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대통령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로록 넘겨주는 代價로 休戰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면서 '반공포로 불송환' 원칙을 固守, 수많은 미군을 희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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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제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을 읽다가 가슴을 치는 감동을 느낀 대목이 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쓴다.
  <한국전쟁의 休戰협상 중 가장 골치 아픈 案件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우리는 미군 포로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로 걱정이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끌고 간 미군 포로들이 非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증거와 보도가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赤十字社의 현지 시찰을 거부하더니 포로 명단을 제출하였는데, 실제 인원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1952년 1월1일, 우리는 휴전협상에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만 교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가장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문제에선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제도이고, 따라서 정신이 바로 박힌 정부라면 자유롭게 살겠다는 포로를 억지로 이런 제도 하로 돌려보낼 순 없는 것이다. 우리 편에 서서 자유를 위하여 싸운 한국인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전쟁 포로들을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산당 지배 체체로 돌려보내려는 해결책을 거부하였다. 1952년 5월7일 내가 한 연설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하게 담은 구절이 하나 있었다.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도록 넘겨주는 代價로 휴전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We will not buy an armistice by turning over human beings for slaughter or slavery.)
  나는 이 건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무시한 강제송환은 韓國戰에 참전한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도덕성의 근본과 인도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포로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면 (그들에게)비참한 流血사태를 불러 미국과 유엔에 있어서 영원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포로들을 강제로 송환받기를 요구함으로써 세계 앞에 그들이 어떤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알지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보낸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태에서 休戰협상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바람에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다. 歷代 최저 지지율이었다. 보통 대통령이라면 ‘모든 포로의 상호 교환’을 통하여 自國民 포로를 서둘러 데리고 오려 하였겠지만 트루먼은 反共포로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원칙을 固守하였다. 反共포로들의 다수는 북한군 포로였다. 즉, 외국인의 人權을 위하여(사실은 고매한 인도적 원칙을 위하여) 自國民(포로)을 희생시킨 셈이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선 反共 포로와 공산 포로 사이에서 殺戮(살륙)이 끊이지 않았고, 미군 포로 수용소 소장을 공산 포로가 납치해가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래도 트루먼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休戰(휴전)협상이 難航(난항)하는 가운데 高地戰이 2년간 계속되어 쌍방 포로들보다 더 많은 수십 만 명이 戰死하였다. 스탈린이 죽자 공산측은 미국의 ‘자유의사 확인 후 송환’ 원칙에 동의하였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할하던 북한군 출신 反共포로 약3만 명을 강제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중공군과 북한군은 항의하는 척하다가 그냥 넘어갔다. 북한정권이 한국군 포로 수만 명을 돌려보내지 않고 不法(불법) 억류한 것은 이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이란 說도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 전쟁중 네 번 위대한 인도적 결단을 하여 한국과 한국인을 살렸다. 南侵 보고를 받자마자 “그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면서 참전을 결단하였고, 중공군이 38선 이남까지 밀려내려 오고 맥아더와 영국이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를 건의하였을 때도 “미국은 困境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고 선언하였다. 미군은 흥남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면서도 한국인 10만 명을 구출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반공포로를 보호하기 위한 결단!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는 미군이 한 士兵을 구출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보내 수십 명이 희생되는 줄거리이다. 미국이 구하려고 하였던 것은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高貴(고귀)한 인도주의 원칙이었다. 한국전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은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하여 수많은 미군들을 희생시켰다. 그 덕분에 한국인들은 지금 번영과 자유를 누리면서 잘 살고 있다. 그 한국인들이 트루먼을 잊었다. 트루먼이란 이름이 붙은 거리, 공원, 기념물이 없다. 임진각 공원의 한 귀퉁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그마한 트루먼 동상이 있을 뿐이다.
  
  트루먼 한 사람의 결단에 의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한국인은 김일성 南侵 전쟁 60주년을 맞아 ‘트루먼 대통령 기억하기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트루먼 이야기를, 反共자유민주주의에 원한을 품고 이상한 판결들을 쏟아내는 좌경판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당신들이 만끽하는 그 깽판의 자유"를 주신 분이 트루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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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중 미군 戰死傷者가 45%!
  
   자유의지에 의한 포로 송환 원칙을 지키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趙甲濟
  
   1951년 여름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2년이 걸렸다. 휴전회담이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네바 포로 협정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미 국부부 간부들은 이 前例를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은 늦어졌고 트루먼 在任기간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人權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韓國戰에서 戰死 5만3000명을 포함, 14만 명의 死傷者를 냈다. 그 가운데 45%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입은 피해라고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 그것도 敵軍의 人權을 존중한다는 고귀한 원칙을 국가가 고수하는 데 얼마나 비싼 비용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戰史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發顯이었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李承晩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韓美상호방위 조약과 국군현대화 계획 및 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李承晩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毛澤東, 金日成, 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李 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낸다.
  
   수년 전 ‘毛澤東 秘話’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著者는 러시아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毛澤東이 金日成에게 '휴전당시 不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Problemyi Dalnego Vostoka. 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Alena Volokhova)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毛澤東 전기는 한국전쟁 때 戰死한 중공군은 약40만 명이며 연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했다. 공식발표로는 戰死者가 15만2000명이지만 鄧小平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숫자가 40만이란 것이다.
  
   좌익들이 만든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휴전회담이 늦어진 것은 유엔군측이 무리하게 자유송환 원칙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란 투로 서술하였다. 공산군 입장에 서서 불평하는 꼴이었다.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좋은 사람이 나쁜 자들보다 훨씬 많은 덕분일 것이다.
  
  
  
  
  
  
  
[ 2010-01-27, 05:1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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