주주의는 자민당 정부에 의해서 공동화(空洞化)되었는데 야스오카는 이 보수 정부의 가장 큰 사상적 기둥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2년 전 죽었다.
  
   1952년에 야기씨는 야스오카의 사우회 상무 겸 사무국장으로 취임, 그의 손발이 되었다. 張勉 정부가 집권하자 야기씨는 비로소 한국과 끈을 잇게 된다. 한국쪽의 상대역은 물론 총독부 시절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장면 총리는 야기씨가 총독부 학무과장 시절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므로 알고 지낸 사이었다. 1961년, 박영준씨(창씨명 喜多穀)가 당시 대한전력주식회사 유동진 사장을 야기씨에게 소개, 유씨와 야스오카가 만나도록 했다. 유씨는 국교 정상화를 바라는 장면 정부의 뜻을 전달했다.
  
   야스오카는 이 뜻을 기시 전 수상과 이케다 당시 수상에게 중계, 야기씨를 밀사로써 한국에 보내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5·16이 나는 바람에 야기씨의 밀파 계획은 좌절됐다. 곧 야기씨는 박철언이란 한국인을 통해 당시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이던 朴泰俊씨(전 포항제철 회장)를 알게 됐다. 朴 실장의 중계로 일본쪽의 뜻이 朴正熙 의장에게 전달됐다.
  
  * 박정희·이케다 회담의 알선역
  
  
  
   1961년 10월 한국 군사정권은 서울대학의 李用熙 교수(뒤에 통일원 장관)를 밀사로 보냈다. 李 교수는 야스오카의 알선으로 일본에서 각계 실력자들과 만났다. 기시 전 수상, 사토 에이사꾸 차기 수상, 후지야마 중의원 의원 외에도 상공회의소 회장, 經連團 부회장과 접촉했다. 이때의 안내역은 물론 야기씨였다. 10월14일에는 이용희 교수가 이케다 수상을 방문했다. 배석했던 야기씨의 기억에 따르면 이케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지난 6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은 자주적으로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당신 나라의 朴 의장이 이번에 미국에 가면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미국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기 전에 같은 동양인으로서, 朴 의장이 미국에 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서 나와 이 문제를 의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밀담이 계기가 되어 1961년 11월12일 朴正熙 의장은 國交가 없는 일본을 방문, 이케다 수상과 회담, 國交 정상화 회담의 문을 열어 놓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박 의장은 자민당의 중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나는 한국에서 명치유신과 같은 일대 개혁을 할 방침이니 선배들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오」』
  
  나는 야기씨에게 그 말을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다그쳤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던 자민당 의원 이시이 미쓰지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야기씨는 야스오카의 지도 아래서 國交 정상화 이후에는 포항 종합 제철 건설에 따른 막후 교섭에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철강연맹회장인 야하다 제철사장 이나야마, 후지 제철 사장인 나카노, 미쓰비시 상사 사장인 후지노 등을 설득, 기술과 건설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朴泰俊 사장이 야기씨에게 보낸 감사 편지 사본을 자서전에 붙일 정도로 그는 자신의 역할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全斗煥 대통령과 그가 악수하는 사진도 포항 제철 확장 준공식에 초대받아 갔을 때 찍은 것이다.
  
   『그 쟁쟁한 일본 재계 거물들 가운데 내가 네 번째로 악수를 했답니다』라고 자랑했다. 그는 韓日 관계의 뒷무대에서 활약했지만 금전적인 이익을 추호도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떳떳하다고 했다. 야기씨는 또 李退溪 연구회를 설립, 이사장이 되었고(그는 명치 유신의 사상적 배경에는 이퇴계 사상의 영향이 크다고 했다) 태평양 전쟁 戰歿 한국인 위령 사업회 회장이기도 하다. 알본에 유학한 한국 학생들을 공짜로 하숙시켜 주기도 했고 지금은 15명에게 월 3만엔씩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했다. 야기씨는 또 하나의 거창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사우디 아라비아 황실의 오일 머니 약 20억 달러를 곤도(近藤常雄)라는 일본인이 끌어내게 돼 있고 이 자금으로 한국의 조(趙)모 실업가와 합작, 서해안에 潮力 발전소를 지을 것이란다. 이 합작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승낙했다는 거다. 야기씨는 서해안 조력 발전소 계획은 총독부 시절에 이미 아다치 이다루씨(安達遂 : 당시 호세이 대학 교수)가 세운 적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곤도씨는 일본 수상과 사우디의 회담을 주선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사우디통이라고 했다.
  『이것이 한국에 대한 나의 마지막 사업입니다』고 그는 말했다.
  
   金志雄에게 속아 돕기도
  
   나는 야기씨와 여섯 시간을 이야기 했다. 총독부의 정예 관리에서 親韓派로 변신한 그의 논리를 캐보기 위해서 나는 여러 방향에서 찔러 보았다. 그의 반응을 종합하면 대강 이렇다.
   첫째, 韓日합병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목적은 善意였다. 한국을 차별하려는 게 아니라 일본인과 一體가 되도록 하자는 거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 목적은 좋았지만 실천에서 나쁜 점이 많았다. 동화(同和)는 한국인의 전통과 개성을 살리면서 두 민족이 조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는데 일부 과격파가 한국인의 개성을 없애는 쪽으로 추진했다.
   셋째, 한국이 강해야 일본도 안전하다. 露日전쟁도 일본이 한국을 러시아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으킨 것이다.
  
   야기씨의 생각은 총독부 시절 때나 당시나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후회하고 속죄한다는 것은 식민 통치 그 자체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과 기술인 것이다. 말끝마다 韓日친선을 부르짖는 야기씨의 행동, 그 진면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앞에서도 몇 번 언급한 박준영씨가 십수년 전 김지웅이란 한국인을 나에게 소개했다. 왕조명 정권 시대에 육군 소장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을 위한 물자조달 등 여러 가지로 애쓴 한국인인데 잘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시켜 김지웅에게 생활비를 보태주도록 조처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지웅이란 자는 백범 金九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밀항한 친구가 아닌가. 나는 그 뒤로는 상종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지웅에게 속았다는 점이 아니다. 일본군에게 부역했다는 경력만 듣고도 그를 감싸주었던 야기씨의 조건반사적 심층 심리, 그것이 그가 간직하고 있는 진짜 한국관(觀)의 일면인 것이다. 야기씨가 친하다고 하는 한국인들은 거의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그가 말하는 韓日친선은 이런 사람들과의 친선을 뜻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 총독부의 결산, 변호 작업
  
   나는 앞서 日韓협회가 친선만 하는 단체가 결코 아니라고 했다. 조선총독부의 통치 36년간을 결산하고 있는 단체라고 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日韓협회의 부속 연구 기관인 友邦협회다. 이 협회는 1950년 호즈미(경성 일본인 세화회 회장)의 제안에 따라 재단법인체로 설립됐다. 호즈미가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이 협회는 조선 통치 자료의 보존, 연구를 지금껏 계속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도쿄 우치사이와이초(內幸町)에 동경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패전 뒤 한때 조총련이 이 건물을 점거했다가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쫓겨났다. 이 사무소에는 약 1만 점의 갖가지 총독부 문서가 있었다.
   패전 직후 조선 총독부는 미군 진주까지의 약 25일 사이 대부분의 기밀 문서를 소각해버렸으므로 동경 사무소 보존 문서가 일본인들 손에 남은 최대의 자료가 되었다. 이 자료를 인수한 友邦협회는 자료의 정리·출판, 조선 통치사 연구회, 한국어 강습회 등의 사업을 벌였다. 자료실을 두고 이를 개방, 학생들과 학자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총독부 시절의 고급 관료들을 참석시켜 전문 분야별로 식민지 행정의 실태를 연구, 토론했다. 곤도 게이치씨(近藤劍一)가 실무의 책임자였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일어판)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지금도 협회를 대변하는 논객이다. 지금까지 우방협회가 펴낸 조선 통치사 관계책은 모두 57권으로 1만3000 페이지를 넘는다.
  
   「동양척식 주식회사 연구」「조선반도의 산림」「만세 소요사건(3·1운동)」「조선쌀과 일본의 식량 문제」「조선어 교육 문제」「조선의 국토개발 사업」등 아주 구체적인 분야를 다루고 있는 우방협회의 출판물은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 뺄 수 없는 1차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연구회 개최 약 600 회, 한국어 강습회 약 800 회, 연구회 녹음 테이프 약 400 개…. 이런 활동을 통해 총독부 관리 출신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총독부 통치의 결산을 통해 식민통치를 변호하자는 것이리라. 총독부 통치에 대한 변호는 모든 우방협회 출판물에서 빠짐없이 발견된다. 특히 우방협회의 현 이사장 미즈다 나오마사씨(水田直昌)의 글과 말에서 두드러진다. 미즈다씨는 구보다나 야기씨와는 또 다른 면에서 총독부 관리의 전형이며 연구 대상이다.
  
  * 총독부 국장 중 유일한 생존자
  
   패전 당시 조선총독부의 국장 중 유일한 생존자인 88세의 이 노인은 도쿄 帝大 경제학과를 졸업, 고등文官 시험에 합격, 대장성에 들어갔다. 1929년 총독부 재무국으로 옮긴 다음 패전 때까지 21년간을 총독부 엘리트로 활동했다. 특히 1937년부터 패전 때까지 8년 동안이나 재무국장을 역임, 조선총독부 통치에 관한 한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다. 총독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미즈다씨는 계속 이 자리를 지켰는데 그것은 새로 부임한 총독마다 한국 사정에 환한 그를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다.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가 도오조의 후임 총리대신으로 지명됐을 때는 組閣 본부에서 고이소의 개인 참모로 움직였다.
  
   우방협회 상무인 마쓰기 다카미치씨(전 북해도 재무국장)는 미즈다씨의 큰 사위다. 미즈다씨는 패전 후 한국에서 여러 가지로 고생을 했는데 특히 총독부 아편 유출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은 것을 자주 고생담으로 털어 놓는다. 당시 총독부는 아편을 전매품으로 취급, 그 거래를 독점하고 있었다.
  
   패전 후 미군 진주까지의 공백 기간에 총독부가 보관중인 아편 세 트럭분을 일본으로 보내기로 하고 미즈다씨는 현물을 일본 헌병사령부에 넘겼다. 그런데 미군이 9월초에 진주한 뒤 市中에 아편이 대량 밀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 헌병들이 아편을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한국인 중독자들에게 팔아넘긴 것이었다.
  
   미즈다씨 등 재무국 관리들이 몽땅 잡혀가 신문을 받았는데 무혐의로 곧 풀려났고 헌병들만 수십 명이 구속됐다. 일본인들의 체면을 엉망으로 만든 헌병들이 미워 죽겠더라고 미즈다씨는 말했다. 미즈다씨는 귀환 후 관계(官界)로 돌아가지 못했다. 총독부 국장급 가운데 戰後에 복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머리가 크기 때문에 수용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후배들이 그를 잘 보살펴 주었다.
  
   미즈다씨는 1947년엔 학습원 상무가 되었다. 학습원은 해방 전까지는 황족과 귀족 자제들만 다닐 수 있었던 특수 대학이었다. 1952년엔 전국 은행협회 연합회 상무(뒤에 전무)로 취직했다. 그는 이 자리에 있으면서 우방협회 운영에 자금을 끌어댔다고 한다. 그는 일본 우익의 괴물 야쓰기 가즈오(矢次知夫)의 국책 연구회에도 관여하고 있다.
  
  *『사유 재산 몰수 억울하다』
  
   미즈다씨의 조선 통치 변명의 요점도 야기씨의 그것과 같다. 목적은 좋았으나 방법이 나빴고, 식민 통치를 통하여 한국은 물질적으로 크나큰 진보를 했다는 얘기다 그는 이런 말도 한다.
  『영국은 인도 예산의 3분의 1을 국방비로 가져갔다. 거꾸로 일본은 조선의 국방비로 21억 엔을 부담했다』
  
   요컨대 조선의 국방까지 일본이 말았는데 착취가 웬말이냐는 이야기다. 야기 노부오씨는 이런 말도 했다.
  
   『패전으로 조선내 일본 정부 재산이 빼앗긴 것은 할 수 없다고 해도 거류민의 私有재산까지 몽땅 몰수한 것은 심했다. 國交 정상화 때 한국에 대한 보상액수가 적다고 했는데 이 私有재산 액수를 감안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미즈다씨는 私有재산 몰수에 얼마나 한이 맺혔던지 귀환 후 대장성의 외뢰로 조선내 일본인 몰수 재산액수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法人재산 약556억 엔, 개인 재산 약 250억 엔이었다고 한다. 1984년 時價론 약 2백조 엔인데 이게 다 조선의 땅과 물과 공기,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것이라는 데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다.
  
  * 북한의 감옥행 자원한 내무부장
  
   한국에서 살다가 패전 뒤 쫓겨난 일본인 가운데는 『우리야말로 식민 통치의 피해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는 조선총독부를 우리 민족이 단죄하지 못했다는 걸 한으로 생각하는데. 거꾸로 한국을 가해자로 보는 일본인이 많다는 데는 정말 놀랐다.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북한에서 쫓겨난 일본인들 사이에 특히 많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당한 수모가 훨씬 조직적이고 대규모였기 때문이다.
  
  
  
   해방 때 평안북도 내무부장이었던 다카하시 히데오씨(高橋英夫)가 이른바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75세의 이 노인은 남녀 모두 평균 수명이 세계에서 가장 긴 일본 국민답게 50代처럼 생생하였다. 지금은 은퇴한 뒤 넉넉하게 老後를 보내고 있는데 해방 뒤 일본에 돌아와서도 계속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退官할 때의 직책은 일본에서 가장 큰 고베 세관장이었다. 다카하시씨처럼 관리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패전 당시 총독부에서 과장(지방은 부장)이하의 직책에 있었던 당시 나이가 30대 후반 이하였던 관리들이다.
  
   다카하시씨의 할아버지(다카하시 쇼노스케)는 1907년부터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일본인 변호사 개업 1호라고 한다. 다카하시씨는 일본에서 났지만 중학 시절부터 이 할아버지 집에 보내져 조선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경성중학교를 나와 京城帝大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중에 이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했다. 졸업식날 가장 친한 한국인 친구가 하던 이야기를 그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너는 아마 도지사까지는 하겠지. 그러나 네가 도지사가 되었을 땐 아마도 조선은 독립할 거야』
  
  다카하시씨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조선이 언제까지나 일본 지배를 받고 있을 나라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고 대답했단다. 그는 신의주에서 바로 그날을 맞았다.
  
  『피지배 민족 앞에서 하루아침에 패전국민이 돼버린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9월2일 신의주 인민위원회 보안부장은 소련군의 명령이라면서 다카하시씨 등 40여 명의 일본인 有力者들을 소환, 신문했다. 야마지(山地靖之) 지사 등 12명은 평양으로 넘겨지고 다카하시씨(당시 도청의 제2선임자) 등은 석방되었다. 두 달 이후 다카하시씨 등 30여 명은 또 신의주 보안서 유치장에 쳐넣어졌으나 이때도 며칠 뒤 풀려났다. 당시 평안북도에는 2명의 한국인 부장이 있었으나 해방 직후 모두 남한으로 달아났다.
  
   해를 넘겨 1946년 여름 신의주 거주 일본인들이 철수 준비를 거의 끝냈을 때 평안북도 검사장이 신의주에 있는 일본인 고등관 30여 명을 모두 구속하겠다는 뜻을 일본인 世話會(자치단체)에 통보해 왔다.
  
  『한국인 친일파를 구속하는 마당에 일본인 高官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世話會에서는 한꺼번에 30여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붙들려 들어가면 철수 작업에 큰 지장이 생긴다고 호소하여 고등관 3명만 체면치레로 구속시켜 달라고 했다. 이 때 3명이 감옥행을 自願했는데 다카하시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 2010-01-05, 23:4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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